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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173화 (173/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173화

박세황과 김정환 총서기의 만남으로부터 대략 10초 전.

“들어가시오. 박 선생. 총서기 동지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아이고, 금생에 다시 없을 영광입니다. 이거.”

호들갑을 떨며 서기실로 들어간 박세황은 입으로는 이런 말을 주워섬기면서도 속으로는 전신에 바짝 힘을 주었다.

첩보 임무로 파견된 북에서 자신의 보직이 갑자기 변경되어, 그러니까 북한 권력의 최중심부 서기실과 훨씬 더 가까운 곳으로 재배치된 게 몇 달 전이었다.

자신의 제1 목표가 한국에 가장 큰 경제적 위협이 될 북한의 유전에 대한 조사와 정보수집이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신상정보 대부분이 베일에 가려진 북한의 최고지도자에 대해 알아내는 것이기도 했던 박세황으로서는 믿기 힘들만큼의 행운이었다.

서기실과 직통 연결되는 공보담당이라니, 처음에는 이 엄청난 기회에 살짝 의심도 들었지만 이내 정보수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자 그런 생각도 곧 사라졌다.

서기실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는 전부 하나 같이 북조선 최고 핵심부 인사들이나 알 수 있는 정보, 총서기의 동향이나 피오니 홀딩스 내년도 투자 포트폴리오처럼 극비 정보였고, 그렇게 알아낸 내부정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 정책으로 옮겨져 교차검증을 할 수 있었다.

얼마 전 한국 국방부를 1급 경계 태세에 빠트린 ‘조선인민군 8대 과업’도 박세황 그가 수집해서 보고하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첩보 성과였다.

이렇게 고급 정보를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운 좋게 가게 된 것에 박세황 본인도 혹시 이건 북한 측의 역공작 같은 게 아닐까 한 번 정도 의심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그 의심을 접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최고 존엄의 교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받드는 서기실이다.

북한에서 최고 존엄이 어떤 존재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간첩으로 의심되는 자를 최고 존엄 옆에 배치한다는 말인가?

실수로라도 그런 명령을 내렸다가 ‘하늘이 점지해준 민족 절세 위인’ 김정환 총서기의 신상에 무슨 위해라도 가면 해당 책임자는 삼족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데에 박세황은 자기 직을 걸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첩보 활동에 여념이 없던 날, 뜬금없이 서기실에서 자신을 소환한 것이다.

무려 자신의 제1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최고 존엄, 살아있는 신,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김일성 주석님만큼, 어쩌면 그 이상의 민족적 위인’이라고 칭송을 듣고 있는 북한 최고지도자가 직접.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잔뜩 긴장해서 서기실로 소환된 박세황이 듣게 된, 사진과 김정환 총서기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충격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남조선에서 온 박세황이라는 비즈니스맨입니다. 이렇게 민족의 만고 위인인 김 총서기님을 뵙게 되어 다시 없을 영광…….”

“초면이지만 피곤하니까 서로 잡아떼는 건 그만두도록 합시다, 박세황 선생.”

“……네?”

“박세황 아니, 흑금성이라 불러드릴까? 남측에 가서 박이삼 남조선 대통령에게 내 말을 하나 전해줬으면 하는데.”

“……!”

정환의 차분한 목소리가 고막을 지나 뇌에 닿자 어떻게 아부를 해야 목적을 빨리 달성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박세황의 등골에 얼음물을 확 뒤집어쓴 듯 싸늘한 기운이 달렸다.

정환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태연자약 했지만, 그 속에 담긴 암시는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답게 흑금성 아니, 박세황은 기적적으로 침착을 찾고 일단 부인해보기로 했다.

“죄송합니다만, 총서기님. 저는 도통 총서기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박세황, 남조선 안기부에서 대북 실장으로 있다가 신분세탁을 겸해 안기부를 나와 성삼 그룹에 위장 취업했지. 애들은 둘이고 둘 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 내가 서로 피곤하게 부인하고 추궁하는 일은 그만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쯤이면 눈치챘으리라 생각하지만, 그쪽이 공화국에 들어올 때부터 우리 총국에서는 선생의 정체와 목적을 전부 알고 있었습니다.”

‘……씨팔, 망했군. 미안하다, 얘들아. 이 아빠는 너희들을 고아로 만들어야겠구나.’

정체가 탄로 난 게 확실해지자 박세황은 잠시 눈앞이 흐릿해지는 거 같았다.

벌써부터 교화소의 철조망과 군견, 강제노동 그리고 자식과 가족들의 얼굴이 손에 잡힐 듯 뚜렷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의 머리는 좀 다른 쪽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럼 왜 나를 진작에 체포하지 않았지? 그리고 오늘 이 자리는 대체 뭐야?’

죽을 때 죽더라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공화국에서 눈에 띄자마자 박멸해야 할 대상인 반동분자 중 반동분자, 남조선 간첩인 자신이 왜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심지어 김정환 총서기와 독대하고 있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박세황은 짚이는 게 없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제가 한국 안기부에 가져다준 정보는 다 그쪽에서 의도적으로 흘려주신 것들이겠군요.”

“물론이지.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동무라 좋군.”

“그럼 오늘 이 자리는 저에게 전향을 요구하기 위해서입니까? 다시 한국에 돌아가 이 북조선의 이중간첩이 되라고? 하지만 북한 최고지도자께서 그런 잡무를 왜 굳이 손수 하시는지 저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박세황은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추측을 말해봤지만, 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맞아. 내가 오늘 이 자리에 박 선생을 부른 건 그리고 그동안 우리 내부정보를 조금씩 흘려 줘가며 그쪽의 입지를 높여준 건, 아까도 말했지만, 박세황 선생이 남조선 대통령에게 정식 외교 채널로는 전할 수 없는 말을 하기 위해서요.”

“……정식 외교 채널로 전할 수 없는 말이라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그리고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이 현재 겪고 있는 건국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를 타개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240억 달러의 차관을 포함한 경제적 원조를 제공할 의사가 있소.”

* * *

“동지들, 이제 남조선과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외교를 할 기회가 왔소.”

박세황과의 만남으로부터 열흘쯤 전, 정환이 남조선 시국을 논하기 위해 급하게 소집된 정치국 회의석상에서 시작하자마자 툭 내뱉은 한 마디였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다시피, 그의 말에 당군정 할 것 없이 모든 위원의 얼굴에 각기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그 말씀은……?”

“남조선이 요즘 달러가 많이 부족하다지? 한 핏줄로서 같은 민족의 위기를 그냥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차관을 해주는 것을 검토해보도록 하시오.”

“총서기 동지, 지금 남조선의 경제위기를 리용하여 풍부한 외환을 무기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자는 전략은 이해하갔습네다만…… 뜻이 그러시다면 먼저 제의하지 마시고 완전히 망할 때까지 그냥 놔두는 게 좋지 않갔습네까?”

“그냥 빌려주자는 게 아닐세. 조건을 붙여야겠지.”

“죽을 위기에 처한 남조선을 구해주는데 그기야 당연한 거이지만…… 물에 빠진 개는 구해주지 말고 막대기로 두드리랬다고. 남조선 수뇌부들이 저희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공화국과 총서기 동지의 위엄이 땅으로 추락할 것입네다. 차라리 이대로 일이 년만 더 사태를 관망하시면 남조선 인민들이 알아서 휴전선을 넘어 살길을 찾아 우리 공화국으로 대거 망명하디 않갔습네까? 급한 건 남조선이지 우리 공화국이 아닙네다.”

왜 귀중한 우리 외화를 남조선에게 퍼주느냐, 그리고 저쪽이 순순히 자기 경제 통제권을 넘기겠느냐? 하는 뜻이 담긴 대외경제위원장 장성택의 완곡한 이의 표시이었지만, 당연히 정환의 생각은 달랐다.

어느 의미에서는 이것도 일종의 경쟁이었기 때문이다.

향후 몇 년간 한국의 경제 주권을 틀어쥘 지대한 영향력을 누가 먼저 가져오느냐 하는 경쟁.

그리고 현재 조선인민공화국의 경쟁 상대는 당연히…….

“이 상황에서는 먼저 제의한다고 약세를 보이는 게 아닐세. 남조선 동무들은 우리보다 먼저 외환을 꾸기 위해 찾아갈 곳이 있으니까.”

“미국을 말씀하시는 거이라면, 글씨요, 부시 전 대통령이라면 우방에 대한 우의를 봐서라도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갔지만 얼마 전 앨 고어인가 하는 민주당 후보가 미 대통령 보위에 올랐는데 기건…….”

“미국이라, 틀린 말은 아니군. 현재 그 국제기구에 가장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누가 뭐래도 미국이니까.”

“……! 총서기 동지께서는 IMF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이번에 정환의 의중을 먼저 짐작한 것은 역시 장성택이 아니라 국제금융에서 잔뼈가 굵은 최승일이었다.

IMF!

연구원 시절 지겹게 연구했던 그 국제금융 최후의 보루, 혹은 불난 집에 기름 붓는 악마라는 상반된 평가를 들어왔던 기관이 드디어 한반도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니 정환은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자신이 북조선의 지도자로 취임한 지 10년 만에 역사를 바꿀 큰 분기점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이라, 제가 공부하고 직접 경험한 바로는 이제까지 금융 난리를 수습한 적보다 더 키운 전적이 많은 놈인 걸로 알고 있습네다만. 이번이라고 별다를 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네다.”

“그렇지. 터진 상처를 기워준 대가로 장기 몇 개 뜯어가는 놈들답게 남조선 수뇌부에게 구제금융을 대가로 자기들 관리 체제 하에서 가혹한 조건을 요구하겠지. 금융법 개정, 금리 인상, 민영화 그리고 무엇보다 기업 구조조정,”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 청년 실업과 3포 세상이 오는 거지, 하고 정환은 자기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스스로 자조했다.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도 그 IMF 체제에 큰 영향을 받은 세대의 일원 아닌가.

사실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한국 국민 중 안 그런 사람이 없었지.

그러니 이건 어느 의미에서 정환 나름의 개인적인 감정과 경험이 상당 부분 섞인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제까지와는 큰 폭으로 다르게 굴리는 이 선택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커다란 장애물이 하나 있다는 것을 정환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장애물은 김용건의 입을 빌어 설명되었다.

“하지만 박이삼 정권이 지금까지 해온 행태를 볼 때 죽었으면 죽었지 IMF가 아니라 저희 공화국에 손을 벌리러 올 거 같지는 않습네다. 아니, 사실 박이삼 정권이 아니라 남조선 어느 정권이라도…….”

가능성이 매우 낮아 보입니다, 라는 김용건의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정환을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돈 융통이 급해 상대에게 채무를 잡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체제경쟁 패배 인증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전까지의 군사정권까지는 아니더라도 박이삼 정권이 상당한 반공 보수를 기조로 내세운 정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북조선에게 손을 벌리는 행위는 (안 그래도 위태한) 정권의 생명을 끝장내는 건 당연하고 폭력이 동반된 소요사태까지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까지 IMF 위기가 도래할 거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던 정환이 걱정했던 점도 이것이었다.

‘이 선택만큼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박이삼이 하는 것이니.’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 부분은 자신의 손에 달린 게 아니라 한국 대통령 박이삼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양국의 명운이 갈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북조선을 파탄국가에서 정상국가, 폐쇄적인 공산 국가에서 발전국가로 국력을 상승시킬수록 한국, 특히나 보수 정권의 공화국에 대한 경계심과 불안감은 커져만 갈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북한에게 돈을 빌려서 채무를 만드느니 IMF에게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경제 주권을 떼다 바친다는 결정을 어느 한국 지도자든 내릴 가능성이 매우 컸다.

설령 그 결정이 짧게는 향후 3년에서 4년, 길게는 향후 20년을 저당 잡히게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지. 그러니 우리 공화국 입장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건 크게 두 가지일세.”

“두 가지라면……?”

“첫째, IMF보다 크게 관대한 차관 조건을 내거는 것. 우리 공화국의 목적은 남조선에게 고이율로 돈을 우려내는 게 아니라, 빚을 지게 해서 두고두고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고 향후 공화국 산업 부흥을 위해 필요한 남조선 기업들의 지분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니까.”

설득력 있는 지도자의 말에 정치국 위원들은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아니면 합법적이고 직접적으로 북조선 자본을 남조선에 들여놓을 기회는 앞으로 최소 20년간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믿을만한 특사, 메신저를 비공식적으로 보내 이 제안을 전달하는 것.”

“……특사라면 누구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오고 있었네. 아무래도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데에는 자기 나라 사람이 직접 말해주는 게 박이삼도 편하겠지.”

* * *

“……그러니까 그 특사가 바로 저라는 말이군요.”

정환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흑금성, 아니 박세황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처음부터 자기와 안기부는 저 북한 지도자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을까, 그리고 자기를 써먹을 계획을 준비해두고 있었을까.

이쯤 되자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 확고한 박세황 자신도 김정환 총서기라는 사람에게 경외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알겠지만 이 정도로 민감한 사안은 정식 외교 절차보다 비선을 통해야 하는 법이거든. 정식 외교 루트란 중간에 거치는 입이 많은 법이고. 아는 입이 많으면 정보가 샐 가능성이 크니까. 박이삼 대통령 동지도 이해할 걸세.”

박세황 역시 이해하고도 남았다.

한국 대통령이 북한에 차관을 빌려서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 경제에 영향을 끼치게 해준다는 것은, 그 말이 새어나가는 즉시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올라올 법한 사안이었으니까.

아무리 지금 상황이 심각해도, 그리고 아무리 차관 조건이 상대적으로 관대해도 그 북한이 채권단 혹은 기업의 최대주주가 된다는 장기적 위험성만으로도, 그리고 심정적으로도 한국 국민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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