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177화 (177/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177화

“……지금 쿠데타를 일으키시겠다는 겁니까? 이 시국에?”

“이 시국이니까 하는 거지. 그리고 쿠데타라니? 우리는 박세황 그 미치광이가 이 나라의 피와 살을 저 북한 빨갱이 애송이에게 송두리째 팔아넘기기 전에 멈추려는 거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말이야!”

쿠데타 맞네, 뭘.

박이삼은 화가 난다기보다는 허탈해서 힘이 탁 풀릴 지경이었다.

입으로는 구국의 결단이네 뭐니 말하지만 그들의 의도가 너무 쉽게 짐작되어서였다.

그들, 내란음모자들 사이에 껴있는 몇몇은 지난 박이삼의 정권 초 하나회 숙청 때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3당 합당을 과정에서 저쪽의 입장을 고려하네 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네 어쩌네 하면서 예편의 칼날을 피해간 자들이었는데…….

지금 임기 말 레임덕 현상에 명분까지 갖추어지자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박이삼 입장에서 보기에도 지금이 쿠데타에 필수적인 명분을 확보하기에는 최적기인 게 사실이었다.

원화 가치가 폭락하고 현 대통령이 북한에게 돈을 빌리러 한국은행 총재를 평양으로 보내는 이 막장 상황보다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나라를 북한에 팔아먹으려 하니 끌어내린다.’라는 명분이 더 힘을 얻는 때가 어디 있겠는가?

“그동안 박이삼이를 포함한 민자당계는 문민정부니 OECD 가입이니 뭐니 하면서 나라를 망쳐왔네. 우리가 거사에 성공하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두 분 전 대통령을 풀어드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대한민국에 망조가 드는 일을 목숨 걸고 막을 걸세.”

“……일단 들어나 보고 싶습니다. 그 거사라는 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하실 계획입니까?”

박세황은 그들이 입을 다물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안기부장은 순순히 자신들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얼마 후 있을 대선이 치러지기 전에 신속하게 군을 움직여야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상 빨갱이 유민중이가 당선되면 군과 안기부부터 청산해버리려 할 테니까. 이미 이 이야기를 들은 전방 부대의 뜻있는 지휘관 여러 명은 우리 편일세.”

“……박 대통령님이 그렇게 솎아냈는데도 아직 그런 사람이 남아있었군요.”

“아직 군에는 유민중이가 군 통수권을 쥐는 사태에 대해 거부감이 심한 친구들이 많거든. 게다가 애국자라면 작금의 이 나라 상황에 대해 어떻게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나? 문민 통제는 나라 말아먹는 길이라고! 예전 유신 시절처럼 강력한 리더쉽이 있었다면 이 나라가 북한에 굴복하는 일이 없었을 거라 이 말이야!”

군 고위 장성쯤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생각만 해도 기가 찬다는 듯 분노한 목소리로 울화를 터트렸다.

뭐라 대답을 하려던 찰나, ‘대선’이라는 말을 들은 박세황의 뇌리에 뭔가가 지나갔다.

“대선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뭉개고 가기는 어려울 텐데…… 혹시 현 대선 후보 중에 이 사태를 알고 있는…… 아니, 동조한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이현창 후보가?”

“이 나라는 북괴 놈들 독재 왕국과는 다르니까 선거를 하기는 해야겠지. 거사가 성공하고 사태가 좀 진정되면, 그때 다시 계엄령 하에 기표소를 열고 대선을 하면 될 거야. 물론 국민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우리가 좀 도와줘야 하겠지만.”

그러니까 관권선거를 하겠다 그거로군.

그들조차도 이런 시국에서도, 그리고 설령 쿠데타가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대통령 직선제라는 시대의 변화에 익숙해진 국민을 완전히 입 다물게 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리고 미묘하게 불쾌감이 섞여 있는 안기부장의 호통을 듣자마자 박세황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대선 후보 중 누가 이 쿠데타에 동조하고 있는지도.

“김준필 후보입니까? 이현창 후보는 끌어들이는 데 실패하신 모양이군요?”

“……전 대통령님 두 분을 사면해준다고 해서 우리처럼 사상적으로 건전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우리가 사람을 잘못 봤어.”

의원 중 한 명이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며 그렇게만 뇌까렸지만, 그건 완곡한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쿠데타를 결의하고 인원을 모으자마자 ‘옹립’시킬 사람으로 이현창을 낙점하고 극비리에 그를 방문하여 그런 뜻을 슬쩍 내비쳤지만, 이현창 쪽에서 거절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일언지하에.

지금 나보고 특정 세력의 꼭두각시가 되라는 겁니까? 그 아까부터 멸사봉공의 각오 운운하시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저는 오로지 원칙을 지킨 합법적 선거로 승리해서 청와대에 들어갈 것이니, 이상한 권유하지 마십시오!

결국 그들이 찾아간 것은 김준필이었다.

군사정부 출신에, 이현창이나 유민중처럼 여야 어느 한쪽에서 열렬히 지지받는 것도 아니라 이도 저도 아닌 그라면 자기들의 옹립 제안을 받아들 거라고 생각했고, 이번에는 그 예상이 들어맞았다.

단, 계산에 능한 김준필답게 직접적으로 연관되면 위험성이 너무 크니 그저 알고만 있다가 쿠데타가 성공하고 쌀이 익어 밥이 될 때쯤에서야 대안으로 공개적으로 등판하겠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제 알 만큼 알았지만, 박세황에게는 아직 궁금한 점이 남았다.

그리고 그 문제야말로 현재 그의 가슴을 장악한 불길함의 진원지였다.

“미국이야 거사 후에는 어차피 자기들 요구조건을 잘 받아들이는 쪽을 인정할 걸세. 박이삼 대통령 아니, 전(前) 대통령이 IMF가 아닌 북한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다는 사실을 공표하고 그쪽 구조조정안을 통 크게 받아들이면 미국도 우리를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할 테지.”

“……그럼 제 역할은 뭡니까? 저에게 뭘 시키시려고 여기로 부르신 건지…….”

박세황이 조심스럽게 묻자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이번에도 안기부장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번 거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네.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는 역할이라고나 할까.”

“……진실이요?”

“알겠지만 현재로서 북의 제안은 알고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네. 공식적 접촉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외교 전문이 오간 것도 아니니, 그런 제안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내용을 증명해줄 사람은 북한 지도자를 제외하면 특사인 자네 하나뿐인 셈이지.”

“…….”

“거사가 성공하면, 자네가 방송에 나와서 북측 제안에 대해 이렇게 말해줘야겠네. 북측에서 차관을 해주는 대가로 국군을 절반으로 감축하고 한미군사동맹을 파기하라고 요구했다고. 그 밖에 차관 조건이나 액수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손질을 좀 해서 말해줘야겠네.”

여기까지 말한 후 안기부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뒤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북측이 선호하는 유력 대선 후보인 유민중과도 사전 접촉을 하려 했다고도 해야겠지. 그리고 유민중이 그 제안을 크게 환영하고 자기가 대통령이 되도록 도와주면 그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고도. 자네는 그 광경을 보고 마음속에서 가책이 일어 양심선언을 하러 카메라 앞에 나섰다고 하면 되겠군.”

여기까지 듣자 박세황은 지금 이 쿠데타 모의에서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그리고 자기가 처한 상황이 외통수라는 것도.

왜냐면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할 쿠데타 계획을 이렇게 물어보는 대로 술술 알려준다는 건…….

“이렇게 모든 걸 다 알려주신다는 이야기는 제가 거부하면 이 건물에서 걸어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로군요.”

“그렇게 됐네. 하지만 나는 북측으로 가기 전부터 항상 박세황 자네가 이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진정한 애국자임을 잘 알고 있었지. 그러니 현명한 선택을 내릴 거라 믿네.”

“아, 박 요원, 고민할 게 뭐 있습니까? 이 대한민국을 국난에서 구해내는 일이에요! 집에 가족이 있다고 들었는데 자식들이 아버지가 내린 결단을 들으면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여당 의원과 장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지만, 그 말은 박세황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소가죽 구두를 신은 자신의 발과 시멘트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으려는 듯 발 뒷굽에 힘을 주고 고개를 다시 쳐들었다.

3일 전 박이삼이 그랬던 것처럼, 박세황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결정을 내리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것은 바로 가족들의 얼굴이었다.

“부장님, 저는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내 그럴 줄 알았네! 자네가 올바른 선택할 줄 알았어! 약속건대 잘만 협조해주면 이 모든 애국심에 대한 보상을 톡톡히……!”

“……저는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실제로 저는 직장을 잃고, 가족을 떠나고, 죽을 가능성이 높은 북파공작을 맡았을 때도 군말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이게 맞았다.

흑금성, 아니 박세황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기부장과 일당들에게 결론을 내려주었다.

“……그게 제가 이 나라를 위해 모함하거나 거짓말할 거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익!!”

순식간에 방 안 공기가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안기부장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고 일부는 벌써부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안기부장이 다시 입을 열어 으르렁거렸다.

“……아무래도 북에 오래 있다 보니 좌우가 흐릿해지고 나쁜 물이 든 모양이군. 그럴 수 있지.”

“…….”

“그러니 자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기까지 여기 있어 줘야겠네. 식구들은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여기로 데려와서 같이 있게 할 테니까. 뭣들 하나? 끌고 가.”

방 밖에 대기하고 있던 안기부 요원 몇이 들어와 박세황의 팔을 양쪽에서 붙들고 그의 등을 떼밀었다.

질질 끌리다시피 방을 나서면서 박세황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모자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일단 주요 국도와 서울부터 장악해야 합니다. 기계화보병사단을 휴전선에서 빼고 공수특전여단으로 서울로 들어오는 모든 IC와 톨게이트를 차단하시죠.”

“국회는 어떻게 할까요?”

“일단 여당 의원들은 여기 오 의원님, 허 의원님, 장 의원님이 설득해 주시고…… 야당 의원들은 다 가택에 연금시키고 시간을 들여야 하지 않겠어요? 일단 북측 국채 수작의 위험성이 잘 알려지면 보수단체와 고려일보를 중심으로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친 애국 여론이 일어날 겁니다.”

“수도방위 사령부에도 우리 사람이 많습니다. 방송국과 언론사 점거는 그쪽 병력을 통해서 하시는 게…….”

두런두런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박세황은 엉거주춤 끌려가면서도 다시 자기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이걸 받았을 때는 찜찜했지만, 이제는 믿고 의지할 곳이 이것밖에는 없었다.

* * *

“총서기 동지! 남조선 서울에서 단파 라디오 수신으로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흑금성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듯합니다.”

“……빌어먹을. 이럴 거 같더라니. 백 상장 동무, 유 소좌, 지금 휴전선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남조선군 병력 중 휴전선을 경계하던 땅크 부대 몇 개가 급히 이동을 시작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네다. 일정과 규모, 편제가 통상적인 훈련과 전혀 다른 거이를 보아하면…… 아무래도 동지께서 우려하시던 일이 일어나고 있는 듯합네다.”

한편, 서울에서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 평양에서 박이삼의 답을 기다리고 있던 정환은 설마 하던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다는 보고를 전달한 유혜림과 백승철의 말을 듣고 입술을 씹었다.

메신저를 하나로 줄이는 건 그만큼 기밀 누설의 위험성이 줄어들지만, 동시에 한 가지 위험성이 더 생긴다.

바로 그 메신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면 기밀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태를 우려한 정환은 흑금성, 박세황을 서울로 돌려보내기 전에 보험을 하나 들어두었다.

“지금 흑금성의 위치는 어디지?”

“서울 모처 안기부 안가인 듯합네다. 이미 저희 총국 남파 요원들이 감시하고 있습네다만, 며칠 전 승합차가 오가더니 갑자기 감호 병력이 불어나고 경비 태세가 삼엄해졌다고 합네다. 아무래도 흑금성 박세황이가 그곳에 연금되어 있는 거이 확실합네다.”

북조선 대외정찰총국에서 박세황의 신변 이상과 위급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는데, 바로 정환이 그에게 선물로 준 소가죽 구두에 비밀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고급 수제구두였지만, 사실 그 정체는 잘 위장된 소형 단파 라디오 발신기로, 뒷굽을 세게 누르면 사전에 지정해둔 메시지가 평양 정찰총국까지 날아오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위치추적까지 가능해서 정환은 박세황이 현재 자기 집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3일째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다는 걸 알고 그가 연금 상태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휴전선에서 병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그것도 북쪽이 아니라 서울로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까지 받자 정환은 결단을 내렸다.

지금은 한국 내 북조선의 첩보 작전 능력이 노출되고 어쩌고를 고민할 계제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리종수 동무에게 연락해서 정찰총국 남파 공작원 중 특급 전사들을 선별해서 구출 작전을 실행하도록. 최대한 정체를 감추되 첩보 자원을 아끼지 말게. 최고지도자의 이름으로 모든 허가를 내려주지.”

“즉시 실행하도록 하갔습네다!”

“그리고 이걸 명심하게. 구출 작전 중 남조선 안기부 측 인원이 단 한 명도 죽거나 다치면 안 되네. 어려운 요구라는 건 알지만, 남조선 안기부의 여론 선동을 사실로 만들어줄 여지를 주면 안 되니까.”

그렇게 해서 제6공화국 수립 이래 두 번째, 헌정 사상 열한 번째 쿠데타 기도를 한국 민선 정부도 아니고 북조선 대외정찰총국이 막아야 한다는 초유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국제신용등급 평가사 S&P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다섯 단계나 하향 조정해서 ‘투자 주의’ 등급으로 강등시켰다.

외환보유액이 20억 달러 미만으로 떨어졌는데도 한국 정부가 IMF와의 협상에 거의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한국의 경제적, 정치적 파국이 목전까지 들이닥친 상황에서, 북한 대외정찰총국은 서기실의 승인을 받아 서울에서의 해외 공작, ‘북한산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남북한 간 ‘빅 딜’의 메신저이자 증인인 흑금성, 박세황을 구출해서 비밀리에 남조선 당국에 인계하는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