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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167화 (167/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167화

“……그러니까, OPEC. 정확히는 사우디아라비아 측에서 총서기님께 제의했단 말씀입니까? 자기들과 함께 하자고?”

“그렇습니다.”

“……총서기님은 그걸 거절하셨고요? 왜냐면 중동인들에게 석유 패권을 남겨두는 게 전 세계와 미국을 위해서 좋지 않다고 생각하셨기에?”

“그리고 물론 저희 공화국의 국익을 위해서기도 합니다. 어쨌든 제대로 들으신 게 맞습니다, 부통령님.”

“흠…….”

전화선 건너편에서 정환의 전후 사정 설명을 들은 딕 체니의 첫 반응은 침묵이었다.

일견 당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환은 그것이 당황이 아니라 자신의 진의를 캐내기 위해서 고심에 빠져있음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윽고 침묵을 깨고 딕 체니가 입을 열었다.

“……왜 하필 저한테 그런 뜬금없는 제의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대외 관계에 대한 제의는 국무부를 통해서 부시 대통령 각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올바른 프로토콜입니다. 대통령과 의회의 재가 없이 타국과의 조약이나 동맹에 가입하는 건 반역 행위고요.”

“…….”

“게다가 총서기님. 저는 부통령입니다, 그것도 임기가 다 끝나가고 있는 데다 그다지 인기도 없는. 솔직히 왜 하필 제게 이런 전화를 거셨는지 많이 당황스럽군요.”

‘피곤하게 발 뺌 하기는. 지금 시기면 이미 이야기가 대충 되어 있을 텐데…….’

정환은 이론상으로는 그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딕 체니가 네오콘들의 대표주자로 서며 역사상 최강의 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현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의 아들 조지 워커 부시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아버지 부시가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은퇴할 시기가 가까워져 오는 지금으로서 딕 체니는 말 그대로 그냥 부통령이었다.

아버지 부시는 임기 내내 체니에게 휘둘린 아들만큼 무능하지도 않았고 항공기가 납치돼서 뉴욕 세계무역 센터에 부딪히지도 않았다, 최소한 아직은.

한마디로, 그를 비롯한 네오콘이 전성기를 맞아 활개를 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것이다.

임기 와중 딕 체니가 정환을 괴롭힌 거도 기껏해야 두 번 정도.

그것도 각각 미국의 국방장관과 부통령이라는 자신의 직무 범위에 속한 권한을 좀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행사한 정도였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딕 체니가 진의 반 의구심 반의 지적에, 정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이거 하나만 분명히 해두죠, 부통령님. 저는 부통령님의 백악관 내 지위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닙니다. 백악관 밖에서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죄송하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아리송한…….”

“이번 임기 끝나시고 워싱턴 정계를 떠나 민간기업 쪽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국방장관에 부통령을 역임하셨으니 부르는 곳이 많겠죠. 제가 알기로는 핼리버튼(Halliburton)이라는 기업에 CEO로 부임하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맞게 알고 있습니까?”

그 순간, 태평양 반대편 백악관에서 딕 체니는 전화기를 든 손에 힘줄이 솟아오르도록 힘을 꽉 주었다.

대체 지구 반대편 평양에 앉아있는 이 젊은 놈이 아직 조지 타운에서도 소문으로만 떠도는 정보를 어떻게 알아낸 거지?

“유전 개발을 주력 사업으로 미합중국 군대에 많은 납품을 하며 인연을 맺어온 텍사스 대기업이죠. 걸프전 때도 미군과 수백만 달러어치 계약을 체결하고 전후 유전 복구에도 참여했다고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전직 국방장관님이 CEO로 부임하신다면 아마 차후 군으로부터 도급을 따내는 일도 훨씬 수월할 테니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군요.”

“……말하고 싶으신 게 대체 뭡니까?”

“부통령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중동에만 카르텔이 있는 게 아니라 미국에도 카르텔이 있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내부 분규로 바람 잘 날 없는 OPEC 따위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력한, 통일된 목적으로 움직이는 카르텔이죠. 그리고 부통령님은 그 거대한 카르텔의 중요한 일원이고요. 제가 방금 털어놓은 제의를 전달받을 사람은 백악관의 부시 대통령 각하가 아니라 바로 그 카르텔의 구성원들입니다.”

“…….”

이번에는 딕 체니가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미합중국 부통령의 이마에 진땀을 흐르게 한 정환이었지만 정작 그는 태연했다.

원래 정말로 강력한 존재는 딱히 거창한 이름이 필요 없는 법이다.

심지어는 아예 이름이 없는 경우도 있는데, 방금 정환이 지적한 ‘미국의 카르텔’ 역시 딱히 이름은 없었다.

정해진 우두머리도, 조직도도, 본부도,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총회나 심지어 한자리에 모이는 일조차 드물었지만 정환은 그러한 무형의 카르텔이 실존함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카르텔은 공화당에서부터 월 스트리트, 바이블벨트(Bible Belt)의 기독교 우파 목사들, 전미총기협회(NRA) 그리고 거대 정유사 사장들에게 닿아있으며 미군 장성들과 미국의 해외 군사력 투사의 효과를 분석하는 씽크 탱크와 대학에 이르기까지 깊고도 광범위하게 닿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정확히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움직여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OPEC은 물론이고 미국 대통령마저도 압도할 수 있었다.

정환은 바로 그 카르텔의 중추 중 한 명인 딕 체니에게 제의한 것이다.

마침내 당황을 수습한 딕 체니가 다시 냉정한 어조로 물었다.

“좋습니다. 확실히 공화당과 석유업계, 그리고 국방부에는 저와 생각을 같이하는 여러 친구, 인사들이 있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총서기님이 바라시는 게 뭡니까?”

“간단합니다. OPEC을 대체할 새로운 산유국들의 연맹체를 하나 만들자는 겁니다. 중동 국가들이 아닌, 친미 국가들을 중심으로 해서요.”

여기까지 말한 정환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본부는 평양에 두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 *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정환의 말이 끝나고 채 1초도 지나기 전에, 딕 체니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그리고 정환이 왜냐고 물어볼 줄 안다는 듯 미리 자신의 거절 이유를 설명했다.

“저희 미국은 흠 아니, 이건 좀 뭐한 표현이군요. 하여튼 저희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OPEC이 석유 결제를 달러화로 하는 이상 그들의 이권을 정면으로 위협하고 싶지 않습니다. 달러화가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게 해주는 이유나 다름없는데, 왜 그러겠습니까?”

“OPEC 내에는 그러한 석유가 달러로만 결제되는 방식에 불만을 품은 나라도 많습니다. 베네수엘라가 대표적이죠.”

“그렇다고 해도, 국지적 반발 때문에 미국이 OPEC을 대신할 국제연맹을 만드는 건 얻는 건 적고 리스크는 너무 큰 투자입니다. 석유가 자기 나라에서만 나는 것도 아닌데 거들먹대는 아랍인들이 고까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석유 수요는 맞춰야 할 거 아닙니까?”

예상했던 반응이었고 반대였다.

그리고 그런 만큼 정환은 당연히 반박도 준비해놓고 있었다.

“생각해보십시오, 부통령님. 부통령님 말대로 석유가 OPEC 회원국에서만 채굴되는 게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채굴되고, 미국의 최우방 영국에서도 채굴됩니다. 브라질이나 노르웨이도 유전이 있죠. 그런데 왜 하필 저희 북조선에만 가입 제의가 왔을까요?”

“그야 그쪽의 생산량과 추정 매장량이 근래 보기 드물 정도이니 당연히…….”

여기까지 말하던 딕 체니는 뭔가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어떤 안 좋은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정환은 그 안 좋은 예감을 자기 입으로 대신 말해주었다.

“저희 북조선이 반미 국가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아마 중국하고 나름 가깝다는 것도. 이걸 조선말로 코드가 맞는다라고 하죠, 아마.”

“……지금 사우디가 중국과 관계 개선을 의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럴 리는 없습니다. 일단 최근 이스라엘이 중국과 가까워지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그야말로 견원지간…….”

“그건 미국도 그랬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최우방국이면서도 사우디에도 미군을 주둔시켰죠. 게다가 중국의 석유 소비량이 해가 갈수록 폭증하는 걸 생각해본다면, 두 국가 간 이해관계 합치의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

그제야 딕 체니는 이 제안이 다시 한번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현재의 중국은 미국은 고사하고 일본에도 GDP가 떨어지는 전형적인 저개발 도상국이다.

하지만 조금만 앞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그게 언제가 되었든 중국이 다시 용이 승천하듯 하늘로 비상할 것이며.

그때가 되면 미국은 거의 소련만큼이나 강대한 적수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장쩌민 취임 후부터 그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게다가 중국은 어쨌거나 핵무기 보유국 아닌가, 그런 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석유를 쥐고 있는 중동 국가들과 가까워지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 반드시 막아야 했다.

‘아니, 이 모든 가정들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걸 우리가 앞장서서 훼방 놓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OPEC 외의 다른 석유 카르텔 결성은 중동 석유 패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짓이고, 어쨌거나 미국 유권자들은 석유가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사우디나 OPEC이 중국과 가까워지려 시도를 한다고 해도 그걸 가지고 바로 그들을 적대시하는 건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어쨌거나 그건 주권국가의 외교활동이고, 오일쇼크 후 체결된 양 국가 간에 합의에 따라 사우디가 석유를 달러로만 결제하는 이상 최소한의 신의는 지켜야 하니까.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우방이자 전제 왕정국가인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OPEC 카르텔이 유가를 쥐락펴락하는 걸 언제까지나 내버려 두기에도 너무 속이 터졌다.

그리고 그때 딕 체니는 왜 정환이 자신에게 이런 전화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또 왜 본부를 평양에 두자고 했는지도.

이건 그러니까…….

“새 석유 카르텔 결성의 선봉에 서는 부담을 감수하시겠다는 말씀이군요. 하기야 우리와 OPEC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건 이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고, 미국이나 영국이 의장국을 맡으면 그 의도가 너무 빤히 보일 테니 말입니다.”

“미국이나 기타 선진국들은 이미 산업이 발달해 석유 의존도가 저희 공화국보다 크다는 점도 있지요. 게다가 민주주의 회원국들은 OPEC이 반발해서 유가가 오르면 자국에서 시위가 일어나지만…… 저희는 그럴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

‘게다가 석유와 밀접한 기업이나 자본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미국이나 영국보다 훨씬 적으니 한번 정한 정책을 물리거나 할 일도 적고 말이야.

그렇게 정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이제 겨우 제1세계 외교를 시작한 북조선이 전 세계 질서를 움직이는 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석유 질서를 바꿔보겠다는, 어찌 보면 주제 파악 못 하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현 정세에서 북조선이라는 국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명확히 구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주제에 맞는’ 역할이란 바로 소위 말하는 ‘바지사장’이었다.

진짜 보스 미국을 대신하여 얼굴마담 역할을 하고 영미로 하여금 OPEC과 직접적으로 적대해서 유가 상승으로 인한 보복의 리스크를 피하게 해주는 역할.

좀 심하게 말해서 총알받이였다.

‘하지만 총알받이라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게 분명히 있거든.’

물론 정환은 OPEC 주도의 석유 질서에 도전장을 내미는 전쟁의 최전선에 서는 대신, 그 대가는 확실히 받아낼 작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딕 체니의 입에서 기대하던 답이 나왔다.

“충분히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거 같군요.”

“……! 그렇다면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략적인 안을 구상해서 국무부를 통해 국정 의제에 올리지요. 현안이 현안인 만큼 민간에서도 적극적으로 땔감을 넣어줄 테니 서두른다면 저희 임기 안에 결성과 가입을 의회에서 비준받을 수 있을 겁니다.”

됐다.

정환은 속으로 그렇게 쾌재를 불렀고, 딕 체니는 한결 우호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회원국들인데…… 산유국이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미국과 친한 국가들만 가입시킨다면 OPEC의 경계를 사게 될 겁니다.”

“그 문제는 일단 저희가 처음으로 가입할 테니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것이고…… 나머지 국가들의 구색을 잘 맞춰야겠군요. 우선 영국은 북해유전도 있고, 미국과 우리 공화국의 공통된 우방국이니 가입시켜야 할 겁니다. 대처 여사님을 앞세워 잘 구슬리면 어렵지는 않겠군요.”

일단 결성에 뜻이 모이자, 그 뒤로는 빠르게 논의가 진척되어 갔다.

영국 다음 회원국 후보로는 캐나다와 노르웨이가 물망에 올랐다.

캐나다야 세계 수위권 산유국인데다 친미 국가고, 노르웨이는 전통적으로 중립 외교를 표방하니 친미 국가 일변도라는 (진실) 이미지를 희석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호주는 영국이나 캐나다와 비슷한 이유로 빠르게 통과됐고 그다음은 브라질과 멕시코였는데, 이들 역시 미국이 어렵지 않게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이유로 명단에 올려졌다.

그리고 연이어 말레이시아, 볼리비아, 인도, 아르헨티나, 베트남이 회원국 후보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OPEC에 맞서는 새로운 석유 카르텔의 결성에는 한 국가를 회유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갈릴 수 있다는 것을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환 역시 이 국가에 대해서 자신과 딕 체니의 의견이 가장 크게 갈릴 것이라는 점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 국가란 바로 러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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