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151화
“자자, 일단 쭉 들이켜시죠.”
“아이고, 고맙소, 박세황 동무. 이거 초면인데 남조선 동무치고는 의리를 아는구만 기래.”
‘의리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이제까지 이 정보줄 잡으려고 얼마를 갖다 처발랐는지 알고는 있냐?
……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그랬다가는 이제까지 해온 일들이 모조리 허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으므로 박세황은 잠자코 그의 오늘 손님에게 술을 한 잔 더 따라주었다.
라선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러시아인들부터 북조선 군관들까지 모두가 폭넓게 좋아하는 독한 고급 보드카였다.
요새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고급 바와 레스토랑, 호텔들이 문을 여는 이 라선에서도 돈주들이 외국 손님 접대할 때 이용하는 바가 이곳이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박세황은 마지막까지 신중을 기하는 의미에서 최무룡을 칙사 대접하듯 아낌없이 썼다.
어차피 이거 다 예산이기도 하고, 하나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취해 있을수록 좋았다.
결정적으로 이 ‘접대비’는 박세황 본인 돈이 아니라서, 나중에 영수증 떼서 갖다 주면 되지 뭐, 하는 전형적인 월급쟁이 마인드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고.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의 빈대까지 잡아먹는다더니, 북괴 놈들 갑자기 돈맛, 기름 맛 좀 보니 몇 년 새에 아주 그냥 미쳐 돌아가는군.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자, 그럼 이제 비즈니스 이야기로 들어가자면…… 최무룡 동무…… 아니, 최 과장님……. 하여튼 그쪽이 명천-길주 유전 주둔부대 군관들까지 다 선후배로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아 속고만 살았소? 어쩌다 세상 바뀌어 이 지경이 됐지만 이 최무룡이가 기래도 한때 김정일 정치 군사대학 나왔던 재원이요. 지금 이 돈장사도 사람 잘못 패는 바람에 써비차 사업 주저앉고 죽을 고생하다가 인맥으로 어찌어찌 해 먹는 기고. 제길,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열이 뻗치누만.”
“고생이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신의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자식 안해랑 세간 다 싸 들고 도망 나오고……. 그나마 다행인 게 내가 군에 있을 때부터 주먹을 좀 쓰고 따르는 동생들이 많아서 지금 이 일자리를 잡았소. 사람 죽여서 교화소 갈 뻔했다 기러니 오히려 환영을 해주질 않갔소? 기런데…….”
여기까지 넋두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다가 보드카의 취기로 흐릿해진 듯했던 최무룡의 눈동자가 잠시 번쩍 빛났다.
“……기런데 박 동무는 명천 길주 석유 기업소 담당 간부들은 왜 만나려고 하는 기요? 박 동무도 모르지는 않을 거이지만 거기는 평양 중앙당에서 직접 관리하는 곳이라 잘못 손대면 삼족이 삼수갑산 갈 각오를 해야 될 기요. 기것도 남조선 동무들은 근처에도 못 오게 하는데, 혹시 뭐 꾸미고 있는 거이 아니오?”
“……!!!”
은근 멍청해 보여서 별거 아닐 줄 알았던 정보원이 허를 찌르는 추궁을 하자 산전수전 다 겪은 박세황도 잠시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거리며 별일 아니라는 듯 털어놓았다.
“꾸미고 있는 거? 아 그거야 물론 있지요.”
“……동무, 지금 뭐라고…….”
“제가 저기 남조선 성삼 그룹 성삼 중공업 대관(代官) 업무 담당자인 건 아시죠? 왜 그 비디오테이프 기계 만드는 회사. 거기도 성삼 전자라고 남조선에서 알아주는 기업입니다. 그래 봤자 기름 캐서 버는 돈 한참 못 미치지만…… 하여튼 대관 업무라는 게 뭐겠습니까, 대할 대, 벼슬 관! 즉 관을 상대로 하는 업무다 이겁니다.”
“……기런데?”
“바로 그 성삼 그룹 회장님께서 여기 북조선에서 석유가 나는 게 이제 확실해졌으니, 근대중공업이랑 정문영이가 혼자 다 퍼먹는 꼴은 못 보겠다 그렇게 불호령을 하신 겁니다. 그런데 저기 평양의 총서기님은 정문영 회장하고만 친하니 이거 우리 성삼은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 없다 이거죠. 그래서 저 같은 사람 대관 담당자가 있는 겁니다. 좀 짐작이 가시죠?”
박세황이 상당히 대략적으로 설명해 줬음에도 최무룡은 잠시 머리를 굴리는 눈치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클클 웃었다.
“그거이 알겠구만, 간부들이랑 군관들한테 기름칠을 해서 바늘 들어갈 수 있게 구멍을 넓히라는 거이 아닌가. 거 남조선 동무들도 목구녕이 포도청인 건 여기 이북이랑 똑같구만 기래.”
“그래도 그거 덕분에 저도 먹고삽니다.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다 저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러지 말고 한 잔 더 하시죠.”
최무룡이 대충 납득한 듯하자 박세황은 그가 더 귀찮은 질문을 하기 전에 술로 입을 막아버릴 심산으로 보드카를 한 잔 더 주문했다.
은쟁반에 받쳐 나온 보드카를 얼음과 물을 섞어 쭉 들이켠 최무룡은 신음을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크으, 이거 죽이는구만. 기래. 박 동무, 내 오늘 면을 튼 기념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주갔소. 동무래 라선의 ‘3대 노선’이 뭐인 줄 아시오?”
“3대 노선? 그게 뭡니까?”
“뭐갔소. 이 라선에 돈이 넘치게 만든 선 3개를 말하는 기지. 총서기 동지의 개혁 개방 이후로 이 공화국이 점점 부유해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라선이 평양 다음으로 제일이오. 아니, 내 듣기로는 곧 중앙에서 장성택 동지 주도로 저기 시베리아하고 철도도 튼다고 하는데, 그거이 들어오면 평양에도 비빌 수 있을지도 모르디!”
“…….”
그렇게 운을 뗀 최무룡이 설명하는 라선의 3대 노선이란 근래 라선 인민들 사이에 떠도는 말이었다.
계획특구로 지정되고 5년, 중공업 단지 조성과 유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라선은 원래 가지고 있던 천혜의 무역항이라는 입지까지 힘입어 그야말로 공화국에서 평양 다음가는 도시로 빠르게 탈바꿈하고 있었다.
부의 중심지인 평양에서 가장 먼 곳임에도 부동항(不凍港)을 필요로 하는 러시아, 동해로의 진출을 위해 교두보가 필요한 중국, 그리고 대륙과 유라시아로 나가려는 북조선 3국 정부와 민간의 수요가 겹쳐 라선에 돈과 사람이 몰린 결과였다.
오죽하면 ‘라선에서는 지나가는 개도 10달러짜리를 물고 다닌다’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는데, 최무룡이 설명하는 소위 ‘라선 3대 노선’이란 개혁개방을 천명하며 김정환 총서기가 내세운 3대 노선에 빗대어 나온 말이었다.
“중국과 시베리아로 넘어가는 철로가 있으니 이게 첫째 선(線)이요, 블라디보스톡과 두만강을 건너오는 로씨야의 해로가 있으니 이거이 두 번째 선. 마지막으로 길주와 명천에서 기름이 들어오는 송유관이 있으니 이거이 세 번째 선. 이 세 가지가 라선의 3대 선! 평양 중앙당에만 3대 노선이 있는 거이 아니라 이 라선에도 3대 선이 있다 이 말 아니갔소? 하하하하……!!!”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는 빛과 어둠이 존재하듯이, 이러한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유전과 중화학 공업소, 제철소에서 땀 흘려 일해 급료를 손에 쥔 인부들은 술과 여자를 찾아 밤거리를 헤맸고, 그런 그들의 수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라선에는 벌써부터 홍등가가 들어서고 성매매가 성행하고 있었다.
거기서 만족하지 못한 자들은 도박이나 심지어 마약처럼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그래서 더 하고 싶은 것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히 양지에서 유통시킬 수 없는 검은돈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고, 그 수요는 최무룡 같은 불법 사금융 업자들을 부흥시킨 것이다.
“원래 이 돈장사, 대부업이 말이야요, 저기 일본에서 야쿠자 하던 째포(재일교포)들이 일본 돈 시장 바닥이 꽉 차자 눈깔을 굴리다가 여기 조선으로 자기들 하던 놀음을 그대로 들여와서 하던 거이요. 우리 천리마 대출 사장 동무도 일본 나고야 출신이지 않갔소.”
“요즘 재일교포들이 이 북조선에서 돈줄을 꽉 쥐고 있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제에기, 예전 같으면 민족동포를 버리고 섬 쪽바리들에게 붙은 째포들이라고 눈길도 안 줬을 거인디, 요즘 공화국에서는 총서기 다음으로 돈이 당 간부고 인민영웅이고 수령님이요. 공화국 군관이 째포 놈 밑에서 주먹질이나 하다니…….”
‘취하기 시작했군. 슬슬 기회가 온다.’
얼굴을 불콰하게 물들인 채로 최무룡이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하자 박세황은 기회가 왔음을 알아차리고 얼른 그의 잔에 보드카를 더 부어 넣었다.
박세황이 자신의 환심을 사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최무룡은 이내 그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술 외의 것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거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도 한때 남조선에서 공무원 했던 사람이라 최 과장님 사연이 남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군요.”
“기렇지. 박 동무 참 마음에 드는구만, 기래. 기런데 내가 박 동무에게 좀 더 얻어먹고 싶은 거이 있는데…….”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최 과장님하고 친해질 수만 있다면 뭐든 사드리겠습니다.”
“저거디. 저거.”
이제 슬슬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꺼내기 위해 각을 재던 박세황에게 최무룡은 불그스레한 얼굴을 하고 바 중앙의 무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 중앙의 무대에는 가슴이 다 드러나는 선정적인 옷을 입고 춤을 추며 손님들에게 눈요깃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는 금발 벽안의 러시아 여성들이 있었다.
“저 로씨야 에미나이들이 말이야, 요새 그 동네 먹고 살기가 워낙 각박해져서 이 조선 땅 라선까지 흘러들어와. 근데 내 동무들 말로는, 저기서 춤만 추는 게 아니라 손님이 돈을 좀 괴면 데리고 나가서…… 흐흐흐흐…….”
“…….”
“이래서 나라는 사람이든 잘 살고 봐야 되는 기지. 소비에트 시절만 해도 어디 이런 일을 생각이나 했갔나? 이게 다 총서기 동지의 신묘한 계책으로 이 라선에 달러가 넘치게 된 덕분 아니갔어. 저기 저 뽀얀 젖가슴 좀 보라우. 저거이 이 조선 에미나이들에게는 가당키나 한…….”
‘젠장, 참자 참아.’
박세황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이놈한테 화대까지 내줘야 최종 목표 지점인 석유공사 간부들에게까지 자신을 데려다줄 것 같았다.
그리고 최무룡이라는 놈 역시도 돈놀이하는 놈인 만큼 매수할 수 있을 게 뻔했고, 그러면 자신의 원래 목적인 길주, 명천 유전의 자원공사 간부들에게까지 끈을 댈 수 있을 것이다.
무용담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원래 자기가 하는 일이 다 그런 거 아닌가.
“알겠습니다.”
“아이고, 고맙구만, 박 동무. 내 오늘 박 동무 덕에 간만에 평생소원 이루갔어. 하하하……!!! 이렇게까지 이 최무룡이를 환대해 주니 내 박 동무랑 성삼그룹 회장님이 만나고 싶은 동무가 누구건 두 팔 걷어붙이고 밀어줘야지 않갔어. 그 밖에도 원하는 거이 있으면 말만 하라우, 누구 된맛을 보여줄 놈이 있는 기야? 그거이 아니면 급전 써야 하는 거이가? 내 박 동무에게는 특별히 우대 이자로…….”
“비즈니스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과장님. 제가 이야기를 꺼냈던 비즈니스에는 사실 영어로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박 동무, 갑자기 뭔 소린가?”
“첫째로 사업이라는 뜻이고…… 둘째로 모험이라는 뜻입니다. 최 과장님도 언제까지나 째포 밑에서 주먹질하고 돈이나 뜯으며 살고 싶지는 않으실 거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과장님. 저하고 모험 한번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
“저를 명천 유전 간부들에게 잘 소개해 주고 개중에 특히 돈이 급하거나 한몫 잡고 싶은 사람을 연결시켜 주신다면 그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기, 기건…….”
“제 뒤에 있는 분들, 성삼그룹 회장님 같은 분들은 이 조선의 유전 사업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 돈이야 봉이 김선달 대동강 물 쓰듯 쓰실 수 있는 분들입니다. 최 과장님도 저처럼 안해(아내) 자식이 있지 않습니까? 그 대동강 물 몇 바가지만 퍼가도 평생 호강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최무룡은 박세황의 제안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이 무대에서 금발을 휘날리며 춤추는 헐벗은 러시아 댄서들의 요염한 다리와 박세황의 빛나는 눈동자 사이를 연신 왔다 갔다 했다.
결국, 그날 박세황은 보드카에 각종 안주, 거기에 자기 조카뻘밖에 안 되어 보이는 러시아 여성 댄서들을 최무룡이 위층 객실로 데리고 올라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호텔 바를 나섰다.
“에이, 제기랄,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가 쉽지 않구만.”
거머리 같은 놈을 떼어놓고 밤거리로 나오니 속이 다 후련했다.
잠시 짬을 내어 담뱃불을 붙이다가 박세황의 눈에는 저 멀리 불야성(不夜城)을 이룬 라선의 야경이 더욱 잔인하게 반짝거리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찬탄을 내뱉었다.
“히야…… 이거 20년, 아니 15년만 더 있으면 홍콩 뺨치겠는데?”
과장이 섞여 있기는 해도 라선의 발전상에 대한 박세황의 감상은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정확했다.
하루가 멀다고 세워지는 호텔과 빌딩, 철도 공사현장의 불빛은 라선을 그야말로 밤이 없는 도시로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근 몇 년간 인근 청진에는 제철소와 승리 화학 단지가, 길주와 명천에서는 영미의 다국적 자본이 유전을 개발하고, 그 자본이 다시 라선으로 흘러들어 오면서 라선은 계획특구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어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자본주의의 물결이 가장 많이, 가장 빨리 밀어닥치면서 그 수혜와 부작용 양쪽 모두 라선 특구가 가장 많이 겪는 도시가 된 것이다.
각국의 상인들과 선원, 최무룡 같은 범죄자에 그들을 단속하는 보안원, 외국 스파이까지 한 데 섞여 달아오른 냄비처럼 끓어 넘치는 현재의 라선은 그야말로 마경(魔境)이라고 할 만했다.
“잘되어야 하는데…….”
수많은 인생과 그 인생에 담겨 있는 각자의 사정, 피땀과 눈물, 야심과 희망이 별빛처럼 명멸하는 그 야경을 보고 있자니 박세황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번 일이 잘돼야 고향 대한민국으로 어깨를 펴고 돌아갈 수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비록 떳떳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박세황은 자신이 하는 일이 결국 조국과 민족 나아가 자신의 가족을 위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순수한 바람 하나만큼은 지금 자신이나 이곳 라선에서 용쓰는 북조선 인민들이나 다를 바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박세황은 가슴 한구석이 씁쓸했다.
그러나 언젠가 시간이 지나 한국 서울에 있을 자기 아이들이 장성했을 때 지금보다는 더 나은 나라, 더 강하고 인정받는 조국에서 살게 해주기 위해서, 지금 자신이 하는 일들은 어쩔 수 없다고 박세황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각, 저 멀리 떨어진 평양에서는 이런 박세황의 막연한 기대를 배신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이름 박세황, 나이 41세. 충청북도 청원군 출생이고…… 기혼에 아들이 둘 있습니다. 남조선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해서 안기부 대(對)조선 그루빠에서 재직하다 얼마 전 남한 대통령 박이삼이 안기부를 개편할 때 모종의 이유로 퇴직했습네다. 현재는 표면적으로 공화국에 사업허가를 받은 성삼그룹 국제과에 몸을 담고 있고요.”
“……그 모종의 이유란 뭔가?”
“저희 총국 대 남조선 그루빠의 조사에 따르면 빚을 많이 졌다고 하더군요. 주식하다가 날리고, 증권하다가 날리고…… 하지만 이건 모조리 신분세탁을 위한 남조선 안기부의 연막작전, 사전에 지시를 받은 행위가 확실하다는 게 저희 대외정찰총국의 소견입네다. 총서기 동지.”
정환은 정찰총국장 리종수가 자신의 책상 위에 내려놓은 파일에 붙은 박세황의 사진과 인적사항을 자세히 눈으로 훑었다.
개혁개방을 지시하고 한국 기업들을 공화국 내에 들일 때부터, 그중에 안기부의 공작원이 끼어 있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원역사에서도 국정원 간부가 경수로 시공을 위한 건설관계자로 위장해서 입북해 정보활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나름 유명하지 않았는가.
어차피 그 많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다 거를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원 역사에서 정환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찾을 수 있었다.
“남조선 안기부에서도 단단히 주의를 기울이고 보냈는지, 저희 남조선 내 방첩망을 총동원해서 이 정도 정보밖에 모으지 못했습네다. 총서기 동지께서 사전에 이 박세황이라는 놈의 암호를 알려주지 않으셨다면 이 동무가 남조선 안기부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걸 꿈에도 몰랐을 겁네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신통력을 발휘하셨는지…….”
“지금은 알 거 없네. 그래서 리종수 국장 동무. 안기부 내에서 이 친구를 뭐라고 부른다고?”
마지막 최종 확인을 위해, 정환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리종수에게 물었다.
리종수의 입에서 나온 답은 역시나였다.
“그동안 이 박세황이는 라선과 명천, 길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우리 공화국의 보물, 명천 유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주력한 것으로 보입네다. 남조선 안기부에서는 이 박세황이라는 자를……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호칭한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