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37화
그해, 2006년 여름, 조선인민공화국 공안들과 보안성 진압대들은 그 날도 학총련의 시위 현장을 감시하며 자신들의 임무 수행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체제와 당에 대한 충성심이 최우선 선발기준이 된 그들조차도 요즘 상당수가 당에서 내려온 학총련 시위 대응 지침에 조금씩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위의 높으신 지도일꾼들이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는 몰라도, 학총련(과 그들 공안부)이 결성된 작년 말부터 올해 여름까지 위에서 내려온 방침에 따른 그들의 대응 기조는 한결같았던 것이다.
-절대 먼저 시위자들을 공격하지 말고, 보안성과 함께 질서 유지에만 주력할 것. 유인물을 유포하거나 외신과 인터뷰하는 것도 말리지 말 것.
-저쪽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폭력사용은 엄금.
윗대가리들은 분노한 학총련 놈들의 각목과 돌멩이를 시위 현장에서 직접 마주할 일이 없다 보니 골이 맛이 간 거 아닌가, 하는 짐작이 들 정도로 너그러운 대응이었다.
전대 장군님 시절에 비교하면 관용적이다 못해 지나치게 물러터진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방침에 몇몇 공안부 요원들 사이에서 소극적인 항의까지 나왔지만, 그런 불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런 당의 대응 기조는 이제까지 한 번도 변함이 없었다.
그나마 얼마 전에는 애국전선이라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쪽에 붙어있던 퇴역 군관들 모임이 돌아서서 드디어 당에서도 전 반동들을 때려잡으려나 은근히 기대를 했다.
하지만 그때조차 윗선에서 내려온 방침은 ‘앞으로는 직접적인 시위대 해산은 애국전선에 맡겨두되, 절대 직접 개입하지 말고 특히 양쪽 누군가가 중상을 입는 건 극력 저지하라’라는 도통 모를 지시뿐이었다.
“거참, 이럴 거이면 우리 공안부는 왜 만들었는지 모르갔구만. 이번 총서기 동지 령도 초기에 교화소를 많이도 없애버렸다니 저놈들 잡아 처넣을 자리가 부족하기라도 한 거는 아니갔지?”
“그거는 아닐 거이야. 아마도.”
“??? 무슨 근거로 그리 생각하는데?”
“내 군 시절 동무가 그 교화소 개조 작업에 참가한 동무인데, 그 동무가 건너건너 듣기로는 다 없애기는커녕 몇 개소는 오히려 개조를 해서 이전보다 엄청나게 나아졌다지 기래. 특히 피양 승호구역에 있는 23호 관리소인가, 거기는 당에서 직접 관리한다네.”
“나아져? 아, 하기야 옛날에는 공화국에 돈이 없어 교화소 전기 울타리에도 불이 자주 나가고 그랬다던데. 기럼 이제 탈출은 꿈도 못 꾸겠구만? 제기랄, 기거 속이 다 시원하군. 아예 본보기로 저기 아새끼들 몇 놈 처넣었으면 원이 없겠는데 말이야!”
한 공안부 요원이 보호 장구 아래로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면서 동료의 말에 그렇게 맞장구쳤다.
아무리 평양이 한반도 남반구보다는 시원하다지만 한여름에, 그것도 혹시라도 분노한 시위대가 폭력을 행사할 경우에 대비하여 두꺼운 보호장구까지 껴입고 있으니 안 더울 리가 없었다.
아니, 더운 건 둘째로 쳐도 이마에 땀이 흐르는 건 심리적인 문제에 기인한 바도 컸다.
학총련 측이나 노총맹 측이나 공안을 먼저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잘 알아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폭력 행사는 극구 피했지만, 시위의 열기에 취했는지 아무 짓도 안 하고 한구석에 장승처럼 서 있는 그들 공안에게도 학총련 측의 조롱과 멸시가 매일같이 날아왔던 것이다.
-퉤에엣! 독재체제의 사냥개 놈들, 이제까지 로동당 일당 령도에 반기를 드는 인민들을 몇이나 족쳤갔지? 그러고도 잘도 공화국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둥 지껄여대면서 낯짝 뻔뻔하게 들고 다니는구만!
-김정환 독재 권력과 유착한 남조선 대기업, 대자본 돈주들이 던져주는 더러운 돈푼이나 받아 가족을 먹여 살리니 참으로 자랑스럽겠구만, 기래? 우리보고 반동 반체제 분자라 그러는데 너거들 공안부야말로 이 조선 민족과 사회주의 체제의 일등 배신자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중인 그들 공안 입장에서는 정작 붙으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안경잽이 대학생들이 저렇게 면전에다 대거리를 해대니 울화통이 안 터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요즘 몇몇 공안들은 바짝 독이 올라 차라리 저 학총련 측에서 먼저 공격해 줬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하는 와중이었다.
아무리 상부에서 유화적 대응을 지시했다 해도 학총련 측에서 그들을 먼저 공격할 경우에는 단호히 대응하라고 천명했으니, 저놈들이 선만 넘으면 그 즉시 최대한 가혹한 교화소로 보내 버리기를 (물론 그전에 이제까지 당한 걸 제대로 갚아주고) 그들은 마음속에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일부 공안들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아니, 나아졌다는 거이 그런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좋게, 호텔처럼 바뀌었다네. 듣기로는 수감자들 전용 테니스장까지 만들었다나. 그런데 또 거기에 아무나 들어가는 거는 아니라던데.”
“?!?!! 뭐이야? 그거이 대체……!!! 저 당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역도들에게 인민의 혈세로 그런 호사를 누리게 해준다는 말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모르디! 근데 신기한 거이 건너 듣기로는 그게 또 효과가 있는 모양이야. 들어가기 전에는 김대 교수니 엘리트 지도일꾼이니 당보다 잘났다고 꺼드럭대던 반혁명분자들도 고분고분해져서 나온다네. 지난번에 입 잘못 놀렸다가 혁명화 교육 처분받은 김대 사회주의 경제학 교수 알디 않간?”
“아, 그 상학시간에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항상 전 인민을 노예화했으며 시장경제체제로 로선을 전환한 당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 했다가 잡혀들어간 그 양반?”
“기래, 그 양반도 거기 23호 관리소에 들어갔디, 내 동무가 거기 들락거리다 그 양반을 봤는데 완전 딴판이 됐다네.”
“아니, 안에서 무슨 짓을 하길래?”
“난들 알겠나, ……어이, 저기 한 놈 이쪽으로 다가온다.”
어처구니없다는 공안의 반문은 그의 동료가 저쪽에서 자기들 쪽으로 다가오는 학총련 놈들 몇 명을 가리키면서 중단되었다.
대강 학총련 간부쯤으로 추정되는 그 청년과 동료들의 눈에서는 결연한 빛이 번뜩였고 얼굴에는 심상치 않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공안들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면서 몰래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물음을 던졌다.
“뭐이야? 애국전선 동무들하고 쌈박질하는 것도 물리워(질려)? 뭐이 얻어먹을 거 있다고 너희들 좋아하는 시위질도 안 하고 그러고 서 있나? 썩 돌아가라우!”
“……너희들은 부끄럽지도 않은가?”
“……뭐이가 어드래?”
“전 조선 인민을 노예화하는 남조선, 미제 대자본과 결탁한 독재에 부역하고! 일당 독재, 언론 압살,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당의 사냥개가 된 것에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느냐 이 말이디! 이 김정환이의 썩어빠진 하수인들아!”
“……아니, 이 아새끼들 오늘 뭔가를 심하게 잘못 처먹었어? 썩 꺼지지 않으면 아무리 상부 지침이 있어도 내 오늘 반드시…….”
“오늘 우리가 탄압에 신음하는 전 조선 인민을 대신해 천벌을 내려주마! 뒈져라! 이 독재의 하수인들아!”
“……아, 아니, 이런 정신 나간…… 어어어어어!!!!!”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안들에게 다가온 몇몇 학총련 간부들은 이렇게 고함을 지르면서 쏜살같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손에는 삐죽이 튀어나와 여름 햇살에 반사되어 싸늘한 빛을 뿜는 금속성 물체가 쥐어져 있었다.
설마 이놈들이 이 정도로 미쳤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을 못 한 공안들은 경악하여 급히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진압봉을 빼 들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그들과 학생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행히 이 광경을 목격하고 달려온 대경실색하여 주변의 다른 공안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잡으라우! 뺏어! 날붙이부터 뺏으라우!”
“이거 안 놔? 당장 안 놓으면 손모가지 뼛골을 작살내 놓갔어!”
“이 정신 나간 간나새끼들이! 우리가 계속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디? 어디 죽어보라!”
“으윽! 윽! 아악!”
퍽퍽퍽……!!!
애초에 체격적으로 우세한 데다가 보호장구까지 갖춰 입고 있던 공안들은 금세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고 곧 먼저 습격한 학생들을 제압하고 일방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경찰이고 군인이고 대체로 사람은 자기 목숨을 눈앞에서 직접 위협받으면 공무원으로서의 몸가짐이든 뭐든 잠시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근처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동료들까지 합세하자 안 그래도 근래 학총련의 일방적인 대거리를 참고 들으며 독이 바짝 올라있던 공안들은 직접 폭력을 (대중 앞에서) 쓰지 말라는 지시를 일순간 망각했다.
곧 거의 살기가 실린 그들의 주먹질 세례에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공안들을 습격한 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죽어라! 죽어! 이 씹어먹어도 모자랄 간나들! 오늘 걸어서 집에 못 돌아갈 줄…… 응?”
“이거이……? 칼이 아니라…….”
느닷없는 생사의 위기에 이를 갈아붙이며 학생들을 한참 구타하던 공안 중 몇 명의 눈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문제의 날붙이가 들어왔다.
하도 경황 중에 당한 일이라 손목을 비틀어 빼앗은 뒤로 정작 그게 뭔지도 자세히 안 봤는데, 지금 보니 그 흉기는 칼이 아니었다.
그건 숟가락 손잡이였다.
“아, 아니, 이거이…… 이 무슨……!!”
“도와주십쇼! 도와주시라요! 동무 여러분! 공민 여러분! 이 공안들이 사람 잡습네다! 맨손의 학생들을 공안들이 죽일 듯이 팬다!”
“리 동지! 정신 좀 차려보시오! 사람이 죽는다! 여기 공안들이 리경수 대의원 동지를 죽인다! 공안들이 사람을 죽였다!”
그제서야 피투성이가 된 학총련 간부들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들을 둘러쌌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듯 근처에서 시위하고 있던 다른 학총련 시위대들이, 그다음에는 이제까지 남의 집 불구경하는 것처럼 구경하던 근처 인민들이, 그리고 그다음은 공안들이 내심 가장 경계하던 사람들이 몰려왔다.
바로 외신 기자들이었다.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리경수와 학총련 간부들에게 향한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자신들이 이 아새끼들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공안들은 사색이 되었다.
“이, 일단 구속하라우! 잡아서 끌고 가!”
“비키라우! 비켜! 당장 비키지 않간?”
결국 그날 공안을 습격했던 리경수 외 몇몇 학총련 간부들은 그 자리에서 공안들에게 연행되어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요 몇 달 새 학총련에게 급격하게 싸늘해져 외면 직전까지 간 공화국 민심에는 그날을 기점으로 작지만 분명한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학총련 측에서 미리 대기시켜 놓은 외신기자들이 피범벅이 되어 수갑을 찬 채로 공안의 등에 업혀 실려 가는 리경수 등 학생들의 사진을 1면에 실어 다음과 같은 제목을 찍어 보도하자 파문은 이내 작은 물결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북한 공안부, 자국의 학생 시위대 3인을 일방적으로 폭행한 후 체포! 체포자들은 생사불명으로 추정됨.
-‘동북아시아의 싱가포르’,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독재체제’로 추앙받던 북조선 김정환 체제,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나?
-아직 공식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공안부, 학총련 측 ‘평화시위자에 대한 명백한 테러 행위’, ‘이 나라가 독재국가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 조금씩 요동치는 평양 민심!
“뭐 조만간 이런 일이 터질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
사건 발생 당일 이 사태를 보고 받은 정환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다른 정치국 관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땅에 닿도록 숙였다.
도무지 정환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는 태도였다.
“죄, 죄송합네다! 총서기 동지! 저희가 불민하여 이런 사태를 초래했으니……! 죽여주시라요!”
“아닐세, 그 동무들 인적사항을 보니 김대 출신에, 성적도 우수하고 유학도 갈 수 있었다고 하더군. 길을 잘못 들어 나쁜 물이 든 건 좀 아쉽지만,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 사실 예전부터 이런 일에 써먹으려고 23호 관리소를 만들어 둔 거 아닌가?”
“그 말씀은…….”
“체포된 동무들을 승호 구역 23호 관리소로 보내게. 나중에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우리 공화국의 기둥이 될 인재들이니 잘 대우해 줘야겠지.”
“받들갔습네다!”
‘이름이 리경수라…… 경수…… 참 재미있는 우연이야.’
자기 앞에서 우렁차게 복명하는 간부들을 눈에 담으며 정환이 한 생각이었다.
* * *
“23호 관리소로!”
유치장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공안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리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꽉 움켜쥐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한 몸이 찢기고 부러지고 무너져도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신념을 절대로 꺾지 말자는 다짐을 동지들과,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해왔음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올 게 왔기 때문이었다.
동지들과 상의 끝에 결의한 ‘혁명의 횃불 작전’을 위하여 공안들을 먼저 공격하다가 체포될 때 무자비하게 두드려 맞은 온몸의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렸지만, ‘23호 관리소’라는 말을 들을 때 내려앉은 가슴의 서늘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게 될 23호 관리소는, 그들과 같은 평양 대학가를 기반으로 한 학총련 및 기타 시위대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을 종합해볼 때 무간지옥의 밑바닥 같은 곳이었으니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로지 소문으로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혹자는 그 안에서 김정일 시대에 모습을 감춘 인민군 최고의 고문기술자들이 뼈를 가르고 힘줄을 뽑는 생체실험을 한다고도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수감자들에게 당 직속 연구소에서 개발한 세뇌 약물을 강제로 주입시킨다고도 했다.
제아무리 바위 같고 강철 같은 반혁명 사상을 가진 정치범이라도, 심지어 그 악명 높은 김정일 시대부터 은밀히 저항 의지를 품어왔던 자라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려 당과 김정환 총서기 동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맹세를 흐느끼게 되는 곳이 바로 23호 관리소였다.
얼마 전 김대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부패 타락에 대해 강의하다가 순식간에 증발한 자신의 은사 한 명도 23호 관리소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리경수 본인 역시 일개 학생이지만 공안의 주적 학총련에서 대의원을 맡을 정도로 간부급이었으므로 자신도 만만치 않은 골칫거리일 게 뻔하다고 리경수는 예상하고 있었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이 김정환이의 사냥개들!’
공안의 거센 손길에 밀려 눈이 가려진 채 호송차 뒷자리에 처박히면서도 리경수는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다른 동지들, 공안부의 감시를 피해 생사고락을 함께해 오다가 지난번에도 같이 동참해서 체포된 동지들은 전부 체포 시점 후로 흩어진 지 오래였다.
어쩌면 이미 아무도 모를 곳에서 죽어 땅에 묻혔을지도 몰랐다.
아니, 사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덜컹거리는 호송차 바닥의 진동을 느끼면서도 리경수는 어디 있는지 모를 동지들에게, 먼 미래의 후손들에게, 무엇보다 자신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절대로 변절하지 않으리라.
제아무리 혹독한 고문이 가해져도, 절대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이동했는지 감이 안 잡힐 무렵, 마침내 호송 차량은 멈췄다.
밖에서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고, 재빠르게 오가는 발소리에 리경수는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곳이 23호 관리소인가?
아니면…… 아니면 그런 곳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그냥 자신의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 넣고 어딘가에 암매장해 버리려는 게 아닐까?
그리고 문이 열리고 안대 위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밝은 빛이 각막에 닿은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번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역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가? 그렇게 맹서를 했음에도?’
잠시나마 움츠러든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려는 순간, 부드러운 손길 하나가 그를 호송차 의자에서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손길의 주인은 친절한 목소리로 멍해 있는 리경수에게 말을 걸었다.
“리경수 동지, 아니, 리경수 선생님. 23호 관리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네다. 오랫동안 씻지 못하신 걸로 아는데, 욕실이 준비되어 있으니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