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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184화 (184/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184화

어찌 보면 잔소리에 가까운, 가볍게 질책하는 어투였지만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꺼낸 사람인 만큼 조금 전까지만 하도 여유로운 분위기였던 정치국 위원들은 긴장해서 자세를 바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환은 이 기회에 안 그래도 한 마디 하고 싶었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군기 잡기에 나섰다.

“아무리 지금 공화국 경제 사정이 호황기라지만, 인민의 피땀을 들여 만들어진 국산 소비를 장려하라는 내 말은 다들 어디로 들은 건가? 당장 오늘 세정위원회에서 공화국 기업 물산을 일정 구매하면 면세 적용을 얼마만큼 해줄 것이냐에 대해 보고가 올라와 있는데…… 당장 정치국 위원들이 이래서야 어디 인민들이 곧이 곧대로 듣겠어?”

“초, 총서기 동지…… 즉각 시정하도록 하갔습네다. 저희는 단지 근래 외국 기업가들과 민간 기업소 책임자들을 접대하면서 로동당은 공화국 경제에 기여하는 국내외 기업들의 편이라는 걸 알려주고자…….”

“최근 3월 1분기 GDP 성장률이 10% 선을 간신히 지켰기 망정이지, 이렇게 계속해서 간부들이 부끄러운 행동만 보였다가는 현 부장과 선전선동부가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인민들이 당의 욕을 입에 담는 날이 머지않을 걸세.”

“…….”

“내가 이제 공화국은 양적인 성장보다 인민들 한명 한명을 잘살게 해야하는 시기에 들어섰다고 말하지 않았나? 최근 김영일 국장 동무가 일이 없다고 하던데, 자꾸 이렇게 나온다면 내가 수사국의 업무 범위와 권한을 다시 확장하는 걸 고려해보게 될 거야. 동무들은 내가 그러기를 바라나?”

8층 소회의실 전체가 고요해졌다.

간부들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쭈뼛거리며 보는 상황에서 정환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들 한 명 한 명을 주시했다.

그때 총서기 석 옆의(하지만 가장 가까운) 작은 책상에서 말없이 앉아있던 유혜림이 말없이 그에게 몸을 밀착하여 손가락을 뻗어 정환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이제 다들 알아들은 듯 하니 쥐 잡는 건 그만해도 될 것 같다는 그들끼리만의 신호였다.

‘에휴, 말을 말아야지.’

정환은 잔뜩 힘이 들어가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간부들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차피 유혜림의 신호가 아니었어도 적당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지난 10년 간 시장 경제를 활성화하고 남조선을 비롯하여 타 국가들에게 한참 뒤처진 격차를 따라잡느라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지금은 그 인고의 열매를 어느 정도 맛보는 시기 아닌가.

그렇게 기적적으로(여타 인민들과 간부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 격차를 ‘어느 정도’ 따라 잡았고 공산주의 물을 빼는 것도 성공했으니 그 체제 전환의 1등 공신인 로동당 간부들도 그 단물을 맛보여줘야 할 필요는 있었다.

비록 과거 김일성, 김정일 정권 밑에서 부역했지만 지도자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느니만큼 정환의 손발이 되어 오늘의 북조선을 이룩한 건 누가 뭐래도 그들이다.

그런 만큼 그들 스스로 과거의 사이비 공산주의 국가로 돌아가지 말아야 할 동기 부여 역할을 하는데 자본주의의 달콤함만큼 효과적인 게 어디 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그 단물에 취해 해이해지거나 부패해도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아니면 최소한 좀 인민친화적인 취미로들 하던가. 권투 같은 걸 배워보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조기축구라도 해보게. 당 로선에도 그게 맞고 말이야. 하여튼 두고 보겠네.”

“교시를 뼈에 새기갔습네다! 총서기 동지!”

“그럼 이제 지체된 정치국 회의로 넘어가도록 하지. 오늘 첫 번째 안건이 뭔가?”

정환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를 거두자 그제서야 테이블 상하석의 당 간부들과 정치국 위원들은 살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바닥에 떨어트렸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만에 하나라도 정환이 다시 골프장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재빨리 그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이번에도 역시 대외경제위 위원장이자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장성택이었다.

“주체사상탑의 처분에 관련해서입네다. 총서기 동지. 아시다시피 현재 이 신청사를 짓느라 옮겨진 주석님의 주체사상탑은 분해되어 인근 공군 비행장 창고에 잘 보관되어 있기는 합네다만…… 최종적인 이전 장소는 총서기께서 영단을 내려주셔야 할 듯합네다.”

“아아, 그렇지. 그게 있었군.”

정환은 버리는 걸 깜박 잊어 냉장고 한구석에서 썩어가던 식재료를 발견한 사람처럼 표정을 찡그렸다.

사실 비유에서나 실제에서나 그 표현이 정확하기도 했고.

“흠, 우리 조선 민족의 태양 김일성 주석님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인 만큼 이렇게 방치해 두는 건 그분의 후계자로서 참으로 낯부끄러운 일일 테고…… 어디 좋은 의견들 없나?”

주체사상탑이란 말 그대로 죽은 김일성의 최대 업적인 주체사상 창시를 기념하는 탑이다.

지금이야 옛날이야기지만 주체사상은 한때 북조선의 지도 이념이었던 만큼 그 이념의 창시를 기념하는 건축물인 주체사상탑의 중요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런 만큼 위치도 평양 중심부, 대동강 건너편 동신동 김일성 광장 한복판에 세워져 있었다.

내부에는 엘리베이터와 전망대까지 설치되어 있었고 과거 전력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을 때도 최우선적으로 전기가 공급되어 항상 평양의 등대처럼 훤히 빛났었다.

이것만 봐도 과거 조선로동당과 국가에서 이 프로파간다 건축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더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 이 주체사상탑은 느닷없이 해체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게 되었는데, 바로 새롭게 취임한 총서기가 그 부지에 다른 건물을 짓겠다고 천명했기 때문이었다.

“초, 총서기 동지. 아무리 기래도 이건 조금…….”

“김일성 주석님이 이 공화국과 인민에게 남겨주신 유산은 주체사상도 있지만, 그보다 우리 당, 이 조선로동당이다. 그러니 그 조선로동당의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기 위한 신청사 건축에 주체사상탑 부지를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이 있겠는가?”

주체사상탑을 해체 이전하고 그 자리에 지금 그들이 자리한 신청사를 세우라는 교시가 내려지자 (참으로 오랜만에 제기된) 미약한 반발에 대해서 정환이 한 말이었다.

어쩌겠는가, 김일성은 이미 죽어서 한 줌 흙이 되었고 지금의 수령은 그인 것을.

하여간 이러한 사정을 거쳐 주체사상탑은 다른 여러 프로파간다 성 건축물, 그러니까 천리마 동상 기타 등등과 함께 철 지난 계절 옷처럼 인근 공군 격납고에 보관되어 있는 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어서 의견들을 내보게. 과거 주석님의 유훈과 업적을 보존하고 기리는 일인데 나 혼자가 아니라 모든 당원들의 머리를 모아 결정해야겠지. 게다가 사랑하고 경모하는 아바디의 업적을 언제까지나 저렇게 방치해두는 건 아들로서 도리가 아니지 않겠나.”

뭔가 떠보는 듯한 정환의 말에 테이블에 앉은 정치국 위원들 중 몇몇은 서로 눈을 빛내며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의 최고지도자가 내심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짐작한 것인데, 특히나 장성택과 김용건, 현영숙을 비롯한 핵심 간부들은 행간에 담긴 정환의 진심을 금방 읽어냈다.

‘총서기께서는 우리가 총대를 메고 나서기를 바라시는구나.’

그들은 당연히 사랑하는 아바디 운운하는 정환의 말이 새빨간 거짓부렁이라는 걸 알았지만, 동시에 정환이 왜 혼자 결정해버리지 않고 일부러 그들에게 의견을 물었는지도 눈치챘다.

한 마디로 처치 곤란인 거 없애버릴 명분이 없다 이 이야기 아닌가.

“일부분만 남겨 주석님이 묻히신 대성산 혁명열사릉으로 이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 그거 좋은 의견이로군, 장 부부장 동무.”

이번에도 가장 먼저 좋은 아이디어를 낸 건 장성택 부부장이었다.

김일성, 김정일 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른 그는 오랜 짬밥(?)에서 나온 내공으로 현재 지도자의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그의 심기를 만족시킬 방법을 누구보다 빨리 떠올린 것이다.

“난 장 부부장의 의견에 찬동하네. 다른 동무 누구 더 좋은 생각 있나?”

“…….”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그리고 총서기 취임 후 10년 넘게 조선로동당은 많은 변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변화의 길에서 주체사상은 도태되어도 된 지 한참 된, 말 그대로 과거의 유물이다.

김일성 주석이 살아있을 때라면 모를까, 이미 국가자본주의 1당 개발독재로 노선을 굳힌 현재에 정환이 원하는 것은 이 주체사상이라는 선대의 유산과 흉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별하는 것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들이자 후계자 된 입장에서 ‘거 대충 부숴서 건축자재로나 재활용 하지’라고 말하기는 힘드니,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것이 현명한 충신의 모범이었다.

그러니 아무도 ‘대성산 혁명열사릉은 눙토히 말해 무덤인데, 우리 공화국의 지도 이념인 주체사상을 기념하는 상징물을 무덤가에 옮겨놓는 게 인민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두렵습네다.’라고 말할 턱이 없었다.

오히려 장성택의 의견에 찬성하는 소리만이 회의석 곳곳에서 나올 뿐이었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네다, 총서기 동지.”

“과연 장 부부장 동지의 고견이 옳습네다. 주석님도 그분의 업적을 가까이 두고 보시기를 원하실 겝니다.”

“아무도 반대하는 동무가 없는 거 같군. 그럼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지.”

이렇게 해서 반세기 가까이 북조선을 지배해왔던 주체사상의 상징, 주체사상탑은 평양 중심부에서 한참 떨어진 대성산 혁명렬사릉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비록 내부의 시선과 인민들을 의식해 공식 발표 같은 건 나지 않겠지만, 조선로동당은 이렇게 주체사상을 말 그대로 무덤으로 보내버림으로써 사실상 주체사상에 이별을 고했다.

사실 지금 정환의 머리를 썩히게 하는 문제는 이런 겉치레보다 좀 더 실리적인 문제였다.

“그럼 다음 회의 주제는 이번에 있을 조중 합동 군사훈련일세. 저쪽에서 강하게 의지를 보여왔으니 인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지만, 규모와 참가 부대 부분에서 조절을 해야겠군. 괜히 우리의 친애하는 우방국, 미국인들의 오해를 사지 않게 말일세.”

정환의 냉소적인 말에 당 간부들 역시도 쓴웃음 반, 불쾌함 반이 섞인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들로서도 이번 훈련 결정이 별도리가 없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근 몇 년 사이 장쩌민의 영도 아래 해안에 인접한 상하이, 광저우 등 1선급 도시들을 중심으로 무섭게 자라나기 시작한 중국 경제는 이미 벌써부터 미국인들의 경계심을 조금씩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급수는 맞춰줘야 하는 게 예의니 백승철 상장 동지가 직접 참관하는 게 좋겠군. 훈련 내용과 장소 조절은 어떻게 되어 가나?”

“단둥 조중 접경지대에서 테러 진압 작전 훈련으로 결정되었습네다. ……중국 쪽에서 대만군을 가상적으로 하는 상륙 훈련을 하자고 하는 거이를 저희 인민군에서 간신히 뜯어말렸습네다.”

“잘했네. 선전선동부에서는 해당 사실을 딱 중국의 체면을 세워줄 정도로만 보도하도록. 조선중앙텔레비죤을 비롯한 관영 방송에서는 첫 꼭지에 언급을 하되 민영 방송국과 케이블 쪽에는 반드시 보도해야 한다고 강제할 필요 없네. 어차피 저쪽에서도 우리에게 이번 훈련을 통해 알아내려고 하는 건 따로 있을 테니.”

여기까지 말한 후 정환은 고개를 돌려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는 백승철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동안 보낸 시간이 시간이고 하니 이제 이 친구에게도 이 정도는 일을 믿고 맡겨도 될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백승철 상장 동지가 우리 입장을 중국에 잘 설명해 주리라 믿네. 내가 동무를 믿어도 되겠나?”

“그동안 총서기 동지께서 지향하고자 하는 공화국 외교전의 목표는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 있습네다. 국가 간 관계란 언제든 변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오랜 동맹이 소중함을 저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오겠습네다.”

“…….”

잠시 두 사람의 눈빛이 교차했다.

이전까지와는 달리 자신의 눈빛을 흔들림 없이 직시하는 백승철을 보며 정환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동무를 믿지.”

그리고 그 회의로부터 몇 달 후, 단둥 조중 접경지대에 백승철이 이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 부대가 합동 훈련을 위하여 집결했다.

훈련 시작 전,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중국 측 장령이 조선인민군 측 지휘관으로 참석한 백승철에게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역시나 정환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반갑소, 백 상장. 훈련을 시작하기 전 양국 간 오해가 없게 한 가지만 확인했으면 하는데…… 사실 우리 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이번 기회에 조중우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조선의 진의를 확실하게 듣고자 하오.”

“……그 진의라는 게 무엇이오?”

“이번에 미국 육군으로부터 아파치 공격헬기(AH-64) 24대를 구매해 전력 강화를 꾀한다고 들었는데, 그 진짜 의도를 알려줄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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