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192화
여기까지 판단이 서자 중국은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일단은) 제3자로서의, 하지만 명백하게 한국을 비난하는 내용의 공식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우리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는 근래 조선반도에서 벌어지는 긴장의 원인을 제공하는 한국의 행동에 우려를 표한다.
이렇게 오래간만에 북중관계에 훈풍이 불며 한국 전쟁의 사회주의 진영이 서로 밀착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 서해교전 사태를 매일 1면 기사로 보도하던 한국 신문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여론의 선두에는 역시 근래 들어 다시 힘을 되찾기 시작한 고려일보가 있었다.
-아프간에서 다시 뭉치게 될 중공군과 인민군……! 다시 점화되는 北의 위협과 해상 영토 한계선 문제. 단 한 치의 영토라도 뺏기지 않을지 위기에 봉착한 유민중 정부!
슬슬 불이 붙기 시작하는 양측 여론 속에, 양측 입장 조율을 위해 서울에서 열린 회의는 서로의 입장 차만 확인한 채로 끝났다.
아니, 오히려 묻어두었던 문제만 더더욱 수면 위로 올라오게 일조하기까지 한 느낌이었다.
“확인 결과 우리 함정은 분명히 북방한계선을 넘은 적이 없습니다. 애초에 그쪽 바다는 북측의 영유권 주장이 미치지 않는 장소니만큼 당신들의 주장은 분명한 억지…….”
“그 소위 북방한계선이야 그쪽에서 련합국 군(유엔군) 사령부랑 일방적으로 정한 거잖소? 우리 공화국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해당 분계선을 린정하지 않으며 더 이남에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해왔소! 당장 국제법상으로만 따져보면 ‘영해 기선 등거리 원칙’을 준수하는 쪽은 우리 쪽 아니오?”
“그, 그거야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동안 아무 말 안 하다가 대체 왜 인제 와서 긁어 부스럼을…….”
“에이! 그건 알 바 아니고! 만약 우리 주장을 린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관련국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 국제사법재판소에 이 사건을 위탁하도록 하겠소. 진짜 불리한 쪽이 어느 쪽인지를 모르시는군.”
당국자들 간 거친 말이 오가고 양국 언론사에 양국 정부 입장을 옹호하는 사설이 올라왔다.
그리고 좀처럼 협의가 진전되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마치 남측에 협박을 가하듯 다음과 같은 성명을 다시 발표했다.
우리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이번 아프간에서 벌어지는 중국 사회주의 동지들의 투쟁을 돕기 위한 파병군의 규모를 2천 명에서 3천 명으로 증파하기로 했음을 이 성명을 통하여 발표하는 바이다.
“총서기 동지, 저는 솔직히 동지께서 갑자기 왜 이 문제를 들고나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북방한계선이 뭐길래 이 난리입네까? 동지께서 그 남측 대통령 유민중 선생이라는 동지와 무슨 밀담을 나누셨길래…….”
“유 소좌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군. 좀 의외인데?”
호위사령부 출신 엘리트인 유혜림이 나름 남북 간 뜨거운 감자인 북방한계선 문제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자 정환은 여전히 시선을 TV에 고정시킨 채로 웃음을 보였다.
TV에서는 정환을 본뜬 인형을 화형시키는 한국 과격 우파 성향 시민단체의 시위를 생중계해주고 있었다.
정환의 말에는 일말의 문책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유혜림은 뭔가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간만에 얼굴을 살짝 물들이며 뒷말을 흐렸다.
“그, 그게…… 저는 육군이고 그쪽은 인민군 해군 관할이라…… 게다가 동지도 알다시피 저는 프룬제로 유학을 다녀오느라 공화국 내 사정에 크게 밝지 못하는 부분도 있어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북남 양쪽 모두가 대강 좋은 게 좋은 거 식으로 쉬쉬하던 문제를 나와 유민중이 동시에 들고나온 걸세. 여기 직접 보여주지.”
정환은 자신의 집무실에 설치되어 있던 펜티엄 컴퓨터를 켜 한반도 지도에서 클로즈업 된 서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북 양측이 맞닿은 서해는 점선, 실선, 붉은색, 푸른색 등 다종다양하게 구별된 수평선으로 어지러이 나뉘어 있었다.
정환은 그중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North Limit Line’이라고 된 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선이 조국해방전쟁 직후 련합국 군 사령부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소위 북방한계선, 그리고 여기 남조선 연평도 아래쪽이 이번에 우리 인민군 총참모부에서 새로 제시한 경비계선. 이번에 남측 함정이 활동한 것은 이 지점이지.”
정환이 북방한계선과 경비계선 사이에 위치한 바다 위 어느 지점을 가리키자 유혜림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입을 뗐다.
“……그러니까…… 확실히 우리 총참모부에서 주장한 분계선보다 위쪽에 있기는 하군요. 하지만 남측이 이걸 영해 침범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면 결국 다시 원점 아닙니까.”
“그건 아니야. 왜냐하면 국제법적으로 따지면 분명히 우리 공화국 쪽이 우위에 있거든. 보통은 영해기선에서 12해리를 적용하는데 저쪽은 조국해방전쟁 이래 이제까지 그걸 무시해 왔으니까.”
“……그럼 대체 왜 이제까지 공화국에서 그걸 항의하지 않았는지…….”
“했네. 우리 항의를 사실로 납득시킬 힘이 없어서 먹히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 저쪽에서도 자기들이 국제법의 상례에서 어긋난 주장을 해오고 있다는 걸 알기에 쓸데없이 책잡힐 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 북방한계선 밑에 자체적으로 선을 그어 그 위쪽에서는 군사 활동을 하지 않고 있고. 그러니까…… 이번 건 이전에는 말이야.”
“……아리송하군요.”
“원래 국제법이라는 게 그런 법이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힘의 논리에 따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같은 허점투성이인 거 같아도, 또 완전히 무시하기에는 충분히 국제적 여론을 불러올 명분 역할을 해주고 있단 말이지. 아마 우리 공화국의 친애하는 혈맹, 중국도 그 점에는 동의할걸?”
알쏭달쏭한 정환의 말에 유혜림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정환은 다시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유민중 대통령에게 요청한 건 바로 이 남조선군에서 암묵적으로 지키는 작전 활동 한계선 위쪽에서 작전을 하라는 거였네. 일단 그렇게 해두면 남조선도 할 말이 있거든. 어쨌거나 NLL 아래쪽은 명목상 본인들과…… 이 연극의 다음 등장 국가가 합의한 영해니까 말이야.”
“다음 등장 국가? 그리고 할 말이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입네까?”
“당연히 이 북방한계선을 정해놓은 나라, 즉 우리 공화국에서 언급한 ‘주변 이성적인 우방국’을 말하는 거지. 우리 공화국에서 정말로 이 문제를 고치려고 나선다면, 남조선뿐만 아니라 그곳과도 협의해야 한다는 이야기일세.”
“하지만 그래도 저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도대체 동지께서 무엇을 목표로 하시기에 이렇게 번거로운 갈등을 연출하시고…….”
처음에 유혜림은 잠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이걸 정해놓은 곳은 련합국 군 사령부, 유엔군 사령부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유엔군 사령부를 움직이는 건…….”
“그래, 사실상 미국이지. 아마 그쪽도 귀를 기울이면서 슬슬 유엔군 사령관 명함을 가지고 달려와 개입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 거야. 나와 유민중이 동시에 핑곗거리를 줬으니 유민중이 중재 요청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겠지.”
“……그럼 결론이 어떻게 날까요? 유엔사 당시에는 우리 공화국이 적국이었지만 지금은 남조선과 우리 모두 미국의 우방국이니…….”
골똘하게 생각하는 유혜림에게 정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 소좌가 지금 생각하는 그 생각이 맞아. 초등학교에서 선생들이 싸우는 동무들 화해시킬 때와 똑같이 하겠지.”
“초등학교에서 싸우는 동무들 화해시킬 때라면…… 그러니까…….”
여기까지 정신없이 정환의 설명을 듣던 유혜림은 뭔가 어린 시절의 억울한 추억이 떠오른 듯 눈썹을 위로 비쭉 들어 올렸다.
어린아이들 싸움에 끼어들어 공정한 판사 역할을 하기 귀찮은 공립학교 선생들에게 가장 편한 방법은 남이나 북이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너희 둘, 모두 나빴으니까 선생님 보는 앞에서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화해해! 알겠지?
“사실 남조선과 일본 쪽바리들이 싸울 때도 항상 이런 식으로 해왔으니 별로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네. 그럼 남조선과 우리는 그 중재를 받아들여 서로 한 발자국씩 양보하면 되는 걸세. 남조선은 NLL에 대한 기존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과도수역(過渡水域)으로 지정하기로 하고…….”
이 부분에서 정환은 이게 핵심이라는 듯 눈을 빛내며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우리는 그에 대한 쌍무(雙務)적 대응으로 최근의 적대적 행동, 조국해방전쟁 혈맹인 중국의 아프간 원정을 도와줄 파병을 철회하기로. 이 쌍방 합의에 중재자인 미국을 보증 세우면 당분간 중동 패권에 미국이 최대한 관심 꺼주기를 바라는 중국도 뭐라 말을 못 할 테고, 조중 동맹을 지키려는 자세는 충분히 취했으니 생색도 내고. 꿩 먹고 알 먹고 아닌가? 하하.”
“……동지께서 처음부터 노리셨던 게 이거였군요. 이 서로 다른 두 문제를 하나로 묶어 처리하는 것. 역시 동지의 혁명적 전략은 제가 따라갈 수 없군요.”
그제야 완전히 이해가 갔다는 듯 유혜림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정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남측의 도발만을 연출할 거였으면 그냥 육상에서 해도 되지만, 유 소좌도 알다시피 이제는 비무장지대도 없어지고 오가는 사람도 많고 해서 자칫하다가는 남북교류를 파탄 낼 위험이 있거든. 육상 교전은 해상 교전보다 사상자가 나올 위험성도 더 크고 말이야. NLL처럼 남과 북 모두 깨끗하게 종결짓지 못한 회색 지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나 할까.”
“유민중 대통령 선생이 정말 총서기 동지의 이런 혁명적 전략에 동의한 건가요? 일단 남조선 쪽은 그냥 지금 NLL을 고수해도 손해가 없지 않습니까?”
“예전이라면야 국제 사법계에서 우리 편을 들어줄 나라가 없었으니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 공화국이 유엔사를 주도하는 국가, 그러니까 미국과의 관계도 회복했고 국제적 지위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지 않나? 유민중 입장에서는 국제적 통례에도 어긋나는 영토고권 주장을 고집해봐야 남조선에도 이득이 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걸세.”
“아! 그건 그렇지요.”
“우리 측에서 진지하게 각을 내서 항의할 기회를 주느니 차라리 미국 중재 하에 과도수역으로 묶어두는 게 남조선 국가 차원에서도 이득이고…… 유민중 정권으로서도 국제법적으로 불리한 NLL을 북조선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싸우는 모습을 연출해서 지지율에 도움도 되고. 그야말로 대승적 결단이지.”
‘그리고 일당 독재 국가가 일으킨 남의 나라 전쟁에 같은 민족 동포가 싸우러 가는 꼴을 안 봐도 되니 유민중 개인의 가치관에도 부합했을 테고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쉬운 결단은 아니었을 텐데.’
사실 그도 내심 속으로 운이 좋았다고 느낀 이유는, 유민중의 결단이 아니었더라면 진짜로 2천 명 규모를 그대로 중국에 파병해야 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비록 한국 측도 분명히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암묵적으로 지키던 군사 활동 한계선을 넘어가는 건 분명한 무력 도발인데, 자타가 공인하는 평화주의자인 유민중이 정환에게 동조해서 이러한 연극에 합을 맞춰준 건 그야말로 운이 좋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거 말고도 다른 하나의 보상을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 보상 때문도,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유민중도 원 역사와는 다르게 바뀐 것일지도 몰랐다.
정환 본인과 북조선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대북 유화 노선에 적극적이었던 유민중도 북조선에 대해서 좀 더 계산적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일이 돌아가고 있음에도, 지난 상하이 테러를 기점으로 점점 자신이 아는 것과 바뀌기 시작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시 느끼게 되어 정환은 내심 기쁘지만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국제사법재판소에 가기 전에 미국에서 헐레벌떡 두 우방국 중재를 하러 오는 걸 기다리자고. 파병 규모 3,000명이 200명으로 줄었다는 걸 알게 되면 중국인들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 * *
다음 1주일간, 정환의 예상 아니, 유민중과 정환 두 지도자 간의 이면 합의는 거의 그대로 실현되었다.
미국의 앨 고어 대통령은 국무부 장관과 유엔군 사령관(이라고 쓰고 주한미군 사령관이라고 읽는다)를 포함한 협상단을 통해 ‘양국이 서로 평화적인 해결 방법을 찾기 바란다.’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남북한 정부는 모두 이를 받아들여 NLL 수역 분계선을 ‘현실화’하기 위한 조정 작업에 돌입했다.
중간에 ‘주변의 이성적인 우방국’이 자국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어 기분이 상한 중국은 ‘중국도 한국 전쟁 휴전협정의 당사자이므로 해당 협의에 참가할 권리가 있다’라는 메시지를 비공식적으로 보내왔지만, 한국 유민중 대통령의 한 마디에 그냥 아프간 전황에나 관심을 쏟기로 마음을 바꿨다.
“당사자라, 그 말씀은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이 이제까지 주장해왔던 것처럼 자발적인 의용군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이라는 국가를 대표해서 침략전쟁에 참전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남북은 NLL에서 있었던 교전에서 2주 후 (겉으로 보기에) 극적인 합의에 다다랐다.
현재 북방한계선, NLL을 좀 더 남쪽으로 내림으로서 국제법에 맞게 북한의 영해를 보장하되, 연평도를 비롯한 해당 수역의 섬들은 이미 남한 주민들이 살고 있으므로 과도수역의 섬으로 취급하여 남측이 행정권을 가지되 북측의 어로를 비롯한 경제활동을 허가해주는 안이 최종 채택되었다.
또한 이러한 남측의 양보에 북측은 기존에 엄포했던 ‘적대적 행동’, 중국의 아프간 전쟁 파병 규모를 크게 줄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남북 지도자 간 비밀리에 오갔던 핫라인 전화통화 내용은 한국 정부의 1급 기밀로 지정되어 대통령 기록 보관소의 ‘30년 후 봉인해제’란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그렇게 서해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