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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175화 (175/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175화

“…….”

회의실 전체에 죽음과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박이삼의 어조가 겉으로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 담긴 말 못할 고뇌와 비통함이 서려 있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박세황이 북한 총서기의 메시지를 들고 휴전선을 넘어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서울로 들어왔을 때, 그리고 그 메시지가 현재의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북한의 차관 제의라는 것을 알게 된 직후, 박이삼의 첫 반응은 냉소였다.

지금 불난 집에 기름 끼얹자는 건가? 그 총서기라는 친구, 똑똑한 줄 알았는데 설마 그걸 우리 측에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내 예상이 틀렸군요.

우리나라가 지금 전례 없는 위기상황이기는 하지만 넘어진 사람 걷어차는 북측의 유치한 조롱까지 들어줄 시간은 없어요.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곧이어 박세황이 김정환 총서기가 내건 자세한 조건과 액수를 듣고 나자, 박이삼은 그제야 이 제의가 북한의 기만이나 프로파간다가 아닌, 진지한 제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 이제까지 박세황이 가져온 북한 내 정보들의 신용도와 질만 봐도 그의 말을 단순한 허언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북한 최고지도자는 정말로 이 위기에 손을 내밀어줄 의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차관에 걸린 조건이었다.

“다시 한번 정리를 해봅시다. IMF 구제 금융과 북한의 긴급 차관에 각각 달린 조건이 뭐라고요?”

이미 수십 번 반복해서 거의 외울 정도로 알고 있는 조건이었지만, 박이삼은 반복하면 그 조건이 바뀌기라도 할 듯 재정경제원 장관에게 재방송을 요청했다.

그러자 입각한 지 얼마 안 된 장관이 마치 자기 잘못인 양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조건을 읊었다.

전 장관은 바로 며칠 전 이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IMF 측은 210억 달러의 1차 구제 금융을 대가로 금리를 30%까지 올릴 것, 시장경쟁을 활성화하고 중복 과잉투자를 막기 위해 민간 분야 기업들을 구조 조정할 것…… 그리고 공공부문 민영화 등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구제금융을 제공할 수 없다 이 말입니까?”

“IMF 측에서 ‘관리 체제 동안 채무상환을 위해 적절한 조치를 이행하려는 의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돌려 말하기는 했습니다만…… 사실상 그렇습니다.”

“허허 참…….”

몇 번을 들어도 현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박이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말 그대로 빚을 볼모로 한 6년 간의 경제적 식민지화다.

돈을 확실하게 갚을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해야만, 혹은 갚을 노력을 보여야지만 돈을 빌려주겠다는 거 아닌가.

채권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건일지 몰라도, 빚을 진 채무자 입장에서는 사실상 빚을 미끼로 경제 주권을 앗아가겠다는 것으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애초에 이 궁지까지 오지 않도록 외환과 대기업들을 잘 관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리고 나라가 이 지경까지 오는데, 박이삼 본인의 실책과 오판이 만만치 않은 공헌을 했다는 점에서 박이삼은 그야말로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자는 자기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해서 암에 걸렸으니 부작용이 독한 항암제를 놔 준다고 의사를 비난하면 안 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IMF가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정직하고 성실한 의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밖에 다른 조건은?”

“투자 활성화와 외자 유치를 위해 외국인 투자 제한을 폐지할 것…… 한 마디로 금융시장을 개방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는 미국 투자은행들이 들어올 것이고? 그동안 한국의 금융 규제 조치가 비현실적이고 자유 시장경제체제에서 괴리되어 있다고 골드만삭스에서 그렇게 입 아프게 떠들어 대더니…… 결국 소원 성취들을 하겠군.”

박이삼의 넋두리 같은 말에 좌중들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말이야 투자 활성화를 위한 조치라지만 미국 자본의 금융시장 진출을 막는 빗장을 풀고 외국인들이 한국의 알짜 대기업들의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이야기 아닌가.

겉으로는 IMF와 미셸 캉드쉬 총재의 협상안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것만 봐도 이 구제금융 조건 뒤에 미국이 있다는 사실은 일곱 살짜리 아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당장 서울에 여장을 푼 IMF 실무진이 묵고 있는 호텔 같은 건물에 미국 재무부 차관을 포함한 특사단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현 미국 재무부 장관인 로버트 루빈은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공동회장 출신이었다.

이미 IMF로 간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언론은 IMF 총재 미셸 캉드쉬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총독에 비유하면서 갖은 비난을 하고 있었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캉드쉬도 얼굴마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애초에 현재 IMF 기금 최대 출자국이 미국 아닌가, 아마 일본을 비롯해 다른 곳에서 융자를 꾸어 위기를 넘기려 했던 그 모든 시도가 다 무산으로 돌아간 것에도 미국의 압력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IMF 제안은 들었으니 이제 북측 제안을 다시 들어보지요. 그쪽은 뭘 내걸었습니까?”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첫 번째 선택지, 호랑이의 조건을 다 들었으니 이제는 승냥이의 제안을 들을 차례인 것이다.

이 승냥이가 정말로 승냥이에 불과할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지만.

이윽고 장관의 입이 열렸다.

“북측에서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첫째는 1차적으로 240억 달러를 지원하는 대신 한국 정부가 발행한 20년 만기 국채를 북측 국영 투자회사 피오니 홀딩스가 독점적으로 달러를 주고 사들이는 형태로 할 것, 둘째는 3년간 80% 고용 유지를 전제로 부도 위기에 처한 한국 기업들의 지분을 사들일 수 있게 협조해 달라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참 머리 좋은 친구군, 당장 살을 뜯어가는 대신 두고두고 목줄을 채우겠다 그거 아닌가.”

박이삼은 다시 한번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국가가 발행한 국채라는 건 대체로 이율이 낮은 대신 안정성이 높다.

발행 주체가 웬만해서는 부도날 일이 없는 국가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발행한 미국 국채는 금 다음가는 최고 등급 안전 자산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국가의 대외신용도와 직결되는 요소이기도 한데, 국채 상환을 거부하기라도 할 겨우 해당국의 신용도는 그 즉시 바닥으로 추락한다.

특히나 경제 구조가 수출 중심인 한국이 만에 하나 (남북관계 악화든 무슨 이유든) 북한이 가지고 있는 한국 국채 상환을 거부하기라도 할 경우, 신용도에 있어서 액면가 이상의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1차 구제금융을 채권 매입 형식으로 해 준다면 2차에는 현금 지원을 해 준다고 했으니 IMF 측과 비교해보면 그렇게 나쁜 건 아닙니다.”

“그 돈으로 공적 자금 지원받을 기업들 입장에서야 그렇긋지. 나머지도 다시 한번 봅시다. 쌍용과 기아 자동차는 그렇다 치고. LS반도체, 성삼우주항공과 우대중공업까지 가져가겠다는 건데…… 이건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북한이 구제금융을 대가로 제시한 두 번째 조건은, 북한 자금이 한국 주식 시장에 들어오는 것에 대한 규제를 풀고 한국 기업을 인수합병 하는 것을 허용해달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작금의 위기를 맞아 부실로 휘청거리는 상당수 한국 기업들을 당장 사가겠다고까지 제의했는데, 그 범위는 재계 8위 기아 그룹을 휘청거리게 한 기아 자동차 같은 승용차부터 고려 증권 같은 금융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했다.

이 첫 번째 조건보다도 훨씬 논란거리가 될 소지가 있는 두 번째 조건에 대해서는, 박이삼과 참모진들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렸다.

“절대 받아주시면 안 됩니다. 이미 진보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삼당합당에 더해 이 위기를 초래한 대통령님 보고 ‘YS는 민족 최악의 죄인’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여기에 기업들 지분을 북에 팔도록 허가하시면, 얼마 안 남은 보수 지지층까지 등을 돌릴 겁니다!”

“맞습니다!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위기에 처해있다고 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내실을 가꾸면 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될 기업들인데, 이걸 팔아치울 수는 없습니다. 팔거나 이리저리 계열사들을 자르고 붙이고 한다 해도 살려서 우리나라 우리 기업들에게 팔아야 합니다. 김우준 회장의 우대그룹이라던가…….”

첫 번째 조건과는 다르게 이구동성으로 반대하는 장관과 수석들을 보며 박이삼은 잠시 꾹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뭔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의견은 다들 잘 들었습니다만, 지금 우리나라가 이러한 위기에 처한 것도 바로 그 기업인들, 재벌들의 방만 경영과 차입으로 덩치를 불린 전략 때문 아닙니까? 내 말이 틀려요?”

“대통령님, 그건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하던 시절에 자본도 노하우도 없고 그래서…….”

“시멘트 기업이면 시멘트만, 전화기 만드는 기업이면 전화기만 잘해야지, 증권에 자동차에 심지어 리조트나 백화점까지 문어발식으로 손을 대지 않았나? 당장 한보만 해도 무리하게 제철소만 안 지었어도 그 꼴이 나지는 않았을 낀데…….”

“하지만 국민도 기업에 다니며 일자리와 월급을 가져가지 않습니까! 게다가 경제성장기에 기업들뿐만 아니라 국민도 모피코트 사고 비행기 타고 동남아 여행 다니면서 외화를 써서 이 위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고…….”

“아, 시끄러워! 성장기에야 그런 전략이 통했다손 쳐도, 결국 따지고 보면 그게 다 기업 하는 양반들 욕심에서 비롯된 건데 그로 인해 초래된 고통을 애먼 국민이 왜 져야 한다는 말인가? 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도 자기들 경영권과 지분은 꼭 틀어쥐고 못 내놓겠다, 이 말이야?”

드디어 노성이 터졌다.

참고 참던 대통령의 노기에 장관과 보좌관들은 입을 다물었지만, 대통령의 말에 승복한 건 아니었는지 몇몇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분기가 잠시 가라앉은 박이삼은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다시 냉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대부분 덩치만 키우고 설비에 공장만 늘린 거품 기업, 어차피 외국인 투자 제한을 내리면 양키들에게 팔려나가 난도질당하고 단물만 빨아먹힐 거요. 애초에 IMF도 중복투자를 줄이라고 했으니 북에서 고용이라도 당분간 유지해준다는 건 다행으로 알아야 합니다. 다 내줄 수는 없다고 해도 저쪽과 협상을 해볼 만하지.”

“……그렇다면 대통령님, 그 말씀은 IMF가 아니라 북쪽 총서기 제안에 더 무게를 두고 진지하게 고려해보시겠다는 겁니까?”

박이삼에 맞선 장관과 보좌관, 수석들의 반격은 정면 공격이 아니라 우회 공격이었다.

그 유명한 박이삼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직속 상관의 마음이 이미 기울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다른 방면으로 전략을 바꿨다.

사실, 임기 말 대통령에게 북한 측이 접촉해 왔을 때부터 진작에 나왔어야 할 지적이지만 언제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을 정하기는 어려운 법이니까.

“어느 모로 보나 북측 제안이 훨씬 우리 국익과 미래에 도움이 되는데 고민해보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국익을 떠나 정무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대통령님. 근래 북측이 크게 바뀌었다고 해도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와 불구대천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렇게 적대적이 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지만 그런 예측 불가능인 북에 손을 벌리면…… 이런 말씀 드리기 대단히 외람됩니다만…….”

“……저 박이삼이가 자손 3대에 걸쳐 욕을 먹는다 이 말입니까? 그건 이미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이미 백번 넘게 먹은 만고역적, 죽일 놈 소리 몇 번 더 듣는다고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제가 욕을 먹더라도 일단 이 국난을 극복하고 장기적으로 나라를 살리는 게 우선 아닙니까.”

“욕을 먹는 정도가 아닐 겁니다. 대통령님. 이 기업들은 우리 산업의 경쟁력이고 노동자들, 기업가들의 피땀이며 노력의 결정체입니다. 게다가 금융업 같은 건 제쳐놓는다고 해도, 기아, 쌍용 같은 자동차나 항공 분야는 군수산업과도 직결되어 있는데 잠재적 적국의 탱크와 전투기 생산 능력을 강화시켜 주자는 말씀이십니까?”

“…….”

“혹시 먼 미래에라도, 만약 우리나라 제철 기술이 들어간 북의 포탄이 우리 영토나 영해에 떨어지게 되면 그때 후손들이 대통령님의 지금 이 결단을 떠올리며 대통령님을 욕할 겁니다. 그걸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후 장관들은 슬쩍 대통령의 눈치를 살핀 후 반론이 먹혀들어 가는 거 같자 이내 그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최선의 방책을 제시했다.

그들도 이 수라장 같은 한국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른 사람들이다.

임기 종료를 한 달여 앞둔 대통령이 이런 퇴로를 거부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전임자에 대한 정치적 보복과 복수가 줄을 잇는 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더더욱.

“저희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 오명을 각하께서 굳이 짊어지실 필요는 없단 말입니다. 시간을 끄시죠.”

“……뭐라구요? 당신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각하…… 이건 어디로 가던 죽는 판입니다. IMF 안을 받으면 죽을 때까지 욕을 먹을 것이고, 북한 총서기 안을 받으면 죽은 후까지 욕을 먹으실 겁니다. 유민중이든 이현창이든 후임 대통령이 결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봐야 한 달 후입니다.”

“이보세요들……! 지금 이 대한민국은 죽느냐 사느냐하는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이미 자살자가 속출하고 집과 직장을 잃고 한강에서 노숙자로 살아가는 가장들이 있습니다. 북이든 IMF든 한시라도 빨리 구제금융을 받는 게 그런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줄이는…….”

“대통령님, 어렵게 생각하실 거 없습니다. 어차피 그 사람들을 각하께서 다 구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미 사태는 발생했고 흐른 피를 다시 주워 담아 몸에 집어넣을 수는 없다 이 말씀을 드리려 하는 겁니다. 제발, 주군(主君)의 안위를 생각하는 저희를 봐서라도 퇴임 후를 생각해주십시오.”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이 말이 박이삼의 가슴을 때리고 지나갔다.

지금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역사책에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기록될지가 결정된다.

나라를 구할 위대한 영단을 내린 지도자가 되느냐, 아니면 이완용 이래 최악의 매국노가 되느냐.

박이삼의 이마에는 그의 고뇌를 대변하듯 땀방울이 맺혀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 국가와 박이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회의가 시작되기 전처럼 다시 죽음 같은 침묵이 이어진 지 몇 분이 흘렀을까, 이내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보세요, 흑금성…… 아니, 박세황 요원이라고 했습니까? 그쪽이 보기에는 어떤가요? 보좌진, 장관들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이제까지 들을 만큼 들었으니 그 쪽에게도 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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