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150화 (150/350)

경애하는 수령동지 150화

53장. 라선에서 벌어지는 일들

1994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쏘아진 화살처럼 지나가는 와중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연 평균 GDP 성장률 16%.

석유와 해외투자로 인해 자본이 형성되었고 그 자본을 재투자해서 물류 인프라를 닦고 산업을 부흥시킬 책임감 있고 유능한 관료들, 소비욕구 높은 2천 4백만의 인민들, 무엇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국가개발을 해야 할 지 아는 독재 권력의 지도자가 있으니 경제 성장이 느릴 수가 없었다.

물론 아직은 남조선에 비해서 1인당 국민소득이나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최소한 북조선 인민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원동력이 생겼다.

‘보상 받을 수 있는 미래’라는 이름의 희망이.

그리고 선전선동부 산하의 방송과 신문에서는 그러한 인민들의 심리를 빠르게 꿰뚫어보고, 날이면 날마다 성장제일주의적인 광고와 방송, 프로파간다를 내보냈다.

-오늘 김정환 총서기 동지께서는 제2기 평양지하철 확장공사 착공식에 참석하셨습니다.

7년 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해, 평양 지하철이 완성되면 한 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듯 평양도 새롭게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으로 축사를 대신하셨습니다.

-오늘의 달러환율은 1달러에 1,400조선원입니다.

조선 중앙 방송에서 뉴스 말미에 환율의 등락 정보를 알려주는 편성은 시대 변화의 상징이었다.

생활총화도 자아비판도 체제경쟁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경쟁이 들어섰는데, 그건 바로 경제력 경쟁이었다.

그리고 경제력에서 남조선을 이기는 게 암묵적인 국시(國是)가 되어버린 시대상황에서, 조선로동당 조직도도 새로운 목적에 맞춰 점차 변해갔다.

이념 중심의 조직에서 성과 중심의 조직으로, 김씨 일가와 그들에게 아부하는 인사들 중심의 조직에서 전문적인 고학력 관료들 중심의 조직으로.

그리고 그러한 변화 중 하나가 내각에 소속되어 있던 대외경제성(對外經濟省)의 이름을 바꾸고 당 직속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개편되어 해외투자의 공화국 유치 및 수출입 관리 분야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될 ‘대외 경제 위원회’의 수장은 의외라면 의외의 인물이었다.

“정치국 직속 대외경제 위원회라…… 위원장은 누구로 하실 생각이십네까, 총서기 동지?”

“그야 이 사람 아니겠소, 들어오시오.”

“어, 어엇!”

“……허엇……!”

“……와들 그러나, 동지들? 나 처음 보나? 아니면 뭐 찔리는 거이라도 있어?”

갑작스레 숙청되었던 장성택이 대외 경제 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함으로 돌아온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졌던, 아니 모든 사람이 숙청당했다고 생각했던 장성택 조직 지도부장의 복직했다는 소식은 평양의 대학생들 사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빌 게이츠의 방북에 이어 평양을 뜨겁게 달구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놓고는 이 주제를 공적인 자리에서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고, 장성택 역시도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 변함없이 행동했다.

물론, 진짜로 변함이 없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당장 화려하게 컴백한 장성택의 직함부터 그랬는데, 이전의 조직지도부장 자리에서 한 급수 낮추어 조직지도부 부(副)부장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경제력에서 남을 추월하는 것이 화두가 된 이 시대에서 대외경제위원회라는, 어찌 보면 조직지도부보다 더 실속 있을 지도 모르는 조직의 수장 자리를 맡았으므로 총서기가 정말로 장 ‘부’부장을 용서했는지도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장성택 본인 역시도 위기감과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는지, 대외경제위 위원장에 취임하자마자 야심찬 기획을 꺼내들었다.

“로씨야 동무들과 협력해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의 연결이라…… 공화국 중공업 지대가 위치한 청진과 라선, 그리고 나진에서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하산을 이어 시베리아로 넘어 간다?”

“그렇습네다, 총서기 동지! 지금 공화국은 총서기 동지의 영도 아래 철도망과 고속도로 망을 비롯하여 1차적인 정비를 마친 상태입네다! 따라서 그 다음 단계로 국경을 넘어 공화국의 경제 영토를 더욱 확장시키는 거이야말로 인민 경제력의 향상과 남조선 경제를 뛰어넘는데 큰 발돋움이 될 거라 생각합네다!”

철직 이전보다 몇 배는 공손해진 말투로 장성택이 소리 높여 외치자 정환은 해당 기획안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공화국 내 전도에서 세계 전도로 확장되는 이미지가 눈에 들어오자 내심 혀를 내둘렀다.

흠, 확실히 이 양반 나한테 잘 보이려고 작심한 모양이군.

이런 놈의 물건까지 들고 올 정도면 말이야.

“라선이야 원래 무역요지이기도 하고 특히 로씨야 동무들은 블라디보스톡이 포화 상태니 라선과 철도를 연결하자고 하면 쌍수를 들고 좋아하겠지만…… 이건 또 뭔가? 개성에서 시작하는 유라시아 횡단철도? 장 부부장 동무는 이게 과연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로씨야는 지금 엉망이니 달러가 한 푼이라도 급할 것이고 중국 동무들은 조선반도, 나아가 유럽까지 이어지는 물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서라면 거부할 이유가 없습네다. 구라파(유럽)도 1년 전 출범한 EU의 동 구라파 경제 권역을 확대하는 일에 관심을 보일 확률이 높습네다.”

장성택은 자신의 추락한 당내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갓 입당한 젊은이마냥 열성적으로 야심찬 계획을 들고 나온 듯 했지만, 정환은 엄연한 현실주의자였다.

석유로 인해서 모든 가능성이 열린 상태고, 빌 게이츠와 함께 비전 펀드 출범을 준비시키면서 운용 약관에 ‘철도를 포함한 개발도상국 물류에 대한 적극적 투자’도 넣어놓기는 했지만, 당장 공화국 내 고속철조차 노선 계획만 세워놓고 착공을 못한 상태 아닌가.

너무 허황된 계획은 없느니만 못한 것이다.

“……이미 중국 동무들은 비슷한 모델을 도입해 수주를 대가로 캐나다, 일본 등 각국 기술을 흡수하며 전 영토에 철의 비단길을 깔고 있습네다. 일단 건설하시는 김에 미래를 생각해 철도망 복선화와 상호 호환을 설계에 반영하시는 정도는…….”

“그렇다고 해도 이건 현 시점에서는 너무 먼 계획이야. 자체 고속철도 없는 나라가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몇 만 킬로미터짜리 철도를 깔자고 나선다면 국제 사회의 비웃음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지.”

“대신 우리에게는 공화국의 석유 보검이 있지 않습네까. 중국 동무들이 이스라엘과 손을 잡으려는 게 13억 인구를 먹여 살릴 중동 석유가 탐나서라는 건 이제 비밀도 아닙네다. 양키들은 남미에서 기름을 실어온다 치면 구라파 인들은 그린란드, 북해 유전 아니면 로씨야에서 기름을 가지고 와야 하는데…… 북해는 너무 양이 적고 로씨야는 아직도 구라파에서 반쯤 적성국가입네다.”

“…….”

“이 계획의 이야기만이라도 꺼내면 외교 노선 상으로도 공화국의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는 거이, 우리 공화국은 중국, 로씨야하고도 친하지만 이제는 미국하고도 대화를 트는 사이 아닙네까? 자연히 구라파 동무들도 중국이나 로씨야 차원에서 직접 유라시아 철도를 깔자고 제의하는 것보다는 우리 공화국이 중간에서 중재하는 거이 훨씬 부담이 헐할 것입네다.”

과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부용으로 완전히 비현실적인 계획을 들고 나온 건 아니라 그거군.

대외 경제 위원장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장성택의 식견에 정치국 위원들은 전부 나름 고개를 끄덕였다.

정환은 자기 생각을 다 설명하고 진땀을 흘리며 지도자의 재가를 기다리고 있는 장성택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이내 ‘구상이야 나쁠 건 없겠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반쯤 허가를 내려주었다.

“그렇게 장 부부장의 뜻이 확고하다면 천천히 고려해보지. 하지만 이 원대한 계획의 첫발을 떼려면 개성에서 출발해 시베리아-라선 노선, 평양-신의주 노선 고속철도를 건설하는 게 먼저일세. 다 집어치우고 일단 국내 고속철도는 어디에 발주할 생각인가?”

“공화국 내에 건설하시는 기야 여객용으로 주로 쓰일 테니 일본 놈들에게 발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네다. 하지만 차후 라선에서 시베리아 까지 확장할 노선은 화물용이 주력이 될 것이니 캐나다나…… 역시 미국이 어떻겠습네까?”

“허기야 괜히 일본 놈들 돈푼 벌어줄 일은 없갔지요. 수주 조건으로 기술 이전도 받아야 할 거인데 고놈들이 제대로 갈쳐줄 지도 모르고 말입네다.”

“부시 대통령과의 관계를 고려해서라도 미국에 수주를 맡기시는 거이 제일 합당할 듯 싶습네다.”

‘이런, 정말 짧은 시간에 많이 변하기는 했군.’

정환은 이구동성으로 미국에 국가적 철도 프로젝트를 발주하자고 하는 정치국 위원들을 보며 자신이 의도한 것이기는 해도 새삼 시대의 변화를 절감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민족의 적 미 제국주의자’를 앞장서서 외치던(물론 뒤에서는 외제물산에 열중하기는 했지만) 이들이 어느새 지도자 앞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외치게 된 것이다.

달러, 석유, 시장경제가 인민들 뿐 만 아니라 당 간부들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전히 일본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거부감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정환은 그것까지 고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의 권력이 확고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는 제어할 수 있는 선 안에서 권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좋네. 그럼 장 위원장 동무 주도로 접촉을 시도해보지.”

“감사합네다! 총서기 동지!”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리종수 대외정찰총국장 동지 들어오라고 하게.”

그렇게 유라시아 횡단 철도라는 장대한 계획의 제일보로, 청진에서 라선을 거쳐 하산까지 이어지는 국제철도망 부설 계획에 시동이 걸렸다.

외무성을 통하여 러시아와 중국, 일본과 미국 철도회사로 사람이 보내졌다.

그러나 정치국 회의가 끝날 때까지도 아무도 남조선, 대한민국과 관계도 개선도 할 겸 경부선, 경인선 등 한국 철도와 연결시켜 보는 걸 타진해보자는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정환도 그렇고, 모든 간부들이 아직은 한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외교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북관계 개선은 양자가 대등한 입장에 섰을 때(라고 쓰고 북조선이 완전히 주도권을 잡을 때)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정환의 기본적인 외교방침이었다.

* * *

평양의 북조선 핵심부에서 한국에 대한 이러한 전략적 무시 정책이 시행되고 있을 때, 문제의 계획경제 특구 라선에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아직 민간인들의 허가받지 않은 월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관계로 그들 대부분은 북조선에 거액의 투자를 결정한 남조선 기업 관계자들이었는데,

지금 라선 특구의 한 바(Bar)에서 누군가와 접선하는 박세황도 그중 하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삼 그룹 다니는 박세황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소. 나 최무룡이라는 사람이오.”

박세황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험악하게 생긴 오늘의 손님, 최무룡은 거만하게 고개만 한 번 까딱했다.

하지만 박세황은 아랑곳 않고 자리에 앉으며 준비한 접대 멘트를 주워섬겼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 라선에서 알아주는…… 그 금융회사에 다니신다고요.”

“하하, 기렇지. 이런 말 하기는 뭣해도 내가 시작은 늦었어도 진급이 꽤 빠른 편이야요. 다 젊은 시절 군에 몸담으며 쌓아둔 경륜과 인맥 덕분이디. 역시 남이나 북이나 남자는 군에 다녀와야 사람이 되는 기요. 그렇지 않소, 박세황 동무?”

“하하,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군대 다녀와야 철이 들지요.”

사실 지금도 군 생활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박세황이었지만, 지금 여기서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북에 와서 이 최무룡이라는 사람에게 닿기까지 근 반 년을 오롯이 들였던 것이다.

성삼 그룹이라는 멀쩡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그가 왜 이 라선의 호텔 바에서 최무룡이라는 거만한 전직 정치부원과 만나고 있느냐면, 거기에는 다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 * *

“그러니까, 이 최무룡이라는 사람이…… 아니, 동무가 인민군에서도 알아주는 마당발이었다? 이 동무 하나하고만 친하면 청진에 있는 정유 사업소나 명천, 길주 유전 담당 투자공사 당원들, 호위부대 군관들하고도 안면을 틀 수 있다 그 말입니까?”

“아, 기렇다니까, 박 동무. 남조선 사람이라 기런지 의심이 많아가지고는…….”

“보자, 전직 정치부 부원에, 전역한 후에는 신의주에서 택시기사를 했다라…… 근데 시비가 붙어 조선족 하나를 죽여? 거참 굴곡진 인생이군. 그래서, 지금은 이 라선에서 뭐하고 산답니까?”

“이거야요.”

“……? 이 찌라시는 뭐야?”

“그래, 박세황 동무는 우리 기업소…… 아니, 남에서는 회사라고 부르던가? 우리 회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오?”

“라선 돈주들에게 꼭 필요한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홍보도 아주 열심히 하셔서…… 하하하.”

자신을 최무룡에게 안내해준 정보원과의 대화를 떠올리다가 박세황은 주머니에서 문제의 홍보물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웃음으로 뒷말을 흐렸다.

그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건 명함 하나 크기의 인쇄물,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찌라시’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종잇조각이었다.

길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지나가던 사람 눈에 확 띌 수 있도록 크고 원색적인 글씨로 인쇄된 활자로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부르면 어디든 달려가는 공화국 최고 돈줄 천리마 대출! 연 이자 4할 5푼의 로동자 친화적 금리! 당일 대출 철저보장.

“4할 5푼? 연이자율이 45%라고? 잠깐, 그 말은 이 최무룡이라는 사람 직업이…… 사채업?”

“에헤이, 사채업이라니, 박 동무. 그 남조선에서도 점잖게 부르는 이름이 있지 않소. 뭐라 그러더라, 대부업인가…….”

“……하긴 뭐 연 이자가 45%면 확실히 사채업자라 부르기는 좀 그렇지.”

‘……사채업자도 아니고 그건 숫제 도둑놈 혹은 산적이지, 그나저나 북한에서 사채업자라, 참 요지경 세상이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박세황은 눈앞에서 보드카를 들이키는 최무룡의 건너편 테이블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최무룡의 ‘동생들’, 힘 좀 쓰게 생긴 어깨들을 불안하게 곁눈질했다.

저 친구들도 아마 최무룡의 직장, ‘천리마 대출’의 어엿한 직원들이리라.

오늘 그가 접선한 사람, 최무룡은 다름 아닌 라선 바닥에서 유명한 사채회사의 수금담당 직원 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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