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장. 3일 천하의 끝, 30년 천하의 불씨 (3) >
30장. 3일 천하의 끝, 30년 천하의 불씨 (3)
“옐친이다!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다!”
“옐친! 옐친! 보리스!”
포탑 위의 남자를 알아본 모스크바 시민들은 하나 둘씩 그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고, 외침은 점점 거세지더니 이내 하나의 거대한 파도로 변하여 의사당 앞 광장을 온통 휩쓸기 시작했다.
구름처럼 운집한 군중들의 환호성에 힘입은 듯 큰 체구의 남자, 보리스 옐친은 더욱 더 큰 목소리로 쿠데타에 대항할 것을 시민들에게 역설했다.
“우리는 보수파들이 동원한 힘에 의한 조치들이 그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오! 이러한 것들 모두가 우리에게 이른바 저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비상대책위원회'의 권위라는 것이 이렇듯 불법적인 것임을 밝혀주는 셈이오!!”
“맞다! 옐친의 말이 옳다!”
“비상대책위원회는 꺼져라! 우리는 소련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고로 우리는 이렇듯 쿠데타 세력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법적인 '위원회'의 모든 결정들과 지시사항들을 규탄해야 할 것이오!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이 나라의 대통령 고르바초프께서는 지금 우리 러시아인들 및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구성원들에게 말 할 기회를 주셨다는 점이 중요하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어디 있습니까? 그의 행방을 압니까?”
“오늘 지금 그분은 쿠데타 세력들에 의해 어딘가에 연금되신 상태로 보이오. 쿠데타 세력들이 그분과의 연락을 방해했소! 그렇기에 우리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인민 대표자 임시 회의를 즉시 개최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오!”
연설이 점점 정점으로 치달아 감에 따라 광장에 모인 군중들의 흥분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감이, 답답하고 빈곤했던 소련 시절에 대한 혐오가 끓는 물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그들을 막아야 할 군인들은 사실상 우왕좌왕할 뿐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쿠데타 세력의 군사력 중 주축을 이루던 기갑사단의 대대 중 하나는 크렘린 보호라는 임무를 팽개치고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즉 옐친)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였다.
옐친의 연설은 이미 국영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가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저녁 식탁에 앉아있는 러시아 국민들에게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동포들이 저렇듯 부끄러움과 양심을 모조리 상실한 극우 수구 세력 쿠데타 주모자들의 횡포와 무법함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바이오! 인민 여러분! 이러한 요구사항들이 관철될 때까지, 우리는 저자, 소위 국가비상대책위원회라는 자들에 대한 전 세계 시민들의 무한한 공격을 호소할 것입니다!”
“와아아아아!!! 소련 만세! 러시아 만세!”
“국가비상대책위는 물러가라! 야나예프 부통령도 물러가라!”
“옐친 만세! 고르바초프를 돌려 달라!”
그리고 이 시점부터 쿠데타 세력의 패배는 사실상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옐친의 뜨거운 연설에 상황을 관망하던 모스크바 시민들조차 거리로 물밀 듯이 밀려나왔고 전구적으로 파업이 시작되었다.
후일 역사로 기록될 옐친의 ‘전차 위의 연설‘ 이후 단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시위 인파는 무려 50만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의 중심이 된 국회의사당은 점거되었고 임시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바리케이드가 형성되지 않은 곳은 시민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인간 벽을 만들어 공수부대가 중심이 된 쿠데타 군에 저항했다.
쿠데타 군의 산발적인 진입시도로 몇 명이 죽고 다쳤지만 이는 오히려 시민들의 저항 열기에 불을 질러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었다.
“사람이 죽었다! 저놈들, 반란군들이 시민을 공격했다!”
“아니오! 진정하시오! 시민 여러분! 저 사람이 혼자 전차에 올라가려다가 발을 헛디뎌서 죽은 것....”
“그게 네놈들이 죽인 거나 다름없지, 이 살인자들아! 인민을 수호한다는 인민군대가 쿠데타에 협조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여기가 중국 천안문인 줄 알아?”
예상보다 훨씬 강한 시민들의 저항에 쿠데타 세력은 상황통제능력을 바로 상실했다.
야간에는 통금령이 내려졌지만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쿠데타 세력, 보수파들이 마주친 난관은 자국 내부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었는데,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조지아, 리투아니아는 쿠데타 세력에 가담하길 거부했고 여론을 관찰하던 일본은 쿠데타 세력을 비난하며 경제제재를 가했다.
다급해진 보수파들은 결국 자신들의 고르바초프 병환설이 거짓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고르바초프의 위치를 밝혔지만 이미 쿠데타에 참여했던 군부대 일부에 해외 주재 소련 외교관들까지 권력의 풍향이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눈치 채고 옐친에게 지지선언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시위 인원이 100만에 다다르자, 국가비상대책위 위원들, 쿠데타를 일으킨 소련 보수파들은 공항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8월 22일 아침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연금된 지 40시간 만에 공항으로 귀환했다.
“나는 쿠데타 주모자들에게 굴하지 않고 사태에 의연하게 대처해 온 국민에게 그리고 끝까지 정부를 믿고 따른데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주모자들은 불법적으로 병력을 동원해 나의 거처를 포위하고 나와 가족을 위협했으며 나의 의지를 꺾으려 했지만 결국 그들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페레스트로이카의 승리였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말은 틀렸다.
이 3일 천하가 종료되었을 때, 진정한 승리자는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보리스 옐친이라는 것을 러시아 국민들, 그리고 전세계 모두와 옐친 그 자신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반(反) 쿠데타 세력의 선봉장으로서 민주주의와 개혁의 기수로 떠오른 옐친은 현재 러시아 전 국민의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 보리스 옐친 대통령, 쿠데타에서 탄생한 새로운 영웅!
- 미국, 유럽, 일본 등 전세계, 옐친의 용기와 결단력에 찬사를 보내다. 차후 러시아를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자.
- 고르바초프, 급부상한 옐친과의 권력 구도에서 약세, 레짐 체인지 가까워지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연합국으로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가 눈앞에 다가온 것은 누가 봐도 기정사실이었다.
한 때 무시무시한 악명을 자랑했던 KGB의 사무실에는 (그동안 쌓인 러시아 국민들의 감정을 한껏 담은) 화염병과 돌 무더기가 날아들었고 소련 공산당 간부들은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살해 위협까지 당하는 형편이었다.
이제는 ‘소비에트 연방‘이 아닌,’러시아 연방‘의 출현이 다가왔으며 그 지도자는 이번 사태의 최대 수혜자, 보리스 옐친이 될 것임이 자명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까지 영웅 보리스 옐친이 소련에, 아니 이제 러시아연방이 된 국가에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 전혀 짐작을 못하고 있었다.
뿐 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의 숨통에 종지부를 찍은 이 ‘8월 쿠데타’로 인하여 커다란 수혜를 본 또 다른 사람이 있음은 역시도 세인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었다.
“러시아도 아니고 우크라이나였단 말이지. ......그러니까 결국은 북한의 그 젊은 지도자가 제공해준 정보가 다 맞았던 거군.”
조지 부시는 경악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도저히 믿기 힘든 현실이었지만 뒤늦게 움직인 중앙정보국에서 사실 확인까지 해주었으니 이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각료들까지 안 믿을 도리가 없었다.
미국 대통령 집무실, 오벌 오피스(Oval Office)에 집결한 다른 각료들,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이나 콜린 파월 합참의장 등 다른 모든 사람들도 경악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입을 굳게 다물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의 딕 체니 국방장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는 몰라도, 여러분, 이제 우리 합중국의 귀중한 친구가 된 북한 총서기는 우리의 예상과 기대보다 훨씬,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던 게 틀림없소. 쿠데타 발생 시각과 그가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해준 시각을 생각해보면 소련의 모든 내부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받고 있었다는 건데... 아주 고위층에 첩자를 심어뒀다는 이야기인가?”
“저도 아직 얼떨떨합니다, 각하. 그가 이번에 보여준 정보능력에 대한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추측은 자신과 함께 이복 형 김정일을 몰아내는데 가담한 KGB 출신자들을 잘 규합시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건데... 이 정도면 청출어람이라 해야겠군요.”
“그 정도가 아닐세, 이 정도면 우리 중앙정보국 요원들을 북한으로 유학 보내고 싶을 정도군. 아니, 중앙정보국 뿐만 아니라 국방정보본부(DIA), 국가정찰국(NRO), 국가안보국(NSA), 그리고 그밖에 알파벳 세 글자 쓰는 그 많은 정보공동체들 다! 한 해에 십 수억 달러씩 예산을 쓰면서도 자기들 예산의 십 분지 일도 안 되는 북한 첩보기관의 반의반도 못해 내다니, 납세자들의 세금이 다 어디로 가는지, 나 원!”
‘지난번 만났을 때 철인 운운해서 철모르는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잘못 본 걸지도 모르겠군.’
부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개인적으로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한 어조로 짜증스레 중얼거렸고 각료들은 전원 유구무언이 되어 다른 곳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특히나 부시의 비난에 대해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국방장관 딕 체니는 무뚝뚝한 얼굴에 박힌 눈을 안경 뒤로 번쩍 빛내며 표정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상황의 긍정적인 면을 봐야겠지. 중요한 건, 이처럼 확실한 대러 정보원을 얻었다는 건 미국의 안보 상황에 있어서 큰 진전이라는 걸세. 소련이야 곧 산산조각 나겠지만, 그 뒤에 남을 러시아가 장거리 대륙간 탄도탄과 핵탄두를 수천 개 보유하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이 능력 좋은 친구가 우리 편이라 다행이군. 조지 그 철부지가 야구 그만하고 이 친구 반이라도 닮는다면 참 좋을 텐데.”
“...........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각하.”
“앞으로 우리 동북아시아 대외정책에도 변화가 있어야겠군. 남한이나 북한이나 외교적으로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대하겠다는 말일세. 어쩌면 일본 수준으로 관계를 격상해야 할지도 모르지. 다행이 그쪽은 우리가 원하는 게 있고, 우리도 그쪽이 원하는 게 있으니 관계를 개선시켜 나가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 걸세. 전화 연결하게.”
곧 국제전화가 연결되고 워싱턴 오벌 오피스에 앉아있는 부시는 반대편 대륙의 김정환에게 전화상으로 따뜻한 감사인사를 건네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무사히 돌아와 참으로 다행입니다, 부시 대통령님, 이제는 3차 대전의 위협에 전세계가 더는 떨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리고 그러한 평화체제 구축에 김 총서기님이 참으로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국의 우방국 지도자로서, 그리고 유엔 회원국 수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김 총서기님. 이러한 비공식적이면서도 자발적인 협력에 다시 한 번 매우 감사드립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상대로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도움이라 더 감사하다는 걸 부인할 수 없겠군요. 저희 미합중국도 앞으로 북조선과 과거사가 아닌 미래에 대해 더 깊은 대화를 진전시켜 나가고 싶습니다. 차후 공동의 미래에 제가 기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시의 이 질문은 외교적 수사를 가미해 돌려 말했지만 사실상 이런 뜻이었다.
- 묻지도 않았는데 별로 친하지도 않은 우리에게 정보 줘서 고맙다. 당연히 공짜 아닌 거 아니까 이제 가격을 말해라. 원하는 게 뭐냐?
“.........”
태평양 반대편, 평양에서 부시의 이 질문을 들은 정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질문에 담긴 뜻이 뭔지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받아내고 싶은 거야 당연히 많았다.
아직 그의 나라, 북조선에는 부족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 만큼 수많은 애로사항과 요구가 정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김일성대학교와 스탠퍼드 대학교 사이의 자매결연을 추진할까?
아니면 유엔 개발협력위원회로부터 차관 규모를 늘릴 수 있도록 협력해달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일본 기업 인수전에서 소니와 도시바를 인수하게 도와달라고 할까?
어느 것을 요구하든 지금은 어렵지 않게 받아낼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정환은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감사합니다만 지금으로서는 호의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님.”
“....정말이십니까?”
“하하... 그렇습니다. 저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계 평화에 기여했는데 어떻게 대가 따위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미합중국과 부시 대통령님께 보내는 제 대가없는 호의라고 생각해주시죠.”
스피커 너머로 그 말을 들은 조지 부시는 표정을 복잡하게 일그러트렸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대가 없는 호의 역시 없다.
특히나 국가 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순수한 선의라는 건 거의 유니콘만큼이나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부시는 정환이라는 인간이 진짜로 세계평화와 팍스 아메리카나의 도래를 위해서 자신들에게 정보를 제공했으리라고는 손톱만큼도 믿지 않았다.
그는 언제고 이 도움에 대한 값을 받아낼 것이다.
단지 지금은 그 청구서에 가격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일 뿐이다.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양국 관계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이러한 종류의 협력이 자주 이루어진다면 좋겠습니다. 미합중국은 절대로 친구를 잊지 않습니다, 총서기님.”
“저 역시 환영입니다, 대통령님. 앞으로의 조-미 관계에 발전과 번영만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한편, 소련에서 벌어진 8월 쿠데타의 수혜자는 옐친과 정환 말고도 또 있었다.
평양에서 수 백 킬로미터 떨어진 베이징의 한 건물에서는 일군의 권력자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자 뉴욕타임스요, 동지들. 아무래도 이제 ‘소비에트 동지’들은 일주일만 지나도 더는 이 세상에 존재 안 할 것 같군.”
한숨을 쉬는 듯한 목소리가 탁 내려놓은 신문의 1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 직 사임.
-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 확실시, 올해 안에 소련 해체 가시화.
“이게 바로 개혁개방의 결과요, 동지들. 사회주의를 버리고 지나친 개혁개방에 몰두한 결과, 인민 생활은 피폐해지고 무질서가 판치며 ‘진정한 애국자들’은 나라에서 개처럼 추방당하는 꼴이 된 거지. 그런 꼴이 이 중국에도 벌어지는 것을 보고 싶은 동지가 혹시 있소?”
목소리의 주인, 중국 국가주석 양상쿤은 방에 가득 들어찬 일군의 무리를 ㅤㅎㅜㄼ어보며 그렇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