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117화 (117/350)

< 36장. 늑대와 호랑이 (1) >

36장. 늑대와 호랑이 (1)

이렇게 북조선 내부에서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인민들의 생활에 직접 체감되게끔 불어 닥치고 있을 때, 한편 공화국 바깥의 세상은 다른 이유로 시끌벅적 해지고 있었다.

바로 그 해 초 있었던 남순강화와 그 결과로 인한 덩샤오핑의 비참한 죽음,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 수뇌부가 보인 태도 때문이었다.

비록 인민들과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한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당 공보실은 공식적으로는 애도와 조의를 표했지만, 그 태도는 마치 이제 철 지나고 몸에 안 맞는 옷을 장롱 한 쪽으로 치워버리려는 사람의 그것이라는 걸 눈치 못 채는 사람은 없었다.

각국의 중국 전문가들과 외교 당국자, 대사들은 이러한 베이징의 공기를 재빠르게 읽고 본국에 이런 메시지를 타전했다.

‘덩샤오핑은 밀려났다, 이제 중국은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양상쿤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 - 경제인 간 연립정권이 장악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가의 소문이 지면을 통해 기사화되고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까지 걸리는 시간 역시 얼마 걸리지 않았다.

- 덩샤오핑 사망!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가? 아니면 천안문의 도살자인가?

- 천안문 학살의 책임을 끝내 벗어나지 못한 덩샤오핑... 대다수의 전문가들, ‘공산당 내 권력 다툼의 결과일 뿐이지 중국이 크게 노선을 전환할 가능성은 적어... 오히려 더욱 강경보수화 될 것.’

- 중국 공산당, 대변인과 관영 인민일보 통해 ‘초창기 혁명원로 중 또 한 분이 타계하셨다’ 발표. 대조적으로 물 밑에서 시급해지는 경제제재 해제 노력.

“이 표현 좀 보게, ‘혁명원로 중 한 분’ 타계? 무슨 뒷방 늙은이 한 명 골로 간 것 마냥 취급하는군. 거기다 정작 중국을 시장경제로 이끈 덩샤오핑을 거의 간접 타살해놓고 무역제재 풀고 최혜국 대우 다시 해달라? 이건 대체 뭐지?”

“이 사람아, 뭐긴 뭐겠나, 천안문 학살 책임 전부 덩샤오핑한테 뒤집어씌우고 자기들은 빠져나가겠다 그거지. 워낙 정보 통제가 심해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만이나 홍콩으로 망명한 중국인들 이야기 들어보면 그때 강경진압 주도한 놈들 거의 제 자리에 그대로 있다면서? 그럼 이게 뭐긴? 그냥 권력다툼이지 뭐....”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되 공산당이 중국을 통치하는 건 확실히 해놓겠다라... 결국 덩샤오핑 없는 덩샤오핑 중국이로군 그래.”

실제로 그 지적은 정확했다.

정치적 은사라고 할 수 있는 덩샤오핑을 버리고 보수파와 손잡은 장쩌민은 바로 공산당 총서기장에 취임했다.

그의 측근들이자 중국 개혁개방의 수혜를 가장 많이, 가장 먼저 누린 경제인들과 부동산 개발 업자들로 이루어진 상하이방 인원들도 중앙 정계에서 요직을 꿰찬 것은 물론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변화 아닌 변화에 대해서, 미국, 정확히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과 그가 이끄는 백악관은 고심에 빠졌다.

그즈음 덩샤오핑의 사망과 중국 내 권력 구도 개편에 대해서 백악관 내에서 나오는 의견은 크게 2가지였다.

- 천안문 학살의 최종 책임자인 덩샤오핑이 죽었으니 체면은 세웠다. 이제 경제를 위해서라도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앞으로 세계무역 체제가 심화될수록 인건비를 절감해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데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미국 기업들에게 필수 불가결하다. 지금은 좀 처졌지만 여전히 강성한 일본 기업들의 고품질 - 싼 가격 공세에 국내외 시장을 다 내준 것 잊었나?

- 아직 제재를 풀어서는 안 된다. 일본이 부동산 버블 붕괴로 큰 타격을 받았으니 앞으로 세계 시장은 미국 기업들이 다시 장악할 것이다. 미국 기업들의 하청 기지 역할은 북조선을 포함해 다른 노동력이 싸고 아시아 시장에 근접한 국가들에게 맡기면 된다. 특히나 일본을 계속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포함해서 극동아시아 지역에 대 일본 견제세력을 장기적으로 육성해야만 한다.

천안문 학살에 학을 떼고 대만과 싱가포르 등지로 망명한 반공산당 성향의 중국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미국 정가의 여론은 (물론 대놓고 말하기는 힘들었지만) 전자가 더 우세했다.

일단 이제 이념 대결의 시대가 끝났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고, 현재 이 시점에서 대다수 미국인들 머릿속 주적은 얼마 전 붕괴한 악의 대마왕, 핵탄두 최다 보유국 소련 혹은, (역시 얼마 전 큰 타격을 입었지만) 동아시아의 경제 사무라이 일본이었지 나이키 하청이나 하는 신발 공장, 혹은 쿵푸 발상지 정도의 이미지 밖에 없었던 중국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미국 정계에서 공화당 민주당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다국적 기업들의 후원을 받거나 아니면 본인이 전현직 이사로 재직하는 식으로 재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과의 관계 개선 요구에는 다가올 글로벌리즘의 최대 수혜자가 될 다국적 기업들과, 그리고 그들을 워싱턴 정치인들과 연결시켜주는 싱크탱크(Think Tank)들이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은 물론이었다.

“젠장, 내가 올해 대선만 없었어도....”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측근들의 입과 친기업 경제 신문 사설란 등을 통해 들어오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 압박에 그렇게 짜증을 냈지만 그라고 달리 도리가 있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이미 민주당에서 대선 주자로 자리매김하고 벌써부터 슬슬 대선 준비운동을 하고 있는 아칸소 주 촌뜨기 클린턴이 지금 자신의 자리에 앉게 되면 자기가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부시는 국무부 장관의 입을 통하여 ‘미국은 덩샤오핑의 죽음에 깊은 조의를 표한다.’라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말은 조의 표시였지만, 이제까지 냉랭하던 미중관계, 그리고 중국에 대한 경제 제재에 미국이 가장 앞장섰으며 그 원인을 덩샤오핑이 제공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외교적인 화해 제스처나 다름없었다.

물론 조지 부시 본인이나 백악관 대변인이 직접 발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입장문은 사실상 이제까지의 미중 간 냉랭한 국면이,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경제 제재가 곧 해소될 거라는 예고나 다름없었다.

물론 서로를 탐색하는 외교적 수사가 오가고, 국제회의를 통하여 천안문에서 유린당한 인권과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해 성토하는 공허한 연설이 몇 번 있겠지만, 모든 전문가들은 제재가 해제 되는데 길어야 2년, 짧아야 1년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뜻은 이제까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대체재로서 북조선이 누렸던 하청 기지, 투자처로서의 ‘프리미엄‘, 반사이익이 너무 빨리 거두어진다는 뜻이었다.

“이거 언젠가는 올 일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빠르군. 아메리카 주인님한테 이용가치 유통기한을 갱신 받으려면 서둘러야겠는데?”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 김정환 총서기는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미국 내 협력자를 물색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대문 앞에 찾아온 늑대 떼부터 먼저 달래서 쫓아 보내야 했다.

“김영남 최고 인민회의 의장? 기타조센 쇼군이 직접 나온 게 아니라고?”

“하잇. 그렇습니다, 장관님. 아무래도 이 역시 협상지연 전략이 아닐지...”

“아니, 급수가 안 맞다 그거겠지. 이런 자리에 본인이 직접 나오는 건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사실 와도 푸대접 받을 가능성이 더 높고 말이야.”

‘여기는 부유한 백인들의 리그니까. 괜히 아직 변방 국가 취급 받는 나라의 어린 지도자가 나와서 무시당할 이유는 없겠지. 사실 우리 일본도 여기서 목소리 좀 내기 시작한 것도 10년이 채 안 됐으니.’

나카오 에이이치 일본 ‘외무상’은 비서의 말에 손을 내저으며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의 말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닌 게 그가 지금 참석해 있는 회의,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 경제 포럼(World Economic Forum)은 프리메이슨 연례 총회 현대버전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돌 정도로 기득권, 그러니까 영미 자본가, 정치인들의 동창회였다.

1981년부터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기에 다보스 포럼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이 모임은 각국 지도자들, 외교 수반, 내로라하는 기업인들, 학계 저명인사들이 모여 ‘세계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라는 거창하면서도 추상적인 목표 아래 토의하는 곳이라는 게 대중적인 인식이었다.

여기서 대중적인 인식이라고 말한 이유는, 나카오는 이 포럼이 사실 이름만 거창하지 서유럽, 백인 유력자들이 모여 자기들이 얼마나 세계 헤게모니를 잘 장악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더 잘 장악할지에 대해 의논하고 서로를 추켜 세워주는 데 여념이 없는 거만한 말잔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이번 해를 기점으로, 정확히는 얼마 전 미국 국무부의 덩샤오핑 조문 발표 이후로 그것도 조금씩 바뀌는 듯 했다.

‘이번 총회가 조금 늦게 열린 게 중국 인사들을 초청하기 위해서였다는 예측이 맞는 거 같군. 아마 우리와 비슷한 이유로 온 거 겠지?‘

나카오는 자신이 앉은 테이블 반대편에서 기조연설은 듣는 척도 안 하며 여기저기 바삐 돌아다니는 중국 외교관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천안문 사태 이후로 수많은 국제기구와 회의에서 경원시 당했던 굴욕 아닌 굴욕의 세월을 보내왔던 중국이었지만, 얼마 전 미국 국무부의 발표 이후로 그것도 이제는 빠르게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듯 했다.

사실 이 다보스 포럼에는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이 서로의 엉덩이를 ㅤㅎㅏㄼ아주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용도가 더 있었는데, 저기 중국인들이, 그리고 나카오가 총리와 내각의 지시에 의해(사실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한 거지만) 이 포럼에 파견된 진짜 이유도 바로 그 용도 때문이었다.

“장소가 잡혔습니다. 장관. 이곳 리조트 최상층 스위트룸입니다.”

“좋네, 일어나지.”

나카오는 지루한 연설을 뒤로 하고 동행한 한 무리의 비서진들, 외교위원회 중의원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식장 출구로 향했다.

애초에 그가 여기 온 건 일본 정부의 특명, ‘북일 관계 수교의 장애물인 납북자 문제와 식민지 배상금 문제’에 대한 비공식 논의를 위해서였다.

지난 해 91년 부시 대통령의 방북 이후, 키타조센, 북한은 의욕적으로 세계 많은 국가들, 그러니까 정확히는 이제까지 반쯤 적대관계에 있던 서방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해왔다.

그 국가들 중 대다수가 이제는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곧 평양에는 수많은 대사관들이 세워졌다.

지난달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지지난달에는 싱가포르가 북한에 대사를 파견하고 정식으로 수교 절차에 들어갔다.

그런데 유독 이상하게 일본에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아무런 연락이 없었는데, 납치 피해자 문제로 몸이 달아있던 내각과 총리대신에 나카오는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 지금 몸값을 올리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한테서 일본령 조선 시절 배상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겠다, 이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기선을 제압당하기 싫다면 절대 먼저 연락해서는 안 됩니다.

- 장관, 키타조센이 친미 국가로 돌아선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납치문제 논의조차 시작이 안 되냐고 국민들 사이에서 벌써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나오는데, 정말 자신 있나?

- 하하하... 급한 건 저쪽 아닙니까? 그동안 중국이 부시 상에게 제재를 당하면서 키타조센이 여러 가지로 경제적 혜택을 받았는데, 이제 그것도 곧 끝날 분위기 아닙니까. 여전히 은둔국가면 모를까, 이제는 개혁개방을 했으니 경제 발전이 키타조센 정권과 젊은 쇼군의 최대 목표입니다. 그러자면 외화와 경제 지원금이 간절할 텐데, 이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너무 오래 기다렸군. 하지만 드디어 그 젊은 친구에게 투자한 게 빛을 발할 때가 왔어.’

나카오는 지난 번 정환에게 당한 굴욕을 되새기면서 속으로 클클 웃었다.

그 건방진 젊은 쇼군, 총서기 김정환 자기 딴에는 나카오와의 관계에서 이제 자기가 주도권을 잡았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 그는 일개 개인이 아니라 한 국가의 지도자다.

미국과 손을 잡고 그동안 한국과 일본이 나눠서 분담하고 있던 대 중국, 대 러시아 견제 전선의 최일선에 나서서 사냥개를 자처하겠다는 생각은 좋았지만, 사냥개들 사이에도 등급이 있는 법이다.

일본, 한국, 그리고 북조선 이 미국의 세 아시아 동맹국가들 중 등수를 매기자면 이제 막 미국과의 동맹에 합류한 북조선은 당연히 그중 꼴찌였다.

국가 차원에서의 식민지 피해 보상금이니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개인 청구권이니 말이 많겠지만, 나카오는 결국 북조선이, 즉 정환이 한일 기본조약 당시의 한국처럼 ‘대승적으로’ 합의에 동의할 거라고 확신했다.

저쪽이 꿀리는 게 아예 없다면 모를까 자기들도 멀쩡한 일본의 민간인을 납치한 게 확실한 상황에서 인권 타령 하기는 영 뭣할 것이고, 미국도 그걸 아는 상황에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나카오는 미국은 자기 사냥개들이 지키라는 집은 안 지키고 서로 치고받고 물고 뜯으며 제 역할을 방기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그가 해결하게 되는 것이고, 총리 자리도 그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의장님, 이쪽은 나카오 에이이치 일본 외무상이십니다. 나카오 장관님, 이 쪽은 김영남 최고 인민회의 의장님이십니다.”

“허허. 만나서 반갑습니다. 조일 간 참으로 역사적인 만남이 아닐 수 없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리에서 부디 건설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양국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면 좋겠군요.”

나카오는 ‘미래지향적’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김영남의 내민 손을 꽉 잡고 흔들었다.

그의 상대, 김영남 역시 외교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라고 들었고, 주름살 속 실눈을 반짝이면서도 자신을 탐색하는 그의 첫 인상 역시 만만치 않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키타조센의 특성상 아무리 물밑 합의라고 해도 현장에서 당국자가 행사하는 권한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고, 김정환은 이처럼 민감한 상황에서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 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나카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영남은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흠흠, 그럼 비공식 회담을 시작하기 전에.... 한 분만 이 자리에 더 모셔도 되겠습니까? 마침 그 분도 이 다보스 포럼에 참석해 계시는데 저희 이야기를 꼭 경청하고 싶어하실 겁니다.”

‘한 사람 더? 이건 뭐야?’

통역사를 통해 김영남의 말을 전해들은 나카오는 예상 밖의 사태에 눈살을 찌푸렸다.

일반적인 외교 관례로 볼 때 즉석에서 갑자기 회담 대상자를 더 추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외부에 알리지 않은, 미수교국끼리의 비공식적인 회담이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북일 간 단독 회담이라고 들었습니다만은.....”

“하하, 당황하신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오신 분을 보시면 나카오 장관님도 그 분이 아까 말씀하신 ‘미래’에 밀접한 연관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회담 주제를 변경하려거나 조건을 바꾸려는 것은 결코 아니니 제 얼굴을 봐서라도 일단 자리에 모셔보지 않겠습니까?”

“............”

상대는 명목상이지만 키타조센의 2인자라고 들었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는데 끝까지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나카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미국 고위 관료 정도가 아니면 회담에 끼치는 영향은 없을 테고 말이지.’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으로 모시게.”

김영남이 수락하자 북조선 측 수행원들이 스위트룸의 문을 열고 새로운 손님을 안으로 들였다.

호기심 반 확신 반으로 김영남의 돌발 제안을 수락한 나카오가 처음 예상한 사람은 유엔 인권이사회 관료 정도였다.

아마도 반 세기 전 식민지배의 불법성이나 징용 피해자들의 고통 따위를 부각시킬 제3자를 초청해서 감성 전술이라도 써보려는 게 아닐까 내심 추측하던 나카오는 안으로 들어오는 안경 쓴 백인 중년 남성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이런 긴 국제회의는 저하고 영 안 맞는 거 같습니다. 저는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아, 저하고는 구면인 걸로 압니다만, 어쨌든 반갑습니다. 나카오 장관님. 미합중국 국방장관 리처드 브루스 체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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