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장. 공화국의 연말 (2) >
32장. 공화국의 연말 (2)
“아가, 거기서 뭐하고 서 있니?”
“..........!!!”
멍하니 창문에 붙은 종이와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주머니 속의 달러를 만지작거리던 용환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고운 조선옷(한복)을 차려입은 중장년에 접어든 여성 한 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묻고 있었다.
“아가, 내 말이 안 들리니? 어디 아픈 거 아이니?”
“.....아, 아닙네다. 동지.”
‘아가라고 불릴 적은 옛적에 지났는데...’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기도 전에 용환은 재빨리 (평양에 와서 습득한 기술인) 옷차림새를 ㅤㅎㅜㄼ어 보고 눈앞의 여인의 ‘출신성분’을 파악해냈다.
일단 기성 인민복을 입는 게 아니라 조선옷, 그것도 옷감에서 광택이 나는 걸 보니 중국산 재질이 아니라 어떻게 남조선에서 들여온 옷이 분명했다.
거기다 아무리 연말이 가까워지고 인민들 주머니 사정이 급격하게 나아져서 요즘 평양이 평소와는 다르게 들뜬 분위기라고는 해도 남조선제 옷을 저렇게 대놓고 입고 다니는 걸 보면 용환 앞의 중년 녀성(여성) 동무는 지위와 돈 양 쪽 모두 가진 사람이 분명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유는 몰라도 그녀가 용환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는 것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고위 당 간부 안해나 그 쯤 될 기야!’
계산이 선 용환은 즉시 허리를 방아깨비처럼 굽히며 눈앞의 녀인, 막 당사로 향하던 중이던 정환의 어머니 김명애에게 절했다.
“아닙네다, 녀성 동무. 그저 처음 보는 양옥집이라 신기해서 보고 있었시요.”
“그렇구나, 저건 미제... 아니, 미합중국에서 건너온 고기겹빵 집이란다. 너도 맛 본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김명애 동지. 지금 동지와 저희 특별호위국은 총서기 동지께서 하달하신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입네다. 이 동무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한시라도 빨리 차에 오르시는 거이...”
“그러지 말고 잠시만 시간을 주시오, 동무. 나 같은 녀인네가 보기에도 그리 급하지도 않은 거 같구만... 아가, 이름이 뭐니?”
용환과 김명애의 대화에 끼어든 사람은 험상궂은 표정에 검은 양장을 입고 목깃에 인공기가 그려진 뱃지를 단 큰 체구의 남자였다.
뿐 만 아니라 김명애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로가에는 한눈에 봐도 외산이 분명한 검은 자동차 몇 대가 일렬로 주차되어 있었고 차 근처에는 용환을 노려보는 남자와 비슷한 복장, 비슷한 체구의 남자들이 (역시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우르르 몰려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대단히 위험하고 중요한 당무에 종사하는 듯한 남자들이 자신을 째려보자 용환은 덜컥 겁이 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그런 남자를 자신 눈앞의 중년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제지하자 방금 전 자신의 생각에 더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아주마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높은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리, 리용환이라고 합네다, 동지!”
“용환이라... 이 아주마이에게도 비슷한 이름을 가진 아들이 하나 있단다. 실은 지금도 그 아들을 보러 가는 길이란다.”
“그, 그렇습네까? 동지의 아드님은 필시 높은 직위에서 경애하는 공화국 최고지도자, 총서기 동지를 보필하시는 간부이신 듯 합네다! 저 같은 일개 인민이 동지의 금덩이 같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게 하는 거는 아인지...”
“높은 직위라... 그거는 기렇지. 내 아들도 어렸을 때는 느처럼 때 묻지 않은 면이 있었는데... 아무튼 아가, 이건 선물이니 이거 먹고 열심히 공부해서 공화국에 보탬이 되는 일꾼이 되길 바란다. 너는 내 아들하고 이름도 꼭 비슷하니 장성하면 큰 일을 할 것도 비슷할 기야.”
그 말을 하면서 여느 동네 아주머니가 하듯 김명애는 저고리 자락에서 사탕 몇 개를 꺼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용환의 손아귀에 쥐어주었다.
하루 종일 막일을 해 지저분한 용환의 손과 나이를 실감할 수 없게 고운 김명애의 손이 한순간 겹쳐지자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인 남성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내놓지 않았다.
눈앞의 여인은 흔하디 흔한 평양의 중년 아주마이가 아니라, 현 공화국 최고 존엄의 생모인 것이다.
대체 그녀가 무슨 변덕으로 이런 돌발행동을 하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아들’에게 하는 지나가는 투정 한마디로 자신들 전원의 목을 날려버릴 수 있는 신분이라는 것은 그들, 특별호위국 요원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 이 아주마이 동지는 그만 가보마. 차에서 며느릿감이 기다리고 있고, 오랜만에 아들 면을 보고 싶어서 말이야. 너도 잘 있거라. 용환아.”
“.......저....!! 저....!! 저기... 아주마이!”
잠시 김명애가 손에 쥐어준 사탕을 만지작거리던 용환은 등을 돌려 차로 걸어가던 김명애를 소리쳐 붙잡았다.
그녀를 뒤따라가던 호위국 요원이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용환의 절박한 목소리에 김명애는 발걸음을 멈췄다.
“와이 그러니, 아가?”
“즈어기... 저...”
용환은 바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에서 말을 우물거렸다.
아직 열여섯에 불과한 용환에게도 지금 떠오른 생각이 얼마나 무례한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눈앞의 아주마이는 자신이 이제까지 평양에서 배달 일을 하면서 다시 마주치는 게 영영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절박함과 그 나잇대만이 가질 수 있는 치기와 이기심, 설익은 욕심이 합쳐져 용환은 마침내 생각하던 말을 내뱉었다.
“저, 저기, 호, 혹시 사탕 말고 돈으로 주시면 안 되겠습네까? 다, 달러화로 말입네다. 집에 가면 아바이와 오마니가 주린 배를 하고 기다리고 계셔서...”
짝----!!!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용환의 눈앞에 불이 번쩍했다.
옆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채로 듣고 있던 호위국 요원이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올려붙인 것이다.
공화국 평균 체중을 한참 초과하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 휘두른 따귀에 그대로 나가떨어진 용환은 바닥을 구르느라 차에서 제3의 인물이 내려 자신들 쪽으로 급하게 걸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쓰러진 용환에게 호위국 요원은 함경도 산골짜기의 성난 불곰처럼 이를 갈아붙였다.
“이 은혜도 모르는 정신 나간 아새끼가... 지금 이 동지가 뉘신 줄 알고 불경스럽게 아가리질이간! 최고지도자 동지께서 직접 하달하신 과업 수행을 늦춘 것만으로도 이미 혁명화 교육을 당해 마땅함을 직접 맛 봐야 알갔...”
“그만 하세요. 동무, 이 간단한 일에 왜 이리 늦어지나 해서 와 봤더니...”
“하, 하지만 소좌 동지...”
“.....그리고 내가 알기로 총서기께서 얼마 전에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학생 동무들에게는 살인 같은 중범죄를 제외하고는 어떤 식으로든 혁명화 교육을 금지시키지 않으셨나요? 동무는 내가 총서기께 직접 청을 올려야 그만 할 참이시오?”
“아, 아닙네다! 유혜림 소좌 동지! 저희가 어찌....”
비몽사몽간에도 용환은 자신에게 따귀를 갈긴 ‘불곰’이 갑자기 나타난 웬 여성에게 쩔쩔 매며 경례를 붙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여성은 방금 전 ‘김명애’라고 불린 아주마이보다 30살 쯤 어려보이는 젊고 얼굴이 새하얀 처자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곰’을 포함해 양장 사내들은 김명애보다 오히려 그녀를 더욱 어려워하는 듯 했다.
“이런 일을 겪게 해드려서 죄송합네다, 김명애 동지. 여기 일은 제가 잘 처리할 테니 어서 차에 오르시지요.”
“아니요, 유 소좌. 항상 우리 정환이를 옆에서 보살펴주는 데 소좌 동무가 뭐이 죄송할 게 있갔소? 그저 요즘 공화국이 변해간다고 들었는데 저 어린 동무도 그렇고 인민들도 그에 맞춰서 변해가는 것 뿐 이지 않갔소.”
약간 씁쓸하다는 듯이 김명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버르적거리는 용환을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조금 비틀거리는 용환의 옷에 묻은 흙까지 털어준 그녀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유 소좌라는 여자에게서 건네받은 십 달러 지폐 몇 장을 용환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가, 아니 동무. 이 아주마이가 그저 배운 것 없고 요즘 공화국 물정에 어두워서 동무가 대신 변을 당했소. 내가 참 눈치도 없이 한창 배고플 나이의 어린 동무가 저 미제 식당에서 한 끼 하고 싶어하는 줄 모르고... 이 달러는 그 사죄의 뜻이니 먹고 싶은 걸 양껏 먹어보기를 바라갔소. 하기야 정환이도 오직 인민들을 잘 먹이고 입히는 것이 앞으로 당과 공화국이 살 길이라고 했으니....기럼 만나서 반가웠소.”
그렇게 중얼거리던 김명애는 여전히 달러를 쥐고 멍해있는 용환을 내버려두고 유혜림과 함께 차로 걸어갔다.
검은 양장 사내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 타는 두 여성이 소근소근 나누는 대화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 용환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식사는 어떠셨습네까, 김명애 동지?”
“...글쎄... 나는 나이를 먹어서인지 도무지 뭐가 맛 난다는 건지 모르갔소. 역시 내 입맛에는 조선 음식이 제일인 거 같네, 유 소좌.”
“하아. 아마 총서기께서도 그 정도는 미리 짐작하셨을 겁네다. 서두르시죠. 이게 눅눅해지기 전에 가지고 오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하셨으니.”
그리고 그들은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며 차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용환은 잠시 아직도 얼얼한 뺨을 쓰다듬으며 그 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손에 여전히 달러가 쥐어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등을 돌려 맥도날드로 달려가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줄은 꽤 길었지만 (방금 전 소동에서 김명애와 유혜림을 알아본) 평양 공민들이 괜히 불똥이라도 튈까 현장에서 멀리 이동한 덕에 용환은 지체 없이 맥도날드에 입장할 수 있었다.
“여, 여기서 요리 주문하는 거입니까?”
“네, 그렇습네다. 동무, 아니, 손님. ............흐음,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용환과 비슷한 손님을 여러 번 맞아본 듯 ‘훤히 보이네’하는 표정을 한 맥도날드 평양점 점원은 흙먼지로 더럽혀진 용환의 옷을 위아래로 ㅤㅎㅜㄼ어 보았다.
생전 처음 본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불이 번쩍번쩍하고 따뜻한 유채색조 실내 장식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꼴이 척 봐도 처음 평양 구경을 온 지방 뜨내기가 분명했다.
공화국 부유층이 모여 산다는 평양에서도 이런 얼빤이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외국 다녀온 경험으로 금방 익숙해져서 여타 자본주의 인민처럼 능숙하게 행세하고는 했는데... 용환의 손에 달러가 쥐어져 있는 게 보이지 않았다면 즉시 보안원을 불러 내쫓았을 것이다.
하지만 용환은 생전 처음 보는 미합중국 요릿집을 구경하느라 이런 종업원의 멸시하는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 여기서 제일 맛있고 인민들이 많이 주문하는 거이 뭡네까?”
“.........빅맥.... 세트 입네다. 손님.”
우여곡절 끝에 용환은 빅맥과 감자튀김, 콜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더듬더듬 햄버거를 감싼 종이 포장을 벗긴 그는 뭔가 요상하게 생긴 형태의 빅맥을 앞에 놔두고 잠시 관찰하듯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을 한 듯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케첩과 마요네즈, 치즈, 고기 패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금과 조미료의 맛이 혼합된 풍미가 그의 코와 입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
‘자본주의의 맛’은 처음에는 낯설었다.
하지만 이내 전세계 사람들 절반 이상의 입맛에 맞게 오랜 세월에 걸쳐 보완된(특히 용환 나이대의 청소년은 더욱 환장하는) 달고 짠 맛이 점차 뇌를 장악하면서, 용환은 이내 자신도 모르게 두 입, 세 입을 베어 물었다.
우걱우걱우걱....
이내 게눈 감추듯 버거를 먹어버린 용환은 이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이미 버거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 때서야 취식, 아니 흡입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긴 용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말없는 시선의 존재감을 눈치채고 이내 생애 처음 맛보는 어떤 낯선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의 이름은 바로 부끄러움, 혹은 열등감이었다.
“........쯧쯧, 저런 꽃제비가 이런 고급 요릿집에 어떻게 들어왔더래? 달러는 고사하고 공화국 돈도 없게 생겼구만...”
“어디서 외국 손님 구두라도 닦아주다가 훔친 거 아니간? 거 요즘 여행허가표가 없어져서 지방에서 평양 냄새라도 맡아보려고 촌놈들이 상경한다더니...”
“오라버니, 이거이 좀 더 일찍 왔어야 했시오. 간만에 평양에서 눈치 안 보고 달러 쓸 기회가 와서 좋아했더니.. 벌써부터 이 지경인데 내년도부터는 온갖 거러지들이 평양 공민 흉내 내어 보겠다고 올라올 텐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좀더 격식 있는 요릿집으로, 당 중앙의 김용건 부장 동지께서도 가끔 행차하신다는 그 째포가 한다는 일본 요릿집으로 갑세다.”
여기저기서 숨죽인 채로 들려오는 그 비웃음들에 용환은 어린 마음에도 얼굴이 벌게졌다.
정환의 총서기 취임 이전부터 조금씩,(취임 이후로는 거의 대놓고) 가장 빠르게 자본주의화와 그로 인하여 유발된 보이지 않는 계층분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공화국의 수도, 평양의 실체였다.
용환의 주변에는 어른들 뿐만 아니라 당 간부들의 자녀들, 즉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청소년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차림새는 땟국물이 흐르는 용환과는 다르게 깔끔하고 나름의 최신 유행 패션이라 부를만한 것까지 장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년소녀들은 어른, 자신들의 부모와는 다르게 그러한 조롱조를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 듯 했다.
‘......내가 정말로 더러운가? 여기 발을 들이면 안 되는 거였나?’
그러고 보니 아까의 종업원도 왠지 모르게 자신이 한 꼴을 비웃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린 용환의 가슴에 가장 큰 트라우마를 남긴 건, 자신 주위의 다른 손님들이 자신이 보기에도 (당시 기준) 매우 격식 있고 세련되어 보였다는 것이다.
거기까지 인식하자 조금 전 집도 절도 없는 꽃제비처럼 고기겹빵, 아니 햄버거를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치운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평양에서는 돈이 참말로 왕이고 당중앙이고, 총서기로구나.’
그리고 앞으로는 전 공화국이 이 평양처럼 변하게 될 것이라는 건 어린 용환으로서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수치심은 자격지심으로, 자격지심은 울분으로, 그리고 울분은 어떤 결심이 변해서 그날 열여섯 리용환의 앞으로의 인생항로를 결정해버렸다.
용환은 이제 점점 고층 빌딩이 하나씩 들어서고 도로를 내고 지하철 노선을 확장하느라 어두워질 새가 없는 평양의 야경을 맥도날드 창밖으로 조용히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 치욕을 갚아주겠다고.
누구보다 많은 돈을, 공화국 원이든, 엔이든, 달러든 돈을 긁어모아 지금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비웃는 저 간나새끼들의 아가리를 조가비처럼 영영 꽉 다물게 만들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돈이 된다면 용환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평양의 첫 맥도날드 지점에서는 일자리와 부를 찾아 계획특구로 상경한 많은 북조선 인민들이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또 하나의 자본주의 괴물이 탄생하게 되었다.
“크으, 역시 이 맛이야. 수고했어. 유 소좌.”
“.........김명애 동지를 모셔오라고 하셨던 것은 역시 방편에 불과하셨군요. 총서기 동지.”
“응? 아니 뭐 오늘 일정도 있고, 어머니도 간만에 뵙고 싶었고.... 그리고... 음... ”
뭔가 실망이라는 듯한 유혜림의 책망어린 시선에 정환은 그렇게 얼버무리면서도 다시 그리웠던 맛, 감자 튀김 하나를 집어 케첩을 듬뿍 발라 입에 집어넣었다.
일본에서 망명하는 동안, 그리고 총서기로 취임한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게 됐지만 이 조미료 맛만큼은 흉내 내는 게 불가능했다.
“휴우, 총서기 동지. 고기 겹빵... 아니, 햄버거가 드시고 싶으셨다면 그냥 당사 요리사 동무에게 주문을 하시면....”
“에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 소좌는 알 거 아니야? 이런 건 사다 먹어야 진짜 맛이라고. 어쨌든 참으로 중차대한 과업을 수행했어. 이제 보니 호위국 요원들도 제법 쓸모가 있군 그래. 하하.”
그날 정오, 리용환에게 따귀를 날린 일군의 호위국 요원들이 수행하던 ‘최고지도자 동지께서 직접 하달하신 과업’의 정체는 바로 이것, 빅맥 (라지세트) 배달이었다.
연말을 맞아 정환의 어머니 김명애를 수행하기 위해 호위국 요원들과 나서던 유혜림에게 정환이 던진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 아, 어머니를 모시고 오면서 요번에 평양에 들어온 미국 요릿집.... 맥도날드에 한 번 모시고 가줘. 내가 직접 가고는 싶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부탁하지.
- .......알겠습네다. 그런데 김명애 동지께서는 평소에도 조선 음식을 즐겨 드셔서 과연 입맛에 맞아하실 지는......
- .....그리고 서기실로 돌아올 때 내 것도 사오게. 빅맥이야, 라지 세트로! 유 소좌도 일본에서 맥도날드 몇 번 가봤으니 기억하지?
- .......................
- 감자튀김 안 눅눅해지게 서두르는 거 잊지 마. 뭐하나? 어서 가보지 않고.
‘대학생이었을 때나 연구원에서 죽어라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을 때나 물리게 먹었던 맛이지만.... 이것도 몇 년 만에 먹으니 그야말로 천하일품이군. 이래서 인간의 혀가 제일 간사하다는 말이 나온 건가? 에휴, 총서기가 돼서 이건 좀 불편한데. 나 혼자 털레털레 맥도날드로 걸어 들어갈 수도 없고... 맥도날드 북조선 법인에 맥 딜리버리를 좀 일찍 도입하라고 슬쩍 흘려볼까?’
그날 자신이 내린 지시가 한 인간의 운명을 (또 한 번) 결정했음을 꿈에도 모른 채로 정환은 어린 리용환 못지않은 속도로 빅맥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리고 정환은 (별 일 안 했는데도 뭔가 허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유혜림에게 싱긋 웃었다.
“앞으로도 자주 부탁하지. 그럼 이제 어머니 보러 가자고.”
“.....차후 버거킹이 평양에 들어오면 어떨지 저는 그게 두려울 뿐입네다. 총서기 동지.”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1991년의 마지막 날, 조선 중앙방송, 평양 TV, 조선방송공사 등 북조선의 메이저 미디어 매체들은 신문 방송을 가리지 않고 몇 가지 소식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 1991년, 공화국이 강성대국으로의 큰 도약발전을 이루었던 올 한 해를 보내시며, 총서기 동지께서는 김명애 평양 산업재해 병원 신임 명예 원장 동지를 방문하시고 환자들을 위무하셨습니다. 김명애 신임 원장 동지께서는 이번에 당에서 새롭게 창립한 공화국 상이군인, 장애우 위문 위원회 명예 위원장, 한민족 혁명 신여성 권리 총연맹 명예 총재, 조선 어린이 보호위탁 위원회의 위원장 직을 겸임하시게 되셨습니다.
- 김명애 동지는 총서기 동지께서 ‘최고 존엄과 일면식도 없는’ 자신의 원장 취임식에 몸소 방문해주시고 축사까지 해주신데 대하여, ‘공화국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각박해지는 생활 속 소외당하는 인민이 있음을 전 공화국이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특별히 자신의 의견을 밝히셨습니다. 이 날 자리에는 장성택 조직지도부장 동지, 홍계성 인민군 차수 동지 등 당 행사의 중요도와 규모에 비하여 대단히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당군정 요인들이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제까지 젊었을 적에 통역원으로 잠시 근무한 것 외에는 거의 아무런 당정 경력이 없는 김명애가 (대부분 명예직이지만) 갑자기 수많은 당직을 겸임하게 된 것에 대하여, 그녀와 총서기 정환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물 밑으로 많은 추측이 오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공보실에서는 그러한 소문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헛소문일 뿐’이라며 논란을 일축했으며, 반부패수사국장 김영일은 ‘최고 존엄에 대한 유언비어 유포와 사회 기강 저하 시도에는 어떤 자비도 없다’라는 방침을 밝혀 그러한 루머들은 나타날 때처럼 금새 사라졌다.
그렇게 공화국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었던 다음 십년의 첫해, 1991년은 발전과 퇴조, 상승과 하락, 부에 대한 욕망과 꿈이 뒤엉킨 도시 평양에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