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157화
56장. Stranger In Pyongyang
역시나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미리 대답도 준비해놨던 박이삼 역시 완곡하지만 강경한 태도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이미 미국 측에 정식으로 요청을 넣었습니다. 우리 측 입장도 충분히 설명했고 한미동맹의 진작이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대답도 충분히 무게감 있는 고위급 인사로부터 들었습니다.”
“……그 고위급 인사라는 게 누구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딕 체니 부통령입니다. 전직 국방장관인 만큼 부시 대통령도 그 말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미국 측에서는 안 받아들일 겁니다. 이미 미국은 북한과도 수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미국 자본이 들어가 평양에서 맥도날드까지 장사를 하고 있는 판에 부시 정권이 우리 합동훈련 요청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할 겁니다.”
유민중, 박이삼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거두이자 현재 제1야당인 민주당의 총재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는 아무리 야당 총재라도 현직 대통령에게 이렇게 국정에 관해 집요하게 캐묻다시피 하는 것은 도의나 상례에서 상당히 어긋난 일이었지만, 박이삼 대통령은 그것을 용납했다.
상대방이 야당 총재라는 입장을 떠나서, 상대가 일생의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 유민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민중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박이삼은 진작에 완곡한 축객령을 내렸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시도 자체를 못 했겠지만.
“게다가, 자본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근대는 물론이고 성삼, 태화, LS 같은 우리 기업들도 이미 북에 많은 자본이 묶여있지 않습니까? 만약 북한이 홧김에 우리 기업들이나 주재원들에게 무슨 해라도 끼치면…….”
“그럼 그때부터는 우리 명분이 더더욱 확고해지는 거지요. 남북합의의 재산권 존중 사항을 어긴 것 아닙니까. 게다가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시선도 다시 싸늘해질 것이고. 역시 아직은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공산국가다, 이렇게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 이렇게 강경하게 밀어붙이시는 데에는 분명히 뭔가 계기가 있으시겠군요.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처음에 유민중은 한국 기업의 피해를 감수하겠다는 박이삼의 말에 놀라서 잠시 얼어붙어 있다가 이내 눈을 빛내며 진지하게 물었다.
박이삼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자신이 이런 강경한 입장을 취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를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늦든 빠르든 알려질 일이었고, (안 그래도 지난 성수대교 붕괴 이후 자신과 빠르게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 고려일보 같은 곳에서 터지는 것보다는 이편이 그나마 나았다.
“후우…… 유민중 총재…… 아니, 유 총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지만 미국 국방부가 주한미군 감축을 검토하고 있답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최근 부시 정부 들어 중동에서 손을 떼기 시작하고…… 중국과의 무역도 다시 시작하다 보니 굳이 해외 주둔을 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내부에서 제기된 모양입니다. 게다가 심지어는 아예 주한미군을 철수시켜버리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도 돕니다. 무엇보다…….”
“……주한미군의 가장 큰 존재이유인 북한이 이제는 친미국가가 되었으니까 이겠지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고, 만약 정말 사실이라면 큰 일 이겠지만, 확실한 정보가 아니지 않습니까. 오로지 가능성만으로 굳이 남북관계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이유가 있습니까?”
유민중의 추궁 같은 질문에 박이삼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고민 중 절반 정도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사실 그가 오늘 유민중 총재가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문을 피하지 않은 것에는 이 고민을 공유하고 이 위협에 대한 연합전선을 펼치려는 목적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고민의 나머지 절반은 오랜 동지였던 그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정치인은 절대로,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보여주어서는 안 되므로.
“아, 고려일보 같은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면 가능성도 진실이 됩니다. 그 친구들 수법은 유 총재가 저보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주한미군 전격 철군 검토! 적화통일의 징조인가?’운운하는 헤드라인을 뽑고 그게 모두 제 탓 인양 몰아가겠지요. 아시겠지만 제가 이미 전 국민적으로 역적이 되지 않았습니까.”
“허, 저야 그렇다 치더라도…… 박 대통령님에게까지 그 고려일보가 펜대를 들이댄다는 말입니까? 음…… 그러니까…… 지난번에는 분명히 대통령님을 지지했던 것으로 아는데…….”
‘지난 번’이란 유민중이 출마를 번복해서 박이삼이 낙승을 거두었던 14대 대선을 의미한다.
대부분 박이삼의 라이벌로 잘 알려진 유민중이 대권가도에 가장 큰 난관이 될 것이라 예상되었고,
원역사와는 다르게 정문영이 출마하지 않음으로서 박이삼의 승세가 훨씬 확고해졌다.
그리고 패배를 직감한 유민중이 출마를 아예 안 해버리기는 안했지만, 여전히 삼당합당의 리벤지 매치, 세기의 대결을 벌일 뻔 했던 왕년의 두 거목 사이에는 그때의 껄끄러운 기억이 남아있었다.
유민중 총재가 일부러 명확하게 선거라고 언급하지 않고 지난번이라고 돌려 말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야 그때는 유 총재보다 제가 더 자기들 성향에 맞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이 친구들도 슬슬 다른 사람으로 갈아탈 기회…… 간을 보고 있는 거지요. 그 환승 대상이 누군지도 이미 아실 거라 믿습니다.”
그 말에 유민중의 뇌리에 떠오르는 한 이름이 있었다.
전직 감사원장이며 이번 정부에서 국무총리까지 지내다가 박이삼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 대쪽 같은 이미지의 한 보수 정치인이었다.
최근 성수대교 붕괴부터 연이은 사고에 아들을 중심으로 한 친족정치 이야기까지 떠도는 박이삼과는 차별화된 이미지를 가진 그를 조명하는 기사를 고려일보는 벌써부터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여의도에서 얼마나 많은 정계 은퇴에 불출마가 번복되었는지 유민중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그라면 한국 보수정당의 수호자이자 최후의 보루라는 고려일보가 소위 말하는 ‘단물 빠진’ 박이삼에서 환승해서 밀어줄만한 후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박 대통령님은 현직 대통령입니다. 아무리 최근 큰 정치적 타격을 입으셨고 우리나라 최대 발행부수 일간지 고려일보라고 해도 고작 기사 몇 개를 두려워하셔서 대미, 대북 외교를 결정하시는 건 쉽게 납득이 가지…….”
유민중의 이 말에 이제까지 침착하던 박이삼은 처음으로 감정, 내지는 진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 진심이란 바로 분명한 노기(怒氣)였다.
억눌렀지만 분명한 격정이 서린 표정으로 대답하는 박이삼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눌러 담겨져 있었다.
“대체 우리가 왜 그렇게까지 북한 눈치를 봐야합니까? 우리랑 손을 잡고 통일로 나아간다거나 하면 모를까, 이제껏 우리를 죽 무시하고 미국하고만 소통한 자들에게 우리가 왜 그래야만 합니까? 그 총서기라는 작자가 취임 이후 저와 이 한국정부에게 공식 축사 한 번 보낸 적은 있습니까? 그들은, 그 김정환이라는 놈은 우리와 친교를 맺거나 관계 개선을 할 의지가 안 보인다는 게 그동안의 제 결론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게 북을 적대해야 한다는 뜻은…….”
“그리고! 얼마 전 성수대교 붕괴 당시에 사실상 북측은 우리를 조롱했습니다! 말은 위로였지만, 이게 자기들 내부 체제선전과 강화에 우리 무고한 국민들의 희생을 이용한 게 아니고 뭡니까? 이런 자들에게 정치적 배려를 해줘가면서까지 남북 관계를 신경 써야 한다는 말에는, 이 박이삼이는 도저히 납득을 못 하겠다 이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잠시간의 고성이 오가고, 이내 자신이 흥분했음을 깨달은 박이삼은 이내 다시 원래의 침착한 표정과 목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빛 깊은 곳에는 숨길 수 없는 불만과 분노가 가득했다.
“북 문제가 아니더라도, 팀 스피릿 재개를 통한 미국과의 군사 협력 강화, 한미동맹 강조는 이 대한민국 안보에 분명한 이득입니다. 여전히 이 나라의 국군은 아직도 미군의 역량에 너무나도 많이 의존을 하고 있어요. 유 총재가 고려일보 치들이 떠드는 것처럼 말 안 통하는 반미주의자가 아닌 걸 잘 알기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현직 대통령이 왜 기사를 두려워하느냐는 말씀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말한 박이삼은 침을 한 번 삼키고서는 몸을 유민중 쪽으로 살짝 숙이며 말했다.
“……‘현직 대통령이기에’ 두려워하는 거예요, 유 총재. 이제 제 임기 5년 중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비록 가장 급한, 굵직한 일들은 어떻게 이루었지만, 임기 초부터 대한민국 곳곳에서 사고가 터지고 박이삼이 문민정부는 사고 공화국이다, 벌써부터 이런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지율이 여름철 장맛비마냥 뚝뚝 떨어지는데 무슨 동력으로 남은 2년 반 국정을 끌고 가겠습니까?”
“…….”
“유 총재, 이제는 더 이상 그 어느 정치인도 길바닥에서 머리띠 두르고 싸우는 것으로는 어떤 것도 쟁취할 수 없어요. 나는 선출직 정치인이고, 현실의 정치인은 자기 지지도와 지지기반 관리, 즉 표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부인하는 건 자기 몸에 진흙을 묻혀본 적도 없으면서 정치가 더럽다고 고고한 헛소리나 하는 상아탑의 공상가들 뿐 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잘 알지 않느냐,’하는 어투로 박이삼이 말하자 유민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 이유는 누구보다 그 말에 실린 세월과 고뇌의 무게를 잘 알고 있는 처지에, 입을 열면 자기도 모르게 동조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이번 팀 스피릿 훈련은 보수당 정치인인 제 지지기반 결집과 이 대한민국 국익 양쪽 모두에 부합하며, 그렇기에 안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대통령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오늘 회동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거 같군요.”
박이삼의 뜻이 확고함을 느끼고 유민중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으로 향하는 그를 보면서 박이삼 역시도 내심 작은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에 감정이 흔들려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 한 조각남은 의도를 노출할 뻔 했는데, 다행이 들키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박이삼의 이러한 안심은, 접견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유민중이 지나가듯 던진 질문 하나에 바로 깨어졌다.
“대통령님, 혹시나 해서 물어보지만…… 팀 스피릿 예정 희망일을 상당히 빠른 시일에 잡으셨더군요. 미국 측이 협의를 받아들일지는 둘째 치고, 준비기간을 포함해 너무 짧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이 버릇을 모르는 북괴 놈들에게는 최대한 빨리 이 대한민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올해 6월에 있을 제1회 전국지방선거일로부터 고작 2주 전에 말씀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여당 측에서 이번 선거 판세가 어렵게 돌아간다는 예측을 내놓은 걸로 아는데…… 혹시 그 사실이 대통령님의 훈련 재개 판단에 영향을 끼쳤다고 봐도?”
“…….”
이번에는 박이삼이 입을 다물었다.
다시 접견실에는 침묵만이 감돌았지만, 유민중은 이미 대답을 들은 거나 다름없다는 듯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 제가 대통령님께 참 여러 모로 배우는군요. 삼당 합당 때도 그랬지만 말입니다.”
“……유 총재, 아까 내가 한 말을 기억하세요. 우리는 정치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뭐라고 해도, 욕을 해도 좋고 요새 시장 상인들처럼 박이삼이 죽일 놈 해도 좋지만,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가야하는 법입니다.”
“대통령님을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저도 대통령님과 비슷한 위치, 비슷한 상황에 있었어도, 그다지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지 않아서입니다. 그럼 이만.”
유민중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접견실 문을 닫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모습을 감춘 이후에도, 박이삼은 유민중이 앉아있던 자리를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었다.
* * *
“우선 강경대응, 그러니까 맞불 놓듯 하는 무력시위는 제외하도록 하지. 그건 현명한 일이 아니니까.”
“……이유를 물어봐도 되갔습네까, 총서기 동지?”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정환에게 질문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인민군 상장 백승철이었다.
공식 서열상 인민군 1인자 홍계성 차수가 골골하는 요즘, 실질적인 조선인민군의 총책임자인 그에게 ‘무력사용금지’는 불만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날이 갈수록 조직이 줄어가고 있었다.
간만에 인민군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기에 날아가는 건 백승철로 하여금 절대 권력자 정환에게 미약하게나마 불만을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주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남조선 군과 침략훈련…… 팀 스피릿을 같이 여는 대상이 누군가?”
“……미군이지요.”
“잘 아는군, 그럼 말해보게, 백 상장 동무. 설마 가상으로나마 미군하고 적대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동안 조선인민군이 규모를 축소하고 정예화와 기술군으로 이행하며 내실을 다졌다고는 해도, 미군에 비하면 여전히 코끼리와 흰개미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백승철은 모르지 않았다.
단지 그걸 입 밖으로 내기에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뿐.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습네까. 저 남조선 괴뢰들이 여전히 침략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 공화국의 대문 앞에서 방자히 경거망동을 놀아대는데…….”
불만이 있던 것은 백승철 뿐만이 아니었는지, 함께 서기실에서 한국 국방부 대변인의 발표를 듣던 현영숙도 한 마디 했다.
“그건 백 상장 동무 말이 맞아요. 제 생각에는…… 총서기께서 국제사회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발표하시는 게 가장 적절한 대응 아닐까요? 아무리 남과 우리가 직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엄연히 미국이라는 공동의 동맹국이 있는데, 이런 침략 훈련을 하는 걸 눈 뜨고 볼 수는 없어요.”
“…….”
“전 세계 국가들 시선도 있고, 이번 기회에 이 조선반도에서 명백한 주권국가에 대한 침략 시도를 군사훈련으로 정당화하며 지역 불안정을 가중시키는 주체가 남조선이라고 알린다면 미국도 박이삼의 간청을 재고해볼 수밖에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