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220화 (220/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220화

유신.

샴페인을 터뜨리기도 전에 승리감에 도취됐는지, 혀가 꼬인 고려일보의 입에서 이 초유의 단어가 지면을 빌려 언급되었다.

그 순간, 7부능선을 넘어가는 듯했던 총선 판세는 막판 반전을 맞이했다.

“빌어먹을, 이 녀석들 선을 넘었군.”

“유신!?!? 우리 총서기께서 콩알탄이라도 맞아야 한다는 말이야? 이 남조선 아새끼들 왜 선을 넘는 기야! 밀어주면 분수를 알고 작작해야 하디 않간?”

“……이런 등신 같은……!!! 총선 3일 앞두고 역풍 불 수도 있는데 이런 건 데스크 선에서 걸렀어야지!! 요즘 데스크는 지방대 애들 뽑아?!?!?!?!”

사설이 실린 그 날 아침, 각자의 사무실로 배달된 고려일보 1면을 보고 정환, 장성택, 김 실장이 각각 내뱉은 말이었다.

참으로 경악스러운, 그리고 이전 고려일보의 북한에 대한 증오를 알았다면 더더욱 경악스러울 이런 제목의 아래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하는 사설이 실려 있었다.

-신神, 하늘은 가끔씩 국난을 맞은 어떤 민족이나 국가에게 백마 탄 초인을 보내준다. 선지자가 나타났을 때, 주변의 눈멀고 어리석은 자들이 뭉쳐 대항하듯이 온갖 고난과 음해와 모함에 시달리지만, 결국은 나라와 민족을 구해내는 역사의 위업을 이루어낸다. 우리 대한민국 역시 꽤 오래전 그러한 반인반신半人半神을 영접한 적이 있지 않은가? 비록 실제 설화 속 영웅처럼 우매한 대중과 배신한 부하의 흉탄兇彈에 맞아 쓰러지기는 했지만,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번에는 그 영웅이 다시 저 북방에 다시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하면, 필자의 선입견일까?

가히 정환 본인조차 낯이 심히 간지러워지는 문장으로 서문을 뗀 해당 사설은, 꽤 길게 ‘초인적인 지도 능력을 보여주는 지도자’, ‘맨손으로 시작하여 경제와 정치 모두 엄청난 성과를 낸, 시대에 선택받은 리더’ 등의 말을 주워섬겨 가며 정환을 추켜세워 주는 것에 열을 올렸다.

그러고는 아마 본론이었을 ‘이러한 하늘에 선택받은 지도자의 출현을 인지하지 못하는 우매한 자들’의 예시로 현 민주당과 그 의원들, 특히 노윤현 총재를 노골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설 중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이게 사설인지 무협지 도입부인지 모를 정도로 이현창 현 대통령과 김정환 총서기의 남북 고속철도 연결 결정을 ‘시대에 선택받은 두 영웅의 만남’이라 찬양하며 은근슬쩍 이현창을 ‘철인’ 김정환과 동격으로 올려놓기까지 했다.

이렇게 한참 이어진 사설은 마지막 문장에서 ‘3일 후 있을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올바른 지도자들을 진작에 알아보고 따르는 현자賢者가 될 것인지, 모함과 발목 잡기만 일삼는 모리배들과 한편에 서는 우민愚民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라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사실 고려일보 입장에서는 참으로 간만에 자신들의 솔직한(?) 속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사설이 아닐 수 없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들 입장에서는 김정환이라는 독재자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눈에 정환은 친미, 친시장주의적이며 지도자의 손발이 되어 우매한 대중들을 이끌 엘리트들인 당 간부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데다, 하는 일마다 모두 성공하는, 그야말로 고려일보(와 그들이 대표하는 성향을 가진 적지 않은 수의 국민들)의 이상향인 완성형 개발독재자 그 자체였다.

게다가 단 10년 만에 기울어지기 시작해 마침내 무너지기 직전에 이른 북한이라는 국가를 거의 혼자 힘으로 일으켜 세우다시피 하면서, 인민들의 진심 어린 숭앙까지 받았다.

그러니 이미 여러 독재자들에게 민주주의 국가의 주류 언론이라고 보기에는 위험한 수위의 ‘존경’을 은밀하게 표시해 왔던 고려일보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려일보 입장이고, 아직 절대다수의 진보 정치인과 과반수의 한국 국민들, 심지어 일부의 보수 정치인들에게까지도 유신과 군부 독재는 잊고 싶은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

물론 아직 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부르고 ‘한국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한국식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때였던 만큼, 고려일보의 사설에 대해 뭐가 문제냐고 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을 지나쳐 오면서 조금씩 정착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미 유신이라는 낱말을 용납할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했던 때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이 사설이 나간 지 채 12시간이 안 되어 포털 사이트 뉴스 서비스 1면과 정치 관련 미니 홈피, 그리고 (얼마 전 운영을 개시한) 블로그는 불이 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내용은 대부분 ‘고려일보 이 새끼들이 총선 거진 이겼다고 기고만장하다 보니 아주 그냥 1절만 하고 그칠 줄을 모른다’라는 중도 성향 유권자들의 성토였다.

* * *

-고려일보의 조선로동당 김정환 총서기에 대한 사설이 여당의 낙승으로 거의 결정되어 가는 듯했던 총선판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오늘 민주당 대변인은 공식 논평을 통하여 ‘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존재할 수 없는, 민주주의를 역행시키는 위험한 발언’이라고 비판하며 남은 기간 총선에서 지지자들을 총결집하는 궐기 대회를 일으킬 것을…….

삐익.

리모컨의 전원 버튼이 눌리며 회의실 벽에 걸려 한국 뉴스가 나오는 TV가 꺼졌다.

그리고 찾아온 침묵 속에서 한 사람이 읍소(泣訴)에 가깝게 호소하며 허리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총서기님……!!! 고려일보가 제가 있을 적에는 안 이랬는데, 어쩌다 이런 실기(失期)가 발생했는지……!!!”

“…….”

급히 서기실을 찾아 이마가 땅에 닿게 머리를 조아리는 김 실장을 보면서 정환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살짝 머리만 짚었다.

하지만 정환의 그런 묵묵부답이 ‘저놈 모가지를 날려? 붙여놔?’ 하는 고민으로 읽혀 김 실장은 등줄기에 식은땀만 뻘뻘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쨌거나 한국과는 다르게 이곳은 총서기의 아침 커피에 설탕을 너무 많이 탔다는 이유만으로 삼족이 재판 없이 총살될 수도 있는 곳 아닌가.

자신이 권력의 편에 서 있을 때는 그런 점이 그 어느 나라보다 편하고 행복할지 몰라도, 그 권력이 등을 돌리면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 나락으로 빠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까지 능글능글한 모습만 보여주었던 김 실장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장성택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냉랭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지만, 당연히 그걸 밖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지금 최고지도자가 오래 계획한 대사업에 예상치 못한 악재가 닥쳐 심기가 불편한 상황에서, 감히 누가 입 밖으로 실실 웃어재끼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짓을 하겠는가.

한편 정환은 ‘뽕을 너무 심하게 줘서 해롱거리는 건가’ 하고 중얼거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걸 보고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아니면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는 건가? 아니, 어쩌면 그냥 노윤현의 운이 여기까지가 아닐지도 모르겠군.’

사실 이번 선거는 누가 봐도 여당인 새나라당의 낙승을 예측할 수 있었다.

아무리 안보 보수 세력이 북한의 개혁개방을 기점으로 전환했다지만, 한국의 경제개발을 이끈 보수 세력은 한때의 휘청거림을 극복하고 여전한 대기업과 언론의 비호를 등에 업어 강력하기 그지없었고, 그 힘은 이현창의 대통령 취임으로 인해 정점에 달해 있었다.

반면 그들에 맞설 진보 야당은 이리저리 분열되어 있었고, 여기에 북조선까지 그들의 ‘코드에 맞게’ 나오면서 북남 철도 KTX 통합 및 시베리아 철도라는 로망까지 더해지자 야당 내에서도 ‘이번 선거는 버리는 패라고 생각하자’라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보수 정치권의 입이자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고려일보가, 방심에 로망이 지나쳐서 아예 현실에서 유체이탈해 버릴 줄을.

이미 총선까지는 이틀밖에 안 남은 상황이라 정환이 뭐를 더 어떻게 해주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정환은 손사래를 치면서 이번만큼은 어느 정도 운에 맡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줄 수밖에 없었다.

“됐네, 김 실장. 어차피 손쓰기는 늦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네. 떠먹여 주는 걸 토해내는 데에는 도리가 없지. 그나마 총선이 이틀밖에 안 남은 건 다행이군. 곧 남조선 야당 측에서 본격적으로 물고 늘어질 텐데, 우려먹을 시간이 얼마 없을 테니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로 총서기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그나마 노윤현 총재 개인은 남측 진보파 중에서 당리당략과 관계없이 북남철도 연결 및 북남의 융화에 긍정적인 이념을 가진 사람인 게 다행이군. 일단 총선에서 살아남고 의석수를 보전하면 민주당도 우리 제안을 좀 전향적으로 생각해 볼지도 모르지.”

그리고 정환의 이런 말마따나, 고작 이틀 남은 총선 기간 동안 실낱같은 기회를 잡은 민주계 야당들은 총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원래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살아날 수 있는 출구를 하나 틔워주면, 그 사람들은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출구로 질주하게 마련이다.

‘한국 보수의 완전체’라고 불리는 이현창의 임기 초반이라는 시기, 고려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들의 노골적인 여당 편애, 분열된 야당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던 범민주 – 진보 계열은 이번만큼은 모든 이합집산을 멈추고 총단결했다.

그리고 그러한 대연합의 선두에서 총지휘를 맡은 건 유민중의 뒤를 이어 그 자신이 군부 독재에 열심히 맞서 싸웠던 사람 중 하나였던 노윤현 총재였다.

-겉으로는 남북 고속철 연결에 반대하면서, 뒤로는 부산 지역 해운사에게서 정치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느니, 민족의 일대 사업을 방해하는 반민족주의자라느니, 이러한 진보 분열론, 그리고 근거 없는 모략은 이제 중단해 주십시오. 새나라당과 고려일보가 합창해서, 입을 맞추어서 저와 민주당을 헐뜯는 것을 방어하기도 참 힘이 듭니다.

총선을 하루 앞두고 소집된 궐기 대회에서 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당원과 국민들에게 털어놓은 말이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민주당뿐만 아니라 하마터면 비주류에서 시작해 정치 생명이 거의 끝날 뻔했던 노윤현이 벼랑 끝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계기라고 평하기도 했다.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심판해 주십시오!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모략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언론을 권력으로서 어떻게 흔들 생각도 없지만, 그러나!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입니다! 고려일보와 그 밖에 유신 헌법! 독재를 추종하는 보수 언론들은! 이번 총선에서! 손을 떼십시오!

결국, 이틀 후 치러진 17대 총선은 여당인 새나라당이 일자리 유출로 인한 지역구 표심 이탈, 당내 분열 등으로 휘청거리는 민주당을 압살할 것이라는 초기 예측과는 다르게, 양 당이 영호남이라는 서로의 전통적 지역기반을 지키며 새나라당 약우세로 기우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북한 지역으로의 지역 일자리 유출, 그리고 고속철 개통으로 인해 민주당에 대한 불신에 빠진 호남 지역 유권자들이 고려일보의 ‘유신’이라는 한마디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며 민주당 지지세로 돌아선 것이 결정적이었다.

고속철 개통의 직접적 수혜지역 중 하나이자 고학력 고임금 노동자들이 몰려 있어서 생산직 일자리 유출이라는 이슈와 거리가 멀었던 수도권도 ‘유신’이라는 말 한마디로 새나라당에 등을 돌렸다.

그나마 집토끼인 영남을 확고하게 굳히고, 수도권에서 일부나마 의석을 더 얻어낸 것이 이번 새나라당이 민주당 참패 대신에 얻어낸 성과였다.

어쨌거나 승리긴 승리였지만, 경제와 이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더 몰아붙이면 장차 민주당을 완전히 궤멸시킬 수도 있었을 기회를 놓친 보수 진영으로서는 너무나 뼈아픈 실책, 승리 같지 않은 승리였다.

물론, ‘어쨌거나 이기기는 이겼으니 약속을 지키시갔지요?’라는 말을 들은 이현창 대통령이 (뭐 씹은 표정으로) KTX 도입 사업 및 북남고속철 연결을 위한 7년 사업 초기 계획안을 승인하면서 정환과 북조선에게는 아무려나 상관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새나라당이 우세를 점한 덕에 우리가 남조선 호남권을 배려하는 몇 가지 양보를 하고 북남고속철 연결, 시베리아 철도 사업이라는 소기의 성과는 지켜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애초에 민주당 궤멸은 우리 목표가 아니었지 않나.”

“그건 그렇습네다만…… 저기…… 총서기 동지…….”

“응? 뭔가, 김 부장 동무?”

“저희 외무성에서는 진작에 궁금해하던 거인데…… 장기적으로 한반도 내 철도와 시베리아 철도를 연결한다 하시면…… 그 이야기는 늦든 빠르든 로씨야하고도 합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 아니갔습네까?”

“그렇지.”

“그런데 저희 외무성에서는 그 점에 대해 아무런 교시를 받지 못해서……. 아시겠지만 지금 로씨야 최고지도자가 보통내기가 아닌 거이는 총서기 동지도 잘 아시…….”

“잘 알고말고. 하지만 그 점은 걱정 말게. 이미 내가 생각해 놓은 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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