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239화 (239/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239화

“하하하…….”

김일철 교수의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리경수는 허탈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 말인즉슨 저 많은 사람들이 ‘고작 이 정도에 내가 변절할 리 없으니 나는 원래부터 체제에 충성한 자’라는 자기세뇌, 합리화에 넘어갔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래도 한때 학총련이 출현하기 전, 음지에서 열심히 투쟁을 이어나갔던 선배 투사들에 대한 남모를 선망과 존경을 가지고 있었던 리경수로서는 허탈함을 넘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히 예전 은사에 대해 입에서 나오는 말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다음은요?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습네까? 기래도 처음부터 모조리 다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 아닙네까!”

“기렇지…… 하지만 시작이 어려웠지 일단 한번 둑이 터지자 봇물 터지듯 전향자가 생기더군. 눙토히 말하자면 나도 그 광경을 보고 많은 걸 느꼈네. 내가 이제까지 이런 믿지 못할 자들과 함께 투쟁을 했다니 나도 참 헛살았구나 하는 거 말일세.”

물론 그 말은 김일철 교수 본인도 이미 돌아선 것이라는 뜻이니 이런 위로 아닌 위로는 리경수의 화를 가라앉히기는커녕 오히려 돋구기만 했지만 말이다.

일단 논리 정립과 합리화가 끝나자 다음 차례는 당연히 예정되어 있었는데, 바로 반대파, 그러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동지였던 자들에 대한 투쟁이었다.

원래 돌아선 자들이 전향한 쪽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위해 더 극렬해진다는 소위 배신자의 딜레마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들, 자칭 ‘미몽에서 깨어나 먼저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김정환 체제의 충신이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반대쪽에 비난을 퍼부었다.

공화국의 번영과 인민 생활 수준 향상, 나아가 선진국 진입이라는 더 큰 목표와 그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당과 총서기의 노고를 몰라보고 비현실적인 민주주의만 뒤쫓는 근시안적인 이기주의자라고 말이다.

곧 관리소 내 수감자들은 두 파벌로 나뉘어 서로 아는 척도 안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일단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는 이야기였다.

김일철 그 자신이 말했듯이, 철벽처럼 보이는 제방도 작은 구멍이 나고, 그 구멍으로 물이 새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로 향하는 법이다.

이내 현 로동당 1당 독재 체제를 반대하는 ‘반체제파’에서 ‘체제수호파’, 내지는 ‘현실순응파’로 전향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동지들,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시오, 현 김정환 체제를 뒤엎을 방법이 현실적으로 있기는 하오? 당은 물론이고 인민군은 구 주도 세력인 주체계부터 현 주도 세력인 프룬제파까지 다 총서기 편 아니냐 말이오.

-군대 없이 어디의 지지를 받아 민주 혁명을 일으킬 생각이오? 력사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소? 동지들처럼 잘 배운 사람이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려 그러시오? 제발 본인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오. 이거이 다 같이 잘되자고 하는 소리요.

-다 집어치우고 현 공화국 인민 과반수는 당, 정확히는 총서기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걸 동지들 본인들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총서기의 탄신일마다 나이 든 농촌 인민들이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사서 서기실로 보낸 선물에 각종 특산물이 매년 당사 열다섯 바퀴 반을 돌고도 남는다는 풍문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 아이오. 그 전대 김정일, 심지어 김일성 주석도 그런 자발적 충성을 받아본 일이 없는데, 이런 체제를 어떻게 뒤엎으려 한단 말이오?

처음에는 하나둘씩이었지만, 조금씩 늘어나다가 종래는 하루에도 몇 명씩 진영을 바꿀 정도로, 반체제파에서 체제수호파로 돌아서는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져 처음에는 소수파였던 체제수호파가 나중에는 오히려 반체제파를 압도할 정도로 많아졌다.

물론 그들에게는 자기 내면의 합리화 반, 체제수호파의 설득 반 해서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지만, 김일철 교수는 그냥 그들 내면 깊숙이 ‘언젠가 전향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 자신도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내심 이 18년 동안 이 공화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온 김정환 체제를 자기들끼리 무너뜨리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그냥 자기 혼자 변절하면 배신자가 되지만, 같이 변절해 줄 여러 명이 생겼으니 죄책감이 희석됐을 수도 있고.

어느 나라의 속담처럼 횡단보도 빨간 불도 다 같이 건너면 무섭지 않은 법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종래는 관리소 내의 거의 모든 수감자가 김정환 체제의 열렬한 찬양자, 최소한 투쟁을 포기하고 현실에 적응하기로 한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말씀은 김 교수 동지도 넘어갔다는 이야기겠군요.”

“……흠, 부인하지는 않네만, 리경수 군. 생각해보게. 눙토히 말해 이 투쟁이고 뭐고 이제는 이길 가망이 없는 일 아닌가. 시류를 아는 것도 준걸의 자질이라고,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고집을 꺾는 것도 현명한…….”

“그만하시라요! 전 무슨 일이 있어도 김정환이에게 무릎 꿇을 일이 없습네다. 그리고 여기 안에만 계셔서 모르실 텐데, 밖에는 이미 투쟁의 성과, 민주화의 새싹이 피어났습네다. 곧 그 동지들이 이 김정환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고 저를 구출해 낼 테니, 그때 가서 교수 동지는 분노한 인민 대중의 돌 세례나 맞을 준비나 하고 계시오!”

리경수는 분노와 배신감, 실망감에 가득 차서 자신을 회유하려는 김일철에게 이렇게 일갈하고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안으로 뛰어들어 가 문을 닫은 후에도 그는 한동안 분을 삭이지 못해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교수라는 작자들이 저럴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밖에서는 자신들의 지도를 받은 학생들이 언제 탄압당해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위협에 맞서서 자신의 맨주먹으로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영영 모르는 척하기로 결정했을 수도.

체제와 야합하고 권력에 순응하여 때 되면 사료를 내려주는 사냥개의 삶, 오욕의 삶을 살기로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도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리경수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지금 밖에 있는 동지들은 이런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자신이 만들어준 기회를 살리기 위하여 죽어라 투쟁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그런 생각은 더더욱 절실해졌다.

하지만, 리경수는 아직 그날이 이 관리소, 나아가 앞으로 자신이 겪고 견뎌내야 할 모든 것의 시작일 뿐이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 * *

결국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침내 달이 넘어가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이르기까지 리경수는 단 한 번도 관리소 측에 반성문을 제출하지 않았다.

김일철의 말대로 저 반성문이 이 관리소와 그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설계한 당의 수작이라면, 더더욱 응해서는 안 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리소 측에서는 리경수에게 아무런 독촉이나 괴롭힘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를 괴롭힌 것은 관리소의 압박 같은 게 아니라, 날마다 공용구역에서 그에게 접근한 동료 수감자들의 집요한 설득과 회유였다.

처음 그들이 접근한 방식은 ‘기래, 우리도 다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말이디……’로 시작되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리경수는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처럼 마지막까지 전향하지 않은 극소수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는 것, 이곳 승호 구역뿐만이 아니라 공화국 내 여러 곳에 이런 관리소가 있다는 것, 개중에는 한때 김정일 김일성의 특각으로 쓰이던 곳을 개조해서 시설이나 대우가 이곳보다 더 좋은 곳도 있다는 것 등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리경수를 설득하는 전향자 그들이 행복해 보인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 대한 회유가 초기에 리경수가 추측했던 것처럼 결코 관리소 측에서 사주한 게 아니라 지극히 자발적인 것에서 우러난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레퍼토리는 가지각색이었지만 하나같이 끈질기고 집요했다.

이미 대세는 뒤집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인민들이 지금의 공화국에 얼마나 만족해하는지 보라.

쏘련 붕괴 직후 러시아 꼴만 봐도 민주주의가 높은 생활수준과 경제발전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일단 지금 당장은 굴욕적이라도 참고 넘기면 언젠가 조선식 민주주의를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일단 당의 령도에 따르자 등등…….

리경수 입장에서는 기도 안 차는 말들이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터무니없었던 회유는 다음과 같았다.

“동무, 생각해 보시오. 눙토히 이 공화국이 지금의 총서기처럼 유능하고 인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지도자를 얻은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홍복(洪福)인지 아시오? 기런데 여기서 족한 줄을 모르고 민주주의까지 달라고 떼를 쓰다가는 이미 있는 밥상도 엎어버리고 다시 밥을 굶는 시절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오! 그 사실을 알고는 있소?”

“대체 기게 무슨 귀신 허물 벗는 소리입네까? 할 말을 자유롭게 하고 인민의 대표자를 인민의 손으로 뽑자는 거이 어찌 떼를 쓰는 거란 말입네까?”

“동무는 아직 나이가 젊어 잘 기억을 못 할지 몰라도, 이전 김씨 일가 지도자들, 김정일이…… 아니, 잘 떠올리면 그 애비 김일성이도 마찬가지였지. 하여튼 지금 생각하면 그 자다가도 이가 갈리는 두 놈보다는 현 총서기가 백 배, 아니, 천 배는 낫소. 옛날 주체사상 타령하던 시절을 떠올려 보시오! 지금 공화국이 다시 보니 선녀 같을 거요!”

“맞소! 보위부 간나들이 제멋대로 사람 죽이고 잡아가고, 우리식 사회주의 경제, 자력갱생한답시고 허구한 날 천리마 운동! 만리마 운동! 그러면서도 독일제 벤츠 타는 당 간부 자제들은 뒷주머니에 달러 다발을 꽂고 다니며 반반한 처자들을 제놈들 침대로 끌어들이고, 어린이 동무들은 덧셈 뺄셈도 배우기 전에 ‘김정일 장군님의 혁명적 거짓부렁’이나 배우고 있고! 최소한 현 총서기 체제에서 그런 일은 오래전에 사라지지 않았소?”

“공화국 내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요. 이전까지는 달러 뀌러 찾아가면 랭대와 조롱만 일삼던 구 동유럽, 동남아 국가들도 이제는 우리 공화국 같은 강력하고 유능한 지도자가 부럽다고 하는 판이오. 국격과 민족적 자부심이 별거요? 만약 김정일이 같은 놈이 지금까지 계속 집권했다면 고작 20여 년 만에 전 세계 GDP 순위에서 이 공화국이 16위까지 오르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갔소? 여전히 남조선에 쌀이나 꾸러 다녔갔지!”

“그래서, 동지들은 지금 경제 발전시켰으니 김정환이의 독재 체제와 관영 언론에 소위 말하는 면죄부를 주자 이 말입네까? 그런 명분이 오히려 김씨 일가의 변종 사회주의, 세습 독재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고 있다는 건 정녕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네까? 만약 김정환이가 그렇게 쌓아놓은 기반으로 3대 세습을 하겠다고 나서면 그때는 어떻게 막을 생각입네까?”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알자 이 말이오. 듣자 하니 동무도 밖에서 주체사상 다시 하자고 헛나발을 불어대는 종자들 때문에 고생 많이 한 걸로 아는데,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동무 같은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이 지금의 김정환 체제를 약화시켜서 그런 작자들이 다시 공화국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인민과 겨레에 죄를 짓는 거이 아니고 뭐갔소?”

설득은 논쟁으로, 논쟁은 실랑이로, 실랑이가 주먹다짐으로 발전할 뻔한 나날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결국은 다른 모든 수감자들이 리경수를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고집불통’으로 단정하고 설득을 포기한 건 그가 잡혀들어온 지 몇 달이 지나서였다.

리경수는 리경수대로 저 변절자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에 대화를 시도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내 리경수는 공용 식당에서나 운동장에서나, 23호 관리소 내에서 마치 섬처럼, 지나가면 등 뒤에서 수감자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뒷말만 무성히 남기는 일종의 기피인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리경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러면 제놈들의 변절이 좀 금방 잊힐 줄 아나? 쓸개 빠진 변절자들 같으니라고.’

리경수는 본인이 저들의 속을 뻔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들의 저런 행동은 결국 리경수를 공범자로 끌어들이지 못해서, 그리함으로써 자신들의 신념에 대한 배신 행각을 계속 상기시키는 증인을 없애버리지 못해서 불편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리경수를 볼 때마다 예전 꼿꼿했던 시절의 본인들이 떠올라, 마음속 한구석 애써 묻어놓은 양심의 가책이 들려와 견딜 수 없는 것이라고 내심 비웃었다.

그러니 자신은 그저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저 배신자들에게 응징이 되는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의심과 불안이 안 그래도 분노와 배신감으로 적셔진 마음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차라리 고문이나 가혹한 강제노동 같은 이유로 몸이 힘들면 정신은 말짱할지 몰라도, 이 관리소는 몸이 편하다 못해 무료하기 그지없는 지경이라 도무지 정신이 딴 데로 새는 걸 막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주변 상황에 집중하느라 리경수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잠시 까먹고 있었던 것은 바로 관리소 측, 나아가 그를 이곳에 보낸 공안부와 당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미 관리소 내에서의 리경수의 일거수일투족은 전부 관찰, 기록되어 평양의 공안부에 전달되고 있던지 오래였다.

입감 첫날 불안감에 사로잡혀 보안원에게 윽박지른 일부터 둘째 날 김일철과의 대화, 공용구역에서 다른 수감자들과 벌어졌던 실랑이로 이어진 모든 논쟁들은 물론이고 그 혼자 방 안에 있을 때의 모든 언행까지 포함하여 전부 다 말이다.

그가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했던 ‘약해지지 말자’ 등의 혼잣말, 불안한 중얼거림, 미세한 스트레스 징후, 심지어 자는 와중의 잠꼬대까지.

모든 리경수의 말과 행동들은 그의 방 안과 관리소 내에 빠짐없이 설치되어 있던 카메라와 도청기에 의해서 기록되고 있었다.

이 기록들은 매일 관리소에서 평양의 공안부 청사로 전송되어 공안 직속 심리학자들에 의하여 나날이 실험동물 관찰하듯 분류, 분석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해당 수감자는 보기 드물게 어려운 케이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보고는 더 높이 올라가 서기실에서까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 * *

“리경수 선생! 소장실에서 호출이오! 즉시 나를 따라오도록 하시오!”

“소장실……?”

그날도 공용구역에서의 운동이나 레크리에이션에도 참여하지 않고 홀로 방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리경수는 뜻밖의 호출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반성문 제출을 단칼에 거부한 이래로 그에 대해서 거의 무관심을 넘어 방치 상태에 가깝게 내버려 두는 관리소 측에서 그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그를 부른다는 말인가?

“뭐요? 아, 내가 하도 쇠고집이니 이제는 당에서도 포기하고 쏴 죽이기로 결심들 하신 거이요? 그러면 고맙다고 말씀을 드려야겠구만 기래!”

“……잔말 말고 서둘러 따라오기나 하시오!”

이젠 거의 될 대로 되라 상태가 된 리경수가 비아냥거렸지만, 웬일로 항상 짜증 날 정도로 나긋나긋하던 관리 일꾼이 단호하게 쏘아붙이고는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

더욱 어안이 벙벙해진 리경수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소장실이 아니라 이제까지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던 관리소 내의 어떤 방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저 멀리 화려한 평양의 전경이 한눈에 비치는 전망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방의 한쪽 구석에는 이 관리소의 소장을 포함하여 중앙의 높으신 분으로 보이는 몇 명의 지도 간부들이 이제껏 리경수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긴장한 표정을 한 채 부동자세로 시립해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는 한 남성이 등을 돌린 채로 리경수가 들어오는 문을 등지고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장 동지. 웬일로…….”

“리경수라고 했나? 공안부에서 동무 때문에 많이 고심하더군. 23호 관리소를 운영한 지 꽤 됐지만 동무 같은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았으니까. 내 기억으로는 열 명 안팎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창밖을 주시하던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로 몸을 돌리자, 리경수의 동공이 사자를 목격한 사슴처럼 크게 확장되었다.

이제까지 수도 없이 보고 들어왔지만, 자신이 단 한 번도 살아서 만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 바로 지금, 너무나도 예상치 못한 지금 이 순간에 자기 눈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남자, 정환은 그렇게 망부석처럼 굳어져 있는 리경수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군. 리경수 동무. 조선로동당 총서기 김정환일세. 그동안 동무가 맞서 싸우던 절대악을 직접 눈으로 마주한 소감이 어떤가? 이마에 뿔이 달려 있지 않아서 실망했는지 들어보고 싶군 그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