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동지 132화
안토노프도 이제 슬슬 그가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알아들은 듯 입 꼬리가 미묘하게 변하며 표정이 달라졌다.
“공학자로서 당신의 의견은 잘 들었어. 엄청나게 난도가 높다는 것도 이해했고. 그럼 이제 내가 국가 지도자로서의 의견을 말해보라면…… 돈과 시간, 인력을 퍼부으면 결국 기술과 생산능력은 어떻게든 갖춰진다는 게 내 의견이야. 단지 그 과정에서 들어가는 자원이 얼마냐, 그리고 물주가 그만큼을 투자하고 기다려줄 의향이 있느냐가 문제일 뿐.”
“…….”
“그리고 나에게 그럴 의향이 여전히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여전히 ‘있다’야. 개발 과정에서 타 국가와 협력을 할 수도 있고 초기에는 수입에 의존해야 하겠지만…… 내 요점, 장기적 공군력 육성에 우리가 아닌 타국이 결정권을 쥐면 안 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 결과적으로 이건 우리 공화국과 인민의 주권에 관련된 문제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 나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이 과업에 얼마만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더라도.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내심 안토노프 당신도 개인적으로는 새 비행기에 도전해보고 싶지 않나? 설계국에서 나오고 술만 퍼마시다 항공공학자로서의 경력을 끝내기에는 당신도 스스로가 너무 젊은 나이라고 생각하잖아. 내 말이 틀린가?”
“그게 지금 무슨…….”
안토노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때와 장소도 잊고 불 같이 발끈하려고 했지만 정환은 아랑곳 않고 계속했다.
“정찰총국 보고서로 들은 바에 의하면, 설계국 내에서 아직 못 끝낸 프로젝트가 있지? 걸프전 이후 미 공군의 능력에 충격을 받은 소련 수뇌부가 개발을 지시한 비밀 프로젝트. 이제 실증기 제작에 착수하려던 차에 소련이 붕괴해버렸고. 하지만 여전히 당신은 그 설계도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지 않나?”
다시 안토노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번에는 술기운 때문이 아니라,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그럼, 당신이 나를 특별히 지목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거기서 연구하던 차기 주력기 프로젝트까지 그대로, 털도 안 뽑고 가져다 바치라고?”
“부인하지는 않지. 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봐. 안토노프 동무. 손이 근질거리지 않나? 밤마다 아직 못 끝낸 일이, 제트 엔진이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가 눈과 귀에 어른거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자지 않느냐는 말이야. 그래서 그렇게 보드카를 퍼마셔대는 거고.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아닌가?”
침묵.
다시 서기실 내에 침묵이 찾아왔다.
백승철은 입술이 바짝 바짝 마르는 표정으로 안토노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유혜림은 뭔가 간절한 표정으로 정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환은…… 그저 고요하게 안토노프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침묵의 기간을 거쳐, 안토노프의 입이 열렸다.
“뭐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데.”
“뭔데?”
“나 말고도 우리 러시아 엔지니어들이 여기 많이 와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의 명단을 보여줄 수 있나?”
“그거야 어렵지 않지.”
책상에서 ‘극비’라고 붙은 서류를 꺼낸 정환은 놀라서 움찔거리는 백승철과 유혜림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안토노프에게 해당 부분을 펼쳐 보여주었다.
한동안 ‘전향완료’ ‘포섭 중’ ‘중립’ ‘적대적’이라고 분류된 인명부를 보던 안토노프는 이내 중얼거렸다.
“많이도 데려왔군. 이 정도면 설계국 몇 개는 거의 뿌리 채 뽑아온 수준인데.”
“비겁하다고 말해도 상관없어. 변명을 좀 하자면, 그쪽 상관들도 이 공화국에 끄나풀을 많이 심어놨던 적이 있거든. 그러니 내가 왜 소련인들에게 기술종속을 당하는 것에 대해 민감한지 이해해주기를 바라네.”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요즘 나라 사정이 사정이니까, 차라리 이런 데서 밥걱정, 술 걱정 없이 생업에 종사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내가 이걸 보자고 했던 건, 내 일을 도와줄 손이 몇이냐에 따라 총 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이야. 항공기는 설계자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정도 숫자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허, 페르미노프 이 녀석도 여기 와 있었군.”
“……그래서? 이걸 보니 얼마나 걸릴 거 같나?”
꿀꺽.
누군가의 목구멍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 소요 시간이 남은 것이다.
안토노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느냐에 따라, 이 서기실에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이나 살아생전에 그 북조선의 국산 4세대 전투기를 볼 수 있느냐 마느냐가 정해지니까.
그런 좌중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토노프는 여전히 눈을 서류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원래는 당신들 경제가 순조롭게 성장하고 모든 지원을 다 해줘도 최소 30년 이상을 부르려고 했는데…… 방금 이걸 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어. 기간을 약간 줄일 수 있겠군.”
“……얼마나?”
“15년에서 20년. 동체 만드는 데 3년, 제트 엔진 만드는데 5년, 항전 장비와 레이더 만드는데 7년. 합이 15년이지. 물론 중간에 불의의 사고 같은 게 전혀 안 터진다는 가정 하에, 그리고 실제 조립과 제작에 들어가서 그 후 시험비행, 까지 하면 20년이 넘어가겠지만…… 하여튼 이 이하로 줄여달라면 나는 못해. 그러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아니야, 정말로 그 정도면 대환영인데…… 그런데 정말 그렇게 짧은 시간에 가능한 건가?”
자신이 주문해 놓고도 예상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정환이 쉽게 믿겨지지 않는 다는 표정을 띄우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안토노프는 몇 가지 단서를 달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모든 게 잘 풀렸을 경우의 기한이야, 그것도 그쪽 총서기 동지가 요구한 F15, 즉 하이(High)급 전투기가 아니라 비교적 염가 사양의 다목적 로우(Low)급 전투기, F16을 기준으로 잡더라도 말이지. 사실 이 고생을 해서 만들어놓고 양키들이 만든 진퉁 F16 성능의 80% 정도만 나와 줘도 기적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타협 가능한 사안이군. 좋아.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에 도전한다는 데 그 정도는 받아들여야겠지.”
정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진짜 F15처럼 공중을 지배하는 공대공 전투의 왕자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현실적으로 볼 때 북조선 공군에게 필요한 전투기는 동일한 개발 비용과 도입 비용으로 최대한 여러 군데서 굴려먹을 수 있는 멀티롤(Multi Role) 전투기니까.
정 하이엔드 급 고성능 전투기가 필요하면 지금보다 미국의 신뢰를 조금 더 얻고, 무엇보다 중국이 미국 무기 구입 정도로 북조선에게 갑질을 시전할 수 없는 정치 경제적 입지를 확보한 후에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당장 그 오랜 세월 친미 노선을 타온 아랫동네 대한민국만 해도 아직도 F15를 들여오지 못하고 있지 않나.
두 사람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자, 그제야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지도자와 외국인 엔지니어 간의 줄다리기를 지켜보던 백승철과 유혜림의 안색이 좀 나아졌다.
백승철이 먼저 과장된 몸짓으로 안토노프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의 한 마디를 하려는 순간, 그런 기대를 배신하듯 안토노프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방금 말한 무제한적인 지원에 얹어서 내가 제시한 몇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준다는 약속을 해줬으면 하는데.”
“요건? 혹시 술 문제라면, 결과를 제대로 내면서 우리 측의 관리감독을 받는다는 조건에 세계 모든 명주를 공수해주지. 원한다면 아까 말한 김정일의 술 창고를 통째로 주지, 어차피 나한테는 별 필요도 없…….”
“아, 그건 총서기 동지가 내 동료들을 붙여두면서 해결됐어. 내가 술 먹고 곯아떨어져도 이 친구들이 대신 작업하면 되거든. 내가 제시한 요건이라는 건 다른 문제들이야.”
“……그게 뭐지?”
누가 러시아인 아니랄까봐, 라고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정환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물었다.
여기서 더 무슨 조건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혹시 지나치게 과도한 조건을 내걸면 간신히 설득해놓은 안토노프의 의욕이 흔들리지 않도록 어떻게 요령 좋게 거절할까 머리를 굴리던 차에, 안토노프는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것 같던 유혜림과 백승철을 슬쩍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건 나중에 알려주도록 하지. 지금은 자리가 좀 그렇군.”
“……부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기를 바라겠어.”
“너무 긴장하지는 말라고, 동지. 요건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뭣하면 충고나 조언이라고 바꿔도 좋소. 아까도 말했지만 항공공학이란 재료공학부터 전자공학, 화공학에 이르기까지 국가 공업력의 총체니까. 요건을 들어보면 결국은 이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거라고 동지도 납득하게 될 거야.”
거기까지 말한 후 각자 다양하게 변하는 중인들의 표정을 곁눈질하면서 안토노프는 중요하다는 듯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나는 소련인이 아니야, 우크라이나 인이지. 난 키예프에서 태어났거든. 나를 부리기 위해서는 그 점은 잊지 말아주시오, 총서기 동지.”
* * *
안토노프가 수락하자 그 이후에 다른 러시아 엔지니어들을 설득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직 포섭하지 않은 엔지니어들이나 이미 포섭한 자들이나 저 성격 괴팍한 안토노프가 넘어올 정도면 무엇이든 북조선 측이 제시한 조건이 아주 좋을 거라고 확신했고.
도박 빚이 아니더라도 러시아가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에는 모든 사람이 벌써 동의하고 있었다.
곧 그들이 이 공화국 안보의 명운을 건 과업을 수행할 연구소의 부지가 정해지고 필요한 자재들과 공작기계들이 빠르게 수입되었다.
평양에서 가까운 황주에 둥지를 튼 이 과업의 직속 책임자는 리종수와 함께 걸프전에서 공군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실감한 공군 소장 김철규로 정해졌다.
설립과정 내내 ‘70호 연구소’라는 가칭으로만 불리어졌던 이 극비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안토노프는 자신이 보드카에 쩔어 있던 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북조선의 공업력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20점정도 올려주었다.
“근대 그룹이라…… 한국 엔지니어들은 제법 솜씨가 좋지. 좋소, 지난 번 내가 말했던 비유 기억하시오? 전투기 제작을 자동차에 비유하면 이 나라에서 자체제작 가능한 건 문짝 정도라고 했던 거 말이오.”
“기억하고말고.”
“문짝은 취소, 거기에 타이어도 추가하지. 아니, 우리가 전수를 좀 해주면 헤드라이트까지도 가능할지 모르겠군. 물론 그들로서도 전투기용 제트 엔진이나 레이더 같은 건 물론 언감생심이지만, 이들이 프로젝트의 손발이 되어준다면 랜딩 기어나 급유 시스템 부분 정도는 걱정 안 해도 될지도 모르겠군. 이 임무 성격상 입조심을 시키는 게 가장 어렵기는 하겠지만…….”
“그건 걱정 말라고, 안토노프 동지. 각 부품 별로 담당 업무를 쪼개서 그들 중 누구도 자기들이 최종적으로 뭘 만드는지 모르게 하면 되니까. 남조선 공작원이 저들 중 섞여 있다고 해도 추측할 수 있는 건 잘해봐야 우리가 미그기의 부품을 자체 조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겠지.”
북조선 첫 항공기 연구소 설립 후, 첫 과제는 러시아에서 도입한 Mig 29기를 완전히 분해해서 부품을 뜯어보고 다시 역순으로 조립을 시도해보는 것이었다.
안토노프를 비롯한 러시아 엔지니어들이야 그 과정을 이미 머릿속에 다 담아두고 있었기에, 이 일은 사실상 그들의 제자가 될 북조선인들, 평성리과대학(平城理科大學)과 김책 공대에서 엄선된 북조선 항공공학의 꿈나무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서기실은 특명을 내려 인민군 공군에서 귀중한 최신 미그기 두 대를 ‘교보재’로 각출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실험을 위한 전용비행장이 세워지고 김철규 공군 장령을 연구소장으로 하는 70호 연구소의 정식 출범을 앞두고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야 할 시점에, 정환은 연구소의 이름을 문의하는 김철규 소장에게 상당히 의외의 답변을 내려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이름을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은 옆에서 듣고 있던 유혜림 정도였지만.
“왜? 이 이름이 의외라고 생각하나? 유 소좌?”
“아, 아닙네다! 이런 공화국의 일대 혁명사업이 될 연구소의 이름에 이것보다 더 적합한 것은 찾기 힘들 것입니다! 애초에 총서기 동지가 아니었다면 이런 민족겨레의 역사에 남을 위업에 도전할 생각이나 했겠습네까?”
김철규 소장에게 말해준 이름에 유혜림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을 금방 눈치 챈 정환이 은근히 놀리듯 묻자,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부인했다.
하지만 정환은 간만에 보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반가워서인지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에이, 거짓부렁 하지 말고. 속으로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총서기 동지도 역시 명예욕이 강한 면이 있으시군. 전대 장군님들과 한 핏줄이라는 점은 역시 못 속여.’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 그게…… 무, 물론 평상시부터 뽐내기를 좋아하는 성정이 아니시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기에 좀 의외라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만은…….”
“이건 내 업적이 될 테니까. 물론 성공할 경우의 이야기지만 말이야. 평상시 김정일이나 전대 주석 동지가 김대부터 시작해서 공화국 동서남북에 자기 이름을 갖다 붙이는 걸 보고 참 뻔뻔스럽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제 좀 그들의 그런 심정이 이해가 가는 거 같아, 후후.”
사실, 정환이 이 이름을 정하면서 떠올린 것은 자신의 ‘진짜’ 아버지, 그러니까 김일성이 아니라 실패한 정치인이었던 전생에서의 자신의 아버지였다.
가끔 인간의 수많은 욕망 중 가장 기초적인 물욕이나 성욕, 심지어는 생존욕구조차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구, 명예욕에 압도될 때가 있다고 했는데 이제야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어째서 아버지가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정치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지도.
‘분명히 이렇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싶으셨겠지.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유치한 면이 있군. 이런 건 원래 JFK 국제공항이나 링컨 기념관처럼 후손들이 세워줘야 진짜 의미가 있는 건데 말이야. 나중에 인민들에게 선대들처럼 역시 자아도취에 빠진 독재자였다는 욕 안 먹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는걸.’
하지만 이 믿기지 않는 사업이 성공한다면, 분명히 정환 그의 이름은 후손 만대에 찬란하게 남게 될 것이다.
그렇게 북조선 최초의 차세대 추격기 개발 연구소, 정식 명칭 ‘김정환 고등항공기 연구소’는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개인숭배 전통이 아직도 만연한 북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듯 김일성 종합대학, 김정일 정치군사대학, 김책 공대 등등에 이어 처음으로 현직 수령의 이름을 딴 기관이었지만, 연구소의 성격이나 방침, 구성인원 등은 다른 기관들과 확연히 달랐다.
또한 후일 시간이 흘러 다른 기관들이 개인의 이름을 슬그머니 떼어버리고 개칭하는 데 비하여 김정환 고등항공기 연구소는 끝까지 설립자의 이름을 지켰다는 점 역시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