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04화
73장. 조선인민군 종합화력시범
“큭, 뭐가 월드컵이냐! 뭐가 공화국 력사에 남을 16강 진출의 위업이야! 진짜로 뭐가 중요한 지도 모르는 놈들이 설치기는…….”
“여기고 저기고 다 월드컵 이야기 뿐이니 파업의 파 자도 못 꺼내갔다. 심지어는 화물차 운전수들 중에서도 월드컵 이야기를 하면서 사측 협상에 응해서 돈 받고 째는 놈들이 있다니까! 그렇게 근시안적이고 타성에 젖어 사니 언제까지나 그 모양이지, 이래서 못 배운 놈들이란!”
한창 월드컵의 열기로 공화국 전체가 날 새는 줄 모를 무렵, 일군의 사람들이 어딘가에 모여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대부분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20대의 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의 불만이란 슬슬 공화국에서 나돌기 시작한 평면 LCD TV로 중계되는 월드컵에서 누가 잘하더라 못하더라 하는 일이 아니라 누가 들으면 그 즉시 경악하거나 하얗게 질려버렸을 종류의 불만이었다.
바로 조선로동당과 현 북조선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게 다 당에 가득 들어찬 욕심 많은 당 간부 놈들, 그놈들과 붙어먹는 외세 자본가들의 간악한 수작이라고! 콤퓨타 게임이니 스포츠니 뭐니로 인민의 눈을 현실에서 돌리게 하려는 거야!”
“거기다 얼마 전에는 남조선 자본가 정문영이 골로 갔으니 장례식한다고 애도 기간 선포까지 하지 않았나! 공화국 인민들의 피를 빨아 제놈 배를 불린 남조선 부르주아지를 애도한다니, 대체 당에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기야? 이거이 조선로동당이냐? 조선 자본가 당이디!”
“쉿! 너거들 입조심들 해! 요즘은 반부패수사국 말고도 우리 같은 반골들을 잡아 각을 뜨는 그루빠가 있다고 들었디 않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주둥아리들 다물라!”
그날 하루 종일 그들은 허공에 삿대질을 하거나 맥주, 마오타이주를 들이키며 시국과 정세에 대한 열변을 토했지만, 결국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이라고는 쓸쓸히 흩어지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직 그들 자신조차도 구체적으로 묘사는 할 수 없었지만) 어떠한 변화, 나아가 체제 변혁의 도화선이 될 법했던 화물차 시위는 이미 월드컵 열기에 묻혀버렸고, 그들과 함께 투쟁했던 운전수들은 사(社)측의 유혹에 넘어가 얼마 안 되는 임금 인상안에 만족하고 해산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 속 불만과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아마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다시 새로운 구호와 새로운 조직, 하지만 비슷한 신념으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결코 이번처럼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 * *
2002년 남북 공동 월드컵이 끝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맞은 2003년은 말하자면 변화의 해였다.
사실 90년대의 역사적인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체제 전환 이래로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옛 공화국의 자취는 점점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매해가 변화의 해였지만, 2003년은 특기할만한 변화들이, 정확히는 총서기 정환에게 많이 일어났다.
그런 변화 중 당장 체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역시 맛있군. 이거. 참 신기하단 말이야, 혹시 이 조선 민족은 닭을 튀기는데 유전학적으로 타고난 뭔가가 있는 건가?”
사실상 북조선의 정치 그리고 나아가 경제까지 한 손에 틀어쥐고 운영하다시피 하는 정환의 하루는 당연히 눈코 뜰 새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식사도 이동 중에 대강 때우는 경우가 많았고.
평상시에는 서기실 전담 요리사가 맛과 영양을 모두 고려해 곽밥(도시락)을 싸주지만, 가끔 맥도날드 같은 ‘특식’을 먹을 때가 있었는데, 오늘의 특식이란 바로 지나가는 길에 수행원을 시켜 사 온 프라이드 치킨이었다.
“……그냥 KFC를 드시면 되지 않갔습네까? 솔직히 저는 아직 뭐가 다른지 잘…….”
“쯧쯧, 아직 유 소좌는 치킨의 참맛을 모르는군. 장담하는데 앞으로 15년만 지나면 공화국 아니, 남북 인민들의 최고 존엄은 바로 이 치킨이 될걸?”
관용차 뒷좌석에서 닭기름을 손가락에 묻힌 채로 서류를 보는 정환의 농담에 운전석에 앉은 유혜림은 끝까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월드컵 이후 북조선에 나타난 변화 중 하나란 지금 정환이 먹고 있는 것과 같은 배달식 프라이드 치킨이었는데, 동시기 한국에서 발생했던 것과 거의 데칼코마니 수준으로 똑같은 사회현상이었다.
이미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사업형태 자체는 북조선 내에도 흔했고.
이미 치킨 선도국(?)의 길을 한발 앞서 걷고 있던 한국 이민자들이 외환위기 이후 북조선에 와서 시작했던 사업의 대다수는 여타 이민자들과 비슷하게 요식업이었다.
그리고 월드컵이 열리자, 집에서 월드컵 중계를 틀어놓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맥주 한잔을 걸치면서 남이 배달해준 치킨을 뜯는 것 이상의 여가가 없다는 것에는 곧 남북한 모두가 대통합을 이루었다.
“이상하게 KFC하고는 뭔가 다르단 말이지. 비슷한데, 뭔가 틀려. 거 참.”
이전에도 (KFC처럼) 북조선에서 프라이드 치킨을 먹는 방법이 없는 건 물론 아니었지만, 오토바이를 탄 배달원이 주문을 받아 닭을 튀겨 각 가구에 배달해주는 사업이 우후죽순으로 생긴 계기는 단연 월드컵이었다.
이미 월드컵이 끝난 지 6개월 가까이 흘러 2003년을 맞은 지금, 공화국 내에서는 치킨 프랜차이즈 산업이 때아닌 붐을 이루고 있었다.
“치킨만 배워왔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근데 그건 또 아니니 골치가 아프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정환은 냅킨으로 손을 대강 닦고 차 안에 준비되어 있던 고려일보를 펴들었다.
1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이현창, 국민들은 다시 경제를 선택하다.
역대 찾아볼 수 없었던 윈윈(Win ? Win) 선거…… 이현창의 맞수 노윤현, 비록 졌지만, 무명 정치인에서 야권의 기대주로 급부상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노윤현의 선전(善戰)…… 거대 여당의 에이스 이현창과 대선에서 대등하게 싸우다!
신임 이 대통령 취임 일성, ‘경제와 국방이라는 보수적 가치를 살리되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도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 커지는 진보 세력의 요구와 권위주의자라는 비판을 의식한 듯.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결과 아니셨습니까? 노윤현인가 하는 후보가 이렇게 선전할 줄은 의외지만…….”
“……예상 못 했어. 북남 대타협 이후 남조선 보수 세력이 재편성해서 칼을 갈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 하지만 이건…….”
정환의 말대로였다.
북남 대타협과 그로 인해 이루어진 기업 합병, 차관에 대해서 남측의 평가는 크게 두 개로 나뉘었다.
첫째는 북측의 차관과 경제지원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며 이제 남북 갈등의 세월을 청산하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향해 나아가자는 의견이었다.
이 타협으로 인해 남북은 이제 시장경제체제라는 공동의 가치 아래 뭉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최종적 목표인 통일 뿐이니, 미국과 일본 같은 쓸데없는 외세의 간섭을 뿌리치고 본격적으로 통일을 위한 구상에 들어가자. 지금 당장이야 힘들겠지만, 남북 지도자의 합의 아래 통일 제헌 의회를 구성하고 10여 년에 걸쳐 하나씩 차근차근 법과 제도와 체제를 단일화해가면 되지 않겠나?
주로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된 주장이었고 경제 위기로 인한 산발적인 북한 이민과 월드컵 등으로 인하여 대중들에게도 상당히 설득력을 얻은 이야기였다.
이 통일에 관한 논의는 지난 3년간 한국의 모든 대학교와 회의실과 술자리와 밥상머리를 뜨겁게 달군 주제였지만 머지않아 반발이 나왔고, 현재는 두 논리가 일종의 정치적 길항 상태에 있었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했고 이제는 군사적 도발, 그러니까 적화통일 같은 허황된 목표를 실질적으로 포기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쪽에서 통일 이야기를 먼저 들고나온 적이 있는가? 만약 북한 지도자인 김정환이 정말로 통일을 바란다면 개혁개방 후 10년간 대남 무시 전략으로 일관하다가 남에게 흡수통일 당하지 않을 국가적 체급을 키운 후에야 대남 외교를 재개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게다가 북한은 지금 아프간에서 무자비한 소탕 작전을 벌이고 있으며 한국 전쟁 당시 통일을 가로막은 원흉이나 다름없던 중국과 맺은 조중동맹을 아직도 파기하지 않고 있다. 이 모든 논쟁거리를 둘째치고서라도, 당장 지금 북에 이민 간 한국인들이 보내는 증언을 좀 들어봐라, 신문 관영, 방송 관영, 대부분 대기업은 국영펀드에서 지분 보유, 지도자나 체제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 파산할 정도의 무거운 벌금 및 징역. 당신들은 이러한 체제가 과연 대한민국과 융합될 수 있는 체제라고 보는가?
그리고 이번 이현창의 대통령 당선은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 두 번째 논리의 지지자들이 1차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방증이었다.
이렇게 당선된 이현창, 이 대통령은 자신을 뽑아준 보수 유권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듯 바로 구미에 맞는 정책을 천명했다.
-국민 여러분! 강한 나라는 강한 국방에서 나옵니다! 이제 대한민국 국군은 2020년까지 육군에 편중된 기형적인 국방력이 아닌, 뛰어난 공군과 해군을 갖춘 기술군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를 위해 저와 새로운 정부, 국민의 정부에 이은 ‘원칙 정부’는 ‘국방개혁2017’이라는 계획을 발족, 국가의 주권을 지킬 수 있는 체계적이고 선진적인 국방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남이 갑작스레 이러한 국방력 증진을 내건 것은…… 여전히 우리 공화국을 가상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의미일까요?”
“반반 정도? 육군 중심에서 탈피하겠다고 한 걸 보니 우리와의 전면전은 이제 거의 시야에 넣고 있지 않은 거 같지만…… 교리나 주적 개념을 떠나서 공화국을 노리고 국방력 강화를 천명한 건 틀림없겠지. 어쨌거나 국가라는 공동체가 그 존속을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건 이념도 체제도 아니고 결국 무력, 군사력이니까.”
이현창과 새롭게 출범한 ‘원칙 정부’가 취임 초기부터 들고나온 ‘국방개혁 2017’은 원 역사에서 정환이 알고 있는 (다른 대통령의) ‘국방개혁 2020’보다 시기적으로 빨랐지만, 대부분 세부안건은 같았는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부정적인 점에서도 동일했다.
바로 정환의 북조선과 화합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대도 아닌 기묘한 동거를 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적인 상황에서인지는 몰라도, 명확한 가상의 적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외환위기 당시 보류 내지는 취소 위기까지 몰렸던 국방력 강화 계획을 대부분 되살렸지만 계혁안 어디를 훑어봐도 ‘어떤 상황, 어떤 적에도 대응하는 강한 국방력을 기른다.’라는 화날 정도로 두루뭉술한 목표만이 적혀있었지 실제 어느 나라와 가장 전쟁할 확률이 높은지는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정작 통일 논의는 거의 진척되고 있지 않아도 원 역사보다는 남북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교류를 하는 현 상황에서, 지지기반의 구미를 맞춰주면서 북조선과의 관계도 적당히 관리하겠다는 이현창 정부의 노림수가 훤히 보였다.
“하여간 단수가 제법 높으시군. 뭐 이것도 내가 남 욕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야.”
정환은 신문을 접으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당장 지금 공무로 바쁜 그가 향하는 곳도 그런 북조선의 국방개혁과 밀접하게 연관된 곳 아닌가.
이윽고 차가 멈췄다.
“아, 도착했군.”
“네, 이미 백 상장…… 아니, 차수 동지는 도착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평양을 벗어나 꽤 오래 교외로 달려가던 정환의 관용차는 이내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고, 이내 이런 경고문이 붙은 외곽 철조망을 지나쳤다.
경고. 해당 시설은 허가받은 공민 외에는 출입과 접근 및 사진 촬영이 엄금되며, 이를 위반할 시 사형 혹은 25년 이상의 교화소 형이 구형될 것임.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및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철조망을 지나자 위병소가 나왔고, 위병소가 지키는 정문에는 ‘김정환 국방과학연구원 제2분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곧 정환의 차량을 먼저 선도하던 경호 차량이 위병소에 극비방문임을 알리자 급하게 철문이 열렸다.
차에서 내린 정환은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걸어 나오는 반가운 얼굴을 보며 한 마디 던졌다.
“꽤 오랜만이군. 안토노프 동지. 고등항공연에서 항공기에만 매달리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지상무기 실험장에는 어쩐 일인가?”
“좀 안 봤다고 그새 잊었나? 나도 직승기(헬리콥터) 설계할 때 항공역학 자문으로 들어왔다고. 자, 그리고 이 몸의 천재성이 큰 역할을 한 덕에, 진전이 컸고. 하여간 서기장 동지. 뭐부터 보고 싶으신지? 헬기? 자주포? 아니면 차기 주력 전차?”
“주력 전차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