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장. 동북아시아 균형안보 재단 >
38장. 동북아시아 균형안보 재단
“....돈의 힘이라고 하셨습네까? 총서기 동지?”
“그렇네, 돈, 즉 달러의 힘으로! 미국은 겉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지만 실제로는 금권정치(金權政治) 체제에 더 가깝네. 정치인은 여론과 표를 모아 당선되지만, 여론이든 표든 돈을 주고 사들일 수 있기 마련일세.”
위로 치켜들었던 최고지도자의 손가락은 굽혀져서 엄지손가락과 맞닿아 작은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이제는 북조선에서도 통하기 시작한 기호, ‘돈’을 뜻하는 만국공통의 표시였다.
얼핏 바로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지만, 김용건 역시 국제외교판에서 오래 굴러본 사람답게 정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들었다.
“워싱턴 정가에 저희 공화국의 입장을 대변해줄 집단을 만들자는 말씀이시군요. 과연 그렇게만 된다면 이번처럼 굴욕적으로 미국 놈들에게 도움을 구걸할 일도 없을 겁네다.”
“바로 그렇네. 아직 이름은 안 정했지만, 재단이든 연구소든 이름은 뭐 되는대로 갖다 붙이면 되는 거고. 저기 일본 놈들처럼 ‘귀축영미 아메리카 연구소’, ‘도조 히데키 평화재단’처럼 기가 차게 뻔뻔스런 이름이라도 괜찮지. 원래 로비라는 건 뻔뻔해야 하는 거니까. 중요한 건,.....”
여기까지 말한 정환은 이게 진짜로 중요하다는 듯 잠시 말을 끊고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었다.
“......우리 집단의 논리가 미국의 여론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단순히 돈을 뿌려 표를 사는 건 로비스트 펌만 제대로 고용하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건 하수나 하는 짓이야. 진짜 전문가들은 자신의 집단 혹은 자국, 이 경우에는 우리 조선이겠군. 그 자국의 이익이 곧 미국의 이익과 합치한다는 것을 미국인들, 특히 워싱턴 의원 나리들에게 납득시키는 자들일세.”
유대인들처럼 말이지, 하고 정환은 속으로 생각했다.
미국 대통령은 선거로 결정된다, 하지만 그 선거를 결정하는 것은 선거광고를 사들일 돈, 그리고 여론의 풍향을 가늠하고 이쪽으로 끌어와 줄 정책 전문가 집단이다.
게다가 92년 현 시점에서는 정치 자금을 제한하는 매케인 - 파인골드 법도 없으니 현재 워싱턴 정치판은 금맥과 인맥이 엉키고 성켜 그야말로 복마전이었다.
정치인은 유권자들의 시청률이 집중되는 골든타임 전국방송에 자신의 선거 광고를 내보낼 돈을 모으느라 바빴고, 워싱턴에 산재한 수많은 로비스트 펌(Firm)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조종하고자 하는 각종 이익단체들, 그리고 외국 정부에까지 그들을 연결시켜 주느라 일거리가 끊길 날이 없었다.
당장 지금 집권 중인 아버지 부시부터 지난 선거전 때 상대 후보를 대놓고 저격하는 광고를 전파에 들이부은 네거티브 선거로 당선되지 않았는가.
게다가, 올해 말에 제42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는 이상,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한 푼의 기부금이라도 더 긁어모으기 위해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던 차였다.
사실 부시와 이 당 청사 밖 정원에서 산책 회담을 가지고 미국과 수교한 직후, 정환은 이미 주미 북조선 대사관을 통해 미국 현지에서 재단 설립 절차를 밟고 그 재단의 구성원이 되어줄 이름 값 높은 두뇌들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사실 이런 점에서는 씽크탱크나 로비스트 펌이나 다를 바 없지. 정치판에 돈으로 영향을 끼치느냐 두뇌로 영향을 끼치느냐 정도만 다를 뿐. 사실 그 두뇌도 돈으로 사올 수 있으니 결국은 돈이 최고지만.’
“그렇다면 즉시 착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공화국보다 훨씬 일찍 시작한 이스라엘이나 섬 쪽발이들 호주머니에서 미국 의원 동무들을 빼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원래 천릿길도 한걸음부터 아니겠습네까.”
“돈 아끼지 말고 아이비 리그 출신 석박사들, 전현직 관료들, 군인들, 기업가들, 특히 아시아 정치에 관심 많은 학자들을 초빙해 오게. 미합중국의 아시아 전략에 있어서 우리 공화국의 지정학적인 가치를 부각시키는 연구라면 뭐든지 연구자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타진해보도록.”
그렇게 미국 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백악관과 의회에 그것을 반영시킬 수 있는 로비 단체를 설립하기 위한 공작이 서기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시작되었다.
피오니 홀딩스에서 막대한 자금이 다시 빠져나갔고 이 돈은 ‘김일성 대학교 주최 미국 학술교류 진흥 기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곧 워싱턴에 세워질 재단의 출연금이 되었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외무성에서 근무하던 유학생 출신의 젊은 관료들이 외무성에서 소속을 옮겨 이 중임을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도 (전생에서 한국 유수의 씽크탱크 연구원이었던 기억을 되살린) 정환이 특별히 당부한 몇 가지 지시사항이 적극 반영되었다.
“우선 이름을 잘 정해야지. 안타깝지만 아직 미국 내에서 이 공화국이 가지는 인상은 이름 없는 동아시아의 후진국에 불과하다네. 그나마 존재를 알고 있는 자들도 부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러니 우리가 출연한 자금으로 세워지더라도 겉으로는 가급적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하겠군.”
“특별히 생각해놓으신 이름이라도 있으십네까?”
“있고말고. 재단이 실제로는 우리 공화국의 국익을 대변하더라도 겉으로는 인류 전체의 대의와 인간의 존엄처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찬동할 수 있는 명분을 앞세워야 하네. 물론 너무 추상적이어서도 안 되니 이 재단의 목적을 분명하게 나타내기도 해야 하겠지만.”
총서기를 포함한 정치국 위원들은 짧은 토론 끝에 이 로비 단체의 이름을 ‘동북아시아 균형안보 재단’으로 정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여기서 특별히 ‘균형’이란 단어가 들어간 이유는 선전선동부 부장 현영숙의 의견 덕이었다.
“이 재단의 설립 이유는 미국 내에서 우리 공화국의 발언권과 위세를 늘리기 위함이에요. 그리고 미국인들에게 우리 공화국의 가치는 되놈들과 로스케를 견제하는 데 있지 않나요?”
“그렇지요.”
“이제까지는 그 역할을 섬 쪽바리들이 독점했습니다만, 미국인들에게 아시아에서의 동맹은 일본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전부에서 외국 출장을 나갈 때도 미국 위세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며 자기들이 아시아 평화의 수호신 마냥 위세를 부리는 왜놈들이 눈꼴시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확실히 현재의 미국에서 아시아는 곧 일본 아니면 중국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일반인들 뿐 만 아니라 정치인들, 심지어 외교 안보에서도 한 먹물 한다는 식자층에서도 별 다를 바 없었는데, 재단 이름에서부터 이를 바꿔보자는 게 현영숙의 말이었다.
듣고 보니 과연 선전선동부 부장다운 식견이 담긴 의견이라, 동북아시아 균형안보 재단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채택되었다.
“그럼 이제 이름을 정했으니 적당한 간판, 우리 재단의 얼굴이 되어줄 인사를 찾아야겠군. 공화국 외무성 인사나 김대 교수 쯤이 재단 연구소장을 맡으면 너무 티가 날 테니 영미권 백인이 좋겠네. 물론 이름값이 있는, 최대한 유명한 인사로.”
“.....이런 신생 재단에 자신의 이름을 팔아줄 인사가... 많지는 않을 것 같습네다. 있다고 해도 저희와 궁합이 맞지 않을 것 같습네다만...”
머릿속에 여러 후보군들의 인명부를 쭉 떠올리면서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김용건의 지적은 타당했다.
보통 이런 재단의 최고책임자는 마케팅을 위해서라도 네임 밸류가 있는 학계 석학이나 유명한 국제 정치인을 모셔오는데, 연봉은 둘째 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 역시 물주인 공화국과 소위 말하는 ‘코드’가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미국에서 난다긴다하는 아시아 연구자라면 대부분 이미 일본계 로비단체의 끈이 닿아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신생 재단보다 좀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씽크탱크로 가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일본을 고깝게 보는 미국 공화당 성향 네오콘 인사들 중 한 명을 골라 뽑자니 나중에 이 양반들이 뭔 사고를 칠지 무섭다는 건데... 다음 선거까지는 모르겠지만 민주당이 집권할 때 환승을 쉽게 하기 위해서라도 너무 우파적이면 곤란해.’
“생각해보게 김 부장. 국제적 명망이 높고, 기본적으로 우파지만 너무 꼴통은 아니어야 하고, 일본에 경도되지 않았으면서도 중국을 싫어하며 우리 공화국에 우호적인 영미권 백인 인사. 그런 사람이 있겠나?”
난 벌써 한 명 생각났는데, 하고 정환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는 일부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일본 망명(?) 시절부터 자신을 섬겨온 충신 김용건이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호기심이 갑자기 솟아올라서였다.
그리고 김용건은 자신의 주군의 기대에 훌륭히 부응했다.
“그런 동무가 있.... 아! 생각났습네다, 총서기 동지!”
“실은 나도 방금 부장 동무가 떠올린 사람을 생각했지. 마침 그 동무도 지금쯤 은퇴해서 괜찮은 일자리를 찾고 있을 테니, 우리 이직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일 걸세.”
그렇게 말하며 정환은 서기실 전화를 들어서 영국 대사관으로 교환해 달라고 지시했다.
“어.... 그럼 이제 출석을 부르는 것을 마치고 본회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총 인원 96명, 제적 의원 수.... 11명이로군요.”
‘이건 그야말로 모욕적이야. 차라리 집에 가서 티 스푼 설거지나 하는 게 낫겠어. 맙소사,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가정주부 일을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가정은 더 이상 직장에서 잘하는 게 없을 때나 오는 곳이라는데.’
그녀는 그 날도 자리 채우기 외에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출근을 해서 회의장 의자에 앉아 짜증스럽게 손가락을 두드렸다.
영국 상원, 귀족원 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그녀의 새 직장은 이름만 상원이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주전장’이던) 하원, 서민원에 비하여 실질적인 권한이 전혀 없었다.
무려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세습 귀족들의 전유물인 이 상원이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는 건 전통을 소중히 하는 영국 국민성 탓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 외에도 실용적인 용도가 하나 더 있어서였다.
바로 뭔가 작위 하나는 던져줘야겠지만 실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한 마디로 뒷방 늙은이 전용 노인정이었다.
‘여남작(Baroness) 작위고 뭐고 아무 소용없어. 애초에 나는 식료품 점 딸내미였다고. 다시 그리운 정치판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그 빌어먹을 놈의 인두세 때문에 이 대 브리튼 연합왕국에서는 무리겠지만!’
그녀는 거의 대부분이 텅 빈 회의장을 바라보며 그렇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분간은 그나마 남은 인맥과 재직 시절 영향력으로 어떻게 막후 정치 흉내라도 내보겠지만, 그것도 몇 년 못 갈 것이다.
현직 시절에 세금인상안을 가지고 국민들의 절반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 탓에, 이제 그녀와 손잡는 거나 가까워지는 건 어떤 영국 정치인이든 이미지의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정치판이 그리웠다.
그녀는 원래 주방에서 가사 일이나 하는 전업주부와는 끔찍하게 안 맞았고, 천성적으로 휴식이나 은퇴를 멀리하는 워커홀릭이었던 것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신사숙녀 여러분들,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한 5분 쯤 ‘업무’에 종사했을까?
그녀가 들리지 않는 자기 신세한탄을 하고 있는 동안, 상원 본회의는 언제 개회했느냐는 듯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애초에 출석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비워지는 데도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은 회의장을 나와 의원실에 당도해 자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상원에서는 뭔가 하고 싶어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자서전을 쓰거나 대학 강연을 다니거나 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그건 이제 본인이 현직에서 물러났다는 걸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육순이 넘었음에도 그녀가 그리운 것은, 그녀의 열정을 깨우는 것은 진짜 정치였다.
설득하고 협상해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표를 모으고, 가끔은 (아니, 실은 가급적 자주) 모략도 부리고 협박도 하는, 그런 진짜 정치.
그 때, 드물게도 의원실의 전화가 울렸다.
“Hello?"
"아, 마가렛 대처 총리님. 아니, 이제 은퇴하셨으니 여사님이라고 불러드려야겠군요. 비서가 먼저 받을 줄 알았는데 좀 의외로군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 영국의 전 총리 마가렛 대처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다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기억해냈다.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그리고 그녀의 정치 역정 중 아주 잠깐 스쳐지나간 사람이었음에도 기억해내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은, 천직이었던 정치에 대한 그녀의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알려주었다.
사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요즘 데일리 텔레그래프나 더 가디언, 심지어는 더 선에도 자주 오르내린 까닭도 있었지만.
“비서가 있기는 했는데 내가 내보냈어요. 따로 비서가 필요할 만큼 이 노인정에 일이 많지도 않고. 영국 국민의 세금을 아껴야 되지 않겠습니까? 김 총서기님?”
“이거 여전하시군요. 제가 오늘 이렇게 갑자기 평양에서 런던까지 전화를 드린 건, 대처 여사님을 스카웃하고 싶어서입니다.”
스카웃이라고?
대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로 ‘동북아시아 균형안보재단’이라는 단체 산하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그녀를 모셔가고 싶다는 말을 듣고 있다가, 상대가 아시아 변방국가의 독재자라는 걸 뒤늦게 떠올리고 먼저 선을 그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친미 친서방 독재자기는 했지만, 그래도 독재자는 독재자 아닌가.
“제의는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총서기님.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는데 제가 아무리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지만 영국의 국익에 반하는 제의는 받아들일 수 없....”
“저희 공화국이 첫 수교한 서방 국가가 영국이라는 걸 벌써 잊으신 모양이군요, 여사님. 그리고 이미지 문제가 걱정이시라면, 이 재단은 표면적으로 저희 북조선과 직접 연관이 없는 학술활동을 주로 한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진짜로 그것만 하는 건 아니지만요.”
“.......일단 제의를 한 번 들어보죠.”
일단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을 들어보겠다고는 했지만, 대처는 벌써부터 이 재단 소장이라는 자리에 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연봉도 높기는 했지만, 진짜 그녀의 마음을 혹하게 했던 것은 이 젊은 총서기가 그녀에게 높은 수준의 재량권, 이 귀족원에서처럼 자리만 차지하는 허울 좋은 위치가 아니라 진짜 권력이 있는 위치를 제의해왔던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서 영영 떠나갔다고 생각했던 정치의 기회, 자신이 현업에서 갈고 닦았던 능력과 경험을 현장에서 다시 살릴 기회가 마법처럼 다시 찾아온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유혹적인데, 심지어 재단의 정치적 지향점까지 그녀와 맞았다.
“그..... 동북아시아 균형안보재단의 설립 취지를 다시 한 번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시아에서의 자유시장경제 수호와 정치적 안정, 경제적 공존공영을 위하여 유럽과 미국의 석학들이 지혜를 모아 최선의 미래를 연구 개척한다.’이런 겁니다.”
“흐음, 좋은 명분이군요. 물론 그 미래라는 건 총서기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게 가장 이로운 미래를 말하는 거겠죠?”
“하하... 과연 이야기가 빨라 기쁘군요. 여사님은 우리 공화국을 미국과 수교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주신 장본인이시기도 하고, 현 미국 집권 여당인 공화당에도 알고 지내는 분들이 많으시니 여사님께서 와주신다면 창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우리 재단에 그야말로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어떻습니까? 생각이 있으신지요?”
처음 정환은 그녀가 쉽게 결정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재단 운용금액이 막대하다지만, 한 때 철의 여인으로 유럽을 넘어 미국에까지 큰 정치적 영향력을 끼쳤던 마거렛 대처가 이제 막 창립한 신생재단 산하 연구소장 같은 직위로 만족할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시원스럽게 승낙했다.
“수락하겠습니다. 제 자서전은 아무래도 한참 뒤에나 써야할 거 같군요.”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시는 군요.”
“창립된 지 얼마 안 됐다는 건 그만큼 첫 소장인 저한테 재량권이 크다는 의미죠. 저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제 길을 제 스스로 개척한 사람입니다. 김 총서기님. 그리고....”
여기까지 말한 대처의 눈에는 벌써부터 불꽃이 번뜩이고 있었다.
총리 직에서 밀려난 후 이제 잿더미로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투지와 호전성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다시 타오르고 있었다.
“중국인들의 아시아 패권을 견제한다라, 총서기님과 저 사이에 공동의 목표가 생겼군요. 덩샤오핑이 홍콩 반환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게 근래 들어 가장 통쾌한 일이었는데, 그 재단에서 일하면 그런 통쾌한 일을 더 만들어낼 수도 있겠어요. 그것도 어쩌면 내 손으로 직접 말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영국과 미국 유수의 신문들, 미디어 매체는 전직 영국 총리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가 미국 워싱턴에 새로 설립되는 동북아시아 균형안보 재단이라는 신흥 재단 산하의 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아직 워싱턴 정가에는 생소한 이름인 이 재단의 출범식에 일본의 사업가 손정의부터 신흥 금융 거물 조지 소로스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낸 것에 벌써부터 세간의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출범 직후부터 의욕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 동북아 균형재단의 정세 예측 능력을 엿볼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그해 4월, 동유럽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지역에서 피비린내 나는 민족 간 내전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