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133화
47장. 성동격서
“에휴, 이놈의 대한민국이나 북괴…… 아니, 북한이나 먹고 살기 힘들구만. 애국하는 것도 힘들고, 먹고 사는 것도 힘들고…… 쯧!”
박세황은 한숨을 내쉬며 입에 물고 있던 ‘솔’ 담배를 아파트 베란다 바닥에 비벼 껐다.
서울의 봄바람도 이제는 가고, 슬슬 더워지기 시작한 여름 햇살이 서울 시민들의 머리 위에 내리쬐면서 뉴스와 신문에서는 연일 피서객들의 행렬을 보도했다.
하지만 박세황과 그의 가족에게는 남의 이야기였다.
과거 무서울 것 없었던 안기부 실장 시절이었다면 급료 외에도 여기저기서 챙기는 가욋돈으로 가족들에게 동남아나 요즘 들어 관광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싸이판 행 비행기를 태워줬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박세황 그는 이제 민간인 신분이니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어깨에 짊어진 공무(公務)의 무게에 문득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눌러 참으며 박세황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거실에서 그의 토끼 같은 자식새끼들과 마누라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대운 전자 TV를 눈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얼마 전부터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방영시간이 다 되었던 것이다.
삐용~삐용~ 삐용~ 삐용~……!
‘이 프로그램은 경찰의 사건 기록을 토대로 실제 사건을 재현해냈으며, 경우에 따라 대역 및 가명을 사용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우와아아아아! ‘경찰청 사람들’ 한다!”
“아빠아아아아! 아빠아아아아! 경찰청 사람들 해애애애! 빨리 와서 같이 보자아아아!”
“정민아……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빠는요~ 저기 나오는 경찰 아저씨들보다 훠얼씬…… 아니, 물론 경찰 아저씨들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만만치 않게 힘들고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중요한 일 뭐어야?”
“아 그건 그러니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리던 박세황은 남북관계의 복잡다단함,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 취임 그리고 자신이 안기부를 그만둔 이유.
최근 박이삼 대통령의 취임까지 이 모든 것을 아직 초등학생인 자신의 자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몰라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베란다까지 따라 나온 첫째 아들 놈, 박정민은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보채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보자아아아~~ 요즘 아빠 계속 집에 있어서 좋은데에에…… 엄마는 아빠 백수 됐다고 화내도 나는 아빠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아! 엄마가 아빠 주식하다가 말아먹고 증권 하다가 말아먹었다고 화내도 난 아빠 좋아! 그러니까 같이 경찰청 사람들 보자! 응?”
“…….”
그렇다. 방금 전 아들 말처럼, 박세황 그는 현재 한 세월 몸담았던 안기부를 나와 다른 직장에 취직을 알아보고 있는 상태, 냉혹히 말해 백수였다.
얼마 전 박세황이 잘 다니던 안기부를 나오게 된 건 여러 가지 입 밖에 내기 힘든 복잡한 내부 사정이 있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박이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 시작된 문민정부의 대대적 개혁이었고.
박이삼은 자신이 민주화 운동을 하며 안기부에 시달렸던 것을 설욕이라도 하듯 ‘안기부의 민주화’를 내세우며 전격적인 물갈이에 나섰다.
안기부 직원들 전원에 대한 내사가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야당 인사들을 감시, 도청하는 등 정치공작에 관여한 인원들은 박세황의 직속 상사였던 3차장을 포함하여 안기부를 나오게 되었다.
박세황의 경우는 3차장보다 좀 더 복잡한 사연이 있었지만 그 본인은 어쨌든 이제 현실을 받아들였다.
박세황은 이 답답한 심정을 아무에게도, 심지어 아들이나 아내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들을 달랬다.
“으이구…… 그런 말은 또 언제 주워들어가지고. 정민아, 저기 나오는 아저씨들은 범죄자들…… 그러니까 조금 나쁜 사람들을 때려잡는 일을 하지만 아빠는 범죄자보다 훠어어얼씬 더 나쁜 사람들을 잡는 사람이야! 경찰 뭐 그런 애들은 이 아빠한테 쨉도 안 돼! 알겠니?”
“훨씬 더 나쁜 사람들 누구?”
“그건…….”
순진무구한 아들의 질문에 습관적으로 거야 당연히 북괴 빨갱이들이지, 라고 말하려던 박세황은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일단 현재의 북한을 빨갱이, 그러니까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친미 자본주의 국가로 전향해서 맥도날드까지 평양에 입점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세상에 말이다.
김정환 취임 이래 북한은 언제 아시아 제일의 은둔 왕국이었냐는 듯 날이 갈수록 바뀌어 가고 있었다.
물론 남북 합의 후에도 직접적인 민간 교류는 금지된 만큼 자기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연상될 만큼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말이 경제교류를 위해 북한과 평양을 다녀온 한국 기업인들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박 실장님, 요새 평양이 옛날 평양이 아닙니다. 완전히 바뀌었어요. 석유가 무섭긴 무섭더군요. 우리나라 10년 전 한창 경제 성장할 80년대 초중반이 연상되더라고요. 하루가 다르게 평양 시가지에 빌딩들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평양 슈퍼마켓에서 허쉬 초콜릿을 살 수 있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많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 정도입니까?”
-장난 아닙니다. 거기다 얘네들도 이제 자신감이 붙었는지 저희 그룹 임원진들이 평양에 묵으면서도 감시인들이 거의 붙지를 않았어요. 옛날에는 화장실 가는 것도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던 보안원들이 일정 끝나니까 이제는 자유시간이니 나가서 쇼핑이나 하고 오라고 그러는 거 상상이나 해보셨습니까? 박 실장님, 게다가 더 무서운 건 이게 끝이 아닙니다.
“……또 뭐가 있습니까?”
-이건 그쪽 당 재정경리부 간부로부터 친해져서 슬쩍 들은 건데, 얘네들이 벌써부터 땅에 묻어놓은 전화선을 통해 초고속 인터넷 회선을 각 가정에 보조금 까지 주면서 보급한다고 하네요. ADSL인가 그거 아시죠? 거기다 이 친구들이 어쨌든 엄연히 독재국가다 보니까 당에서, 그러니까 그 경애하는 김정환 최고지도자 동지인가 하는 친구가 지시를 내리면, 뭐 규제고 기업이익이고 뭐고 할 거 없이 그냥 싹 바꾼다고 합니다. 거기다 얘들은 석유도 있고, 이대로 가면 진짜 15년 안에 1인당 국민소득 따라잡힐 지도 모른다는 고려 일보 사설이 농담으로 안 들려요. 원…….
‘평양에서 PC 통신이라, 이거 참…… 당장 우리부터 얼마 전에 PC 통신으로 좌익 단체 선언문 올린 대학생 애들 잡아갔는데…….’
과거(사실 지금도) 군대 정훈교육에서부터 배달의 기수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부와 민간에서 일관되게 북한을 비판했던 레퍼토리는 주로 ‘북한은 자유가 없는 공산 독재국가’였다.
80년대부터 넘어오기 시작한 탈북자들의 인터뷰를 통하여 북한에서는 자아비판과 사상총화를 통해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박탈하고 국가와 김 씨 부자에게만 충성하도록 시키는 독재국가고, 그러니 북한은 나쁜 나라이고 우리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라는 것이 그 선전의 요지였다.
당장 박세황이 몸을 담고 있던 안기부도 그러한 ‘국가적 차원의 정신교육’ 전파의 최일선에 서 있었고, 박세황 본인도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 몇 년 간 여러 경로로 자신이 보고 들은 북한의 변화와, 그리고 박세황의 세대에서는 거의 상식에 가까웠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자유로운 아들의 질문을 들으니 과연 북한이 정말로 ‘나쁜 사람들’인가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안기부에 있을 때는 생각만으로도 경을 칠 ‘반국가적 발상’이었지만, 쿠웨이트 사막까지 가서 그 사악 무도 하다는 인민군이 자기 나라 국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교전한 것 까지 본 박세황은 이제 예전처럼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북한이라는 나라를 바라볼 수 없었다.
정말 북한은 뿔 달린 마귀, 나쁜 놈들인가?
어쩌면 이제 박세황을 포함한 한국인들은 이 새로운 북한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아빠?”
“……그만하고 거실로 들어가, 그리고 정민아,”
“응, 아빠.”
“아빠 백수 아냐! 알았지?”
아주 중요하다는 듯 힘주어 말하는 박세황의 말은 실제로도 사실이었다.
그는 안기부에서 나오자마자 이전 경력을 살려 사기업 쪽에 일자리를 알아봤고, 사기업 쪽에도 연줄이 막강했던 안기부 시절 상사들의 주선과 보증에 힘입어 별 어렵지 않게 재취직에 성공했다.
그것도 그 일자리란 바로 근대에는 좀 밀리지만 그래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 성삼 그룹 미래 전략실 ‘국제 커뮤니케이션 담당 자문’이라는 이름의…… 한 마디로 북한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 기업들을 돕는 일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이 40 넘은 박세황을 성삼에서 뽑은 이유는 아니나 다를까 북한 관련 경험과 지식이었다.
남북 합의 이후 많은 한국 기업들이 언어도 통하고 남쪽보다 상대적으로 덜 까다로운 소비자 2,300만 명이 포진한 새로운 시장(과 석유)을 노리고 북조선에 진출을 타진했으나…….
남한 자본의 북한 점령을 우려한 정환이 엄명을 내려 실제로 근대에 이어 북에 진출한 기업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극소수의 기업들 역시 정작 사업권을 따내자 40년의 세월 동안 한국과 너무 달라져 버린 북한 현지 사정에 어려움을 겪다가 북한 내부에 정통하면서도 남측 인사들과 말이 좀 통하는 사람들을 뽑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박세황이었다.
이러한 사정 끝에 당장 이번 달부터 박세황은 북한에서 성삼 그룹 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던 갓이다.
결국 안기부 안에서나 밖에서나 빨갱이들…… 아니, 이북 사람들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지게 된 박세황은 애국하려다 보니 참 별일을 다 하게 된다고 속으로 자조하던 차였다.
“정말? 백수 아니야?”
“그래! 설명하자면 좀 복잡하지만 아무튼 이 아빠 백수 아냐! 알았지? 정민아?”
“으응…….”
“그럼 이제 들어가서 경찰청 사람들마저 봐라, 알았지?”
“응!”
자신을 놔두고 거실로 다시 돌아가는 아들의 작은 등을 바라보며, 박세황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민이가, 저 애들이 커서 바라보게 될 북한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고작 4년 동안에도 이렇게 많은 것들이 변했는데, 저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쯤이면 도대체 얼마나 더 변해 있을까?’
답은 오로지 그가 직접 가서 확인해보는 것 뿐 이었다.
그리고 만약, 정말 만약이지만…… 운이 따라준다면 이 모든 것을 바꾸고 그 모든 일들을 일으킨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환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박세황은 이 불확실하지만 모든 게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이길 잘했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 *
“총서기 동지, 그 안토노프…… 동무가 제시한 요건이라는 게 대체 뭐였습네까?”
“그건 좀 있다가 나중에 알려주지, 유 소좌. 그나저나 그 사람은 지금 당도했나? 어차피 그 요건이라는 것도 그 사람과 연관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습네다. 지금 영빈관에서 도착해서 총서기 동지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습네다.”
궁금한 표정으로 그에게 묻는 유혜림에게 정환은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다른 질문으로 말을 돌렸다.
“그럼 지금 가야겠군. 안토노프 동무는? 과업에 성실히 임하고 있나? 술에 취해서 노는 건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저도 좀 의외이기는 했습니다만, 연구소에서 정든 쏘련의 미그기를 다시 보자 마음을 좀 달리 먹은 거 같더군요. 제가 얼마 전 감시차 방문했을 때는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게 현재 당신들 공군의 최신예기, 우리한테 사온 Mig 29기지. 우리 러시아의 최신예 기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런데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줄까, 여군관 동무? 동독이 무너지고 독일에서 양키들이 자기들 F15를 가지고 이 Mig 29기와 모의전을 치러본 적 있어.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 거 같나?”
“…….”
“얼굴에 대답이 나와 있군. 미그29 쪽이 그야말로 박살났어. 사실 저기 쿠웨이트에서도 후세인이 우리한테 사간 무기가 양키 전투기한테 다 털리는 게 전 세계에 생중계 되었으니 별로 예상외의 결과가 아니기는 했지. 당 정치국 노인네들도 그걸 보고 식겁해서 우리한테도 그 문제를 어떻게 해보라고 특명이 떨어졌지만…… 뭐, 그 후에 나라가 박살났으니 전투기 개발이고 뭐고 없었지만…….”
“흐음…….”
정환은 유혜림의 전언을 듣고 잠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유혜림의 입을 거쳐서도 안토노프이 마지막 말에서는 여타 다른 소련인들처럼 씁쓸함과 비애 그리고 슬픔이 짙게 묻어나왔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 군사항공이라는 분야로 겨루어온 한 때의 경쟁자는 이제 세계의 패권을 차지해 그들의 전투기는 전 세계 바다와 하늘을 누비는데.
정작 자신들의 작품은 창고에 처박혀 다른 나라로 팔려갈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그런 게 아닐까 정환은 추측할 뿐이었다.
그리고 안토노프가 술을 끊고 그리운 옛 일터로 돌아왔는지에 대한 동기도.
“하여튼 그 동무 술 걱정은 이제 안 해도 되겠군. 그럼 이제 갈까?”
정환은 곧 당사를 나와 영빈관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사실 오늘 당도한 손님이 국가수반이나 외교관도 아닌 그냥 민간인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정환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를 이 당사로 부르는 게 맞겠지만, 정환은 굳이 국가지도자인 자신이 영빈관으로 직접 행차하는 편을 택했다.
우선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를 존중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이 만남을 가급적 다른 이의 눈에 띄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곳은 평양 한복판이지만, 이제 더 이상 북조선은 모든 정보를 통제 가능한, 폐쇄된 은둔국가가 아니었고, 사람 입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열릴지 아무도 모르니까.
곧 영빈관에 도착하자 정환은 유혜림 외에 다른 수행원을 거느리지 않고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환은 오늘의 손님, 피오니 홀딩스 사장 최승일과 함께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차분하게 자신을 기다리던 육순의 백인 노인을 보자 반갑게 인사하며 말을 꺼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요, 조지, 아니면 지난번처럼 게오르기라 불러드릴까? 하여튼 이 공화국에 방문해주셔서 공식적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조지 소로스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