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115화 (115/350)

< 34장. 평양, 용강 국제공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34장. 평양, 용강 국제공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경악이 식장 전체를 휩쓸었다.

유학생들은 어색하고 겸연쩍었던 표정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고, 거북한 공기에 목이 탄 나머지 입에 물을 머금고 있던 중년 간부들 중 그대로 뿜어버린 자들도 있었다.

일단 최고지도자가 대학 동무에게 하듯 ‘후배님들’하고 말을 건넨 건 둘째 치고, 지금 서방세계에서 오래 살다가 귀국한, 잠재적 반동분자일 가능성이 높은 대학생들에게 ‘우리 공화국은 촌구석에 낙후하다’라고 말한 건가? 지금?

하지만 이런 다른 이들의 충격은 아랑곳 않고 정환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해하네. 후배들 중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불민한 선배도 김대에서 청춘을 보내던 중 전대 장군님의 부름을 받아 저 섬 쪽바리들의 나라,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지. 그리고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그 일본에서 내가 발견한 게 뭔지 아나?”

“................”

“거짓부렁은 안 하도록 하지. 어차피 다른 인민들은 그렇다 쳐도 지난 3년 간 공화국 바깥 공기를 실컷 마시고 온 후배 동무들에게는 안 통할 테니. 그건 바로 갓난아기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이 세상 최고의 국가, 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저 간악한 섬 쪽바리들의 국가, 일본에 비해 너무나도, 비할 수도 없이 초라하다는 것이었네.

‘뭐 엄밀히 선배를 칭하자면 내가 아니라 이 몸 원래 주인인 김정환이겠지만, 어쨌거나 나도 국립대 출신이거든?’

조금만 시간이 있었으면 김일성대 서울대 학부 양쪽 모두를 다녀본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게 되는 거였는데.

유학단을 포함한 장내 청중들은 이런 최고지도자의 마음 속 구시렁거림을 알 리 없었지만, 그들은 바짝 긴장한 채 수령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최소한 틀에 박힌 환영사나 하려고 저러는 건 분명히 아닐 테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현재 우리 공화국은 일본에 비하여 너무나도 낙후하고 보잘 것 없네. 일본은 물론이고 동무들이 이제까지 수학하고 온, 시장경제체제의 최첨단 영국에 비해서 축적된 기술도 자본도 사회간접인프라도 국제사회에 내놓을 만한 기업조차 없네. 그러니 동무들 표정이 그 모양인 것도 무리는 아니지. 방금 전까지 대궐에 살다가 갑자기 초갓집으로 가라는데 히죽이죽 웃을 자가 몇이나 되겠나?”

정환의 적나라한, 하지만 그만큼 정곡을 찌른 지적에 유학생들의 표정에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비록 당연히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그의 말 그대로 식장에 있던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자본주의의 최첨단, 영국 런던에서 유학하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니 너무나도 낙후하고 뒤떨어진 모습에 격한 실망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게다가 (물론 이것도 정환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맥킨지 컨설팅이나 골드만삭스 지사처럼 영국, 아니 전세계에서도 내놓으라 하는 투자은행이나 전략 컨설팅 펌에서 1년 정도 인턴생활을 하다 온 엘리트들이었다.

자본주의 세계의 화려함과 사치를 가장 최전선에서 보고 들은 그들이 곳곳에 찌든 때와 시대에 뒤떨어진 인민복을 차려입은 늙은 당 간부들로 가득 찬 순안국제공항에 내려섰을 때 무엇을 느꼈을지 정환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현재 공화국은 이 비행장과도 같네. 시설은 낡고 의자에는 구멍이 났으며, 유리창은 깨지고 바닥에는 먼지가 더깨로 쌓여있지. 하지만! 동무들이 런던에서 자본주의 공부를 하는 동안, 이 공화국 역시도 변화했네. 개혁개방을 한 것이지. 아마 이미 전해들은 동무도 있는 걸로 아네만?”

갑자기 열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정환의 어조에 당 간부들과 유학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뒤떨어진 자국에 대한 비탄과 비하로 가득 차 있던 젊은 수령의 말이 급격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후배님들, 동무들이 변화한 것처럼 우리 공화국 역시 변화했네, 하지만 그 변화는 충분치 않고, 이제 겨우 강성대국을 향한 구만리 길의 첫 십리를 왔을 뿐이네. 그리고 그 여정은 이 선배 혼자서는 도저히 끌고 나갈 수 없을 만큼 먼 걸이지. 지난 몇 년 간 그것을 절실히 느꼈네.”

“..........!!!”

“본시 이 자리는 먼 길 고생하고 온 후배들의 환영과 축하를 해줘야 하는 자리이지만, 안타깝게도 수령으로서 이 선배의 깊은 근심과 넋두리만 털어놓는 자리가 되어버렸군.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내가 장담할 수 있겠네. 오늘 이 자리에서 여기 후배님들과 같은, 나와 다른 간부들과 함께 이 공화국과 당, 그리고 무엇보다 인민들을 부강한 미래로 이끌어갈 인재들을 만나 그 근심이 최소 한 푼은 덜어졌다는 것을 말이야! 지금 내가 가리키는 저 바깥, 저 공사현장을 보게. 무엇이 보이나?”

그 말과 함께 정환은 손가락을 들어 순안국제공항 저 멀리의 관제탑 쪽을 가리켰다.

모든 시선이 자신의 손가락 끝, 한창 트럭과 포클레인이 분주히 오가는 현장에 집중되었음을 확인하고, 정환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개혁개방의 첫 발자국일세. 이 평양국제비행장이 순안국제공항으로 다시 태어나는 공사지. 비록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완공 이후에는 그야말로 이 공화국의 위용에 어울리는 국제공항으로서의 최첨단, 동무들이 떠나온 런던 히스로 공항보다 더욱 진보하고 편리한 인민들의 자부심, 평양의 자랑거리로 다시 태어날 테지. 바로 이 조선 그 자체처럼! 그리고 그 날 나와 당의 중추에는 그 영광을 함께 만들고 누릴 이 자리의 후배들, 동무들이 있게 될 거라고 약속하지! ......다시 한 번 조국 강산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네. 이상.”

“총서기 동지 만세!”

“조선로동당 만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환영식장 사방에서 만세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당 간부들 뿐만 아니라, 자리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유학생들 또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떠밀려서, 시키는 대로가 아니라, 사실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그들이 가장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정환의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개중에는 감격해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발을 구르고 눈물을 흘리는 대학생들도 있었다.

연설을 마치고 정환은 현영숙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며 한마디 당부했다.

“이제야 방송에 내보내기 적절한 그림이 좀 나오는군. 내가 말한 부분은 적당히 편집하게. 목소리는 뭉게고 저 동무들이 만세 부르는 장면만 넣으면 되겠지.”

“......정말이지 볼 때마다 그 수완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어요. 총서기 동지. 대중선동과 사상교양 최고책임자라는 제 당직은 아무래도 총서기께서 겸임하시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군요.”

“선동이라니? 나는 그들이 잠시 잊고 있던 것을 상기시켜 줬을 뿐이야. 자신들은 앞으로 이 자본주의 조선을 이끌고 나갈 최고 엘리트 일꾼들이라는 걸 말이지.”

정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낙후된 개발도상국을 빠르게 발전시키는 데는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를 볼 줄 아는 지도자, 그리고 각 계 각 분야에서 그 지도자의 손발이 되어 체제를 유지하고 정비시켜 나갈 엘리트들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무책임과 자국에 대한 혐오에 찌들 수 있었던 그 엘리트들에게, 정환은 이전 수령들처럼 무조건적인 충성과 애국을 강요한 게 아니라 솔직하게 현 상황을 인정하고 앞으로 그걸 자신과 함께 타파해 나가자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만약 여기서 그들을 방치해두거나 이제까지처럼 자아비판, 충성맹세 등을 강요했다면, 이들 유학생들은 앞에서는 복종하는 척해도 결코 진심으로 정환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낙후되고 답답한 조국의 현실에 절망하며, 잘 되면 영국에서 밀수해온 잡지나 돌려보는 무기력한 복지부동 관료로 전락하거나 더 나쁘면 개혁개방 과정에서 인민을 착취해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부패 관료로 변질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정환은 방금 전 짧은 연설을 통해 그런 그들에게 책임감을 불어넣고 자신들이 조국 발전과 개방의 선봉장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물론, 거기에 약간의 기초적인 심리전술을 추가해서.

‘선전 대상과 공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부각시켜 유대감을 조성하라는 건 대중 선동고취 전술의 기본이지만...., 도대체 총서기께서는 어디서 저런 것을 배우셨을까?’

그 심리 전술이란 바로 방금 전 그가 유학생들, 선택받은 북조선의 엘리트들에게 불어넣은 특권의식이었다.

북한에서 수령과 그 일가란 현대판 전제군주, 아니 그걸 넘어서 구름 위에 존재하는 현인신이나 다를 바 없다.

김정일부터 정환까지 백두혈통이 김대를 나왔다는 사실은 공화국 내에서도 제법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들과 동격의, 선후배라고 생각하는 김대 출신들은 당연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정환 취임 직후 몇 년 간 북조선을 떠나있었다지만, 이 자리에 있는 유학생들도 ‘김 씨 왕조가 이 공화국의 주인이다’라는 인식에는 다를 바 없었는데, 그런 만큼 그 백두혈통 후계자가 직접 일개 인민들에 불과한 자신들의 동문(同門)이라는 사실을 본인 입으로 강조하자 그들과 정환 사이의 거리감은 단 몇 초 만에 크게 줄어들었던 것이다.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혐오하는 사람도 막상 자기 주변에 권력자가 있으면 그와 친분을 쌓아 득을 보고 싶어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다른 인민들은 그저 경외할 수밖에 없는 최고지도자가 자신들과 선후배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자신들의 출세를 암암리에 보장해주었다는 사실은 젊은 북조선 엘리트들의 마음속에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게 효과가 좋으니 전세계 어디서든 라인 형성이니 친목질이니 인맥 관리니 하는 게 끊이지를 않지. 안 그래도 김대, 김책 공대 등 출신이라 타 인민들에 비해 우월감 비스무리한 것도 만만치 않을 텐데, 이게 엘리트주의나 선민사상으로 발전 안 하게 관리하는 것도 잘 해야겠군.’

정환이 속으로 쓴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열광하는 유학생들을 보던 장성택이 정환 옆으로 다가와 찬사를 주워섬기며 말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총서기 동지. 그런데, 순안국제공항에 새단장 계획이 잡혔다는 건 조직지도부에서는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만, 어느 새 그런 경사가....”

“아, 장 부장 말이 맞아. 새단장 계획 같은 건 없네. 아직은.”

“......네? 하지만 방금 전 분명히....”

“저건 그냥 착륙 유도장비 현대화 공사고, 공항 전체 공사와는 아무 상관없네. 방금 전 저 동무들에게 말한 내용은 즉홍적으로 생각해서 말한 걸세. 뭐 지금부터 사실로 만들면 그만이지만.”

당연히 정환이 정말로 아무 계획 없이 순안 국제공항의 리모델링과 신 공항 개발을 지시한 건 아니었고, 이전부터 언제고 기존 공항을 뜯어고치거나 아예 새로운 공항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즈음 북조선은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새로운 투자처와 싼 노동력을 찾아온 기업인, 혹은 공산주의 세습 독재 국가에서 세계로 문을 열어젖혔다는 기삿거리를 찾아오는 언론인,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호기심에 한 번 평양에 들러보는 특이 취향의 관광객까지 이전보다 공항 수요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폭증하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그들을 수용하고 각지로 실어 나를 관문이 되어야 할 북조선의 유일한 국제공항, 순안 국제공항은 개방 전까지 국제노선이 중국으로 향하는 노선 단 하나였던 만큼 슬슬 폭증하기 시작하는 이용객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원체 태부족이었다.

문제는 새 활주로를 만드는 등 확장 공사를 하기에 순안 국제공항의 위치가 워낙 산속에 위치해서(사실 이건 한반도 북부 지방 대부분이 그랬지만) 엄청난 난공사가 전망되는 형편이었다.

순안공항을 확장시키는 것은 공사의 난도가 너무 높다는 보고를 들은 정환은 바로 결단을 내렸다.

- 지금부터 즉시 평안도 온천 군 비행장을 고쳐서 신공항을 만드는 계획에 들어가도록 하게. 당장은 순안국제공항에 확장공사를 시행해서 급한 대로 고쳐서 써야겠지만, 장기적으로 공화국의 경제가 발전할수록 방문객도 늘어날 텐데, 이번에 돈 좀 들이더라도 제대로 만들게나. 이왕 보고 베낄 거면 최고를 보고 베껴야겠지. 예를 들어 여기로.

그렇게 말하면서 정환이 (재정경리부 관료들로 급하게 결성된) ‘온천 국제공항 추진본부’에 전해준 건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 개발 역사와 과정을 담은 책자였다.

- 얼마 전에 수교도 했겠다, 당시 담당자들도 불러 조언을 들어보고 공화국 사정에 적용시켜서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게 잘 만들어보게. 운영주체는 군에서 따로 독립시켜서 투자공사처럼 공기업으로 만들지. 아, 그리고 이름도 바꾸게. 그래도 공화국의 얼굴이자 관문이 될 국제공항인데 온천이 뭔가, 온천이. 목욕탕도 아니고....

뭔가 지시보다는 구시렁거림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공화국에서는 수령이 하품하는 소리도 살펴야 하는 법, 곧 추진본부는 새 국제공항의 이름을 온천군이 과거에 속했던 지역인 룡강군에서 이름을 따와 ‘용강 국제공항’으로 정했다.

공사기한은 5년, 대규모의 국제공항을 짓는 것 치고는 상당히 짧은 기간이 아닐 수 없었지만, 터는 이미 닦아놨고, 활주로도 이미 만들어놨으니 여객 터미널처럼 군 공항에서 민간 공항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필요한 것만 건설하면 되었다.

곧 이제까지 항공사를 담당했던 조선인민군 공군 민용항공총국은 ‘용강국제공항공사’로 독립했고 즉시 각종 군 장비를 동원하고 (중동에서 공항 건설에 종사하던 경력을 살려) 근대건설의 조력을 얻어 신공항 계획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 국제공항 건설의 계기 아닌 계기가 되었던 런던 정경대 유학생들은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사회 각계각층으로 자신들의 진로를 선택했다.

물론 그들 중 상당수는 정환의 연설에 감명 받아 당직에서 중앙당 관료의 길을 걷는 것을 선택했지만, 그 진로는 다양해서 평양 tv에서 일하는 언론인의 길을 선택한 학생도, 김책 공대에서 연구원의 길을 선택하거나 피오니 홀딩스에서 금융인이 되기로 한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또 일부는 좀 더 특이한(?) 진로를 걷기로 선택한 부류도 있었는데, 바로 소위 말하는 벤처 기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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