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135화
조지 소로스가 후지쯔 인수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 일본 정재계를 지진처럼 뒤 흔들어 놓았다.
후지쯔가 어떤 회사인가, 소니, NEC, 샤프 전자 등과 함께 세계를 제패한 일본 전자업계의 대표 기업 중 하나 아닌가.
슬슬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시작한 개인용 PC부터 노트북, ATM에 이르기까지 기업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일본 내 컴퓨터 역사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후지쯔가, 미국 금융자본에게 팔려나간다는 것은 국부 수호를 떠나 일반적인 정서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일본인들 입장에서 더욱 화가 나는 건, 그 미국 금융자본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조지 소로스가 애초에 후지쯔 경영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다는 것이다.
“주주가치 제고, 경영 투명화, 후진적인 지배 구조개선? 이 탐욕스러운 늙은 백인 돼지 놈이 어디서 건방지게…… 결국 돈이 목적인 거 누가 모를 줄 아는 건가?”
“경영참여니 하는 것도 결국 다 헛소리야! 일단 지분을 확보해서 주주총회에서 목소리를 내는 입장에 서기만 하면, 경영합리화라는 명분하에 일본인 직원들 다 내보내고, 기술 개발 비용도 다 삭감하고, 일시적으로 지분 가치를 크게 부풀린 후에 가장 높이 쳐주는 곳에 팔아치울 거라고! 이 일본의 기업을, 기술을!”
“버블 때도 저놈이랑 월 스트리트 패거리들이 끼어서 한 탕 해먹었다는데 아메리카에서 저놈을 내세워서 이 일본을 완전히 밟으려고 한다는 소문도 있어. 가뜩이나 지금 딕 체니인가 하는 미 부통령도 반일 인사라는데…….”
안 그래도 자국 기업을 탈취하려는 외국 자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데다 버블 붕괴로 인하여 국가적 좌절을 맛보고 경기 부양 시도도 연이어 실패하는 상황에서…….
얼마 전 파운드화를 공격해서 수익을 챙긴 펀드 매니저 소로스는 그야말로 ‘흑선(黑船:구로후네)’의 출현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로 소로스가 자기 말대로 후지쓰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하자 일본 내에는 월가의 금융자본이 미국에 위협이 되는 일본에 금융공격을 가해 완전히 박살내려 한다는 음모론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원래 일본 기업들은 미쓰비시 은행 같은 자국 은행들과 일본 국민의 세금으로 돌아가는 금융 공기업이 지분을 나눠 보유하는 방식으로 외국 자본의 기업 강탈을 방지하고 있지만 하필 지금은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부동산 버블 당시 너도 나도 부동산 투자를 하는 기업에 돈을 빌려주거나 아예 은행 차원에서 직접 부동산에 투자하는 등 버블에 한 다리 걸치지 않은 일본 은행을 찾기 힘들 지경이었기에, 버블이 붕괴하자마자 은행들 역시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이 부실자산으로 전락하자 예금을 날린 작은 은행들은 쓰러지고, 큰 은행들도 자금 사정이 심각하게 경색된 사정에서, 외국계 거대 헤지 펀드의 자본 공세를 막을 수 있는 건 이제 공적자금, 즉 세금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적자금을 통해 소로스가 후지쯔의 경영권을 박탈하는 것을 막자니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안 됩니다! 그 인간 전적을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서 후지쯔 지분을 사들이는 건 이 일본 국민들의 세금을 그대로 소로스 그 인간의 주머니에 꽂아주는 것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지금 저놈 하고 다니는 꼴을 좀 보십쇼. 여기저기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며 자신이 사들이고 있는 후지쯔 지분 가격을 크게 올리고 있습니다.”
“…….”
“언론을 메가폰으로 활용해서 이 일본 국민들이 깜짝 놀라 그 지분을 고가에 사들여주기를 바라는 거라 이 말입니다. 아메리카 기업 사냥꾼들 하시는 일 아시잖습니까!”
일본 관청들이 위치한 가쓰미가세키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격론이 오가고 있었다.
조지 소로스가 운영하는 헤지 펀드가 지금 후지쯔를 대상으로 천명하고 보여주는 전략은 약간 더 미래에는 행동주의(Activism) 헤지 펀드라고 명명될 헤지 펀드들이 펼치는 전략과 같았다.
지배구조가 후진적, 즉 폐쇄적이고 비효율적인 기업의 지분을 사들여, 단기적인 실적 개선, 혹은 그것을 선전하는 언론 플레이를 통하여 주가를 크게 올린다.
이 과정에서 강경한 구조조정, R&D 예산 감축, 필요하면 계열사 매각까지 할 수 있는 건 모두 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펀더멘탈, 장기적인 미래 경쟁력은 크게 손상되겠지만 애초에 이들의 목표는 단타 차익 실현이지 기업 경쟁력 같은 건 알바가 아니니까.
그리고 주가가 오르면 배당을 요구하거나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매도해서 거액을 벌어들인 후 경영에서 손을 뗀다.
이러한 기업 사냥꾼들의 주 타깃은 사내 유보금이 많고 배당을 잘 실시하지 않는 기업들인데…….
소액주주들 입장에서는 배당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한 몫 챙길 수 있기에(그리고 주가도 크게 오르고) 나쁘기만 한 존재는 아니지만, 장기적인 경영 가치에 주안점을 두는 기업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살을 뜯어먹는 굶주린 하이에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수출 대기업들과 함께 밀어주고 끌어주고 하며 오늘의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룩해온 경제 관료들에게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 이대로 이 일본의 기업이 외국 헤지 펀드의 손에 팔려나가는 걸 보고만 있자는 건가? 후생연기금을 움직여서 세금을 동원하든 뭘 하든 정무적 판단을 내려야…….”
“그게 바로 저놈이 원하는 겁니다! 오늘 후지쓰 주가 확인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벌써 무섭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소로스라는 이름값에 더해서 소액주주들이 배당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있을 테니까요. 여기서 주가를 더 올려줘서 저 탐욕스러운 놈이 더 이득을 챙기게 해주란 말씀입니까?”
비록 이러한 행동주의 헤지 펀드들이 아시아 기업들을 대상으로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지만.
일본 재무성 엘리트 관료들은 갑작스레 소로스가 기업 경영에 관심을 가졌을 리는 없다는 걸 눈치 채고 그의 목적을 직감했다.
여기서 괜히 나섰다가는 그의 뜻대로 시세차익실현에 일조해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도 소로스의 펀드는 순조롭게 후지쓰의 지분을 사들여 드디어 후지쓰의 최대 주주인 ‘후지 전기 주식회사’ 다음 가는 2대 주주 자리에 등극했다.
마침내 후지쓰의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 그가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당연히 주주총회의 소집이었다.
“이제까지 이 후지쓰는 대단히 비합리적이고 시대에 맞지 않게 경영되어 왔습니다. 이제 주주 여러분들이 나서서 그것을 바꿀 시간이 되었습니다.”
도쿄 모리 타워에 마련된 주주총회 장에 후지쓰의 소액 주주들과 대주주들인 기관의 대리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소로스는 그렇게 선포했다.
뭐 씹은 표정으로 주총장 한 쪽에 앉아있는 후지쓰의 창업주 가문부터 현재 경영진들에게 소로스와 그의 대리인들이 요구한 것은 당연히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1. 버블 기간 동안 불필요하게 늘어난 부동산들을 대표로 주력 사업 외의 다른 계열사들을 매각하여 경영합리화를 단행.
2. 주주가치를 올리기 위하여 위 사항들을 통해 확보한 현금과 그동안 쌓아둔 유보금을 풀어 즉각적으로 주주들에게 배당을 실시할 것.
3. 기술개발 비용을 줄이고 자사주를 매입하여 지배구조를 개선할 것. 또한 그동안 회사와 주주의 이익에 해를 끼친 현 경영진들을 해임할 것.
당연히 (배당금을 받게 된 후지쓰의 소액주주들을 제외하고) 일본 국내에서는 극심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버블 붕괴로 인한 경기 침체도 우울한데, 이제는 웬 외국자본이 들어와 메이드 인 재팬 기술을 초토화시키려 한다는 한탄이 경제지 지면을 가득 메웠다.
일부는 미국이 금융인들, 소로스를 내세워 2차 원폭을 실시한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정부는 뭐하고 있느냐, 당장 일본 은행을 움직여서라도 일본의 전자기술을 지켜내라, 등등의 비판이 나왔지만 관료들이라고 딱히 뾰족한 방책이 있을 리 없었다.
일본 기업의 경영권이 넘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후지쓰 주식을 사들이면 그건 결국 소로스가 일본 내 투자자들의 주머니에서 투자 수익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흑선’ 헤지 펀드 괴인 소로스에 맞서 후지쓰를 지켜낼 일본의 백기사(White Knight)가 필요하다!
백기사,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에 맞서 경영권을 지켜낼 우호적인 세력 및 자금을 의미하는 그 단어가 드디어 신문지면에 올랐다.
그리고 마치 그런 바람에 화답하듯, 일본 국적을 가진 한 일본인 투자자가 현 경영진 유지를 조건으로 내걸고 백기사로 나타났다.
“후지쯔 주식회사는 전후로부터 오랜 시간 기술을 축적해온 일본의 전통 있는 제조업기업이자 10년 후를 바라보는 전자 기업입니다. 다가올 IT 시대를 준비하는 투자자이자 경영인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장인정신과 모노즈쿠리(物作り: 물건 만들기를 뜻하는 일본 고유의 단어) 정신을 소중히 하는 일본인으로서, 소로스와 그의 펀드가 저지르고 있는 약탈적 행위는 절대로 가만히 앉아서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순혈 일본인이라는 것을 홍보하듯 용맹하게 외치며 나타난 이 투자자의 정체는 예상 외로…….
(일본 열도에서 저 멀리 떨어진 평양에 앉아있는 몇몇에게는 이미 기정사실인) 소프트 뱅크의 CEO이자 백만장자 투자자인 손 마사요시, 바로 손정의였다.
* * *
“이제 슬슬 손정의 아니, 손 마사요시가 등판할 차례로군. 인수합병을 위한 자금은 투자해줬으니 솜씨를 한 번 볼까.”
저 멀리, 파란이 일어나고 있는 도쿄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평양의 서기실에서 정환은 ‘마사요시 vs 소로스’라고 적힌 일본 신문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함께 그 신문을 유심히 보던 유혜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성동격서를 언급하실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과연 혁명전인 전략이군요, 총서기 동지. 이걸로 손정의 동무를 통해서 우리 공화국 조선투자공사는 비교적 수월하게 후지쯔의 주식을 손에 넣을 수 있…….”
“응? 무슨 소리인가? 틀렸어, 유 소좌.”
“네?”
평양, 조선로동당 1호 청사에서 정환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표정을 짓는 유혜림에게 설명을 해줄 필요성을 느꼈다.
요즘 들어 정환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최소한 뭘 말하는 지 알아듣기 위해 자본주의 공부를 하겠다고 따로 시간을 내서 교사까지 두고 공부하는 그녀였지만, 역시 그래도 자신이 직접 옆에서 가르쳐주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소로스…… 동무를 이용해 일본 내 해외자본 인수에 대한 위기감을 부풀려놓고, 나중에 손정의 동무를 통해서 후지쓰 기술을 공화국으로 들여오려는 게 아니었습네까?”
“반만 맞았어, 유 소좌. 소로스를 이용해서 연막작전, 성동격서를 펴는 것도 맞고, 후지쓰가 보유한 주식에 관심이 있는 것도 맞지. 하지만 내가 이번에 노린 건 후지쓰의 기술이 아니야. 다른 쪽이지.”
“……다른 쪽 이라 하시면…….”
“나는 후지쓰에 관심이 없어. 내가 관심이 있는 건 다른 기업, 정확히는 후지쓰 주식회사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어떤 기업의 주식이라고나 할까.”
어차피 정환이 아는 지식에 따르면 먼 미래 후지쓰는 전자 산업에서 패권을 잃고 중국에 흡수합병 당한다.
아니, 사실 후지쓰 뿐 만 아니라 일본 전자산업계의 몰락이 시작되는 것 자체가 지금, 1993년도부터이다.
이왕 비싼 값을 치르고 기술을 들여올 거라면 미래에도 고부가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 가능한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사야지, 굳이 돈 낭비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얼마 전부터 포춘(Fortune) 지나 포브스 지를 열심히 보며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많은 유혜림이 감을 못 잡자 빙그레 웃으며 정환은 하나씩 힌트를 주기 시작했다.
“단서를 주자면 일본 민간기업 최초로 수치제어 공작 기계, CNC의 서보모터를 자체 제작하는 데 성공했고 현재도 금속 절삭분야와 자동화 분야에서 세계 수위권을 다투고 있는 기업이야.”
그럼에도 유혜림은 감을 못 잡았다.
“공업을 일으키는 기초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부품 생산, 즉 금속의 정밀가공능력이 크게 부족한 이 공화국에 정말로 필요한 기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지금은 설명할 수 없었지만, 미래에 스마트폰과 반도체의 시대가 돌아오면 그 기업의 중요성은 더더욱 커져서, 산업용 로봇과 반도체 가공 장비분야에서 절대 강자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 또한 정환은 알고 있었다.
함께 일본에서 보낸 시간이 꽤 길건만, 여전히 공산주의 국가 물이 덜 빠졌는지, 아니면 직접적인 소비재를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어서인지 유혜림은 여전히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그…… 인민들에게 직접 물산을 판매한다는 소위 B2C 기업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럼 기업소끼리 거래하는 분야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
“그렇지. 하지만 기술력이 뛰어난 만큼 그 비밀주의와 폐쇄성은 기술유출 편집증에 걸린 일본 기업 내에서도 유별난 수준이라, 이 하청 생산과 아웃소싱의 시대에도 오로지 일본 내에만 공장을 두는 원칙을 고수 중이지. 최근 몰아닥친 엔고(円高)의 바람에도 공장 해외 이전 대신 무인 공정 로봇 개발에 투자하고 있다지?”
“맞습네다.”
“이런 기업의 경영권을 얻기 위해서는 세계 제일의 헤지 펀드 매니저 정도는 바람잡이로 동원해줘야 할 거야, 그렇지 않아?”
“음…… 그런데 저는 아직도 그 기업소가 후지쓰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 굳이 소로스를 이 평양까지 불러서 총서기 동지께서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부탁을 해야 할 이유가…….”
“이 기업은 2차 대전 직후에 후지쓰의 사내 프로젝트 팀으로 시작해서 70년대에 후지쓰에서 독립했거든. 하지만 여전히 후지쓰가 이 기업의 지분 18%를 보유 중이지.”
원 역사에서는 21세기가 와서야 지분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지만, 현재 정환이 알아본 바로는 원래보다 버블 붕괴의 여파가 커진 탓인지 ‘그 기업’은 자사주를 매입할 자금력이 부족한 듯 했다.
여기까지 말하고서 정환은 스무고개 놀이를 멈추고 처음부터 자신이 노리던 진정한 목표를 유혜림에게 털어놓았다.
“유 소좌, 혹시 화낙(FANUC)이라는 기업에 대해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