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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123화 (123/350)

< 40장. 더러운 피 >

40장. 더러운 피

장쩌민의 제안에 정환이 잠시 머리를 굴리는 표정이자 그는 이내 흑심이라고는 1㎜도 없다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사고 역시 단동과 신의주가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통관, 입국 절차나 자본 이동 규제 등 경제협력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 아니오? 두 도시를 하나로 묶어 통합된 경제권, 특별행정구로 만든다면 서로 상부상조 하에 공동 번영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거요.”

“……듣고 보니 장 총서기님 지적이 옳으십니다.”

‘우리를 경제적으로 묶어놓겠다는 속셈이로군. 무역제재가 완전히 해제되려면 일이 년 더 걸릴 테니, 그 사이에 우회로도 하나 뚫어놓으시겠다? 좋아, 걸려주지.’

속셈이 훤히 보이는 장쩌민의 노림수였지만, 정환은 딱히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단동은 뒤에 선양이라는 큰 도시를 배후지역으로 두고 있는 국경 도시고, 신의주 역시 대륙으로 들어가는 길이 뚫리면 그 길로 들어올 물류와 자본의 유통이 북조선의 혈액순환을 더욱 빠르게 할 것이다.

물론, 안전장치를 하나 만들어 놓는 걸 잊지는 않았다.

“대신 통합특별행정구를 담당할 행정장관은 저희 조선 사람으로 뽑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흐음…….”

장쩌민은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북조선의 사정상 개혁개방 후 시장경제체제에서의 노하우나 자본, 인구수에서 (아무리 지금은 제재를 당하는 중이라도) 중국에 밀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아무리 행정장관이 조선 사람이라도 단동, 나아가 신의주를 실제로 통치하는 것은 막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가진 중국 자본가들, 기업인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중국 공산당 역시 그들을 통해서 북조선을 경제적으로 종속시킬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좋소. 대국으로서 양보의 미덕을 보이는 게 순리겠지.”

“감사합니다. 장 총서기 동지. 신의주-단동 특별 행정구는 나날이 발전해나갈 조중관계 우의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정환이 재빨리 머리를 숙이자 장쩌민은 기분이 좋아진 듯 손뼉을 딱 치면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정환을 안내했다.

“하하하…… 신의주에서의 사고 문제도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는 그런 사소한 문제 가지고 김 총서기 같은 귀한 손님의 방문을 시끄럽게 할 정도로 속이 좁지 않으니까.”

‘어차피 죽은 자가 한족도 아니고 말이지.’

정환의 예측대로, 장쩌민은 신의주에서 벌어진 택시기사 사망사건에 대해서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중국 대륙을 항상 지배해왔던 주류 민족, 한족이 타국 땅에서 죽거나 다쳤다면 국가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좀 더 강경한 자세를 보였겠지만, 상대가 소수민족이면 그도 별로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중국 공산당은 겉으로는 다민족주의를 표방하며 각 소수민족들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한다는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전부를 한족으로 동화시키는 것이 최종적 목표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알고 있었고.

이전부터 그러한 시도들은 양지에서나 음지에서나 항상 있어왔지만, 덩샤오핑의 죽음과 장쩌민과 양상쿤의 집권 이후 그런 소수민족들에 대한 강제적 동화시도는 더더욱 노골적이고 적극적이 되어가던 중이었다.

한줌도 안 되는 이민족들은 인류 4대 문명 중 하나인 황하문명의 창시자, 한족들보다 문화건, 역사에서건 뒤떨어지는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한족들이 중심이 되어 그들을 이끌고 보살피는 게 당연하니까.

장쩌민은 이건 자신뿐만이 아니라, 10억 명을 넘는 중국인 대다수의 생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돌아가신 김일성 동무도 이렇게 동무의 아들이 훌륭하게 장성하여 공화국과 인민을 영도하는 것을 본다면 마음 놓고 잠들 수 있을 거요. 그런 점에서 김 총서기는 참으로 영민한 지도자이자 효자가 아닐 수 없소.”

장쩌민의 립서비스에 정환은 히죽 의미모를 미소를 지으며 다시 대답했다.

“네, 아바지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 * *

그날 회담 이후 며칠 동안, 북조선 최고지도자 김정환은 첫 방중에서 국빈급 예우를 받으며 일선도시와 산업 시설들, 베이징 대학교와 중앙당교, 사회과학원들을 시찰했다.

택시기사 살해 문제는 처음에는 일부 중국인들 사이에 ‘감히 가오리빵즈들이 대국 인민을 살해했다’는 식으로 공분을 불러 일으켰지만, 살해된 택시기사가 한족이 아니라 조선족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금세 가라앉았다.

장족이든 위구르족이든 조선족이든 소수민족들은 대체로 낙후된 곳에 살기 마련이고, 그런 곳에서는 중범죄도 흔하게 일어나니까.

결정적으로 한족이 아닌데 왜 계산적인 중국인들이 그 죽음에 기운을 써서 분노해야 하겠는가?

조선인들끼리의 문제는 조선인들끼리, 중국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같은 민족끼리 해결하게 두는 게 최선이었다.

장쩌민도 이렇게 생각하는 건 다를 바 없었고, 결국 최무룡과 신의주 도당위원회가 죽은 조선족 택시기사의 가족에게 배상금을 물어주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방중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정환은 옆에 있는 유혜림에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조선족들도 중국에서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모양이군.”

“한족들은 자기들 빼고는 다 오랑캐라 부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소수민족들 사이에서 몇 손가락 안에 손꼽힐 정도로 집단 규모가 크다 보니 분리 독립에 대한 경계심도 있을 테고요. 그나마 티베트나 위구르 같은 곳에 비하면 대우가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흐음. 하기야 다른 소수민족들과는 다르게 조선족들은 우리 공화국이나 남조선이라는 배경이 있으니까. 여차하면 딴 마음을 먹고 붙을 수 있다 그거겠지.”

“잠정적인 체제 불안정 요소니까요. 장쩌민 동지와 양 주석이 정권을 잡으신 이후로 그런 동화정책이 더욱 강경해졌다고 하는데…… 위구르 회교도(무슬림) 같은 경우는 보이기만 해도 교화소 같은 곳으로 잡아가거나 고문을 해서 배교를 시킨다는 말까지 들립니다.”

“어리석은 짓이지.”

“……네?”

유혜림은 예상하지 못했던 정환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슬쩍 갸우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김일성 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북한의 극단적 민족주의 아니, 그걸 넘어서 순혈주의는 아직도 민간에 깊게 뿌리내려 있으며 (물론 겉으로는 인종차별을 비판하지만) 전 인민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져 온 사상이었다.

유혜림조차 근래 들어 많이 자유주의 물이 들었다고 해도 국가적으로 순혈주의를 인민들에게 권장하는 통제국가인 북한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라왔던 사람이었다.

주류 민족에서 소외되어 박해를 받는 소수민족들에 대해 인간적인 동정심은 들었지만 그래도 외세에 맞서 국가를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는 소수민족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특성이나 종교를 양보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하고 그녀도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모시는 정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던 것이다.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시대에 뒤쳐진 사상일세. 유 소좌. 자국 내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단결을 유도하기에 위정자들에게는 효과적이지만, 빙두 같은 마약이나 다를 바 없지. 국가적 부작용이 따르니까 말이야.”

“……!”

이번만큼은 유혜림도 정환이 보여준 의외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그가 한 말은 공화국의 수령으로서 파격을 넘어서 혁명적인 발언이었고, 어떤 의미로 거의 ‘상식’에 이반하는 말이었다.

저 오랑캐들로부터 조선민족 만의 순수혈통을 지키고 ‘우리민족끼리’ 자력갱생, 부국강병을 이룩해 나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혈통적으로 조선족은 동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민간에서는 째포(재일교포)와 비슷하게 아니,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경멸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저렇게 강제력을 통해서 때려잡는 방식은 동화와 민족 단결이라는 원래 목적조차 달성하기 힘들게 만들 가능성이 높지. 일제 때의 이 조선을 떠올려 보게. 무단통치보다 문화통치 시절에 훨씬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전향하지 않았나. 만약 그 상태로 10년에서 20년 만 더 흘렀다면 우리는 지금도 일본어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총서기께서는…….”

“저들과 다른 방향으로 가야겠지. 안 그래도 우리 공화국은 태생적으로 인구가 부족하고 영토가 좁아 국력신장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네. 지금까지야 조선족들이 먹고 살기 위해 대국에 협력했지만, 이 공화국에서 좀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면 자신들도 어디에 붙어야 이익일지 금세 깨달을 걸세. 앞으로 중국인들이 알아서 그들을 내쳐준다면 포섭이 훨씬 더 쉬울 테고 말이지.”

* * *

한편 이러한 극동아시아의 정세와는 무관하게, 동유럽 발칸 반도, 정확히는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라고 불렸던 곳에서는 그야말로 폭력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 북조선과 중국 한족 그리고 조선족끼리의 갈등과는 물리적으로 지구 반 바퀴에 달하는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 동기 요인은 근본적으로 동일했다.

이웃한 민족, 종교집단 간의 대립과 역사적인 피해 의식, 그리고 ‘우리 구역’, ‘우리 땅’, ‘우리 여자’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인 민족주의였다.

“세르비아의 전사들이여! 일어나라! 지금 저 회교도(이슬람교)들이 긍지 높은 우리 영토를 더럽히고! 우리 문화와 역사를 말살하며! 나아가 이 세르비아를 이슬람의 물결로 더럽힐 것이다! 총 가진 남아들은 모두 일어나 조상과 민족의 자긍심을 위해 싸워라!”

“하, 하지만 내 이웃 중에도 보스니아계, 내 친구 중에도 크로아티아 계가 있는데…… 그들과 맞서 싸워야한다면…….”

“그런 물러터진 소리 마라! 보스니아인 무슬림들이 나치 독일의 개가 되어 우리 세르비아를 무자비하게 박해하고 학살했던 것이 고작 수십 년 전이다! 피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저쪽이 너를 죽일 거야! 너는 네 가족들이 보스니아 놈들에게 살해당하고 네 여동생, 네 어머니가 무슬림들에게 더럽혀져도 좋다는 말이냐?”

“정규군이건 민병대건 상관없다! 어차피 보스니아 이슬람 돼지들을 도살하는 것은 똑같으니까! 아니, 도살로는 부족해! 아예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고! 이번 기회에 저놈들의 더러운 피를 정화시켜서 완전한 우리 세르비아인들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독립해서 이 유고 연방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안 할 테니!”

발단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영도 아래 존속되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해체였다.

동구권이 붕괴하고 소련이라는 뒷배가 없어지자 안 그래도 복잡한 민족과 종교 구성을 가진 유고 연방 아래 소속되어 있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가 각각 독립을 선언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에 세르비아 계가 반발하면서 내전이 일어났다.

미국과 EC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준한 것을 시작으로, 세르비아계들로 구성된 민병대(라고 부르고 세르비아 군이라고 읽는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계, 보스니아 계 무슬림들은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과 같은 동네에서 함께 일하고 웃고 퇴근하면 술을 마시며 떠들던 세르비아 계 친구들, 동창들, 동료들, 이웃들의 모습을 그 민병대에서 발견했다.

“……헤, 헤라크, 젤코! 요반! 너희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사귀어왔던 친구들이잖아! 제, 제발…… 으아아악!”

어제까지만 해도 웃으며 아침 인사를 나누던 이웃집 아저씨가 집에 불을 질렀다.

빵을 구워주며 할머니는 건강하시냐고, 정정하셔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빵집 아저씨가 할머니를 총으로 쏴 죽였다.

보스니아 계건, 크로아티아 계건 무슬림 남성들은 전부 총살당해 암매장되었고,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웃들을 죽이기를 거부했던 소수 세르비아계들도 마찬가지 일을 당했다.

하지만 가장 큰 그리고 가장 오래 남는 피해를 당했던 것은 여자들이었다.

물론 현대전으로 갈수록 민간인들, 특히 여자와 아이들이 더욱 큰 피해를 당하는 건 어딜 가나 동일했지만, 보스니아 내전은 그런 면에서 특히 더 잔혹했다.

“죽이는 걸로는 부족해. 남자들은 다 죽이더라도 무슬림 년들은 써먹을 데가 다 있지. 아니, 우리 월급도 박봉인데 특별 보너스를 받는다고 생각해도 되고 말이지. 이런 거도 없어서야 어디 군 생활 하겠느냐 말이야. 흐흐흐.”

“이건 범죄가 아니라, 보스니아 무슬림의 더러운 피를 우리 세르비아의 피로 정화하는 작업이다! 우리 세르비아의 피를 받은 아이가 늘어나니까. 재미도 보고, 애국도 하고 말이지. 하하!”

중국이 위구르나 티베트, 혹은 조선족에게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강제적인 ‘민족동화’ 작업이 보스니아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순혈주의와 여기서 발원한 타민족 타종교에 대한 배격, 폭력성이 온갖 야만의 형태로 자행되고 있는 곳이 지금의 보스니아였다.

그리고 이를 막아야 할 유엔 평화유지군들은, 여러 정치적 제약에 묶여서 눈앞에서 이 모든 폭력과 학살이 자행되는 것을 보고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렇게 무력하게 학살당하는 보스니아 무슬림들을 실질적으로 도와줄 능력과 의지가 있는 자들은 극소수였는데, 그 극소수의 정체는 저 멀리서 중동에서부터 온 ‘종교적 동포’들이었다.

* * *

“이츠하크! 도망 가!”

“도망간다! 잡아! 뒷문 쪽이다!”

청년, 이츠하크 밀로셰비치는 뒤에서 찢어지게 절규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친 듯이 달렸다.

너무 뛰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다리에 불이 나는 것 같았지만, 이츠하크에게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도망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저주스럽기만 했다.

‘도대체 왜……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이츠하크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계 아버지와 보스니아계 무슬림 어머니를 둔 청년이었다.

그리 유복하지는 못했지만 행복한 가정이었고, 무슬림이기는 했지만 돼지고기도 즐겨 먹는 그들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너희 알라가 뭐라고 안 하냐?’고 장난스럽게 놀리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이츠하크 역시 ‘알라도 이 거지 같은 유고사회주의 공화국에 살아보시면 답이 없으니 돼지고기라도 먹고 목숨 부지하라고 하실 것이다.’라며 웃으며 맞받아치고는 했다.

하지만 내전이 벌어진 후 모든 것이 돌변했다.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던 세르비아계 이웃들이 소총을 들고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저항하던 아버지를 이츠하크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쏴 죽였고 그의 집을 뒤져 값나가는 모든 것들을 가져갔다.

뒤에 남겨진 어머니가 무슨 일을 당할지 이츠하크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이 포로로 잡은 무슬림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에 대해 들려오던 소문을 그도 모르지 않았기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몽 같은 생각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총알이 뒤에서 날아와 그의 귀를 스치고 가는 순간에도 이츠하크는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려 어머니에게로 달려가고 싶었다.

어떻게 그녀를 구해야할지는 몰라도, ‘이웃’들에게 무릎을 꿇고 호소라도 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웃 아니었느냐고, 이 빈곤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서로 라디오를 나눠듣고 다 떨어진 책을 돌려보던 시절은 다 잊어버린 거냐고, 그놈의 케케묵은 혈통과 민족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절규가 목 끝까지 올라왔다.

쐐액

“……!”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총알이 스치는 소리가 그의 귀를 아프게 두드렸다.

이제 저놈들, 한때 이웃이었고 친구였던 짐승들은 이제 이츠하크를 잡으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아예 죽이려는 듯 했다.

자신이 총알보다 빠르게 뛸 재주는 없었으니 이츠하크는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죽음이 눈앞에 닥쳤다는 것을 실감한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뒤에 놔두고 온 어머니만이 생각났다.

그 순간 이츠하크는 생애 처음으로 진지하게 알라께 기도를 올렸다.

그러고는, 총성이 울렸다.

타타타타탕!

타타탕!

“어린 형제여, 괜찮은가? 아슬아슬했다.”

“……?”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에 이츠하크는 얼떨떨해하며 눈을 떴다.

자신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

“우리는 저 멀리 아프간에서 같은 무슬림 동포들을 돕기 위해 날아온 자유의 전사들이다. 알라는 위대하시도다(Allāho akbar : 알라후 아크바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형제는 무슬림인가?”

이츠하크의 목숨을 구해준 구원자들,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둔 아랍인들이 그렇게 묻자 이츠하크는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 게거품을 물며 자신을 쫓아오던, 이츠하크의 아버지를 죽이고 집을 습격한 ‘이웃’들은 조금 전 그들의 사격에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이제까지 그다지 독실한 무슬림은 아니었던 이츠하크는 자신도 모르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알라의 신실한 종이며 방금 전 그분의 도우심으로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와 행동을 함께 하겠는가? 어린 형제여. 모든 무슬림들은 형제다. 우리 무자헤딘은 압제에 맞서 싸우는 모든 무슬림들의 편이다.”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가장 나이 많은 아랍인이 그렇게 제의하자 이츠하크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의 조건을 달고서.

“그러겠습니다. 대신에 우리 어머니를 구해주세요, 우리 어머니도 무슬림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형제여. 모든 수니파 무슬림들은 국가와 민족을 떠나 알라의 가르침 아래 뭉쳐 모든 기독교도들, 이단자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이상이니까.”

아랍인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들끼리도 완전히 생각이 일치한 건 아니었는지 그들 중 일부는 표정을 찡그리며 우두머리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이츠하크가 만약 청력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그리고 그가 파슈토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그 말이 ‘저 어린 형제는 파슈툰(Pashtun)족이 아닌데요.’라는 뜻인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두머리 아랍인은 오히려 귓속말을 한 자신의 동료를 타박했다.

“왜 그렇게 근시안적으로 행동하나? 진정한 무슬림이라면 이슬람 공동체 외의 다른 모든 사상들, 민족주의, 애국주의, 전체주의…… 이 모든 것들이 서구나 러시아,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헛된 구분이라는 것을 잘 알 텐데? 이 어린 친구는 지하드에서 훌륭하게 싸울 걸세, 나는 그걸 알아.”

그는 그렇게 결론을 지은 후 다시 한 번 따뜻한 목소리로 이츠하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자헤딘이 된 걸 환영하네. 우리 지도자께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저 러시아 놈들과 싸울 때부터 전 세계를 이슬람과 샤리아(이슬람 율법)의 빛 아래로 인도하기 위해 투쟁하는 분일세. 지금 우리는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니, 형제처럼 박해받는 무슬림을 만나면 틀림없이 기뻐하실 걸세.”

이츠하크 밀로셰비치가 당시 설립 초기였던 알 카에다(al-qāʿidah)에, 그리고 무자헤딘을 이끌던 스승인 압둘라의 휘하에서 독립해 세력을 키우던 키 큰 청년, 오사마 빈 라덴의 휘하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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