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136화
“화낙이라면…… 분명히 지난번 청진에 들어설 근대 공장 시찰 하실 때 본 걸로 기억이 납니다만…….”
어디서 본 기억은 나는데 정확히는 안 나는 듯한 유혜림과는 달리 정환은 화낙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컴퓨터 수치 제어 공작기계(CNC) 분야 세계 1위, 시장 점유율 50%, 제어용 서보모터(servo motor) 분야 1위이자 정밀도에서는 경쟁자인 독일이나 스위스의 기업들보다 우위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현 시점에서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화낙이 집중적으로 연구 중인 무인 로봇 분야는 장차 세계 유수의 제조 기업들이 화낙의 로봇 팔 없이는 공장이 안 돌아간다고 할 정도로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지배적인 기술력은 오로지 수치 제어 기계 외길만 걸어가겠다는 일념 하에 사업 다각화 같은 건 거의 외면하다시피 한 결과이며, 모기업인 후지쯔에서 갈라져 나온 것도 창업주가 후지쯔에서 정보통신 분야로 사업 방향을 잡자 자신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으로 화낙은 제조업 기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영업이익률을 내며 그 이익을 다시 연구개발에 투자하여 자신들의 분야에 대한 경제적 해자를 높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환이 조지 소로스까지 초청해가며 화낙을 인수하려고 한 건 높은 이익률 때문만은 물론 아니었다.
“CNC…… 라면 공작기계선반을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 정도는 우리 공화국에서 어느 정도 자체 생산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조선이나 중국에서도 근대 같은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공작기계 선반을 생산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이렇게 노고를 들이면서까지 저 쪽바리들 기업을 사시려는지…….”
“CNC에서 중요한 건 정밀도 거든. 같은 기계를 통해 만들더라도 저쪽과 공화국 기계에서 만들어진 건 나사못 하나에서부터 차이가 날 걸세.”
“……?”
“당장 같은 설계도에 같은 사람이 만들더라도, 공화국 제 공작선반이 가공한 부품을 이용해 만든 것과 일제 부품을 이용해 만든 것이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는 것 정도는 유 소좌도 경험과 실제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아……! 요즘 들어 점점 눈이 트이고 있는 중 입네다, 총서기 동지.”
자존심 상한 표정 반, 부끄러움 반이 섞인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유혜림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정환은 지도교수가 하나씩 깨우쳐가는 제자를 보는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와 함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일본 망명까지 다녀온 유혜림이었지만, 아직도 근본은 시장에서 뭔가를 사기보다는 배급을 타 쓰는 것에 익숙했던 ‘김정일 인민’이었다.
밀수입된 일제 물산을 쓰거나 일본 현지에 가서 먹고 입으면서도 일제 품질이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 산업생산력과 공업력이 어디에 기인하고 공화국과 정확히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까지는 여타 인민들처럼 그다지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었다.
본인도 그걸 느꼈는지 아니면 근래 들어 서기실 직원들이 쑥덕대듯 ‘자본주의 인민보다 더욱 자본주의 인민 같은’ 정환을 보필하기 위해서인지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그 와중에 그녀가 느낀 건 자신이, 그리고 이 공화국 대다수의 인민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이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남조선이나 옆의 중국에까지도 더더욱.
하지만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전환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정환은 그런 그녀의 지적 혁명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 발전해나가면 천재가 아니라 범인도 언젠가 목표한 곳에 도달해있기 마련이지. 아직도 머리 굳은 채인 당 간부들이나 일반 인민들도 저렇게 생각이 유연하면 오죽 좋으련만.’
“금속 정밀가공 능력의 확보는 낙후된 공화국 산업 재건과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야. 그것뿐이라면 이렇게 큰 지출을 쓰지 않고 그냥 저쪽에서 기계를 사와도 되지만…….”
미래를 대비해야 하니까.
정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의 지도 아래 북조선은 일본 부동산 버블에서 뜯어낸 자금과 양산을 시작한 석유에서 나오는 오일 머니로 회복 단계에서 벗어나 빠르게 경제성장 가도를 걸어가고 있었지만, 기술이라는 것이 일조일석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당에서도 그의 지시로 한국의 금은동탑 산업 훈장을 흉내 내어 1,2,3등 ‘인민 산업 보국 훈장’을 제정하는 등 나름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앞선 국가들을 따라가기만 하고 미래 시장주도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찾아올 ‘중진국 함정’을 피할 수가 없다.
이미 첫발을 디딘 IT시대의 도래와 스마트폰, 드론 등 미래 산업발전 동향을 감안하면, 무인로봇 공정 기술력을 확보한 화낙은 국가적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주식을 가지고 있어야할 기업이었다.
그리고 산업적 측면 뿐 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그랬다.
“이걸로 안토노프가 내건 요건 중 첫 요건 하나는 지켰군. 자체 정밀부품 생산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위상배열 레이더 같은 건 무망한 이야기라고 했었지.”
CNC를 이용한 정밀부품 생산능력은 군사기술에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당장 미국 MIT에서 개발된 이후에도 냉전시절에는 ‘군사적 전용’을 이유로 소련을 비롯해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에는 수출이 철저히 금지되는 품목 중 하나 아니었나.
물론 스파이 등을 동원해서 시간이 좀 지난 후 소련에서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잠수함 추진기부터 탄도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CNC는 전략무기 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
물론 붕괴 직전까지도 미국의 그것을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소련에서 북조선으로 옮겨온 안토노프도 북조선 F16 개발에 앞서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정밀 부품 가공 능력을 확보할 것’이었다.
“그런데 총서기 동지, 정말로 그 화낙인가 하는 기업소의 지분을 인수하는데 면을 내세울 대외적인 인사가 필요했다면 그냥 처음부터 손정의 동무에게 인수를 지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왜 굳이 소로스 동무까지 끼워서 주가를 비싸게 올려놓고 본격적으로 인수를 시작하시는 지 그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그야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지. 만약 처음부터 손 마사요시를 내세워 후지쯔 지분을 인수하려 했다면 그 자금 출처에 엄청난 시선이 쏟아졌을 걸. 손 마사요시가 오래 전부터 제조업에 눈독을 들여왔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알지만 후지쯔 같은 대기업을 인수할 정도로 부자는 아니니까. 아직은 말이지.”
“……하지만 그래도 왜 하필이면 소로스 동무를 내세웠어야 했는지는…….”
“이 모든 번거로운 과정들은 우리의 진정한 목표를 숨기고 일본계 자금을 교란시키기 위해서야. 다른 사람이 아닌 조지 소로스와 그의 헤지 펀드니까 후생연기금을 포함한 일본 공적 자금들이 자국 기업 경영권 방어를 위해 백기사로 나서는 것을 꺼려한 거라고. 말하자면 그의 악명을 돈 주고 산 것이랄까. 말 그대로 성동격서지.”
처음부터 정환은 일본인들이 후지쯔 경영권 인수의 목표가 기술력 탈취가 아니라 기업 사냥을 통한 차익실현이라고 착각해주기를 의도했다.
아무리 현재 피오니 홀딩스와 그가 내세운 손 마사요시라고 해도 일본 공적 자금이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서서 머니게임을 벌인다면 답이 없었다.
몇 년 전 버블이 붕괴하고 원 역사보다 크게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일본은 여전히 제2의 그리고 먼 미래에도 제3의 경제대국이니까.
그렇기에 정환은 후지쓰가 보유한 화낙의 지분을 조금 비싸게 가져오더라도 소로스의 손을 걸쳐서 일본 공적자금이 인수전에 들어올 여지를 줄인 것이다.
왜? ‘먹튀’ 당하는 건 누구나 싫어하니까, 그것도 먹튀 당하는 돈이 국민의 세금이라면 더더욱!
‘사실 이건 10년 쯤 후 뒤에서 미국계 헤지 펀드들이 한국 재벌기업, 공기업들에게서 돈을 알겨낸 수법의 변형이지.’
거 왜 그가 중학생이었을 즈음에도 모나코에 적만 둔 어떤 자산운용사가 정유와 이동통신을 주업으로 하는 어떤 국내 재벌을 인수하겠다고 설레발을 쳤다가 마지막에는 수천억 원의 막대한 투자이익을 실현하고 발을 빼지 않았나.
일본 관료들도 바로 그런 꼴을 당할까봐 함부로 발을 내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손정의, 즉 그와 피오니 홀딩스가 정말로 인수합병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대상은 후지쯔가 아니기는 하지만, 하여튼 이제 남은 것은 후지쓰의 손에서 조지 소로스에게로 간 지분을 (피오니 홀딩스 최승일이 이사로 있는) 손정의의 소프트뱅크가 넘겨받는 일만 남았다.
“그럼 이제 일본인들이 늑대와 호랑이, 어느 쪽에 잡아먹히는 걸 선택하는지 지켜보기만 하면 되겠군. 뭐 보나마나 늑대 쪽이 낫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겠지만 지금 이성적인 게 10년, 20년 후에도 이성적인 걸로 보여질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일본 VS 아메리카! 손 마사요시의 소프트뱅크, 아메리카의 금융 마인 조지 소로스로부터 후지쓰 지분을 지켜내기 위해 일전을 다짐!
-‘백기사’ 마사요시의 다짐, ‘경영진 그대로, 기술 개발 투자 그대로, 후지쓰 공장도 일본에 남고 고용인원도 일본인으로 유지,’
-익명을 요구한 후지쓰 경영진, 자사의 주주로 소로스보다 경영 이념을 공유하는 일본인 손 마사요시를 선호한다고 밝혀…….
사람의 심리란 신기한 데가 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처럼, 평상시 별로 곱게 보지 않던 상대라도 더 큰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적수를 만나면, 어느새 적대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심지어 그 사람을 친구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현상이 잦다.
정환의 말처럼, 손정의, 손 마사요시와 조지 소로스는 후지쓰에게 있어서 늑대와 호랑이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지만 일본인들의 여론은 ‘아무래도 미국 호랑이 보다는 일본 늑대가 낫지 않나.’하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물론 손정의는 자이니치, 즉 순혈 일본인하고는 거리가 먼 존재였고 예나 지금이나 일본 사회의 제노포비아는 컸으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지만, 소로스라는 위협 앞에서 편리하게도 그런 사실은 그들의 뇌리에서 바로 잊혀졌다.
때마침 손 마사요시도 그런 여론을 부채질하듯 그때까지 남아있던 자신의 국적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바꿔 자신이 일본인임을 어필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수개월에 걸친 협상과 줄다리기 끝에, 조지 소로스의 퀀텀 펀드는 지금까지 사들인 후지쓰의 지분을 손정의의 소프트뱅크에 매각하고 손을 털고 나갔다.
정환이 그에게 약속했던 대로 주가를 잔뜩 올려 차익을 실현한 후였기에, 소로스로서도 손해 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 손 마사요시는 이 전통 있는 기업, 후지쓰의 이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을 참으로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소프트뱅크가 후지쓰의 지분을 확보하고 경영에 간섭할 수 있는 입장에 오르게 된 후에도 손 정의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경영진의 해임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고,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라거나 기술 개발 비용을 줄이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요구한 것은 딱 한 가지, 소프트뱅크에 후지쓰가 보유한 화낙의 지분을 전부 팔라는 것이었다.
“후지쓰 가족 여러분들은 이번 일로 인하여 경영비전을 공유할 수 없는 적대적인 외국 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저희 소프트 뱅크가 우호적 인수자가 되어 후지쓰의 경영권을 지켜주려고 합니다.”
소로스라는 홍역을 치르고 난 후지쓰의 경영진은 반대가 없었지만, 화낙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단숨에 대주주로 등극한 손정의가 어떤 요구를 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정의는 그 부분도 화낙의 직원과 엔지니어들을 안심시킬 수 있도록 매듭을 지어두었다.
“저는 후지쓰와 마찬가지로 화낙의 기술 개발 일로 매진의 장인정신을 대단히 존중합니다. 제가 대주주로서 요구하고 싶은 것은 저를 경영진에 포함시킬 것, 그리고 제 소프트 뱅크와 합작사를 세워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양쪽 분야에서의 시너지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화낙의 대주주로서 소프트뱅크가 요구한 것은 단 세 가지였다.
1. 소프트뱅크와 합작사를 세우고 기술교류를 시작할 것. 배당도 매 년마다 할 것.
2. 지나친 비밀주의 개선, 합작사에 기술과 특허를 전수하는 새 교육담당 부서를 신설하고, 이들이 화낙의 공장과 현장에서 일하고 교육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 단, 화낙의 정신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합작사는 소프트뱅크 한 개 사 외에는 만들지 않을 것임.
3. 경영승계에 있어서도 창업자 독단이 아닌 자신이 포함된 이사회의 감독을 받을 것.
그 밖에 기술개발 투자비용, 공장을 일본 국외에 세우지 않는 다는 원칙 등 모든 것은 거의 그대로였다.
은둔기업이라는 비판 혹은 칭찬답게 이런 대전환에 대하여 화낙 내부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창업주가 지분을 1% 이하로 보유하고 있던 탓에 지분 18%를 보유한 대주주 소프트뱅크 앞에서는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손정의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뒤에 있는 최승일과 정환은 일단은 여기까지만 하면 된다고 판단했다.
기술을 가져오는 것은 어차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고, 석유 생산이 순조롭게 되는 이상 피오니 홀딩스는 시장에 나오는 족족 화낙의 지분을 사들일 생각이었다.
손안의 떡도 너무 급하게 먹으면 목에 걸려서 체하기 마련 아닌가.
그리고 영국으로 자본주의 경제학을 배우러 떠난 유학생들에 이어 이번에는 선별된 북조선 엔지니어들이 소프트뱅크에 고용되어 화낙으로 교육을 받기 위해 고국을 떠났다.
정환이 15년 후 생산을 시작할 북조선제 F16을 무인기(無人耭), 드론(Drone)으로 만들어 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그때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