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34화
83장.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거지
-아, 거기 운동계 동무들! 요즘 미제나 서방 언론들을 자주 만나고 다닌다던데, 대체 왜 우리 공화국 일에 외세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기요? 조선 민족의 일은 조선 민족끼리 알아서 해결해야 하디 않갔소?
-에이, 시끄럽소! 그러는 거기 주체계 동무들은 그쪽의 뒤떨어진 사상 때문에 우리 학총련의 투쟁 전체가 인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폄하 당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반성은 하고 있는 거이오? 우리 운동계가 뼈 빠지게 학총련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 그 쪽 동무들은 시위도 잘 나오지 않지 않소!
-아니……!!! 애초에 공안부와의 협상을 파투낸 게 그쪽 계열 의장이면서 지금 누구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기요? 처음에 손을 잡고 로동계를 눌러버리자고 제의한 건 그쪽이면서, 이제까지 이 학총련을 책임질 만한 어떠한 영도력이라도 보여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소?
-그거이 우리가 파탄 내고 싶어서 파탄 낸 거요? 로동계 배신자들이 이 학총련을 뛰쳐나가 저기 공안부와 선전선동부에 트집거리만 만들어 줘서 그리된 거이지! 그리고 단어에 주의하시오, 영도력이라니, 그런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주의적인 단어 사용은 민주적 절차로 지도부를 선출한 우리 학총련의 일원으로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언행…….
-이런 빌어먹을! 더는 못 해먹갔다! 애초에 우리 주체계가 너희 운동계 개간나들과 손을 잡은 거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어! 10년 전만 해도 운동계니 노동계니 전부 반동으로 간주해서 교화소에서 혁명화 교육이나 받고 있어야 했는데 우리가 정신이 나갔지! 앞으로 너거들 끼리 어디 잘해보라!
시위로 얼룩진 그해 봄이 여름으로 넘어갈 때쯤, 설립부터 불안한 동거였던 학총련의 노동계 탈퇴에 이은 또 다른 제2의 분열, 주체계 탈퇴의 직접적 원인에 대해서는 먼 훗날까지도 말들이 많다.
혹자는 뒤늦게나마 여론전의 중요성을 깨닫고 외신을 쫓아다니기 시작한 운동계의 행보에 외국인, 외세라면 거의 무조건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주체계가 반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그냥 운동계가 추진한 협상이 지지부진한 것에 실망한 주체계가 슬슬 진지하게 생계의 압박을 느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고위 군관들이 많았던 주체계가 아직 나이대가 어린 운동계 대학생들에게 명령받는 일을 참지 못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는 그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겹쳐서 일어났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동의하는 바는, 노동계에 이은 주체계의 학총련 탈퇴는 아무리 늦어도 1년 안에 일어났을 정도로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건 굳이 정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 애초에 주체계의 이념인 주체사상과 정파를 막론하고 운동계 대부분이 공유했던 대중주의는 공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수령, 즉 지도자로서 인민이 완성된다는 주체사상과 개개인의 합의에 의한 지도체제, 대의 민주주의- 내지는 민주집중제는 상극 중의 상극이었고, 구성원들 출신 성분부터 한참 다른 운동계와 주체계가 진작에 갈라서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치적인 필요성은 주체계 쪽에서 더 절실했는데, 운동계 쪽에서는 앞으로의 투쟁에 있어서 대 여론전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상, 그들은 이제 정치적 동맹에서 거추장스러운 짐 덩어리가 되어버린 주체계를 학총련에서 언제라도 내쳐 버릴 구실만 찾고 있던 중이었다.
또한 그 주체계 역시도 ‘10년 전만 해도 단매에 쳐죽일 반동’인 운동계가 좋아서 붙어 있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그들 자신도 학총련을 나간 순간 자신들은 그저 ‘정치적 자립이 불가능한 구시대의 잔당’일 뿐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줄곧 학총련 내부의 적쯤으로 취급당했던 주체계 역시도 한때 공화국의 골라 뽑은 엘리트들이었던 군관들, 정치장교들, 장령들의 모임이었던 만큼, 학총련을 나가기로 결정한 순간, 주체계 리더들은 머리를 굴리고 굴려 나름의 생존 가능성을 타진할 정치적 한 수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생각해 보시오, 동무들, 지금 인민들은 총서기의 눈을 흐리는 당내 반동들, 뙤놈과 미제 첩자들이 풀어주는 자본주의 단맛에 넘어가 정신이 없소. 지금 상황에서 이런 인민들에게 주체사상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말해봐야 우리만 비웃음을 잔뜩 듣고 말 거요.
-전략적으로 생각해야 하오. 옛날 공화국을 그리워하고 총서기 체제의 현 공화국에 말 못 할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운동계 로동계 이 두 반동들에게 찬동하기는 꺼려 하는 인민들이 많다는 것을 잘 리용하기만 하면 우리도 충분히 우리 밥 바리(밥 그릇)를 지킬 수 있을 거이요.
이런 계산 끝에 그들 주체계 선택한 전략이란, 바로 인민들에게 거부감이 심한 ‘주체사상’을 뒤로 슬쩍 빼버리고 그 자리에 비슷하지만 일반 인민들에게 훨씬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모델’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델이란 바로 죽은 김일성이었다.
-동무들! 오늘 우리 주체계, 아니, ‘조선수령애국전선’은 천하의 반동, 반체제 분자들의 집단인 학총련에서 독립을 선언합네다! 우리 애국전선, 전선의 건립 이념은 돌아가신 조선민족 만고 위인 김일성 동지의 길을 추종하고 따르는바,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일반 인민들의 적극적이고 ‘물질적인’ 참여를 바라겠소!
-??!?!?! 그럼 학총련에 몸담고 있을 때나, 나온 지금이나 그게 그거이 아니오.
-다르오! 우리 애국전선은! 주체사상이 아닌! 김일성 주석 동지의 길을 기념하고 추종하는! 혁명적 애국 이념 전사들의 공화국 수호 모임이오!
-그러니까 그게 그거 아니갔소. 김일성 주석 동지 추종이나 주체사상 추종이나 그게 그거인데…….
-아 거 분명히 다르다고 하지 않소! 아무튼 우리 애국전선은 주체사상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소! 오로지 김일성 동지만을 추종할 뿐이오!
주체계 인사들은 (한때는 공화국 내 모든 공공기관과 가정에 걸려 있었지만 이제는 흘러간 유물이 된) 김일성의 초상화를 크게 인쇄해서 걸어놓은 애국전선의 창립기념식 자리에서 위와 같이 ‘우리는 주체사상에 관심이 없다’라는 노선을 분명히 했다.
김일성이 사실상 주체사상의 알파요 오메가임을 생각해 본다면, 말장난 축에도 못 들어갈 터무니 없는 선언이었지만, 놀랍게도 애국전선의 이러한 마케팅 전략은 성과를 거두었다.
주로 4, 50대가 넘은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회원가입 문의 전화가 쏟아졌고 애국전선의 후원계좌로는 항일 독립투쟁 하던 시절처럼 ‘나라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써달라’라며 한푼 두푼 모은 쌈짓돈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은 더 이상 모든 인민들이 가만히 앉아서 적으나마 배급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경쟁을 해서 자기 밥그릇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경쟁체제에서는 재능이 없었건,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건, 아니면 그냥 운이 나빴건 간에 필연적으로 도태되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주로 경쟁체제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지 못했거나, 어떻게 배웠어도 그 짐을 버거워했던 노인들이었다.
이렇게 사회에서 소외된 구세대들은 김정환 시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대에 대한 (대단히 미화된) 기억을 떠올리며 향수에 잠기고는 했는데, 그러한 정서를 애국전선이 정확하게 찔렀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님 시절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옛날이 좋았지비…… 주체사상이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주석 동지가 계속 살아계셨다면 참 좋았을 텐데…….
물론 사실을 말하자면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김일성 시대를 살아왔던 노인들의 현재 생활 수준이나 소득은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지만, 원래 추억이란 객관적일 수가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적 호응에 용기백배한 애국전선은 대담하게도 ‘동무들 가슴 안에 살아계신 김일성 주석 동지를 되살려 내자!’라고 쓰인 붉은 유인물을 평양 시가지에서 뿌리고 다니며 가두 행진 퍼포먼스를 벌이기까지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이제 주체계는 학총련의 세 계파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단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노동계와 운동계가 박 터지게 싸우는 꼴을 보며 한시름 놓고 있던 공안부,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정환도 새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 * *
“인정하지. 동무들. 솔직히 나도 이건 예상 못 했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네다, 총서기 동지. 설마 아직도 공화국에 김일성 주석님을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인민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무엇보다 한때 붉은 기를 가장 최전선에서 떠받들겠다던 인민군 선배 장령과 군관들의…… ‘사상적 유연성’이 저리 뛰어날 줄은 참 의외가 아닐 수 없군요.”
정환의 고백 아닌 고백에 황망함 반, 냉소 반이 섞인 장성택과 백승철의 대답이었다.
각자 앞에 놓인 최근 애국전선의 활동과 성장세를 서술한 공안부의 보고서를 읽어보던 정치국 위원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아하니 대체로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리고 당연히 정환 역시 애국전선의 이런 창의적인 전략에는 조금이나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다른 것도 아니고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분리시켜서 홍보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그래도 설마 자신들이 간판으로 내건 이념을 저렇게 신속하게 내버릴 거라고는 예상 외였는데, 역시 생계가 위험에 처하니까 판단력이 급상승하는 건가?’
주체계(아니, 이제는 김일성계라고 불러야 할)의 저런 전략은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헛소리지만, 위인의 실제 객관적인 행적과는 별도로 그 이미지만 차용해서 써먹는 사례는 굳이 이 공화국 안에 국한시키지 않더라도 한국이건 어디건 대단히 흔하다.
게다가 애초에 주체사상 자체가 논리적 정합성에 의문을 품는 게 허용되지 않고 ‘동무가 이해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소. 그냥 닥치고 믿으시오’ 주의 아니었던가.
당장 당사자들인 주체계들 내부에도 진짜로 주체사상을 전부 이해하고 신념으로 삼은 사람은 거의 전무했고, 주체사상의 불합리성을 이해한 극소수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정치적인 확장성으로만 보면, 주체사상보다는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비열하지만 현명한 전략임은 확실했다.
당장 같은 학총련에 속해 있던 운동계가 지금 그걸 못 해서 인민들의 지지를 절찬리에 잃어가는 걸 옆에서 지켜봤기에, 머리 굳은 퇴역 장령들과 군관들이 주축인 주체계가 이런 발칙한 발상을 해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정환은 나름대로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 저 애국전선의 성장세를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도 확실했다.
“이 애국전선이라는 동무들이 더 세를 키우기 전에 손을 쓰셔야 할 듯합네다. 아시겠지만 지금 저 애국전선을 그대로 놔두시면…….”
“……운동계나 노동계보다도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지. 걱정 말게, 이미 대책을 세워놨으니까. 여기 있는 황 총장 동무가 바로 그 대책이지. 아니, 대책 중 하나라고 해야 하나?”
정환의 말에 정치국 간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테이블에 앉아 있는 보기 드문 손님에게로 옮겨갔다.
그 손님은 자신이 이 자리에 왜 불려온 건지 모르겠다는 듯 땀을 뻘뻘 흘리며 주변을 연신 돌아보다가,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더욱더 당황한 듯 주름진 입가에 경련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한때는 최고인민회의 의장까지 역임해가며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지만 지금은 김일성 대총장이라는 주변부로 물러나 끈 떨어진 신세가 된 그 사람은 바로 주체사상의 창시자, 현 김대 총장 황장엽이었다.
“……네? 총서기 동지, 죄송하지만 이 늙은이는 지금 동지께서 무슨 교시를 내리시려는 건지 잘…….”
“생각해 보게, 동무들. 지금 이 공화국에서, 그리고 저들 애국전선과 그 추종자들에게 김일성 주석과 주체사상이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본 적 있나?”
황장엽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정환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가자 간부들은 일제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환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환은 역시 이번에도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답을 내려주었다.
“내가 간단하게 요약해 주지. 김일성 주석과 주체사상은 저들 애국전선에게 밥그릇일세. 수저나 포크, 나이프라고 해도 좋고.”
“밥그릇……!!”
“……그렇게 생각해 보면 간단하지 않나? 그러면 주체사상과 김일성 주석을 분리시킨다는 참으로 간교한 발상도 바로 이해가 가지. 밥그릇은 크고 튼튼할수록 좋으니까 말이야. 한마디로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라 이 말일세.”
일단 자기 아버지인 김일성에게 일체의 경어도 붙이지 않고 밥그릇에 비유하는 정환의 행동은 예전이었다면 아무리 현직 최고지도자라도 뒷말이 나올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런 건 감히 상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미 땅에 묻힌 죽은 권력이지만, 정환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살아 있는 권력을 행사하는 최고지도자니까.
게다가 그가 행사하는 권력과 권위는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허황된 사상누각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증명 가능한 진짜 업적 위에 기반하지 않나.
그 말인즉슨 지금까지 그가 집권 이래 이룩해 놓은 그 모든 성과를 감안하면, 설령 진짜 김일성 주석이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걸어 나온다고 해도, 정환은 당원들의 충성심이 둘 중 누구에게로 향할지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었다.
“저들에게 주체사상이란 자신의 빛나던 과거에 대한 향수인 동시에 현실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굳혀줄 정치적 기반이며, 당장 자기들 입에 들어갈 이밥을 해결해 줄 생계 수단일세. 그리고 사실 김일성 주석도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이들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일단 김일성 주석에게 다시 한번 장례식을 치러주어야 하네.”
“……장례식이라 하시면?”
“육체적인 의미의 장례는 이미 내가 취임하면서 거하게 한 번 치렀으니,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장례식! 마르크스 동지, 스탈린 동지, 그리고 저기 중국의 마오 동지처럼 몸은 죽었지만 그들의 유산이 산 사람들의 세상을 걸어 다니게 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일세.”
일체의 존경심이 제거된 정환의 말에 당 간부들 일부는 총서기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랭혈한 사람이라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지만, 일부는 그 말에 내포된 뜻, 그리고 무자비한 실용주의를 깨닫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흠흠, 그런데 총서기 동지도 아시겠지만…… 그 ‘장례식‘을 저희 당과 동지께서 직접 주관하실 수는 없는 노릇입네다. 인민들 중 상당수는 이해하지도 못하는 주체사상은 싫어해도 타계하신 주석님은 아직 경애하는 자들이 많은데, 주석님의 아드님이신 동지께서 선친을 깎아내리시면 그거이 아무래도…….”
“그렇지. 당내에서는 어쨌건 아직도 인민들 사이에서 내 지지도의 상당 부분은 죽은 주석의 정식 후계자라는 것에 기반하니까. 하지만 그거야 내 입으로 직접 안 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제압해야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그거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뭐긴, 이런 의미일세.”
그 말과 함께 정환은 서랍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 테이블 중앙에 툭 던졌다.
대략 세계 위인전 전집 정도의 두께를 가진 그 원고 표지의 글자를 읽은 순간, 정치국 간부들의 눈이 접시만하게 커졌다.
그 원고 겉면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김일성 주석 평전]
- 김정일, 황장엽 공저(共著)
“총서기 동지…… 김정일…… 아차차, 김정일 장군님 저(著) 라는 건…….”
“동무들, 지금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밝히지. 돌아가신 김정일 장군께서는 오랫동안 그분의 아버지이신 김일성 주석님과 주석님의 주체사상, 그리고 지도이념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대해서 학술적인 비판을 집필해 오고 있었네.”
“……네?”
“들은 그대로일세. 뭐 별로 이상할 것도 없지. 공화국 인민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돌아가신 김정일 장군님은 김일성 주석님의 우월한 자질을 물려받아 김대 정치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청년기부터 여러 명저들을 저술하신 공화국의 다시 없을 최고의 사상가이자 절세의 공산주의 리론가(이론가), 학자이시기도 하니까 말이야. 그러니 그분이 선친의 주체사상에서 뭔가 오류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지. 그렇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