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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163화 (163/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163화

58장. 닷컴 버블

정환이 이런 쓰잘데기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어서 이 귀중한 자료들을 씹고 뜯고 맛볼 생각에 흥미진진한 표정을 하고 문으로 향하던 안토노프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미 선 한 번 넘은 거 기우라고 생각하고 들어주면 고맙겠는데…… 이런 일이 반복되면 중국인들도 언젠가는 눈치를 챌 거다. 이번 한 번은 그렇다 쳐도, 언젠가는 그놈들이 당신에게 쓴맛을 보여준다고 작심하면 그때는 어쩔 생각이지?”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 하지만 당분간은 아니야.”

“……어째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안토노프에게 정환은 확신에 찬 어조로 장담했다.

“그들은, 중국은 이 공화국이 필요하니까.”

“……꽤 확신하는 어투로군? 왜 그렇게 장담하는 거지?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중국은 이 나라에 비해 30배는 크고 50배는 더 사람이 많잖아? 그런 대국이 옆에 있다면 두렵다고 해도 딱히 흉은 아닐 거 같은데.”

정환이 좀처럼 이렇게 확신하는 걸 보지 못했던 안토노프는 좀 놀란 듯 하면서도 일반적인 상식론을 이야기 했지만 정환은 확고했다.

“원래 국제관계라는 게 반드시 크고 강한 쪽이 일방적인 우위에 있는 게 아니거든.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만 봐도 그렇잖나?”

이미 10년, 15년 후의 세계에서는 국제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적인 대중들에게도 확산 된 개념이지만, 조중관계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사자성어로 요약될 수 있었다.

중국에게 북조선은 얼마 안 되는 이념적, 정치적 동맹국이자 동해로 진출하는 관문이며 한국에 주둔하는 주한미군이 대륙으로 북진할 경우 1차 방어를 담당하는 방패막이다.

넓게 보면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해양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마개이자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과 직접 국경선을 마주하는 부담을 덜어주는, 말하자면 뒷문의 경비원이다.

그렇기에 중국의 위정자들에게 있어서 북조선의 존재는 실제 보유한 경제적, 군사적 역량보다 훨씬 귀중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특히나 한국이나 일본만큼은 아니어도, 북조선이 어느 정도 친미 국가 노선으로 전환하려는 낌새를 보일락 말락 하는 지금, 북조선이 웬만큼 중국의 핵심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장쩌민을 비롯한 중국 요인들이 자신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게 정환의 판단이었다.

“물론 중국인들도 인내심의 한계라는 게 있는 만큼 무한정 참아주지는 않겠지. 하지만 자기들도 훔친 입장인 만큼 이번 건에 대해서는 말이 나오기 힘들 거야. 도둑놈이 장물을 도둑맞았다고 보안원에 신고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나?”

정환이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자 고개를 끄덕이던 안토노프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되물었다.

“‘이번 건에 대해서는?’ 그럼 앞으로도 미국에 이스라엘에…… 그리고 중국을 거쳐 기술을 지속적으로 빼 올 거라는 이야기인가?”

“여기서 만의 이야기지만, 그래. 이렇게 훌륭한 물주…… 아니, 정보원은 좀처럼 드무니까 말이야.”

“……정말 괜찮은 건가? 그럼 만약 아까 말한 것처럼 중국인들의 인내심의 한계가 오면? 아니, 중국 이전에 미국인들도 바보가 아닐 테니 이 나라에서 전투기가 자체적으로 만들어지면 자기들 기술이 들어갔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러면 그때는…….”

“…….”

정환이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안토노프를 지그시 주시하자 서기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 속에서 안토노프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긁적였다.

“그래,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선을 넘었군. 사과하도록 할게, 총서기 동지.”

“…….”

“엔진은 머지않아 시제품을 볼 수 있을 거야. 그 다음 부터도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아무튼 다시 한 번 고마워. 첸쉐썬처럼 대우해주겠다는 게 허언이 아니었군. 그럼 나는 이만 가서 내 할 일이나 신경 쓰지. 그쪽이 약속을 지킨 만큼, 나도 최선을 다하겠어, 믿어줘.”

그렇게 말한 안토노프가 서기실 문을 열고 모습을 감추자, 정환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안토노프가 지적한 점에 대해서 정환도 걱정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고, 그리고 도난당한 기술의 중요도와 민감성을 생각해보면, 언젠가는 미국이든 중국이든 정부 차원에서 외교적 압박이 가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원역사에서 ‘지금쯤’에 곧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미국이 이 일에 관련해서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것도 힘들 테니, 당분간은 문제없을 거라는 게 정환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파국이 일어나겠지.’

그러니 그때까지 중국의 분노에 대항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힘을 길러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토노프와 엇갈리듯 들어온 유혜림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정환에게 보고한 내용은 정환의 방금 전 예상을 사실로 증명해주었다.

“저 동무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별 거 아닐세. 그보다, 유 소좌 표정을 보니 급한 일이 있어 보이는군. 빨리 보고할 일이라도 있나?”

사실 이제까지 많은 일이 그랬던 것처럼, 정환은 유혜림이 보고할 내용이 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유혜림은 정환의 반문에 그제서야 자신이 서기실에 온 목적을 떠올리며 자세를 바로하고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괴한에게 암살당했습니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이걸로 당분간 중동 평화는 물 건너갔군. 후임자는 베냐민 네타냐후겠지? 미국이 중동에서 손을 뗄 이유가 하나 더 늘었으니 우리 공화국으로서는 좋은 일이로군. 그나저나 그러면 이걸로…….”

거봐, 안토노프 동무, 내가 뭐랬어?

속으로 정환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한 말을 유혜림이 대신 끝맺었다.

“……네. 부시 정부가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했고, 이스라엘의 기술탈취 문제는 완전히 묻힐 듯 합니다. 우방국 초상집에 재를 뿌릴 수는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군. 그래도 리종수 국장 동지에게 정보원 관리를 각별히 주의하라고 이르게. 공식적으로는 항의를 못 해도 비공식적으로 중국이 우리 공화국을 위협할 수단은 엄청나게 많으니까. 영영 안 들키기를 바라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늦게 들키는 게 좋겠지.”

* * *

1995년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전설이 된 마이클 잭슨의 공연 이래로 서방 문화와 소비지향적인 바람이 물밀 듯이 밀어닥치는 세태를 반영하듯, 평양의 연말 백화점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짧은 시간에 급격하게 소득 수준이 올라간 인민들의 소비 욕구는 고급 의류와 비싼 음식, 자동차로도 표출되었지만.

근래 들어 생긴 한 가지 변화라면 첨단 전자기기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물론 당의 전략으로 시내 대학교를 중심으로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어 가고 있었지만.

컴퓨터 외의 전자기기에도, 그리고 전세대 전연령의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정보화 기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었다.

평양 시내에 드나드는 남한 비즈니스맨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손전화(휴대전화)를 들고 이리 저리 활보하거나 팩시밀리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본의 아닌 광고를 해준 덕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인민들의 관심사를 반영하듯, 21세기를 5년도 남겨두지 않은 1996년의 첫 날, 정환이 발표한 신년사는 IT에 관련된 것이었다.

-존경하는 인민 여러분. 앞으로 이 공화국의 미래는 오로지 정보화 기술에 달려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신년을 맞아 저희 조선로동당은 이러한 시대에서 국가 경쟁력을 진작시키고 시대와 인민들의 요구에 발 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한 가지 변화를 도입하였습니다.

그 변화란 북한 인민들은 물론이고 이제까지 북한에 대해서 폐쇄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국가, 조선로동당 역시 그런 나라를 이끄는 집단답게 고루하고 이념에 매몰된 집단으로 알았던 남조선과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바로 조선로동당 인터넷 홈페이지 오픈이었다.

Welcome to the Workers' Party of Korea! (www.worketspartyofkorea.com)

이런 글자가 8개국어로 홈페이지 대문에 박혀있었으며, 무려 총서기 정환이 직접 첫 방문자로서 방명록 게시판에 발 도장을 찍었다.

물론 남조선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의 접속은 차단되거나 게시판 관리를 맡은 선전선동부 IT 부서가 반체제적인 게시물을 삭제하는 등의 홍보성이 강한 이벤트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걸 제외하더라도 대단히 성공적인 이벤트였다.

최소한 북조선 인민들은 총서기께서 언급한 ‘IT’라는 것에 대해서 한 번 쯤 생각해보고 주의를 환기하는 효과는 대단했던 것이다.

“미국에서도 요즘 이런 게 난리라고 들었습니다. 개인이나 기업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그…… 인터넷 홈페이지라는 것을 만들어주고 큰 돈을 번다고요.”

“그래, 거품이 크게 끼었지만, 머지않아 그 거품이 꺼지면 그때는 진정한 강자들만이 살아남을 걸세. 그러니 우리 공화국도 그 흐름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지. 내가 이런 걸 받아보는 이유도 그런 연유야.”

* * *

96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정환은 서기실에서 지금 미국에서 붐이 일어나고 있는 닷컴 버블에 대해 언급하는 유혜림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보고 있던 종이를 흔들었다.

그 종이가 뭔지는 유혜림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달마다 요금을 납부하고 받아볼 수 있는 미국 금융사들의 유료 분석자료였는데.

서기실에는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미국 신문을 포함해 이런 자료들이 거의 매일, 매달마다 날아오기 때문에 일정 주기마다 자신이 수레에 실어날라서 정환에게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유혜림이 궁금한 건 총서기께서 읽고 있는 그 종이가 뭐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음…… 그런데 혹시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총서기 동지? 왜 그리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하시는지 저는 잘…….”

“큭큭큭. 응? 아, 그건 말이지, 유 소좌.”

웬만해서는 화내지도 웃지도 않는 정환이 실없이 큭큭 웃고 있는 것을 보면서 유혜림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제까지 총서기 동지의 그 깊은 속을 자신 같은 일반 인민들이 항상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지만…….

“그것도 이거 때문이지. 이걸 봐. 나는 우울할 때마다 이 종이를 읽어.”

“……네?”

“보면 볼수록 웃음이 나오거든. 그 어떤 유머 모음집보다 효과적이야. 하하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며 정환이 내민 서류를 받아든 유혜림은 그래프와 숫자가 나열된 그 종이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1996년 신년을 맞아 실리콘 밸리 신흥 닷컴 기업들에 대한 전망

……(중략) 해당 기업은 비록 최근 들어 급격한 성장을 이룩해냈고, 인터넷 도서 판매라는 미개척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이 기업의 회사채 신용등급에 대하여 우리는 지극히 불안정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불안정한 것은 현금 흐름(Cash Flow)인데, 사업 다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서비스도 고객 중심에서 벗어나 있기에 1년 안에 닥칠 일정 수준의 기업 환경변화에 대처할 수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와 같은 사유로 본사는 해당 기업, 제프리 베조스 (Jeffrey Bezos)씨가 대표이사 회장으로 있는 아마존 닷컴(Amazon.com)의 기업 전망에 대하여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으며, 이 회사에 대한 투자는 보류하시거나 철회하시는 것이 좋다고 조언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리만 브라더스 홀딩스(Lehman Brothers Holdings) 기업 분석 1팀

“자, 그럼 이 분석이 틀렸다는 것을 우리 공화국 피오니 홀딩스가 증명해줘야겠지?

-작가의 말-

163화 작중에 해당되는 사건은 현재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연출상 지금 서술합니다. 독자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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