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180화
“유 소좌…… 그 말은 오히려 내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조선의 인민들은 동지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저와 이 조선을 오래오래 영도해주셨으면 합니다.”
꼭 붙잡은 유혜림의 오른손에서 체온과 함께 말로 표현 못 할 여러 감정이 전해져 오는 것을 정환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여타 국가 지도자들이 받는 것처럼 거창한 10주기 기념식이나, 그의 이름이 쓰인 흉상도, 심지어 그 흔한 작은 선물조차도 없었지만, 그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기념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정환은 한 번 더 옷매무새를 다듬고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하면서 유혜림에게서 떨어졌다.
“……그럼 이제 갈까? 더 지체하다가는 늦을 거 같은데.”
“이미 식장에 위원들과 손님들이 와 계십니다.”
그들이 서기실을 나와 관용차에 몸을 싣자 곧 차는 앞뒤로 호위를 받으며 빠른 속도로 평양 보통강 구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이제는 고층빌딩이 별로 낯설지 않은 평양의 풍광을 보면서 유혜림의 말대로 시간의 흐름을 역력하게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됐군, 시간 참 빨라.’
인민대학습당에서 유혜림이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게 아직도 엊그제 같은데 자신이 정한 기간인 30년의 3분의 1이 어느새 지나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환은 임기가 끝난 또 한 명의 정치인, 박이삼과의 첫 핫라인 통화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 대통령님. 조선로동당 총서기 김정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직접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군요.”
-저 역시 반갑습니다. 김 총서기님. 그래도 제 임기가 끝나기 직전에 북한 최고지도자에게 한국 대통령 대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나마 받게 되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군요.
그동안 죽 외교적으로 무시해오다가 인제 와서 아는 척 하느냐고 타박하는 듯한 박이삼의 뼈 있는 말에 정환이 속으로 ‘뒷 끝 있으시네’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내심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박이삼은 담담하면서 어딘가 후련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그동안 저를 참 많이도 힘들게 하셨습니다만, 제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이번에 북측과 총서기님이 저희에게 제공한 차관, 경제적 원조에 대해서는 감사하다는 말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반공주의자로서 한평생을 살아왔고, 사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이번에 북측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되어 참으로 인상이 깊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얻는 게 있었으니 그런 제의를 드린 겁니다. 서로에게 없는 것, 외환과 지분을 교환해서 거래자 양쪽 모두 비교우위를 얻게 되니,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참으로 오묘한 인류의 발명품이지요.”
-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드린 말씀입니다. 하마터면 이 땅에 또다시 무력으로 인한 정권탈취와 남북 갈등을 이용해 양자가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일이 벌어질 뻔했습니다.
“…….”
뭐라 할 말이 없어 정환은 입을 다물었지만, 박이삼은 그의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진의를 이해한다는 듯이 말을 계속했다.
-개인적으로는 제 임기 내에서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까지 보고 싶었지만, 천운이 따르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이해하겠습니다. 저는 남북대립 청산이라는 둑의 물꼬를 텄을 뿐이니, 그 물길을 잇고 마르지 않게 관리하는 것은 유민중 당선인이 더 잘할 겁니다.
“저희가 민간 교류 촉진 및 이산가족 상봉 관련해서 기획하고 있는 행사의 날짜를 이미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에 관해서 저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없으십니까?”
문득 심술이 난 정환이 은근한 도발을 던져봤지만, 박이삼은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
-압니다만, 이제 그건 더 이상 제가 머리 썩혀야 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는 유민중 당선인 아니, 유민중 대통령의 문제죠. 퇴임의 좋은 점이 그런 거 아니겠어요? 하하하.
“……언제 한 번 북에 오시죠. 금강산이 요즘 아주 멋지게 바뀌고 있는데 제가 직접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영광입니다. 다만, 당분간은 은퇴자의 노후를 여유롭게 즐기고 싶습니다. 권력이란 얻기는 쉽지만, 지키는 것이 쉽지 않고, 얻은 권력을 오래 지키다가 무사히 내려오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했는데 그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저 자신에게 휴식을 줘야 하겠지 싶습니다.
“총서기 동지?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응? 아, 그래…….”
박이삼의 마지막 말을 곰곰이 떠올리며 자신이 퇴임하는 날을 머릿속에 그려보던 정환은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차가 멈춰서고 문이 열리며 정환과 유혜림이 내리자 조선인민군 의장대가 그를 거창하게 맞아주었다.
“최고지도자 동지께, 받들어 총!”
칼 각이 선 군관들의 군홧발 소리가 축포 소리와 맞물려 이미 행사장 앞은 흥겨운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다.
사열을 받으며 연단까지 깔린 레드 카펫을 걸어간 정환을 제일 먼저 맞아준 것은 외무상 김용건이었다.
“수고가 많군.”
“수고라니요? 그저 감개가 무량할 뿐입네다.”
“그러고 보니 그날 조총련으로부터 참 먼 길을 왔군. 앞으로도 이 나라를 위해 노고를 다해주게.”
김용건의 심정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정환은 감격과 감회에 젖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오늘의 주 행사장을 내려다보며 눈으로 한 번 훑었다.
피오니 홀딩스 본사, 한 달 전 4년 반의 공사 기간 끝에 완공된 70층 평양국제금융센터 앞 공터는 이미 가득 들어선 천막들과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로 북적였다.
단지 한 가지 특기할 점은, 그 안에 들어찬 사람 중 상당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남조선 인민, 즉 한국인들이라는 점이었다.
“자, 그럼 이제 곧 공화국의 품에 안긴 남조선 인민들에 대한 총서기 동지의 따뜻한 환영식 및 평양 국제 금융 센타의 완공 기념식이 있겠습네다. 내외빈 여러분은 착석해주시기 바랍네다.”
그랬다.
오늘, 한국 대통령 유민중의 취임식 날에 정환과 조선로동당이 기획한 행사는, 차관을 조건으로 시작된 남북 민간교류 비자를 받아 평양에 입국한 2,000여 명의 1차 입국자들에 대한 환영식이었다.
물론 그 날짜가 유민중의 15대 대통령 취임식이고, 그 장소가 (남조선에게 차관을 제공한) 피오니 홀딩스의 번쩍이는 70층짜리 유리 궁전 마천루 본사 앞마당 공터라는 것에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했음은 당연했다.
한국 측도 이를 모를 리 없었지만, 차관을 제공 받아 놓고 북측 인사가 취임식에 오면 안 된다고 한 형편이니 오히려 고려일보에서까지 이를 ‘유민중 정부의 첫 외교 패착’이라고 보도하며 자국에 대해서 염세적인 비판의 목소리까지 나오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의 실망감과 외환위기로 인해 크게 바뀐 상호 간 이미지를 상징하듯, 서울과 구(舊) 휴전선에 설치된 비자발급소 및 입국 심사장에는 개소 첫날부터 북으로 가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남에서는 아무래도 내 운이 틔지를 않으니, 요즘 바뀐다는 북에서 새 출발을 해봐야겠다!’
‘박이삼이 때문에 집 날리고 차 날리고 사업도 다 날렸다! 동남아 가서 한국 식당이나 해서 먹고 살아야 할 판에 말 통하고 핏줄 통하는 북한이 좀 더 낫겠지!’
‘정착지원금도 준다잖아! 아무래도 남북의 국운이 바뀌어도 크게 바뀐 거 아니야? 상승세를 타는 나라에서 살아야 내 인생도 상승세 아니겠어?’
물론, 한국과 제3국 간의 통상적 여행이나 이민, 귀화보다 제한이 상당히 많았지만 그래도 비자발급소로 몰려드는 행렬은 끊이지를 않았다.
이들을 선별하고 심사하는 과정에서 북한 측은 ‘이산가족 비자’를 따로 마련하여 경제적 이민자보다 최우선적으로 입국을 받아들인 건 덤이었다.
그때 (자신들의 상상과는 너무나 다른, 그리고 지금도 달라지고 있는) 평양을 놀란 눈으로 한창 두리번거리는 ‘월북민’들을 정환이 보고 있을 때, 김용건이 다가왔다.
“총서기 동지, 중국 소식 들으셨습네까?”
“들었네. OPEC에 중국이 가입한다고? 압둘라 왕세제가 결국 내 화를 돋울 방법을 찾았나 보군.”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벌써 1달 체류 상호 무비자 협정을 체결했고 군사교류도 넓혀가고 있습네다. 머지않아 메카에 중국군이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습니다.”
“흠, 벌써부터 패권 야욕을 드러내기에 중국은 아직 힘이 많이 부족한데…… 하기야 그걸 자기들이 깨달았다면 덩샤오핑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얼마 전 홍콩을 돌려받고 자국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이 한껏 상승하지 않았겠습니까. 장성택 동지 말로는 이번 일은 장쩌민 총서기 밑의 보시라이 등 태자당 2세들이 주도했다고 합니다. 이번 OPEC 가입으로 크게 이득을 본 시노펙 등 석유회사와 다들 어떤 식으로든 ㅤㄲㅘㄴ시가 닿아있는 게 컸겠지만 말입네다.”
사실을 말하자면 김용건이 말해주기 전에도 정환은 이미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외환위기 협상이 타결된 직후 미국에 있는 대처하고도 통화를 해서 의견을 나눴던 것이다.
영국 총리직을 그만둔 지 꽤 되었지만 그래도 무기력하게 해외 영토를 잃는 건 꽤 가슴이 쓰린지 전화상으로 들려오는 마거릿 대처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짙게 묻어있었다.
-……이제 대영제국은 공식적으로 과거의 일이 되었군요. 다음 세기는 아마 미국과 중국의 시대 일 거에요.
“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더군요. 그나저나 미국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제가 한국의 목줄을 IMF 손아귀에서 채갔다고 고까워하지는 않나요?”
-글쎄요, 이쪽은 분노보다는 놀라움이 커요. 노쓰 코리아에게 퍼줬더니 뒤통수를 맞았다고 월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분노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중국이 OPEC에 가입하려고 협상하는 중이라서 말이에요.
“앨 고어 대통령 덕이 컸습니다. 취임하자마자 지구 온난화를 유발하는 석유 산업 축소를 주장하고 다니셔서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 타 OPEC 회원국들의 미국에 대해 마지막 남은 미련까지 없애주셨죠. 중국이야 지구 온난화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안 쓸 테니 말입니다.”
-아무튼, 좋은 소식이 있어요. 미국 석유산업계 내에서도 앨 고어 대통령이 너무 나간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중국과 사우디가 가까워진 덕분에 북조선이 창설하고 의장국으로 있는 UPEC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거든요. 뭐 그 논리 자체가 우리 재단에서 만들고 홍보한 것이기는 하지만…….
“노고에 대해서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곧 있을 한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사 연설을 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유민중 대통령은 서구권에서도 유명한 민주주의 투사인 만큼 재단 홍보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다리를 놓아드리겠습니다.”
-영광으로 알고 받아들이죠. 아무튼, 미국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총서기님께서는 운이 참 좋으시군요. 중국을 견제하는 지정학적 위치와 석유 매장량 덕분에, 미국 워싱턴 내에서도 총서기님의 원조, IMF 사보타주 행위를 그냥 덮고 넘어가자는 분위기에요. 어쨌든 노쓰나 사우쓰나 둘 다 우방국인데, 우방국끼리 서로 도왔다고 비난하는 것도 우습고요.
“……심려가 깊어 보이십니다. 총서기 동지.”
“아니, 아니야, 김 외무상. 오늘처럼 좋은 날에 무슨.”
정환은 자신을 걱정하는 김용건의 깊은 생각에서 깨어나 고개를 흔들었다.
먼 미래의 일은 지금 당장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 있다.
지금의 자신이, 그리고 이 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단결하고 힘을 축적하여 내외부의 도전 모두를 이겨낼 수 있게 준비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끝없이 이어질 날들에서 잠시 쉬어가는, 얼마 안 되는 귀중한 기쁨의 날 아닌가.
“그럼 시작하지. 계획이 뭔가?”
“저기 맨 앞줄에 애 셋과 함께 앉아있는 아주마이 보이십네까? 이번 남조선 외환 유출 사태에서 가장이 자결하고 자식들과 함께 북으로 건너온 녀성 동무입네다. 동지께서 저 동무를 지목해서 위로사를 건네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현 부장 동무가 제의했습니다.”
오늘 (입국, 완공 모두) 기념식은 체제선전의 의미도 컸기에, 선전선동부에서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각본을 짜왔다.
식순에 축사는 물론이고 누가 언제 일어나서 발언할지까지 선전선동부는 날이 갈수록 첨단화되는 기법으로 전부 심혈을 들여 계획해 놓은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 역사적인 이산가족 상봉(겸 월북 권유) 행사는 전부 생중계로 한국 공영방송에도 송출된다.
“좋아. 그럼 한 번 해볼까?”
정환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로 다가갔다.
2월의 차가운 평양 공기를 들이마시자 식장 앞줄부터 뒷줄까지 빼곡하게 들어 앉아있는 사람들이 빠짐없이 보였다.
귀빈석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 소문의 젊은 북한 총서기를 은밀하게 곁눈질하던 좌중들은 그가 일어나서 연단으로 향하자 일순간에 숨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침묵 속에서, 정환은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사랑하는 남북조선의 인민 여러분!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과 마주 앉으니 지난 우리 민족을 갈라놓았던 분단과 대립의 세월이 무망하게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와아아아아아!”
북조선 인민들 중심으로 너나 할 거 없이 식장을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이런 날을 기다려 왔단 말인가.
그런 감정이 그들의 얼굴과 주름살, 눈빛에 구석구석 묻어나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그런데 그 광경이 눈에 들어오자,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정환은 갑자기 계획에 없던 행동을 하고 싶어졌다.
“이 자리에는 다들 알다시피 전과 다르게 남조선 인민 여러분이 많이 자리하고 앉아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조선로동당을 대표하는 일꾼인 저와 대담을 나눠보면 어떻겠나 싶습니다. 거기 중간 줄에 앉은 동무. 일어나서 한 번 본인에 대해 말해보도록 하시오.”
“……저, 저 말입니까?”
“……!”
갑작스러운 지도자의 돌발행동에 귀빈석에 앉아있던 당 간부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전혀 사전 통보를 받지 않은 듯한 그 중년 남성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전달된 마이크를 잡고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저, 저는 서울에서 수출입 회사에 다니던 사람입니다. 이번에 외환위기를 맞아 다니던 회사가 망하는 바람에 가정도 풍비박산이 나고 새 출발을 해볼까 싶어 아버지 고향으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고향이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시오.”
“그게…… 저희 아버지는 이북…… 그러니까 여기 함경도 원산 출신이십니다.”
“그런데 왜 이남에서 살게 된 거요?”
“에에에…… 육이오 때 참전하셨다가 월남해서 부산에 눌러앉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국군, 아, 아니, 한국군…… 아니, 남조선군 쪽으로요. 그분이 원체 빨갱이…… 아차차! 공산당을 많이 싫어하셨거든요. 아니, 아니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
순식간에 식장 분위기는 차가워지다 못해 숫제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당 간부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살인 날 표정이었고 말을 꺼낸 남성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얼굴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현영숙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방송을 끊으라고 수신호를 보내려던 찰나, 정환은 조용히 손짓으로 그걸 제지 시키고 다시 물었다.
“……그렇소? 그럼 왜 하필 새 출발을 할 장소를 이 북조선으로 고른 건지 설명해보시오.”
“그게…… 아버지는 국가 유공자셨는데 솔직히 굉장히 어렵게 사셨습니다. 부산에서도 판자촌에 사시면서 저를 대학까지 보내시느라 죽도록 고생만 하셨죠. 금성화랑무공훈장까지 받은 분이셨는데 돌아가실 때 나라에서 아무도 나와보지 않더군요.”
“…….”
한 번 트인 말문은 마치 급물살을 타듯 조금씩 빨라지고 격해져 갔다.
방금 전 더듬거리며 말하던 남성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울분까지 섞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속에 항상 나라에 한이 맺혀 있었는데 이번 외환위기 겪으면서 결심이 섰습니다. 사원들은 며칠째 임금이 밀려서 집에 빈손으로 돌아가는데 고려일보 같은 신문에서는 이번 위기가 국민의 사치 때문이니 과도한 외환 소비 때문이니 하면서 책임을 돌리더군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놈의 나라에서는 이제 죽어도 더 못 살겠다고요.”
“그래서 결단을 내린 거요?”
“그렇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래도 북한은 아니지 않냐, 거기는 자유가 없는 나라다, 공산당에 찬동하는 거냐 말렸지만, 솔직히 자유니 이념이니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저 같은 서민들이 무슨 상관입니까? 나라가 국민을 세금 낸 만큼 지켜주고 먹여줘야지, 세금 내고 군대 갈 때만 이 나라 국민이고 더 뜯어낼 거 없으면 그때부터는 남의 나라 국민이란 말입니까?”
“참으로 지당한 말이로군. 잘 생각했소, 동무.”
고개를 끄덕인 정환은 성큼성큼 연단에서 내려와 의자의 바다를 건너 남성에게로 다가갔다.
수천 명의 시선과 카메라가 그에게 집중된 가운데, 김정환 총서기는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온 것을 환영하오, 동무.”
그리고 그날로부터 3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