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202화
“아, 방금 홍영조 선수가 중간방어수(미드필더) 김명원 선수에게서 긴 연락(롱패스)를 받아 골 문전으로 빼몰고 있습네다! 상대 팀 방어수(수비수)들의 견제를 뿌리치고 그대로 차 넣습…… 골인! 골 인입네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종합팀이 H조 1위 카메룬 국가종합팀을 2:1로 꺾고 조 1위로 앞서 나갑네다!”
그리고 이틀 후, (석연치 않은 화재로 급하게 변경된) 라선 국제종합스포츠 인민 경기장에서는, 북조선 국가대표팀이 카메룬 대표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정환의 예상대로 카메룬 대표팀은 영상 16도를 기록하는 역대급 추운(?) 날씨에 경기 전부터 맥을 못 췄다.
경기장에 들어설 때부터 추워 보이는 듯 팔다리를 쓱쓱 비비던 카메룬 선수들은 이탈리아를 격파한 실력은 어디로 갔는지 줄곧 경기의 주도권을 북조선 선수들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검은 돌풍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게 중간에 한 번 역습을 성공시켜 선제골을 만회, 1:1 상황으로 만드는 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종료 직전 북조선 팀의 골든 골이 터지면서 아프리카의 검은 돌풍은 라선의 찬 바람에 꺾여 잦아들고 말았다.
“북괴 새끼들 대가리 잘 굴리네. 이런 게 가능했으면 우리 축협도 어디 강원도 철원 같은 데에 경기장 하나 빨리 지어서…….”
“야, 꿈 깨라, 꿈 깨 그리고 어차피 걔네들도 하 무소용인 게 다음 대전 상대가 독일 전차군단 애들이다! 독일! 그리고 어찌어찌 이긴다 쳐도 그다음 대전 상대가 무려 어디인 줄 알아?”
“어디길래?”
“이태리! 이탈리아 팀! 걔네들은 북한한테 1966년에 한 번 크게 당한 적이 있어서 칼 갈고 있을 텐데, 카메룬 애들처럼 허무하게 당하겠냐? 우리는 우리 경기나 신경 쓰자고. 미국은 어찌 이겼으니 남은 건 포르투갈인데…… 젠장, 그나저나 이러다가 남북이 16강에서 만나면 진짜로 육이오 한 번 더 터지는 거 아냐?”
북조선과 카메룬과의 대전결과는 당연히 격분한 카메룬인들 그리고 한국까지 포함해서 수많은 무성한 뒷말이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대강 수습이 되었다.
일단 심판 매수나 고의적인 오심 같은 것이면 모를까, 기후 차이는 홈 어드밴티지의 영역이라 그 자체로는 부정의 증거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무도 북조선이 얼마 후에 있을 독일과의 경기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북조선은 3일 후 평양에서 열린 독일과의 2차전에서 3:1로 참패했다.
“역시, 아무리 홈 어드밴티지라는 게 있어도 근본적인 실력 차라는 건 극복하기 힘들군.”
“하지만 지금까지 해낸 것만 보면 예상 외의 성과입니다. 만약 천운이 따라준다면 남북 동시 16강 진출은 무리가 아닐지도…….”
“하지만 최소 2승은 따내야 안전하게 16강을 갈 수 있네. 게다가 지금 이탈리아 팀은 과거의 공화국과의 악연에 더해서 반드시 이기겠다는 독기로 가득 차 있는데…… 보나 마나 아귀처럼 덤벼들 텐데 말이야.”
“저야 오직 선수들이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될 뿐입니다.”
“……그건 좀 의외로군. 정 회장 동무. 평소 정 동무 성정이라면 상대방 다리를 붙잡고 늘어져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카메룬과의 경기로부터 다시 3일 후, 정환은 다시 라선에서 개최될 북조선 vs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경기에 앞서 직접 경기장을 둘러보다가 그렇게 말했다.
그의 옆에는 북조선 축구 위원회의 위원장 그리고 근대 그룹의 명예 회장인 정문영이 노구(老軀)를 힘겹게 이끌며 정환과 함께 운동장 잔디밭을 걷고 있었다.
고향 땅에 돌아와 남북이 함께 월드컵을 개최한다는 감동 덕인지 원래 역사에서의 수명보다 더 오래 살고 있는 노인이었지만, 젊은 시절 ‘나는 120살까지는 살 것’이라는 패기는 어디 가고 근대그룹의 창업주, 왕회장 정문영은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딱히 무슨 병마라기보다는, 이제 천수를 다해가고 있는 사람이 마지막 염원이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 목숨줄을 잡고 있다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허허…… 이 정문영이도 나이가 들어서 성격이 유해진 걸 수 있겠지만, 이 공화국의 프로 축구 위원회 위원장으로서도 이 정도면 남북 모두 이번 월드컵에서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제는 남에서 무려 포르투갈을 이겼다고 하는데, 이로써 한국은 16강 진출이 확정된 겁니다. 참으로 우리 민족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나도 그 소식은 들었네. 이미 서울은 축제 분위기라더군.”
“물론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특히 이 공화국에서의 프로 축구 아니, 프로 스포츠 전반의 역사는 많이 짧습니다. 남조선, 한국보다도 짧지요. 그게 바로 제가 이번 월드컵에서 공화국 선수들이 무리하다가 몸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아직 대부분 앞길이 창창한 선수들이고, 국가종합팀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이제 시장경제체제가 된 이 공화국에서 국내 클럽의 기둥이 되어 활약하고 나중에는 코치와 감독으로서 다음 월드컵에 진출할 후배들의 뒷받침이 되어줘야 하는데…….”
정환은 이제 걸음을 멈추고 옆의 정문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스포츠 분야에만 한정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님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축구의 역사와 경력이 긴 나라들을 대상으로 대단한 선전이지요. 그런 나라들의 실력과 역량은 결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 점은 경제나 스포츠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오랜 투자와 관심의 결과인데 그걸 이 한반도 사람들은, 남과 북 양쪽 모두 참으로 단기간에 따라잡고 있는 겁니다.”
“스포츠라면 내 시대 이전에도 꽤 많은 투자를 했네. 사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로씨야를 포함해서 스포츠에 결코, 적지 않은 투자를 했지. 체제 선전의 유용한 도구니까.”
“하지만 개개인이 더 잘하고자 하는 열망, 이기고 싶어 하는 의지, 나아가 좁은 국내에 갇혀있는 게 아니라 해외 클럽에도 진출하여 세계를 무대로 뛰고 싶은 의지가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법입니다. 당과 위원회에서 아무리 많은 지원을 해줘도 그들이야말로 가장 이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랬지만 인민 체육 영웅 훈장보다 부와 명예가 더 큰 역할을 했을 겁니다. 특히나 요즘의 공화국에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
“앞으로 10년 후에는 어찌 될 지 모르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이 월드컵에 참가한 선배들이 뒤에 따라올 다음 세대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며 언젠가는 남북 양쪽 모두 본선 진출 정도가 최종목표가 아닌 날이 올 겁니다. 세대에 세대를 거듭해서…… 그게 역사와 국가의 발전인 것 같습니다. 앞 세대들의 본분이란 후세대들의 본보기이자 밑 거름이 되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쿨룩쿨룩…….”
오랜만에 길게 말을 하느라 기력이 쇠진했는지 기침을 쿨럭거리는 정문영을 앞에 두고 정환은 잠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살며시 노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덤덤히 이야기했다.
“그렇지. 아무리 경기장을 옮기고 수를 써도 결국에 최후에 의지할 것은 진정한 실력 뿐이니까 말이야. 이제는 나도 우리 공화국 선수들의 역량과 열망을 믿어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군.”
정환도 이제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꼼수든 편법이든 아주 질 경기를 뒤집어 이기게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렇게 언제까지나 홈 어드밴티지만에만 의존한다면, 장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스포츠 계는 영영 안방 챔피언, 국가와 당의 선전용 나팔수 신세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그건 축구나 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문영은 축구라는 방편으로 이제는 경제 분야에서 당의 통제를 일정 부분 풀어줘야 함을, 북조선의 경제와 국력이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이제는 정환과 당의 원맨쇼가 아니라.
결국, 인민들의 자유의지와 부에 대한 욕망이 가장 중요하다는 조언을 완곡하게 전한 셈이었다.
‘기업인들이 대통령 찾아와서 규제 풀어달라고 하는 하소연도 저 나이 될 때까지 하면 예술의 경지에 오르는군. 하여간 늙은 생강이 맵다고, 저 나이가 돼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야. 하기야 개인적으로도 스포츠를 많이 좋아했으니 지난번 카메룬 전 때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테지.’
그래도 대놓고 ‘이건 부정행위 아니냐’라고 최고지도자 정환에게 불만을 표할 정도로 요령이 없거나 이번 월드컵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도 않고, 그러니 이런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물론 정환은 다가올 이탈리아 전도 카메룬 때처럼 아주 조치를 안 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 조치라는 게 일종의 양날의 검인지라 이번만큼은 정환도 결과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잘못하면 16강 문턱에서 떨어져 한껏 들뜬 인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길 수도 있었지만, 정환은 이번만큼은 정문영의 조언을 받아들여 공작이 아니라 북조선 축구 대표팀의 실력과 무엇보다 이기고자 하는 투지를 믿어보기로 했다.
“정 회장 동지의 조언은 잘 들었소. 앞으로 가슴에 새겨놓지.”
“이 다 죽어가는 노인네의 지나가는 말을 그렇게 들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환의 긍정에 정문영이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바로 그날, 다가올 강적 이탈리아와의 결전에 대한 팽팽한 긴장감에 평양 TV와 조선중앙방송에서 선수들의 슈팅 다리 각도까지 분석하고 있을 때, 북조선 축구 국가대표팀에 낭보가 전해졌다.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북조선을 격파한 독일과의 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2:2로 무승부를 거둬 1패 1무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구원(舊怨)에 16강 진출권까지 더해져서 이탈리아나 북조선이나 어느 쪽도 결코 물러날 수 없는, 피 튀기는 한판 승부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흘 후, 열광하는 각국의 관중들로 꽉꽉 들어찬 라선의 축구 경기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이탈리아 대표팀 간 경기 아니, 혈투가 시작되었다.
* * *
“저 발모가지를 채 썰어 버릴 간나 새끼! 백 태클! 심판! 저 간나 새끼 방금 뒤에서 태클 하지 않았네! 경고표(옐로카드) 주지 않고 뭐 하는 거이야!”
문화어로 태클은 ‘미끄러져 빼앗기’라는 표현이었지만, 지난 10년간 서서히 영어에서 유래한 외래어가 자리 잡기 시작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 심판에게 몰려가 격렬하게 항의하는 북조선 선수들의 입에는 ‘미끄러져 어쩌구’ 보다 태클이라는 짧은 단어가 훨씬 착착 휘감겼다.
게다가 그걸 듣고 있었을 북조선 측 관중이나 지도원(코치)들도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경고표! 아니, 레드 카드 주라우! 지금 정 동무 누워서 신음하고 있지 않네! 저 쳐죽일 코쟁이딸리아 새끼들!”
라선에서 열린 이탈리아와의 경기는 그야말로 난타전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양쪽 모두 수비는 거의 내버린 채 공격에만 올인한 데다 서로 필사적인 심정이었고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의 악몽을 재현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여주듯 초장부터 몸과 몸이 부딪치는 과격한 플레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카메룬만큼은 아니겠지만 이탈리아도 온난 기후 국가인지라 라선의 차가운 바람은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적지 않은 패널티였지만, 이탈리아의 말 그대로 육탄 플레이가 빛을 발해 양 팀은 후반 10분 1:1의 팽팽한 상황을 이어가고 있었다.
방금 전에도 이탈리아 골 문전으로 달려가던 북조선 공격수에게 이탈리아 센터백 파올로 말디니(Paolo Maldini)의 백태클이 작렬하면서 북조선 선수는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거이 백태클이지 뭐이가 백태클이야? 당장 레드카드 주라우!”
“Vai a cagare!! Vaffanculo(엿 먹어)!”
경기의 흥분과 사상 처음 16강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긴장감까지 겹친 북조선 선수들 그리고 북조선인들이 헐리우드 액션을 하는 거라고 항의하는 이탈리아 선수들이 심판을 가운데 두고 팽팽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마침내 주심이 결정을 내렸다.
지금 잔디밭에서 고함을 지르는 선수들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그 심판은 북조선 당국에서 FIFA와 ‘조율 과정’을 거쳐 원래 예정되어 있던 다른 경기에서 빼 와서 배치된 심판이었다.
똑같은 상황을 두 번 바랄 수는 없지만, 혹시나 해서 정환이 준비한 공작이었는데, 그 심판의 이름은 비론 모레노(Byron Moreno)였다.
그리고 선수들뿐만 아니라 라선 경기장에 모인 3만 2천 모든 관중의 눈이 모레노 주심의 앞주머니에서 나온 카드에 집중되었다.
“레드 카드! 파올로 말디니 선수 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