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125화 (125/350)

< 42장. 라선-청진 중공업지대 >

42장. 라선-청진 중공업지대

잔칫집에 찬물 정도가 아니라 숫제 뜨거운 기름을 부어버린 말에 당 간부들 모두 시퍼렇게 굳어있을 게 확실한 정환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재빨리 각자 시선을 땅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개중에는(주로 더 이상 기름 걱정 없이 훈련할 날이 열렸다는 말에 부리나케 달려온 인민군 장령들) ‘인플레이션이 뭐입네?’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런 그들도 회장 분위기가 싸늘해졌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리고 그들 중 ‘사태수습’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역시 장성택이었다.

“거 동무들, 걱정은 이해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총서기 동지께 그 무슨 물 끼얹는 말이네? 나중에 보고서로 들을 테니 지금은 일단…….”

“계속 해보게, 그런 판단을 내린 이유가 뭔가?”

“……어험, 기래, 뭣들 망설이나? 계속 해보라우.”

정작 정환이 태연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자 천하의 당 조직지도부장 장성택도 아무 말 못하고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하늘 같은 조직지도부장 동지 장성택이 딴죽을 걸 때는 덜컥 겁을 집어먹은 젊은 관료들도 하늘 밖의 하늘 총서기가 예상 밖의 허가를 내려주자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어나갔다.

‘에라, 모르겠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달러가 갑자기 유입되면 얼핏 나쁜 점이 전혀 없을 듯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미 산업기반이 확보된 선진국들 이야기입네다. 저희 공화국의 산업 구조는 군수공업을 위한 중공업만 기형적으로 발달했지 정작 인민들 식의주(의식주)의 기반이 되는 소비재, 즉 옷, 제화, 식품 등을 생산하는 경공업은 아직 형편없이 뒤져있는 상황입네다.”

“……흐음, 그래서?”

“게다가 그 중공업 수준이라는 것도 채굴한 원유조차 공화국 자체 기술력으로 정유해서 사용 내지는 해외 판매가 불가능한 수준이라…… 땅크나 포를 생산하는 군수공업은 좀 될지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기름이 나와도 근대 중공업 같은 남조선 기업소 손을 빌리지 않는 이상 기름도 우리 기름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네다.”

자원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자연의 축복인 석유, 천연가스, 희토류 같은 천연자원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다른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을 등한시하고 경제에 왜곡 현상이 일어나 결과적으로 나라를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징크스를 말하는 것이다.

보통 낙후된 전제군주정 내지는 독재자가 통치하는 사우디나 쿠웨이트, 아랍 에미리트 그리고 남미의 몇몇 국가가 이런 경우인데, 이런 국가들은 석유를 팔아 국민 불만을 일시적으로 잠재우고 정권의 미래를 담보 받는 식으로 나라가 돌아가기 때문에 사실상 국제 유가에 나라 명운이 걸려있다.

게다가 그나마도 대체 에너지원이 발견되거나 해당 자원이 고갈되면 그대로 나라가 막장화 되는데, 이 시대에서는 아직 먼 이야기지만 정환은 자신이 살던 2019년에서 그런 식으로 나라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진 경우 하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권력욕은 가득한데 미래를 준비하는 안목이라고는 약에 쓸 것도 없는 지도자까지 더해지면 나라가 암울해지지.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 김 씨 부자가 석유를 파낼 생각을 이제까지 안 한 건 어느 의미로 이 공화국 최대의 행운이군.’

“지금 안 그래도 개혁개방을 통해서 외부에서 대규모 달러가 유입되어 가뜩이나 물가가 올라 있어 인민들 사이에 조금씩 불만이 나오고 있는 상황입네다. 조선중앙은행에서 태환권(兌換券)을 일부 도입해서 인민생활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는 상황에 석유 판매로 그 대금이 공화국 시장에 대규모로 유입되면 환율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질 것입네다.”

“현재 공화국 기업들은 대부분 인건비로 승부하는 노동 집약 산업들인데 이런 상황에서 환율까지 떨어지면 얼마 안 되는 수출경쟁력도 상실하게 됩네다.”

“그, 그렇습네다! 게다가 석유공사에서 재정경리부에 제출한 사업성 평가서를 보면 기술력 한계로 명확한 측정은 힘들어도 명천 유전과 개발 중인 서한만, 동한만, 온성, 동해 유전 등 공화국 내 모든 유전의 추정 매장량을 다 합쳐도 베네주엘라나 쿠웨이트 같은 나라들에게는 미치기 힘들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는데다…….”

처음 열리기가 힘들었을 뿐 한번 터진 말문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새어나왔다.

자신들이 배운 지식과 현재 나타나는 수치에 입각하여 국가 경제 전망을 늘어놓는 젊은 관료들과 그걸 아무 말 없이 경청하는 비슷한 연배의 총서기.

이 기묘하면서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광경을 연회장에 모인 다른 간부들은 넋을 잃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환이 의도한 효과이기도 했다.

‘휴우, 이제 원맨쇼할 일도 좀 줄어들겠군.’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정환은 마음속으로 한시름 놨다는 의미의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 조직, 어느 체계나 다른 그 어느 것보다 인적 혁신이 가장 힘들고 오래 걸리는 법.

그동안 조선로동당과 내각을 차지하고 있던 경제 관료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사회주의식 계획경제체제에 젖어 현재 북조선의 위치가 정확하게 어디고 앞으로 어느 길을 가야할지 감조차 못 잡는 부류.

그게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지식은 있어도 보신주의 때문에 직언을 할 엄두를 못 냈거나 아니면 그 지식을 자신의 사리사욕에 악용할 부류.

어느 쪽이건 중요한 권한을 위임했다가는 나라 하나 말아먹기에 모자람 없는 부류들이었다, 특히나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개혁 개방기에는 더더욱.

당장 지금의 러시아가 그 꼴을 실시간을 겪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오늘 국비유학을 다녀와 제대로 된 판단과 결론을 내리는 경제 관료들을 보니, 그동안 정환 자신이 거의 원맨쇼 하듯 이끌어왔던 경제정책도 어느 정도는 대리해도 되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좋아, 그럼 이제 가장 중요한 걸 물어보겠네.”

정환이 조용히 손을 치켜들고 그들의 말을 중단시키자 그들은 일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 뿐 만 아니라 연회장의 모든 남녀노소들이 교수의 학점을 좌우할 질문을 마주한 학부생마냥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럼 앞으로 대책이 뭔가? 석유가 공화국 경제의 유일한 해법이 될 수 없다면,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공화국 인민들이 식의주를 걱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동무들은 당장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이론을 늘어놨으니 이제 해법을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정환의 질문에 젊은 영국 유학파 관료들은 서로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한 목소리로 합창하듯 답을 내놓았다.

“우선 몇 년 간은 고정환율제를 실시하셔서 환율을 안정시키실 것을 권해 드립네다. 또한 적절한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공화국 산업의 씨줄기가 고사해버리지 않게 당 차원에서 보호무역 정책을 펼치셔야 하고…….”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마저 말을 이었다.

“……원유로 벌어들인 달러를 중공업 육성책에 투자하셔서 장기적으로 화학공업, 중기계공업을 키우셔야 합네다. 중공업은 일반 인민들이 뛰어들기에는 리스크가 지대한 장치산업이지만 중공업을 등한시했다가는 경공업도 일정 수준 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합네다.”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관료 또 나섰다.

“……이미 시멘트, 의류, 보존식품,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경공업은 일반 인민들이 뛰어들어 벌써 성과를 보이고 있으니 아직 흥남, 남포 등지에 국영으로 남아있는 기업소들을 민영화하시고 국가에서는 규제 철폐와 외국인 투자만 유도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시장의 원리에 자연스럽게 맡기시는 것이 최선의 방책입네다.”

“흠…….”

다시 한번 연회장에 침묵이 흘렀다.

모든 당 간부들, ‘답안지’를 내놓은 유학파 관료들도 초조한 표정으로 채점자, 정환의 채점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초 같기도 하고 몇 년 같기도 한 고요의 끝에서, 김정환 총서기는 순안 국제공항에서의 기상천외한 연설보다 훨씬 나지막하지만 역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알 수 없었지만, 김정환 아니, 이정환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었다.

“오케이, 합격!”

* * *

연회장에서 소장파 관료들이 지적한 것처럼, 벌써 개혁개방의 물결이 민간에도 미치고 있음을 증명하듯 이미 시장 자율에 맡긴 경공업 분야는 단기간에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벌써 인민들 중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하는 건설업 경기 상황을 빠르게 인지하고 인민복을 생산하는 공장기업소를 건설 노동자들이 쓸 노가다용 목장갑 공장으로 바꿔 세워서 떼부자가 된 자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중공업 현황은 ‘주체철’이라고 불리는 철강을 생산하는 흥남 제철소 정도가 공화국 최대의 중공업 시설일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다.

물론 정환은 이를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봐둔 곳이 있지. 여기 어떤가?”

“이곳은…….”

정환 본인이 위원장을 맡아 새롭게 창설된 재정경리부 산하 ‘5개년 중공업 진흥위원회’의 첫 회의 시간에 그가 공화국 지도에서 가리킨 지점은 문제의 명천 유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동해안을 따라 길게 펼쳐진 그곳에 정환은 붉은 펜으로 일직선을 그었다.

“라선부터 청진을 거쳐 명천과 길주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이곳이 공화국 중화학 공업 아니, 나아가 거의 모든 산업의 척추가 될 곳일세.”

사실 그곳은 일전부터 정환이 군부대를 이용해서 터를 닦고 철도를 우선적으로 보수하는 등 마음속으로 낙점해놨던 지역이었다.

우선 석유화학부터 키워야 할 테니 당연히 명천과 가까워야 하고, 동해안이 바로 옆이니 공업용수도 구하기 쉬우며 나아가 중국, 러시아와 국경지대도 가까운 만큼 수출입도 용이한 곳.

북조선 최고의 공학 인재들이 모이는 김책 공대가 위치한 김책 시도 바로 옆에 있겠다, 포항 공대가 위치한 남조선 아니, 대한민국의 제철 산업 신화를 일군 포항 롤을 해주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물론 정환과 정치국 직속 중공업 진흥위원회가 대한민국 중공업 육성 역사에서 가져온 건 당연히 위치 뿐 만이 아니었다.

“이거 다 그대로 베끼게. 기계공업 진흥법, 전자공업 진흥법, 석유화학 공업 육성법, 조선공업 진흥 기본계획…… 많기도 하군. 남조선 동무들이 했던 걸 공화국 사정에 맞게 잘 뜯어고쳐보게. 물론 우리는 외자를 들여오기 위해 미국에 손이 발이 되게 비비거나 국제 유가에 목멜 일이 없으니 훨씬 유리한 조건이지만.”

‘라선-청진 중공업 지대’라는 이름을 얻은 중공업 복합단지를 육성하기 위한 정책적 자원 역시 이 길을 앞서 걸었던 한국에서 가져왔다.

정환이 한국 개발 연구원에서 거의 외울 정도로 배웠던 이 정책들은 이제까지 몰라서, 혹은 투자할 자본이 부족해서 시행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바로 이 계획을 직접 이끌고 일선에서 지도해야 할 유능한 인적자원, 경제 관료들이 부족해서였는데, 이제는 그 문제도 해결되었다.

사실 정책이나 자본뿐만 아니라 경험적 측면에서도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가장 생생하게 목격하고 다른 부분이나 아쉬운 부분은 바로 잡아줄 정문영 근대 그룹 회장이라는 존재가 있었으니 인적자원 면에서도 한국보다 앞선 셈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 중공업 기업들을 민간영역에서 이끌 경영자 역시 정환은 이미 낙점해두고 있었다.

“자네들이 직접 해보지 그러나?”

“……예? 총서기 동지?”

“뭘 그리 놀란 표정인 건가들? 그럼 누구를 지명할거라 생각했나?”

“저, 정말이십네까?”

“당적 떼고 소속만 바꾼다고 생각하게. 남조선에도 박태준이라고 하는 유능한 제철 기업소, 포항제철 경영자 역시 원래 군관 출신 아니었나. 장차 공화국 인민군대의 땅크 총포탄도 생산할 중차대한 산업을 일반 인민에게만 맡기는 것도 부적절하고 말이지.”

‘이렇게 되면 사실상 회전문 인사지만, 국가 기간산업을 믿고 맡길만한 경영자가 금방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환이 라선-청진 중공업 복합단지에 들어설 첫 기업인 ‘명천 에너지’의 경영자로 선정한 건 연회장에서 용감하게 발언한 젊은 영국 유학파였다.

투자방향도 결정됐고, 자본과 자원도 조달했으니 이제는 단기적인 이익이 아니라 5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며 국가 기간산업의 대계를 그릴 경영자가 있어야 했다.

그 후보 역시도 정환은 속 편하게 유학파 중에서 결정했던 것이다.

언뜻 성급해 보이는 그 결정에는 지난 연회를 계기로 최고 권력자의 눈에 지나치게 띄어버리는 바람에 당 내 간부들을 포함해 주변에서 들어오게 될 하등 쓸모없는 견제나 권력 다툼 같은 것에 휘말릴 바에야 차라리 편하게 당 밖으로 나가서 일에나 집중하라는 이유 외에도 한 가지 속셈도 더 있었다.

‘괜히 관에 묶어뒀다가 오로지 민영화만이 살 길이라고 설치지 않…… 기를 바라지만 유비무환인 법이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민영화 성애자 대처 여사님 한창 때에 영국 물을 먹은 친구들이니.’

과거 공산주의 통제경제체제였던 국가가 이제 시장경제원리 따른답시고 성급하게 민영화 잘못하면 어떤 사단이 나는지는 현재의 러시아와 예고르 가이다르 재무장관, 그리고 옐친이 더 잘 보여주기 힘들만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앞으로 최소 10년은 국가주도 경제 성장을 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균형점을 적절히 잡아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지도자로서 자신의 주업무라고 정환은 생각했다.

시장원리에 따른 경쟁체제 도입과 그로 인한 경영 합리화 한 마디로 민영화는 복지부동에 빠진 공기업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산업혁명 시절부터 공업 역량을 탄탄히 쌓아온 영국 이야기고, 이제 갓 공업진흥을 시작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혀 사정이 달랐다.

시장원리에 맡겨도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는데, 정환으로서는 아직 젊은 이 ‘인민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들이 관록과 경험을 쌓아가면서 그걸 깨닫고 장차 이 공화국에 맞는 경제정책 모델을 개발해내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리더십의 부재로 그 체제이행의 균형점을 못 맞추면 지금의 러시아처럼 부패한 기회주의자들, 민영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신흥 공산귀족들이 모든 부를 독점하는 사태가 이 평양에서 재현될지도 몰랐다.

‘엘리트들이 엘리트 노릇을 못하고 지도자가 지도자 노릇을 못하면 나라가 망하는 건 시간문제지. 지도층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최소한 나라가 망하지는 않거든, 그건 민주주의건 일당독재건 변하지 않아.’

따지고 보면 몇 년 후 한국에서 일어날 IMF도 민관 경제 엘리트들의 부패와 무책임이 주된 이유 중 하나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올해는 그 유명한 ‘문제는 경제야’라는 역사적 한 마디가 나올 미국 대선도, 박이삼과 유민중이 부닥치게 될 한국 대선이 동시에 예정되어 있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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