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164화
MICE 산업이라는 게 있다.
회의(Meeting), 포상휴가(Incentive Travel), 컨벤션(Convention), 전시회(Exhibition)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신조어다.
회의와 컨벤션에서 만나고, 휴가에서 놀고, 전시회에서 보고 듣고 하면서 생기는 모든 수요를 다루는 산업을 총칭하는 뜻으로 세계무역 시대가 도래하면서 가장 발전한 산업 중 하나로 뽑고 있다.
회사 고위급 임원들이나 접대할 손님의 미팅과 휴가를 어디서 보내게 할 것인가?
맥도날드에서 할 수는 없으니 5성급 호텔에서 해야 한다.
자동차 회사가 새로운 신차를 공개했는데 어디서 어떻게 소개해야 시장에 홍보가 잘 될까?
길바닥이 아니라 전용 시설과 공간을 갖춰놓은 컨벤션 센터에서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MICE 산업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는 호텔, 컨벤션 센터는 21세기가 가까워지고 전 세계의 경제권이 조밀하게 연결될수록 그 숫자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물론 그 비약적으로 늘어난 숫자의 컨벤션 센터, 좀 더 친근한 말로 국제 전시장들의 절대다수는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세계 경제에서 목소리 좀 낸다 하는 나라들의 중심도시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경제 대국의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중국은 물론이고 후발 선진국 대열에 끼기 위해서 기를 쓰고 있던 한국도 대외 무역 비중이 커질수록 이런 컨벤션 센터를 하나둘씩 짓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국가 간의 (유치하지만 그렇다고 또 마냥 유치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자존심 싸움도 큰 몫을 했다.
‘김 장관, 이번에 짓는 우리 코엑스는 무조건 일본 놈들 도쿄 빅 사이트보다 커야 해! 외국 손님들이 와서 보고 초갓집 같다고 생각하면 거기 전시된 우리 기업들 물건 살 마음이 들겠나?’
‘우리 타이베이 전람관은 베이징 것보다 무조건 크게! 비록 우리가 대륙은 뺏겼어도 마음 씀씀이만큼은 대륙에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라고!’
‘저 특정 아시아 국가 놈들 보셨습니까? 우리도 빨리 오사카든 나고야든 확장 공사를 해서 아시아 최대의 경제 대국은 명실상부 우리 일본이라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국가 간 대대(大大)익선, 거거(巨巨)익선의 싸움에는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빠르게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으로 도약하고 있는 북조선도 당연히 한 몫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정환은 몇 년 전 평양을 아시아의 새로운 경제중심지로 바꾸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용강 국제공항과 함께 평양 국제전시장의 건설을 지시했었다.
“어차피 곧 공항과 2기 평양 지하철 확장 공사도 착공할 테니 그에 맞춰서 한꺼번에 짓게. 전시장은 모름지기 접근성이 생명이니까.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돈 아끼지 말고 팍팍 쓰게. 아, 그리고…….”
문장 마지막에 너무 당연하니 말할 필요도 없다는 투로 정환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남조선 코엑스인가 거기보다 크고 넓고 좋게 만들라는 건 굳이 지시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리라 믿네.”
“총서기 동지의 영도력과 새롭게 탄생할 공화국의 격에 맞출 수 있도록 백골이 가루가 되도록 만들겠습네다! 동지!”
이렇게 4년의 공사를 거쳐 마침내 부지면적 28만 제곱미터, 전시면적 12만 제곱미터를 자랑하는 평양 국제 전시장이 1996년과 함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막 개관한 평양 국제전시장에서 열린 역사적인 첫 전시회는, 최근 들어 조선로동당이 IT 산업에 보이는 관심을 증명하듯, 그리고 그 산업의 성장에 북조선의 미래를 걸겠다는 각오를 보여주듯 정보통신 산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제1회 퓨처넷(Future Net) 평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 세계를 하나로 잇는 미래 사업에 종사하고 계신 경쟁자이자 동지 여러분!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또 하나의 세계적인 IT 박람회의 시작이 될 첫날의 개회를 알리게 되어 대단히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희 마이크로소프트 사 역시 회사 차원에서 많은 볼거리를 준비했으니, 부디 인류와 윈도우즈의 미래를 목격하고 가셨으면 합니다.”
“게이츠 씨! 게이츠 씨 같은 세계적인 거물이 IT 산업 후발주자 북한에서 열리는 이런 신생 행사 개회식 연사로 나온 것에 대해 많은 분들이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에 대해, 그리고 혹시 이 이벤트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경영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글쎄요, 제가 소프트웨어의 보급에 인생을 바쳐오면서 느낀 바로는, 이 업계는 언제나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 기존 공룡들이 일궈놓은 게임 규칙을 전부 허물어 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행사에 출석했다고 이해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군요.”
“그 말씀은…….”
“……그리고 제가 본 바로는, 이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바로 그 새로운 경쟁자가 출현하기 가장 좋은 환경을 국가적인 지원 아래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미래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쟁자를 찾기 위해서라도, 얼굴을 보이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사무적이면서도 차분하게 자신의 참석 이유를 밝히는 첫 연사, 빌 게이츠의 말에 평양 국제전시장 제1전시관에 모인 각국 기자들은 입을 떡 벌렸다.
최근 들어 젊은 지도자의 비전이 이 나라에서 급속도로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소프트웨어의 마왕, 빌 게이츠가 저 정도로 관심을 보일 정도란 말인가?
하지만 그 뒤를 이어 나타난 두 번째 연사에 기자들은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빌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거 같군요. 저 역시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창고에서 사과박스를 놓고 사업을 열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와 소프트뱅크가 어디 있는지 보십시오. 이러니 ‘닷컴이라는 말만 붙으면 투자자들이 달려든다’라는 말이 돌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고맙기도 해라 이거. 아무튼 이걸로 첫 회 홍보는 확실히 됐군. 그보다, 내가 초대한 그 사람은 확실히 와 있겠지?”
“물론입네다. 최근 들어 미국에서도 급속도로 주목받고 있지만, 지구 반대편의 구 공산권 국가 지도자까지 알 줄은 몰랐는지 화들짝 놀란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두 번째로 나와 축사를 해준 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사장을 보며 기자들이 다시 경악하고 있는 동안 정환이 중얼거리자 최승일이 한 말이었다.
전시장은 이미 기자들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일본, 대만, 중국에 이르기까지 소프트웨어 하드웨어를 막론하고 전 세계의 IT 관련 기업들의 부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미 이 분야의 선두주자인 유럽계 소비자 가전 박람회 CES나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IT 박람회 컴퓨텍스 타이베이에 역사가 짧은 퓨처넷 평양이 도전장을 내미는 의미로 정환이 초대한 두 손님인 빌 게이츠와 손 마사요시의 이름값에 힘입은 바가 컸다.
물론 언젠가는 유명인을 초대해서 유명한 박람회가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유명한 박람회가 될 수 있도록 하라는 게 정환의 지시이자 목표였지만.
‘그리고 이 박람회 참석을 계기로 투자를 받아 세계적 대기업으로 커나갈 기업이 생긴다면 더더욱 그 효과가 커지겠지.’
그 효과를 위해 정환이 고른 기업은 바로 미래 시가총액 1위 기업, 인터넷 쇼핑몰의 패자 아마존닷컴이었다.
물론 현재 시점에서는 창업자 제프 베조스가 창업한 지 반 년도 안 된 인터넷 서점업체, 주문이 들어온 물량도 소화를 못 해 배송을 지연시키는 작은 업체지만, 이미 미국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벤처, 스타트업 붐을 타고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미 엔젤 투자자들 몇몇이 관심을 가지고 제프 베조스에게 접근하고 있을 테니, 눈독 들여놓은 주식에 누가 침을 바르기 전에 먼저 선점해야만 했다.
겸사겸사하는 김에 평양에서 개최된 IT 박람회 홍보도 하고 말이다.
“이미 어느 정도 언질은 해뒀겠지?”
“그렇습니다. 제가 먼저 저희 공화국 국부 펀드가 귀사에 대한 투자에 관심이 있다는 눈치를 은근슬쩍 흘리자 반응을 보이더군요. 하지만 지도자 동지께서 직접 모습을 보이실 줄은 아직 예상을 못 하고 있을 겁니다.”
“좋군. 가세. 계약서에 사인하면 그 유명한 빌 게이츠하고도 간접적으로 동업을 하게 되는 셈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정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그의 진짜 목표, 제프 베조스가 기다리고 있는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게다가 무엇보다 다른 투자자들과 정환이 차별되는 점은, 바로 투자한 만큼 간섭하지 않으려 하고 적합한 경영자를 찾아 일을 맡긴다는 점일 것이다.
당장 오늘 박람회만 해도 테이프 커팅에 기조연설에 축사도 자신보다 훨씬 더 적합한 사람들에게 맡겼다.
모름지기 정부와 정치인, 심지어는 투자자까지도 그저 기업이 잘할 수 있게끔 판을 깔아주고 신상필벌만 엄히 하면 되는 법이다.
특히나 창의성이 중요한 IT시장 같은 경우는 더더욱.
벌써 국산 메인보드와 모니터를 자체 부스에서 홍보하는 북조선 기업인들을 보며 정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부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끼어들었다가 Active X 같은 삽질을 벌인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만나서 반갑습니다. 베조스 씨. 저는 이 조선로동당의 총서기 김정환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김 총서기님. 최 사장님의 연락을 미국에서 전해 듣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정환이 만난 제프 베조스는 당연하지만, 아직 30이 갓 넘은 젊은 사업가였다.
그는 대체 CNN 국제란에서나 보던 젊은 독재자가 대체 왜 자신을 독대하자고 했을까?
투자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듯한 눈으로 정환을 탐색하는 듯했다.
“하하. 베조스 씨와 아마존은 이미 미국 벤처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한데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아실지 몰라도 최근에 리만 브라더스에서 부정적인 평가전망 보고서가 나온 뒤로는 저희 주가가 급락하고 있습니다. 상장도 안 한 저희 아마존 같은 작은 기업에게 월스트리트 은행들이 너무 하는 거 같군요. 대체 이 정부는 왜 스타트 업들을 못 죽여서 안달인 건지 원…….”
그거야 내가 클린턴을 떨어트려서 그렇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정환은 속으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창업 1세대 들은 아무리 엔젤 투자자들이라고 해도 웬만해서는 자기 지분을 넘기려 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제프 베조스는 벌써부터 투자금에 목이 마른 티를 내는 걸 보니 예상 외로 쉽게 지분을 사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슬 정환이 미리 준비한 대로 아마존 닷컴의 지분 절반을 천만 달러에 사겠다는 말을 꺼내려 할 때, 제프 베조스가 그의 눈치를 슬슬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미 다른 곳에서 투자를 받아 다행입니다. 대단히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사실 여기 평양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 미국계 펀드에서 저희 아마존 닷컴에 투자하겠다는 제안을 이미 받은 상태라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군요. 아, 혹시 총서기님이 그쪽에서 제시한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을 아마존의 미래에 투자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또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