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29화
“많이도 모였군요, 예전 같으면 인민보안성 기동진압대가 먼저 출동해서 바로 콩알탄으로 대응하고 가족들은 전부 혁명화 교육 처분이었을 텐데, 다른 곳도 아니고 이 평양에서 저런 짓거리를 할 수 있다는 건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서야…….”
“총서기 동지께서 인민들의 배에 이밥을 넣어주신 지 10년이 넘었으니 고프고 주린 시절 모르는 어린 것들 머리에 바람이 들어가는 거이 당연합네다. 허, 저놈 보게, ‘미제 자본 물러가라!’라고 써서 들고 다니는 놈이 손 시계는 미제 캘빈 클라인을 차고 다녀? 쯧쯧…….”
자기 일인 양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주로 대학생들로 구성된 시위대를 욕하는 운전기사를 보며 현영숙은 입술을 오므렸다.
생각해 보니 이번 시위대의 동기와 구성, 그리고 동시에 모순점과 한계까지 그대로 드러낸 솔직한 한마디 아닌가.
‘지난번 화물차 시위 때하고는 확실히 연령대가 달라. 이번은 하류계급 로동자들이 아닌, 잘 배우고 논리의 사상 이론 무장이 갖춰진 학생들이 직접 나섰다. 돈 몇 푼 쥐여준다고 물러나지는 않을 텐데.’
사실 지난번 화물차 노조 파업 때도 대학가의 학생 운동 세력이 연계되어 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당의 령도에 불만이 많은 세력이 은밀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세력과 연계하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다.
창밖으로 대학거리를 행진하는 시위대를 지켜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타고 있던 비서에게 질문을 던졌다.
“검열위 그루빠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이미 이럴 때를 대비해서 37호실 김 실장과 합의해 놓은 대응 방침은 잘 돌아가고 있겠지요?”
“전부 당의 통제하에 있습니다. 조선중앙방송, 평양 TV 등 수도권 지상파는 물론이고, 케이블부터 날씨 뉴스까지. 중앙검열위의 일꾼이 활동하는 모든 방송, 전파는 저 시위를 보도하지 않을 테니, 부장 동지께서는 시간을 두고 대응을 생각하셔도 됩니다.”
“좋아요. 이제 당사 회의에 들어가서도 총서기께서 저한테 불벼락을 내리지는 않으시겠네요. 최소한 당장은.”
하지만 이번에는 언제까지나 그것만으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현영숙은 이마를 짚었다.
이전에도 이러한 로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나 대학생들의 당의 처사에 대한 개혁 요구는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시위의 기세가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그리고 한동안 된서리를 맞았던 이 학생 운동이 다시 불붙게 된 원인은 역시 몇 달 전, 중국 신임 주석 보시라이의 인터뷰, 그리고 3대 구호 운동이 결정적이었다.
물론, 그러한 인터뷰는 어디까지나 도화선이었을 뿐, 근래 들어 요원에 불길 번지듯 일어나는 사회 개혁 요구의 근본에는 모든 사회 개혁운동이 그렇듯 현 사회 구조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불만과 의심이 깔려 있었다.
* * *
근 15년간 김정환이라는 개발 독재자의 영도 아래 빠르게 성장 제일주의 노선을 걸어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가 드디어 오래 억눌러 왔던 국가적인 홍역을 앓을 때가 도래한 것이다.
-우리 자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로동계급이 령도하는 로농동맹에 기초한 전체 인민의 정치사상적통일에 의거한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현실이 과연 그러한가?
-당 이름은 조선로동당인데, 정작 당과 국가의 근간이 되어야 할 로동자들은 해외 자본이 만든 공장에서 저임금과 살인적인 로동,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혹사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무슨 로동자의 나라냐?
-돈 없으면 이제 인민은 인민도 아니다. 과거 배급소에서는 피죽이라도 공짜로 나눠주었고, 인민반에서는 서로 버선 하나도 나눠 신으며 가난을 이겼다. 그런데 작금 현실은 반짐 자동차를 타고 동남아로 휴가를 떠나도 모두 한 푼이라도 더 못 가져 눈이 벌게져 있지 않은가? 이리 각박한 세상을 만든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외세와의 관계도 그렇다! 우리 조선 민족은 분명히 자주, 자립, 자력갱생의 원칙 아래 타락한 부르주아지 사상과 맞서 싸워 남조선 인민까지 해방을 이루어 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공화국의 건국 이념 아닌가? 그런데 왜 그런 공화국의 당 간부들이 미국 기업인들이 공화국에 공장을 유치하면 고개를 조아리며, 영국 은행가들이 대출을 해주면 그 손가락을 핥는가? 이것은 당의 무언가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지금 우리 공화국과 사회주의 이념을 공유하는 중국에서는 이러한 인민대중의 불만에 귀를 기울이는 지도자가 나타나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들었다. 해외의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이 더 이상 인민을 괴롭히지 못하며, 타락한 부패 관료들이 길거리에서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 우리 조선도 그러한 모범을 따라야 한다!
요약하면, 이러한 혈기 넘치는 대학생들의 사회 운동은 단기간에 빠른 경제성장을 일군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에서 나타나듯이 반(反)외세, 반자본주의, 반시장경제체제, 민족주의, 민주주의, 탈권위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반미(反美)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처음에는 중국의 소식을 가장 빠르게 접할 수밖에 없는 평양과 남포 대학의 외국어 학과들을 중심으로 작고 은밀한 학습 소조(小組, 스터디 그룹)가 결성되더니, 이내 현실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늦어서 죄송해요, 내일 아침 로동신문에 실릴 사설 논조까지 검토하고 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논조? 어떤 논조?”
“‘학생 동무들은 사회를 바꾸고 싶으면 당에 들어와서 수령에게 충성하며 반체제 분자들에 맞서 싸우는 방식으로 사회를 바꿔라. 혈기에 휩쓸려 쓸데없이 극좌적 오류에 빠지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와 같은 것들이요.”
“괜찮구만. 기래, 일단 자기들도 당에 들어와서 총서기 동지의 노고를 옆에서 몇 년 보다 보면 저들이 한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게 될 테니.”
“저기 김 실장이 이미 말해줬으니 신경 쓰지 말고 앉지, 현 부장 동지. 그럼 다시 설명을 시작하지.”
장성택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던 현영숙은 정환의 무심한 말에 맨 앞쪽 연단에서 프레젠테이션 스크린 앞에 서 있는 김 실장 쪽으로 눈길을 줬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김 실장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노회한 웃음을 실실 흘렸지만, 지금 긴장한 얼굴로 늘어앉아 있는 정치국 위원 중에서 그와 일할 기회가 가장 잦았던 현영숙은 김 실장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지난번 고려일보 건의 유신 기사 이후로 김 실장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느라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그럼 브리핑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인민보안성과 각 도당 위원회 감찰국에서 들어온 보고를 종합하면 저기 자기들끼리 부르는 말에 의하면, 소위 ‘조선사회주의학생총연맹’이라는 것들이 최근 6개월간 주최한 집회는 총 30여 회, 그중 규모가 작거나 금방 해산해서 집계되지 않은 것들을 합치면 100여 회가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 아새끼들이 원하는 게 대체 뭐이야? 대체 뭐가 불만이라 총서기와 당의 령도에 불만인 건가?”
“조선사회주의학생총연맹…… 그냥 학생총련, 학총련이라고 불리는 이 단체의 표면적 요구를 압축하면 최저임금 인상, 노조 결성 허가, 조선 노동자를 고용하는 해외기업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금 법 제정 등등이 있습니다만……. 가장 결정적인 건 이겁니다. ……최고인민회의 직선제 및 비밀투표 보장, 그리고 사회주의 헌법에서 조선로동당의 우월적 지위에 관한 조항 개정.”
“최고인민회의라……. 한마디로 국회, 입법기관에게 권력을 분산하고 대의 민주주의 하자는 거군.”
정환이 툭 내뱉은 말에 정치국 위원들의 얼굴에 분노와 당혹스러움이 반반씩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그들이야말로 정환이 옹립시킨 현 체제, 조선로동당에 의한 개발독재 체제의 가장 직접적이고 큰 수혜자인데 그 체제를 위협시키는 학총련 대학생들에게 좋은 감정이 들 리 만무했다.
아니, 좋은 감정은 고사하고 일부 급한 자들은 당장 군부대를 투입하여 총연맹을 사회질서 교란 명목으로 깔아뭉개야 한다고 진지하게 정환에게 간언하던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환의 대답은 ‘아직 이르다’였다.
“진정하게, 동무들. 무조건 때려잡는다고 될 턱이 있겠나? 이런 종류의 일은 외과 수술하듯이 차분하고 섬세하게 대응해야 하네. 바로 그런 일을 하라고 이런 사업에 잔뼈가 굵은 김 실장 자네를 데려온 건 알겠지? 어디 한 번 솜씨를 보여주게.”
“물론입니다. 저희 37호실이 지속적으로 프락치…… 흠흠, 그러니까 내부 스파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경로와 정보 수집 등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저 학총련의 구성인원들은 크게 세 부류, 내지는 세 계파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최고지도자가 자신의 ‘특기’를 인정해 주는 듯하자 김 실장은 재빠르게 눈을 빛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장성택을 비롯한 일부 당 간부들은 꼴 보기 싫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김 실장은 바로 학총련의 계파 분류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 계파, 노조계라고 부르는 세력인데 사실 이 친구들은 학생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노동현장, 건설판, 자동차 공장, 항만과 운송업계에서 일하다가 주는 돈이 적다고 불만을 품고 일하다가 뛰쳐나온 친구들이지요. 노조결성, 최저임금 인상 등의 구호는 이들이 주축이 되어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북조선의 산업 구조를 훑어보면, 사실 북조선은 후발 개도국치고는 여타 외국 개발경제학자들이 믿기 힘들어할 정도로 산업간 균형이 잘 잡혀 있는 편이었다.
석유, 자원 개발로 대표되는 1차 산업부터 남조선 기업들을 인수해 쌓은 2차, 2.5차 산업, 그리고 최근 들어 무럭무럭 크고 있는 정보통신 산업까지.
물론 지긋지긋한 선천적 한계인 국가 체급의 문제로 인해 대규모 내수 시장이 기반이 되어줘야 하는 대형 제조업, 항공기 사업이나 조선업 같은 건 언감생심이지만 그래도 1, 2, 3차 산업의 고른 균형이 바탕이 되어 중진국 반열에 든 현재까지도 단연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임금도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었고 석유를 통해 안정적으로 벌어들이는 오일 머니를 통하여 최근 들어서는 일정 수준의 사회보장제도까지 도입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노동자 대부분의 상황은 객관적으로 볼 때 매우 열악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개혁개방 초기에 돈 냄새를 잘 맡아 외국에서 물건을 들여와 팔 거나 자기 사업을 차린 인민들은 크고 작은 부를 일구었지만, 절대다수의 자본주의 문외한 인민들 중 돈 없고 기술 없는 자들은 건설현장이나 공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후발 개도국의 불가피한 운명으로 북조선에 입주한 외국 기업들은 이들에게 타국보다 훨씬 싼 임금을 줄 수밖에 없었고, 안전사고나 산업재해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따로 배우지는 않았어도 생존본능으로 더듬더듬 뭉치고 어설프게 조직하여 현재 학총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게 바로 이들 노동계였다.
“그리고 두 번째 계파는 말하자면 학총련 녀석들의 대가리, 브레인을 담당하고 있는 학생운동계, ‘운동계’ 놈들인데, 가장 주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숫자상으로는 가장 적어도 가장 위험한 놈들 중 하나입니다.”
“어째서?”
“다른 놈들, 예를 들어 노동계야 그냥 배고프고 돈 없어서 쇠파이프 들고나온 놈들이니 딱히 정치적으로 뭔가를 요구하지는 않는데, 이 애새끼들은 배가 불러서 그런지 총서기 님과 로동당의 일당 영도 체계에 가장 직접적인 불만이 많은 놈들입니다. 최고 인민회의 직선제 요구도 얘네들이 들고나온 거죠.”
김 실장의 말대로, 운동계는 지난번 화물차 노조 시위 때부터 학총련의 가장 주도적이고 열성적인 세력이었다.
비록 배운 게 많으면 생각도 다 다르다고 운동계 내부에도 여러 계파가 있어서 일인 수령독재를 부정하고 중국식 민주집중제를 지향하는 다수파부터, 아예 일당제를 폐지하고 한국 – 미국식의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소수파가 다 섞여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학총련의 목소리이자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들이었다.
비록 세 세력들 중 가장 수는 적어도 가장 목소리가 크고 지하신문, 유인물 등을 출판하여 ‘사상적 계몽’에 열심히 힘을 쓰는 고학력자들의 모임이기도 했다.
게다가 먹고 사는 데 부족함이 없는 당 간부 자제까지 합류했다는 소문을 증명하듯, 컴퓨터는 물론이고 최근 들어 공화국에 거세게 불고 있는 ‘손전화’(휴대폰) 등 IT기기 사용에 가장 익숙한 계층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한 계파를 설명할 차례에서, 김 실장은 평소의 능글맞은 모습답지 않게 살짝 머뭇거렸다.
“뭐이야? 뭐 때문에 그리 뭉기적거리고 있는 게야? 아직 마지막 한 부류가 남았지 않았간? 어서 말해보라우!”
“아…… 저…… 그게…… 사실 이 부분은 좀 불편하실 수도 있는데……. 마지막 계파는 ‘주체계’라는 놈들입니다.”
“주체계……?”
김 실장을 타박하던 장성택은 이제는 희미한 어떤 기억을 애써 떠올리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사실 이미 당 간부들 몇몇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헛기침을 하며 정환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김 실장이 쐐기를 박듯 그들의 의심에 결론을 지어주었다.
“네, 그 주체사상의 그 주체 맞습니다. 이 주체계라는 놈들의 의도는 별거 없습니다. 그냥 과거가 그리운 거지요. ‘그리운 옛날의 공화국이 지금보다 더 좋았다’라고 생각하는 놈들의 총집합체입니다.”
“옛날이 좋았다면 기러니까…….”
“네, 주로 퇴역 군관들이 중점이 되어 있는 계파인데, 이 친구들의 사상과 목표는 세 계파 중에서 가장 심플합니다. 사실 사상이랄 것도 없는 게, 시장경제체제, 자본주의 그만두고 다시 이전의 주체사상으로 회귀하자 이거 하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