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183화 (183/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183화

65장. 라운딩(Rounding)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 공화국은 경애하는 수령, 김정환 총서기 동지의 령도 아래에 민족의 영원한 태양, 김일성 주석님의 건국 이래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던 것입네다. 88년 총서기 동지의 신 3대 로선 선포, 91년 미국과의 극적인 관계 개선의 계기가 된 페르샤 만 전쟁의 파병과 민족 역사에 길이 남을 승전에 이어 98년, 50년을 이어온 지리한 체제 경쟁에 승리로 종지부를 찍은…… 혹시 학생 중에 아는 동무 있나요? 말해볼 동무?”

“97년 북남 대타협이요.”

“잘했어요. 그리고 북남 대타협에 이어 양국 간 교류를 담당하는 비자발급소가 설치되자마자 남조선 인민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발 디딜 틈 없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들 있갔지요? 지금 여기 이 조선로동당 력사관에도 당시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다음은 ‘21세기 IT 시대의 진입과 공화국 정보 혁명’ 관입네다. 줄 끝에 선 동무들부터 천천히 이동해주시라요!”

이제 슬슬 봄이 찾아왔음을 느낄 수 있는 4월 초, 대동강 동쪽 신리동에 위치한 ‘조선로동당 역사관’은 가이드의 안내에 맞춰 견학을 나온 평양 시내의 중학교 학생들로 가득했다.

역사박물관이라면 대동강 서쪽에 위치한 ‘조선 중앙 력사 박물관’이 있었지만, 주로 고대와 중세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근현대에 세워진 조선 로동 당(黨)을 홍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이유야 물론 주체사상탑부터 시작해서 해방산거리에 위치한 당 창건 기념관, 조선 혁명 박물관 등 수많은 프로파간다 시설이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지만 가장 최근에 지어진, 하지만 가장 크고 시설이 현대적인 이 조선로동당 역사관 신(新)관은 다른 박물관들과 확연히 구분됐다.

그러니까 주된 시기, 그리고 (여타 시설물과는 자릿수가 다른) 예산과 설비 외에 어떤 점에서 구분되느냐 하면…….

“……그렇게 북남 대타협이 이루어진 바로 그해, 1998년에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하게 되었습네다. 또한 경제적 재앙을 피하여 남에서 북으로 이주해온 기업들의 정착과 협력에 힘입어 공화국 자체 기술력으로 콤퓨타를 만드는 게 성공, 현재에 이르러서는 컴퓨터뿐만이 아니라…… 아, 사진 촬영은 지정된 구역 외에 금지되어 있으니 모두 마음에 새겨두시길 바랍네다. 물론 손전화 카메라도 안 돼요!”

안내원이 살짝 언성을 높이며 손전화(핸드폰)을 열고 카메라를 박물관 이곳저곳에 들이대려는 몇몇 학생들을 제지하자 그들은 화들짝 놀라 재빨리 그 물건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제 출시된 지 겨우 반년이 되어가는 최신 기기, 무려 35만 화소짜리 카메라가 달려 있는 ‘카메라폰’이었지만 평양 시내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라 그런지 중학생 주제에 벌써 그런 고가의 물건을 들고 다닐 수 있는 듯했다.

그러나 사실 바로 이런 상황이야말로 이 역사관이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다른 구(舊) 역사관과 다름을, 그리고 지난 3년간의 북조선이 2000년 이전의 북조선과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더 이상 조선로동당은 빨치산 혁명 역사나 주체사상을 선전하지 않았다.

인민들 역시 더 이상 자본주의의 혜택과 서비스들을 강 건너 불구경처럼 마냥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21세기가 온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총서기 동지의 령도 아래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력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으며 신세기, 이제 1년 전이 되어버린 21세기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들의 제지로 잠시간의 소란이 진정되자 여성 안내원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내 다음 전시관으로 학생들을 안내했다.

새로운 전시관은 간접조명과 앤틱한 조금 전의 전시관과는 달리 21세기를 상징하듯 밝은 푸른색 조명과 매끈한 은빛 플라스틱과 실리콘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곳으로 진입하자 안내원은 한층 더 감정에 북받친 목소리로 눈을 동그랗게 뜬 학생들에게 당과 수령의 위업을 선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선전 업무에 열정적이라고 보기에는 전시관 곳곳의 사진과 영상자료에 가장 크게 부각 되어 있는 조선로동당 총서기, 김정환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세주를 바라보는 것처럼 심상치 않았다.

“라선에서 하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시베리아 철도 1차 개통사업이 완료되며 중국, 러시아 같은 우방 국가들과의 무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지난해 인민들의 1인당 평균 소득이 1만 달러를 돌파하며 부국강병과 인민 행복 실현이라는 조선로동당의 최종적 지도 이념의 실현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습네다. 그럼 이제…….”

여성 안내원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과장된 목소리로 설명을 마치고 다시 말을 멈췄다.

하루에도 열 무리에 가까운 평양과 지방의 중학생들을 이 조선로동당 신 청사 력사관으로 안내하지만, 이 학생들은 오늘 특별히 운이 좋았다.

왜냐하면, 오늘 아침 당 중앙에서 예상 밖의 특별한 손님이 잠시 방문할 수도 있다고 언질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어린이 동무들, 오늘 이 자리에 뜻하지 않은 손님을 안내하게 되어 저는 너무나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김용건 내각 총리이자 국제부장,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의장 동지십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린 동무 여러분. 이 력사관을 둘러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안내원이 소개한 사람은 놀랍게도, 비서 몇 명만을 옆에 대동한 채로 력사관 마지막 전시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용건 외무상이었다.

자신들에게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하는 중년 남성의 신분이 밝혀지자 이제까지 약간 지루한 표정으로 여전히 손에 든 손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중학생들도 놀라서 웅성거리기 시작해다.

고작해야 중학생들 박물관 견학에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직급이 높은 당의 일꾼이라는 것쯤은 아직 열 네댓 살에 불과(하지만 슬슬 머리가 굳어 세상 물정을 파악하기 시작)한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까지 수령이나 당 중앙 일꾼이 인민들을 직접 찾아가는 일은 흔했지만, 그 대부분은 프로파간다를 위해 사전에 철저하게 기획된 접촉이었고 거기에 ‘동원된’ 아이들이나 인민들 역시 사전에 누굴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부 지시를 받았다는 점이 달랐다.

하지만 지금 김용건은 카메라는커녕 옆에 수행비서들이나 몇 명 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역시도 지난 3년간 일어난 변화 중 하나였는데, 김정환 총서기가 이끄는 조선로동당 역시 인민 친화적인 당을 표방하며 쓸데없는 권위주의에서 조금씩 탈피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인 남조선도 갓 ‘국민과의 만남’ 형식의 생방송 대담을 진행하는 시대에 김용건이 중학생들 견학 행사에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높으신 분’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다들 왜 그렇게 얼어 있습니까? 이 당 력사관을 둘러본 소감이 어떤지 저에게 말해줄 학생 동무 없습니까?”

“저어기…….”

“아, 거기 동무 한번 말해보시오. 내 무엇이든 대답해 줄 테니.”

“외, 외무상 동지께서는 이 력사관에서 전시된 현장에 직접 자리하신 적이 있으십네까? 그때 이야기를 저희에게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신지…….”

“물론 있습니다.”

김용건은 미소를 지으며 감회에 서린 표정으로 력사관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기 OECD 가입 현장, 저 때도 물론 제가 있었지요. 불란서 빠리에서 열린 총회에 총서기 동지를 수행하여 갔는데 그때 옆에서 가입 헌장에 서명하시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혹시 그때 뭐 생각나는 무용담이라도…….”

“당시 일본 측에서 아직 북조선은 OECD에 가입할 자격이 안 된다며 상주대표 이사회에서 우리 공화국의 OECD 가입을 방해하는 온갖 흑색선전과 패악질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총서기께서는 그 모든 섬쪽바리들의 수작질에 결연히 맞서라는 지시를 내리시어 우리 외무부가 한마음 한뜻으로 분투, 마침내 우리 공화국의 현재와 같은 외교적 지위를 쟁취했던 거이 기억나는군요.”

“와아아아아……!”

아이들은 마치 동화 속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김용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김용건에게 중학생 중 한 아이가 쭈뼛거리며 다시 질문했다.

“저, 저기…… 김 외무상 동지!”

“아, 물어보시오. 동무. 또 무엇이 궁금합니까?”

“호, 혹시 외무상 동지께서는…… 총서기 동지를 직접 만나 뵌 경험이 있으십네까?”

“……!”

이번에는 사위가 모두 고요해졌다.

마치 담아서는 안 될, 하지만 모두가 궁금해하던 사항이 나온 것처럼 공기는 긴장과 은근한 기대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사실 어찌 보면 좀 한심한 질문이었지만 김용건은 전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질문이 나온 것이 기쁘기까지 했다.

인민이 자발적으로 당과 수령에 대하여 궁금해하고, 또 그것이 결코 강요되거나 연출된 호기심이 아님을, 그리고 자신 역시도 그 질문에 별 부담 없이 대답해 줄 수 있는 시대가 왔음을 잘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김용건은 소년 시절처럼 유쾌하게 웃으며 그 질문에 대답했다.

“물론입네다, 눙토히 말하자면, 사실 지금도 그분을 뵈러 당사에 가는 길입니다.”

* * *

“갈 시간이 됐군. 그렇디?”

“그렇습네다. 외무상 동지. 지금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시려면 서두르셔야 합니다.”

얼굴을 붉히고 왁자하게 떠들면서 지나가는 아이들의 등을 바라보며 묻는 김용건의 질문에,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력사관이 바로 정치국 회의가 열리는 장소 바로 옆에 있는 관계로 늦을 걱정은 그다지 안 해도 되지만, 그래도 최고지도자가 주재하는 회의 아닌가.

이윽고 김용건은 빠른 발걸음으로 당 역사관을 나와 지척에 있는 건물, 오늘 정오 정치국 회의가 예정된 ‘조선로동당 신 청사’로 자리를 옮겼다.

몇 분 후 청사 정문에 다다르자 김용건은 력사관과 함께 대동강 건너편에 증축된 이 건물을 바라보며 다시 감회에 잠겼다.

‘조선로동당 신 청사.’

“허허, 참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군.”

신 청사는 하나의 거대한 유리 궁전이었다.

벽돌과 시멘트로 지어진 대동강 서쪽의 구 청사와는 다르게, 스틸 프레임과 유리, 태양광 패널까지 설치된 9층짜리 청사는 기하학적인 곡선을 자랑하며 대동강과 평양을 조용히 굽어보고 있었다.

정당의 당사라기보다는 (그것도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의) 현대미술관이나 IT 기업의 본사를 연상케 하는 외양이었다.

“딱 맞춰 오셨습네다. 총서기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네다.”

“아, 고맙네.”

비서들을 밖에 대기시키고 김용건은 회의실로 들어가 자리에 착석했다.

8층에 위치한 정치국 소회의실은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대동강과 평양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직사각형의 거대한 테이블 최상석에 한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남자, 정환은 유혜림이 건네준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김용건의 도착을 인지하고 가볍게 눈짓했다.

“왔군. 김 외무상 동지.”

“제가 늦은 건 아닌가 모르겠습네다, 총서기 동지.”

“아니야. 자리에 앉지. 그럼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동지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네. 제발 골프장 좀 적당히 가면 안 되겠나? 부주임급 이상 당 일꾼들은 1년에 8회 미만으로 이용하라는 서기실 권고 사항을 들은 것으로 아는데? 아니면 최소한 공화국 내 골프장으로 좀 가란 말일세. 무슨 놈의 당무가 홋카이도와 뉴질란드에만 몰아서 생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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