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139화
장성택의 말에 두 사람은 좀처럼 짐작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과거 조선 시대에 ‘왕비’를 간택하는 데 여러 자격 요건이 필요했던 것처럼, 북조선, 정확히는 김 씨 일가에서도 이제껏 수령, 혹은 차기 수령의 비(妃)를 뽑아 올리는 데에는 까다로운 조건들이 요구되었다.
우선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이 바로 해당 여성의 출신 계급이었는데, (물론 계급이란 단어는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성분’이라는 말로 바뀌어 불렀다.)김일성 - 김정일 시절 인민들은 모두 세 계급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열사 유가족이나 조국해방전쟁 유가족, 조선로동당원이나 그밖에 특혜를 받아 평양에 거주하는 것이 허락된 핵심계층(核心階層).
일반적인 인민들 대다수가 속해 있는 중산층 격인 동요계층(動搖階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짐승보다 조금 나은 정도인 적대계층(動搖階層).
이 모든 계층의 위에는 주석 김일성과 그의 최측근 및 그들의 혈족으로 이루어진,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특별계층이 군림하고 있었다.
이 계급, 아니, 성분은 김정환 총서기가 취임한 지금이야 흘러간 이야기지만 북조선 사회에서 어떤 실력이나 경력보다 우선시되었다.
그리고 세습까지 되는지라 가족이나 친척 중 적대계층이 있으면 본인이 동요계층이나 핵심계층이라도 자신도 적대계층으로 편입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최고 존엄의 안해(아내), 안사람이 되려면 가족은 물론이고 사돈의 팔촌까지 신원조회를 거쳐 상위 1%의 핵심계층이어야 하며 친인척 중 적대계층의 그림자라도 보이면 안 되는 것이다.
설령 엄청난 미모를 타고나 어떻게 수령의 총애를 샀다고 해도 정식 부인, 즉 공화국의 국모(國母)가 되는 일은 핵심계층 외에는 꿈도 꾸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북조선에서 당연한 ‘상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영숙, 김용건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문제의 유혜림이 공화국의 국모가 되기에 출신 성분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유 소좌의 성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총서기의 부인으로서 매우 모범적이지 않습니까?”
유혜림은 대대로 군인 집안이다.
아버지는 육군 대좌 출신이고 어머니도 평양에서 나고 자라 간호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는 핵심계층.
아니, 애초에 본인부터가 지금은 없어진 호위사령부 출신이라는 것에서부터 출신 성분에 논란이 있을 수가 없었다.
수령과 그 일가족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부대 출신 녀성의 성분을 꼬투리 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장성택은 그 의문에도 두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기렇지. 그럼 왜 지금까지, 무려 서른이 다 된 나이까지 총서기께서 결혼을 미루고 계시갔나? 최고영도자로서 안사람을 맞이해서 김가의 피를 이어 차기 공화국을 끌고 나갈 적통후계를 만드는 것이 이 조선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실 분도 아닐 텐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확실히 그건 저도 이상하게 생각해 오던 차였습네다.”
장성택의 말은 조선시대 왕조국가에서나 들을 법한 발언이었지만 김용건과 현영숙 두 사람 모두 전혀 위화감 없이 납득했다.
북조선은 그런 나라였으니까, 그리고 두 사람 다 그런 나라에서 나고 자라왔으니까.
“성분도 문제가 없고, 두 사람 사이에 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럼 뭐갔나? 오래 백두혈통을 지근거리에서 모셔온 이 장성택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일세.”
“그게 뭔가요?”
“총서기가 유혜림이와는 혼인해서 후계를 볼 수 없다는 얘기갔지. 즉, 유혜림이는 석녀(石女), 불임이라는 말일세.”
“……! 그런…….”
두 사람은 충격에 휩싸였다.
1990년대에도 여전히 불임이란 여성에게 있어서 거의 천형, 장애 정도로 취급받는 것이 일상다반사였고, 가부장적 유교 사상이 지배하던, 그리고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북조선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확실히 그거라면 왜 아직까지 별다른 문제가 없는 두 사람이 혼례를 올리지 않았는지 충분히 납득이 간다.
하지만 현영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나요? 의사의 진단이라던지…….”
“현 부장, 총서기 동지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그분의 아내 될 녀성이 애를 밸 수 없는 몸이라는 걸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있갔나? 다른 분도 아니고 이 공화국 최고존엄의 체면과 정통성에 치명적인 손상이 갈 수도 있는 일인데 말이야.”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설령 그런 물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그런 걸 엿들을 수 있갔나? 최고존엄과 백두혈통의 용태에 대한 정보는 조직지도부장인 나로서도 접근할 수 없는 특급 기밀일세. 잘 알면서 왜들 기러나.”
“…….”
확신에 찬 장성택의 지적은 일견 옳은 말이었기에, 현영숙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암살에 대한 편집증적인 공포가 있었던 김 씨 부자는, 만수무강 연구소라고 대대로 자신들의 건강만을 연구하는 연구소를 따로 만들어 놓고 지극히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만 책임자를 임명했다.
물론 그러고서도 자기들의 몰락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게 웃긴 일이었지만, 하여튼 중요한 건 당 이인자라도 수령과 그 일가의 건강상태에 관한 정보를 함부로 캐내려 하다가는 불벼락을 맞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문제는 끝까지 확인을 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현영숙은 묻고 싶었지만, 더 질문하지 않았다.
장성택에게 동조해서가 아니라, 그의 꿍꿍이속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슬슬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해서였다.
반면 일본 주재 외교관이라는 경력 때문인지 공화국 중앙 정계의 생리에서 상대적으로 좀 떨어져 있었던 김용건은 장성택의 속내를 짐작하기 시작한 그녀와 달리 진심 어린 안타까움이 담긴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일입네다. 총서기가 아직 후계자 축에도 못 들 때부터 지금까지 유 소좌는 총서기와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는데…….”
“기렇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김용건 부장 동지. 자네는 일본에서 총서기와 내내 함께 지냈으니 우리 중 제일 잘 알갔지. 내가 알기로 김정일이 시절에 보위부장 김영룡이가 이 사실을 조사한 걸로 아는데…… 총서기 동지와 유혜림 소좌가 한 이불을 쓴 적이 정말로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하나?”
“그건…… 솔직히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래. 그럼 아직도 경사가 들려오지 않는 이유가 뭐갔나? 총서기야 일본에서 여색을 많이 즐겼다고 보위부 보고서에서 봤으니 씨에는 문제가 없고, 그럼 밭에 문제가 있는 기지. 그렇게들 생각하지 않나. 동무들?”
장성택은 자신의 이러한 일련의 추리에 대해서 확신했다.
그리고 이런 뜻밖의 행운이 떨어진 일에 대해서 하늘에 감사했다.
그동안 오래전부터 머릿속으로만 조심스럽게 점쳐온 계획이었지만, 하늘이 장성택의 관운(官運)을 보우하사 앞길이 트인 것이다.
엽색에 일가견 있는 김 씨 일가 피를 받은 사람답지 않게 총서기는 유혜림이 한 여자한테만 관심이 있어서 그동안 감히 말도 꺼내지 못했는데 말이다.
수령의 여자 문제는 가급적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장님 귀머거리 행세를 하는 게 보신에 가장 좋다
하지만, 그 머리 좋고 철저한 총서기라도 후계 문제가 직접적으로 위험에 처하면 생각을 달리할 것이라고 장성택은 확신했다.
마침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장성택도 자신의 진짜 목적에 관련된 운을 떼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게들, 여기 있는 우리 세 명 모두 현 총서기를 옹립했던 그 날의 ‘거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말하자면 개국공신들이 아니야? 그렇다면 백두혈통의 후계를 잇는 이러한 중차대한 사태를 앞에 두고, 우리가 주군의 말 못 할 근심을 덜어드리는 게 신하 된 도리 아니겠나?”
“……그럼 장 부장 동지는 어떻게 하시자는 겁니까.”
“뻔하지 않나. 총서기께 다른 여자를 붙여드리는 것일세. 당연히 임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성동지로.”
“그건……!!!!”
김용건의 안색이 일그러졌고 현영숙은 얼굴에 얼음을 한 겹 씌운 듯 차가워졌다.
이러한 두 사람의 명백하게 부정적인 반응에 장성택은 무슨 생각을 하냐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당 5과(기쁨조)에서 씨받이라도 구해 바치자는 이야기인가요? 장 부장 동지. 그동안 제법 길게 총서기 동지를 옆에서 지켜보시고도 그분에 대해 그렇게 모르실 줄은 몰랐네요. 제가 아는 총서기이시라면, 그런 시키지도 않은 과잉충성은 기뻐하시기는커녕 바로 불쾌해하실…….”
“이런, 동무들. 나를 뭘로 보는 겐가?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말해두자면, 내가 하고자 하는 건 유혜림 소좌를 내치자는 게 아닐세. 오히려 그 두 분의 애정을 지켜드리려 하는 것이지.”
“……??”
“영웅호색이라 했겠다, 어차피 총서기 정도의 위치에 있는 남성이 정말로 정을 두는 여인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자식을 보는 여인이 다르다고 해서 그리 흉 될 것이 있갔나? 게다가 여색을 탐해서도 아니고 합당한 이유가 있는데 말이야. 게다가 이 공화국의 체제 안정이 달린 일이니 어느 쪽이 더 중한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장 부장 동지 말씀은…….”
“내 직접 적당한 처자를 물색하지. 성분도 좋고 건강하고 공화국과 총서기에 대한 충성심이 넘쳐나며 가장 중요한 입이 무거운 녀인으로. 그리고 그 여성 동무로 하여금 공식적으로 총서기와 함께 이 공화국의 국모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일세.”
장성택은 이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니냐는 듯 두 사람에게 슬쩍 제의하듯이 그들을 떠봤다.
그 역겨운 김정일이처럼 국가 권력을 동원해서 양갓집 규수를 데려다가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쓰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북조선이 아니더라도 세계 권력자들도 다들 정부(情婦) 하나둘쯤은 두지 않는가.
“……그럼 유 소좌는……?”
“아 그 두 분이야 서로 알콩달콩 잘살게 배려해 드리면 되지 않갔나. 물론 총서기에게 시집간 여성 동무는 생과부가 되겠지만, 그런 거야 우리들이 힘을 써서 가족들의 미래를 보장하면 충분한 보상이 되갔지. 남동생을 조선투자공사 신입 사환직에 슬쩍 넣어준다든지 아바디 오마니가 소유한 전답이 승호구역 지하철 재개발 공사부지에 포함되도록 해준다든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듣갔지?”
“괜찮은 생각 같군요. 저는 찬성이에요. 장 부장 동지.”
“???”
김용건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 데 비해 현영숙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깜짝 놀란 김용건이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말을 취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하하! 기래, 현영숙 부장 동무는 공화국과 총서기 동지에 대한 내 충정과 심려를 이해해 줄 줄 알았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공화국의 언론을 책임지고 있는 저로서도 총서기께서 서른의 나이에도 독신인 걸 어떻게 인민들에게 선전해야 할지 난감했는데 장 부장 동지 덕에 한시름 덜어낸 기분이에요. 김 외무부장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는…… 이거 참, 저는 공화국 밖에서 외교 사업만 하다 온 사람이라……. 좀 더 생각을 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쯧쯧…… 뭐 더 생각할 게 있갔나? 총서기 동지와 유혜림 소좌는 지금껏 쌓아온 남녀의 정분을 깨지 않아 좋고, 공화국은 총서기 동지의 일인 지도체제를 더욱 공고히 해서 좋고. 아내로 맞아들일 여성 동무는 공화국 1등 신랑감인 총서기 동지의 여사가 되어 신분을 상승해 좋고…….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일일세.”
장성택은 여전히 갈등하는 듯한 김용건을 은근히 책망하면서도 뜻밖에도 현영숙이 자신의 아이디어에 동조해 기쁜 듯했다.
민감하기 그지없는 이 일의 속성상 최대한 정환과 가까운 측근들의 지지를 얻어내야 자신의 위험부담이 줄어드는데, 아무래도 여자라서 가장 설득하기 난감할 거라 예상되었던 현영숙이 정작 먼저 찬성을 표하고 나서니 장성택으로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흠,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홍계성 차수나 백승철 상장에게 알리지 않았는지 이상하군요. 아무래도 충신들이 전부 몰려가 진언하는 게 총서기 동지로서도 좀 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까요?”
“으…… 응? 아! 아하하하…… 기거야 아무래도 홍 차수나 백 상장 그 동무들은 총서기께 좀 나중에 합류한 동무들 아닌가. 역시 이런 내밀한 문제는 현 부장이나 나 같은 진정한 충신들끼리 먼저 의논해야 되는 기지. 그리고 눙토히 말해 그 거친 군관들이 남녀 사이의 문제에 뭘 알갔나? 하하하.”
“흐음, 알겠어요. 부장 동지. 그럼 저는 그렇게 알고 이만 물러가 볼게요. 총서기께 간언할 준비가 되시면 저도 잊지 말고 불러주셨으면 해요.”
그렇게 말하고 현영숙은 문을 향해 또각또각 걸어갔다.
문이 열리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 현영숙은 방금 생각났다는 듯 장성택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방 안에 있던 세 사람 중 오로지 유일한 여자라서, 그리고 한때 비슷한 고민을 해봤던 사람만이 던질 수 있던 질문이었다.
“장 부장 동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확인해 두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보게, 현 부장. 뭐 걸리는 거라도 있나?”
“총서기께서 혼인을 안 하시는 이유, 정말로 유혜림 소좌가 불임이기 때문일까요? 거기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다른 이유라? 이를테면?”
장성택의 질문에 현영숙은 자신도 잘 확신이 안 간다는 듯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분 의중이야 저도 상세히는 몰라도…… 그분 본인에게 결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겠죠. 남조선 신문을 보니 요즘 그쪽에도 그런 유행이랄까 신종 사회 풍조가 번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독신주의, 라고 했었나요?”
그럴 리가,
장성택이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번만큼은 중립이던 김용건도 그건 좀 현실성이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한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독신이라니, 그들의 감각과 상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로서 태어났으면 몸이나 정신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결혼을 해서 자기 씨, 후사를 남기는 건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일반 필부도 그러할 진데 하물며 국가 지도자는, 게다가 현대판 왕이나 다름없는 이 공화국의 최고지도자는 더더욱 그랬다.
“진심으로 한 이야기는 아니라 믿네, 현 부장.”
“……네, 저도 농으로 한 이야기니, 심각하게 듣지 말아주세요. 그럼.”
자신도 터무니없었다는 듯 피식 입꼬리를 올린 현영숙은 그대로 회의실 문을 닫고 당사 밖으로 나왔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용차 운전사가 나오는 현영숙을 알아보고 시동을 걸자 차에 탄 그녀는 짧게 지시했다.
“회의 수고하셨습네다, 현영숙 부장 동지! 선전선동부로 모실까요?”
“아니, 총서기는 지금 어디 계시죠?”
“오늘은 조금 일찍 퇴청하셔서 처소로 가신 걸로 압네다.”
“그럼 그곳으로 가세요. 최대한 빨리.”
* * *
“고마워.”
“……뭐가요?”
속옷을 다시 입는 유혜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정환이 한마디 툭 던지자 유혜림이 그렇게 화답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입을 가리는 그녀에게 정환은 몸을 일으켜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못다 한 말을 끝마쳤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다…… 특히 지난번에 내가 털어놓은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텐데…….”
“아니요. 이해합니다. 이건 저나 동지 개인보다 훨씬 더 큰 문제니까요. 후일 인민들과 역사가들은 동지의 결정에 대해서 위대하기 그지없는 행위였다고 칭송하게 될 겁니다.”
강경할 정도로 딱 잘라 말하는 유혜림의 모습에 정환은 그녀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할 뿐이었다.
8년에 걸쳐 자신의 곁에 있어주면서 그 모든 일을 함께해 준 고마움.
그리고 그러면서도 이것밖에 못 해주는 것에 대한 미안함.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자신은 그녀에게 큰 빚을 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인들은 정환의 이름은 기억해도 그녀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환은 그녀에게 다시 한번 미안할 뿐이었다.
그때, 침실 밖에서 조심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정환은 드물게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뭐야, 오늘은 분명히 일찍 좀 쉬겠다고 언질을 해놨을 텐데…….
“뭔가?”
“쉬, 쉬시는 데 죄송합네다! 총서기 동지! 지금 밖에 현영숙 선전선동부 부장 동지가 급히 찾아와서 기다리고 계십네다! 긴히 총서기 동지를 독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