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181화
막간. 공화국의 첫 크리스마스(1)
1997년 12월은 여러모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기념비적인 달이었다.
남조선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나고 하늘 같은 총서기를 모시는 당군정의 높으신 분들은 구제금융을 하느니 마느니 하면서 연일 날 밤새는 줄 몰랐지만, 일반 인민들 대부분에게 그런 건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사란 동시기 아랫동네 남조선과 비슷하게 오로지 먹고사는 문제였는데, 사실 (총서기가 집권하면서) 이미 그건 대부분 해결됐으니 주안점은 어떻게 ‘더’ 잘 먹고 ‘더’ 잘 살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어른이나 아이나 그 문제는 다를 바 없었다.
직장이 있는 어른의 경우는 이번 연말에 소문으로만 듣던 상여금 제도가 도입될 것이냐 아니냐, 나온다면 얼마나 나올 것이냐, 라선의 석유공사 일꾼들은 상여금이 일 년 급여만큼 나온다더라, 등등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아이들, 특히 아직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의 경우, 최대의 화젯거리는 바로 보통강 거리 나이키 매장에 들어온다는 화제의 신상품이었다.
“너 이번에 그거 사달라는 거이 뭐이라고 했디? 에미…… 뭐?”
“에어 조던(Air Jordan)이요, 아바디! 에어 조던! 꼭 1997년 판 놈으로 사주시요! 작년 거 사 오시면 절대 안 됩네다! 그건 밑창이 벌거지 밑창이랍디다!”
“아 그랬디! 알았디, 알았어…… 제기, 애비 노릇하기 힘들구만, 이거.”
마흔 살의 가장, 류해일은 에어 조던인가 뭐인가 하는 미제 농구화를 사달라고 하는 아들의 보챔이 들려오는 손전화를 끊으며 그렇게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게, 이번에 전문고와 진학고를 가르는 입시에서 아들이 진학고에 들어가면 반드시 돈을 괴어 새 신발을 사주겠다고 했으니 두말할 도리가 없었다.
“어린놈의 자식이 벌써부터 달러 쓰는 버릇만 들어서는…… 나 때는 말이디…….”
자신이 막 사회 진출할 적에는 에어 조던이고 뭐고 다 인민화였다고 투덜거리면서 류해일은 전화를 끊고 다시 어깨에 힘을 넣었다.
방금 전 자신이 상품명을 맞게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나이키 평양점 예약 고객 명단에 이름을 올려놨으니 저녁때쯤 사서 들고 돌아가면 될 것이다.
자신 아들 말고도 평양에서 좀 산다고 하는 집 자녀들 사이에는 이미 유명한 상품인지 신발 쪼가리 파는 놈 주제에 점원이 류해일의 행색을 휘휘 둘러보다가 그의 직업을 물어보기까지 했다.
“이거이 가격이 보통 눅지(싸지) 않을 터인데…… 동무래 직업이 뭐이요?”
“아니, 그건 왜 묻소? 뭐라고 해야 하나…… 그…… 배급 일 하오.”
자신이(정확히는 자기 회사가) 하는 일이 아직 이 공화국에서 좀 희귀한 직종이라 류해일은 대충 그렇게만 얼버무렸다.
그런데 ‘배급’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나이키 점원이 아주 사람 무시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깔아 보던 것은 아직도 류해일에게 열이 뻗치는 일이었다.
“……배급? 이 동무래 아직도 김정일 인민이구만! 기럼 좀 만만치 않을 터인데……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 평양에서 배급 타 먹고 사는 인민이 남아있단 말이오?”
“……뭐이요?”
어처구니가 없어진 류해일은 자신의 직업과 소득 수준을 상세히 설명하고 나서야 ‘에어 조던 1997년 에디션’ 예약 고객 명단 끝자락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하여튼 그의 가정사 쪽은 해결이 되었으니 이제 일만 해결하면 되었다.
아니, 사실 일을 해결해야 가정사 쪽도 최종해결된다고 볼 수 있는 게, 일단 돈을 벌어야 아들과 안해(아내)에게 연말 선물도 사주고, 에어 조던이고 뭐고 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성장 가도를 달려온 그의 회사가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지금 맞닥트린 문제, 선전선동부 영상물검열심의 그루빠 위원들의 벽을 넘어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류해일은 벌써 몇 주 째 위원들에게 위스키부터 선물용 소갈비 세트 하며 별의별 선물을 갖다 바치며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다.
이러다가 심의 통과 이전에 반부패수사국에 잡혀 조사받는 게 우선일지도 모른다고 걱정될 정도로.
하지만 류해일은 전혀 이러한 ‘친목 도모사업’(절대 로비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 자금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들여오려는 놈은 이미 미국에서 성공이 검증된 놈이니까, 일단 공화국에 독점적으로 들여올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을 것이다.
“류해일 동무. 거기서 뭐하시오? 휴회(休會)가 끝났으니 얼른 들어오시오.”
“아, 위원 동무! 하하하…… 집 아새끼들이 하도 보채서 말입네다. 요즘 애들은 총서기 이전 시절을 잘 기억 못 해서 그런지 배가 불러서 이거 사달라 저거 내놓으라 원…….”
“어쭙잖은 소리래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시오. 무슨 조홧속인지 몰라도 현영숙 위원장 동지께서 직접 오셨소. 잘만 보이면 심의 통과도 일사천리니 내가 류 동무라면 잘 보이려 노력할 기요.”
“저, 정말이오?”
그 말에 류해일은 피우던 담뱃불도 제대로 끄지 않고 바닥에 팽개친 후 헐레벌떡 선전선동부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현영숙이 누군가, 공화국의 모든 매체와 영상물 검열을 관리하는 중앙검열위 위원장이자 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 아닌가.
그녀의 말 한마디면 류해일 자신 같은 작은 업자 한 명 정도는 영영 보내버릴 수도, 혹은 저 멀리 하늘 높이 뜬 구름 위로 띄워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지만 ‘아직’ 경제 권력보다는 정치 권력이, 100억 돈주보다는 당 지도국 차장급 관료의 입김이 더 강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현주소였다.
그리고 실제로 믿기지 않게도 청사 안으로 들어가니 40대지만 여전히 화사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여성 한 명이 자리에 앉아 자신이 검열을 요청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레 심의회 회의실로 들어온 류해일을 보자마자 그녀는 짧고 사무적으로 물었다.
“앉으세요, 류해일 동무, 검열 통과를 위해 동무가 중앙 검열위에 제출한 서류들을 보고 있었어요.”
“예, 예에…… 동지.”
“이 서류를 보아하니 그동안 꽤 많은 영화를 공화국 내 극장에 걸어왔더군요. 안목이 제법인지 흥행 수입도 높고, 아마 돈푼도 깨나 버셨겠군요?”
“저, 전부 검열위의 엄정한 심의를 통과한 것들만 배급했습네다! 믿어주십시오!”
“흐음, 그런 것 치고는 동무가 운영하는 배급사에서 ‘배급’한 영화가…… 주로 미제 영화라는 점이 문제에요. 이번에 심의를 요청한 영화도 미제…… 미국 영화인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 점을 추궁해봐야겠군요.”
별로 어조를 높이지도 않았는데 절로 등골에 냉기가 감도는 현영숙의 위압감에 류해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랬다, 류해일이 하는 ‘배급’일이란,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회사는 영화를 수입 배급하는 영화 수입‘배급’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검열위원장 현영숙을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이번 공화국의 첫 크리스마스에 맞춰 들여온 영화를 극장에 걸 수 있을지가 결정될 상황이었다.
회의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루하게 이어진 갑론을박과 심의에 약간의 피로감과 그로 인해 느슨함이 없지 않았지만, ‘한참 지도 간부급 윗분’인 현영숙의 등장으로 회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물론, 그중 가장 긴장한 것은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수입한 영화가 검열심의를 통과할 수 있을지 없을지 침을 꿀꺽 삼키는 류해일이었다.
“동무의 회사가 이제까지 배급을 시도한 영화가…… 에일리언, 터미네이터 2, 거기에 다이 하드? 심의가 길어질 만도 하군요. 대부분 미국의 제국주의 논리를 홍보하는 영화 아닌가요? 아무리 미국과 공화국이 과거처럼 불공대천지 원쑤관계가 아니라고 해도 이런 식은 좀 곤란한데요.”
“아, 아닙니다. 동지! 제게 소명의 기회를 주십시오! 에일리언은 척살 대상이 이계인이고 터미네이터는 미래에서 온 로보트가 적대 대상 아닙네까. 결코 여타 미제 제국주의 영화처럼 공화국 같은 사회주의 동지 국가들을 왜곡 배격하는 영화가 아닙네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쳐요,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동무의 회사는 ‘엑소시스트’를 공화국 극장에 걸겠다고 하다가 심의에 떨어진 적이 있지 않나요?”
“……기, 기거야 그렇지만은 기건 미 제국주의와 아무 상관이…….”
“알겠지만 우리 위원회의 검열지침에 따르면, 실체가 불분명한 영혼이나 신령, 무엇보다 인민의 아편인 종교에 관련된 내용은 타락한 봉건주의적 구습인 미신을 조장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누가 봐도 시정조치를 받을 일이 뻔했는데 왜 이런 걸 올려서 검열위의 과업을 늘리는지 모르겠군요.”
살짝 차가워진 현영숙의 지적에 류해일은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류해일도 나름대로 할 말이 있었는데, 그놈의 검열지침이나 심의 요건이라는 게 하도 들쑥날쑥(들쭉날쭉)해서 어떤 때는 절대 통과되지 않을 것 같던 영화가 통과되거나.
누가 봐도 쉽게 통과될 것 같은 영화가 대번에 시정조치를 당하거나 하는 등 제멋대로였다.
근 총서기 집권 10년 동안 갑작스럽게 인민들의 영상물 수입과 관람의 자유가 늘어남에 따라 검열위의 업무 강도가 폭증한 게 주된 이유였다.
그리고 다른 이유라면 사상의 경직성과 영상물에 대한 빈약한 창의력이 일반 인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검열위원들이 (역시 만만치 않게 빈약한) 심의 지침을 가지고 서방 자유 세계의 영상물을 심의하려니 거의 컬쳐 쇼크를 받았던 것이다.
‘스타워즈 : 새로운 희망’이 ‘농군의 아들로 자란 프롤레타리아 출신 주인공이 소수의 인민 친화적 군대와 강대한 제국주의적 적에 맞서서 승리하는 사회주의적 영화’라는 이유로 통과되는 일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바로 다음 편, ‘제국의 역습’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대립하며 싸우는 패륜적 사태는 (I’m your father) 조선 민족의 정서에 맞지 않다’라면서 심의가 한참이나 지연되는 등 별의별 촌극이 다 벌어지는 상황.
(사실 이건 과거 김정일과 김일성의 부자 대립을 인민들에게 연상시킬 수도 있어서 그랬다고 뒷말이 무성했다.)
이러한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과도기에서 류해일과 같은 해외 영화 수입 배급업자들이 검열을 통과할 때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당연히 뇌물을 고이는 것이었지만, 그걸 현영숙 앞에서 대놓고 말할 정도로 류해일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뇌물이라는 수단을 써서 위원들을 매수하는 건 그 혼자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험, 현 부장 동지께서도 보셨겠지만, 류해일 동무는 지속적으로 사상이 의심스러운 영화들을 공화국 내에 들여오려는 책동을 꾸몄던 적이 많습네다. 그러니 요즘 조금씩 만판이 되어가는 영화 일꾼 동지들의 기강을 잡으실 겸 이번은 반려와 시정조치를 내리시는 편이…….”
‘저 늙은 여우 간나 새끼가 또 수작질이네!’
류해일은 일부러 헛기침까지 해가며 은근히 현영숙을 구슬리는 허연 수염의 장년 위원을 바라보며 속으로 천불이 터졌다.
사실 (죽은 김정일이 영화광이어서) 북조선 내에도 영화 제작소는 꽤 있었고 방향성이 문제였지 인력이나 장비는 의외로 충실하게 갖춰져 있었다.
그래서 자국 산업도 육성할 겸 정환과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에서는 스크린 쿼터제를 실시, 1년에 수입 개봉할 수 있는 외화 숫자가 제한이 되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성공이 보장된 외화에 한해서는 류해일 같은 배급업자들끼리 피 튀기는 경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심의에서 상대 배급사를 떨어트려 한정되어 있는 쿼터를 뺏는 것이었는데, 지금 저 장년 위원도 류해일의 경쟁 배급에게 뒷돈을 받고 있었다.
당장 지금 이렇게 심의가 길어진 것도 자기가 뒤를 봐주는 회사의 영화는 술렁술렁 통과시켜주는 저 염소수염 검열일꾼이 류해일의 회사에 대해서는 별의별 트집을 잡아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심의를 길게 지연시킨 탓도 컸다.
하지만 류해일은 참으려 했다, 염소수염의 마지막 수작질만 아니었다면.
“게다가 부장 동지, 제가 풍문으로 듣기는 류해일 동무는 본인의 직위를 이용해 사석에서도 사상적으로 불온한 미제 영화를 애청하며 공화국 영화보다 매우 낫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네다.”
“……정말인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요즘은 미제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만으로 경을 치는 시대가 아니에요. 어지간히 사회주의 이념에 어긋나는 영화가 아니라면…….”
“바로 기거니까 문제가 됩네다. 제가 알기로는 류해일 동무는 ‘람보2’라는, 미 제국주의 군인이 ㅤㅇㅞㅌ남(베트남)의 사회주의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영화를 대단히 재미나게 관람했다는 믿을 만한 소식이…….”
“……이! 이 어디서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기요! 그러는 댁이 뒤 봐주는 기업소는 미제 추격기가 날뛰는 ‘인디펜던스 데이’에 ‘탑 건’을 심의위에 올려놓으려 하다가 대번에 시정조치에 벌금까지 받고 면을 구기지 않았소! 그 수작질의 뒤에 동무가 있었다는 기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그런 뻔뻔한 모함 책동에 부끄러운 줄 좀 아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