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장. 3일 천하의 끝, 30년 천하의 불씨 (2) >
30장. 3일 천하의 끝, 30년 천하의 불씨 (2)
“......북한 지도자? 그 김정환인가 소련출신 장교들과 친하다는 젊은 친구 말인가? 그 친구가 왜....”
“스피커폰으로 돌리게. 여기서 각료들과 함께 듣지.”
안색을 찌푸리며 이건 또 뭐냐는 듯한 태도로 짜증스럽게 반문하는 딕 체니와 달리, 부시는 즉각 관심을 보이며 지시를 내렸다.
신속하다 못해 좀 성급해 보이는 부시의 결정에 딕 체니는 살짝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내심을 숨기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각하, 각하의 국방장관으로서 우려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정보의 신뢰성은 둘째치고서라도, 북한의 첩보능력을 고려할 때, 이런 급박한 시국에 각화와 저희 국무회의 각료들 전원이 회의 시간을 할애해가면서까지 들어야할 고급 정보를 북한 지도자가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
“그건 들어봐야 아는 일이지. 자네 입으로 북한 총서기와 그 정권 관계자들이 소련과 친하니 경계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지금 소련 내부 사정에 대해 우리보다 더 알고 있는 게 있을 수 있지. 무엇보다, 지금 내가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보유한 곳이 우리 중앙정보국을 포함해서 거의 없지 않나!”
“...............”
부시의 의지가 확고하자 딕 체니는 여전히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지금은 물러날 때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스피커폰이 연결되면서 테이블의 모든 사람이 입을 닫고 귀를 기울였다.
과연 북한의 젊은 지도자는 첫 (비공식) 정보협력에서 쓸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
그리고 과연 부시 대통령은 우방이 된지 고작 반년도 안 된 국가에서 제공한 정보를 믿을 것인가?
이런 각료들의 기대와 불안이 섞인 시선을 받으며 지구 반대편으로 연결된 스피커폰에서는 곧 젊은 남성의 유창한 영어가 들려왔다.
“지난 평양 방문 이후 오랜만입니다. 부시 대통령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 하군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김 총서기. 저와 각료들도 휴가를 중단하고 지금 백악관에 앉아있는 형편입니다. 듣자하니 이번 소련의 쿠데타에 대해서 저희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정보가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 친구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의도가 뭘까? 분명히 바라는 게 있어서일 테지, ODA 규모를 늘려달라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앞으로 소련이 아니라 우리와 잘 해보고 싶다는 제스처 일수도 있겠지만, 그건 일단 이 정보를 들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 저쪽에서 어떤 대가를 요구하더라도 미국은 충분히 지불할 수 있으니까.’
부시가 그렇게 생각하며 인사치레를 생략하고 바로 용건으로 넘어가자 서기실에 앉아 전화를 하는 정환 역시 그에 부응하듯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습니다. 지금 쿠데타는 야조에프 부통령을 필두로 소련 유지존속을 바라는 보수파들이 일으킨 것일 텐데, 지금 그에 대해 미국이 외교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고민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흠, 솔직히 털어놓자면 그렇습니다. 지금 모스크바와 크렘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무사한지 모든 게 암흑 속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보수파들의 쿠데타는 실패할 겁니다. 그러니 저는 대통령 님께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지지하고 쿠데타 세력의 반대편에서 성명을 발표하라고 조언해드리고 싶군요.”
스피커폰을 통해 들려온 정환의 말은 테이블에 작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콜린 파월을 비롯한 일부 각료들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심 안심하는 듯 했지만, 딕 체니를 필두로 한 상당수의 각료들은 냉랭한 코웃음을 치면서 대놓고 불신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어찌 됐건, 부시는 여전히 긍정적인 반응도 부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고 다시 반문했다.
“김 총서기께서 그런 판단을 내리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나라 정보기관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대외정찰총국은 대(對) 소련 첩보망에 있어서 최고의 능력을 자랑합니다. 소련에서 공작 중인 저희 요원들, 정보원들의 보고를 종합한 결과, 쿠데타에 대한 모스크바 시민들의 반응이 부정적이라고 공통적으로 예상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머지않아 민중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힐 거라고 확신합니다.”
“.....죄송합니다만 김 총서기님, 어떤 민중봉기든 구심점이 될 만한 정치 지도자가 없으면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특히 소련 같은 나라에서는 더더욱이요.”
냉소가 서려있는 이번 목소리의 주인공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었듯이 국방장관 딕 체니였다.
상관의 대화에 끼어든 격이었지만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할 말을 대신해준다고 생각했는지 부시는 체니가 계속해서 정환과 대화하도록 놔두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사실 지도자가 있어도 성공하기 힘듭니다. 보수파들은 이미 상당한 군 부대의 지휘권을 회유한 게 분명하고 민중 봉기에 무력 진압을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전 모스크바가 피로 물들 겁니다. 중국 천안문에서처럼 말이죠. 공산주의자들이란 입으로는 인민을 외쳐대면서 자기들의 그 인민을 학살하는 데는 어떤 망설임도 없는 자들이니. 김 총서기님의 열의는 감사하지만 이번 사태는 저희 미국이 국제사회의 경찰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에 나서는 것이....”
“정치 지도자는 있습니다. 두 달 전 당선된 현 러시아 연방공화국 대통령 옐친이죠. 쿠데타 세력이 포섭하는데 실패한 거 같지만 그게 그들의 결정적인 실수가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뭐라고요?”
정환의 단언적인 어조에 이번만큼은 딕 체니도 예상하지 못한 듯 얼굴이 굳어졌다.
그 뿐만 아니라, 부시를 포함해서 국무회의 석상의 모든 관료들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부시가 다시 급하게 끼어들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살아있단 말씀입니까? 그리고 보리스 옐친이 억류되지 않았다고요? 저희가 그 정보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원하신다면 고르바초프 서기장 동지가 억류되어 있는 장소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우크라이나 포로스에 위치한 별장에 연금되어 있습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세한 정보로군요. 출처도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희 대외정찰총국의 소련 정보망 중 하나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믿으실 지는 몰라도 장담하는데 대(對) 소련 첩보에 대해서만큼은 미국 중앙정보국보다 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 조선로동당 간부들 중에는 소련 고위층과 가까운 끈이 있는 친구들이 아주 많거든요, 뭐 이건 딕 체니 국방장관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정환의 말 끝 부분에는 약간의 비아냥을 담겨있었지만 이미 부시를 포함해 국무회의 각료들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고르바초프가 살아있다, 그리고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은 옐친도 여전히 억류되지 않고 행동의 자유를 보장 받고 있다.
정보 출처가 확실하지 않다는 게 최대의 문제였지만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전(前) CIA 국장으로서 불확실한 정보만을 가지고 결단을 내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도 결단을 내렸다.
“베이커 국무장관, 성명문을 준비하지. 내용은 쿠데타 세력의 헌법 유린과 자유 파괴에 대한 비난으로 하는 게 좋겠군.”
“각하, 김 총서기님을 못 믿는다는 건 아니지만,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딕, 자네가 강인한 모습을 보이라고 했지. 이게 내 선택일세. 우리 미합중국은 총을 뽑아들기 전에 그 무엇보다 원리원칙과 대의명분을 우선시하는 나라라는 메시지를 전세계에 보내자는 것. 난 이미 결정을 내렸네.”
“......!! 그러시다면 각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딕 체니는 이미 부시의 마음이 굳어졌음을 알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바다 건너편에서 듣고 있던 정환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신속한 태세전환이었지만, 정환이 이 자리에서 딕 체니의 표정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면, 그가 여전히 다음 기회를 벼르고 있음을 바로 눈치 챘을 것이다.
“제가 결단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서기님. 정보의 정확도에 대해서는 저희도 검증을 해봐야하겠지만 그걸 떠나서 북조선이 미합중국과의 관계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양국 간에 많은 협력과 공동의 이익을 위한 노력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정환이 서기실 책상 전화에 수화기를 내려놓자 옆에서 듣고 있던 비서, 유혜림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정환에게 물었다.
“.....미제 대통령이 뭐라고 합네까?”
“도와줘서 고맙다, 확인해보겠다고 하더군. 하지만 이미 결단을 내렸어. 미국은 쿠데타 반대편에 설 거야.”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저쪽에서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군요.”
“내 정보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 하지만 그것도 곧 시간문제야. 3일만 지나면 내 말이 전부 맞았다는 게 드러날 테니까.”
자신만만한 정환의 말에 유혜림은 긴가민가하면서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자신이 알아온 이 남자는 절대로 허황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 사람이 저런 표정으로 장담하는 일은 이제까지 모두 성공해왔다, 그게 아무리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그게 그동안 정환이라는 존재에게 헌신하기로 결정한 유혜림이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총서기 동지.”
“뭔데, 유 소좌?”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대외정찰총국이 쏘련에 고정 간첩들을 그렇게 많이 심어놓았습니까? 고르바초프 동지가 연금되어 있는 별장까지 하루 만에 알아낼 정도라면 가히 모르는 게 없는 거 아닐까요? 리종수 동지가 국장에 취임하신지 고작 한 달이 안 됐는데 어떻게 이런 위업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응?”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질문하는 유혜림에게 정환은 피식 웃었다.
프룬제 출신이자 소련 유학파인 유혜림 입장에서는 공산주의 진영의 좌장 국가이자 (물론 말로는 표현 못 했지만) 내심 수령님, 장군님보다 윗줄에 있다고 여겨지는 북조선의 상국(上國)이나 다름없는 쏘련의 내정을 정환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는 것이 신기한 게 당연했다.
게다가 소련의 방첩기관인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KGB가 얼마나 철저하고 물불가리지 않는 조직인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데, 대체 어느 사이에 그들의 눈을 피해 이런 해외 정보망을 형성했는지 총서기의 끝없는 능력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혜림은 정환의 엄청난 능력에 대한 감탄하면서도 내심 자신이 그래도 일본에서 유학을 빙자한 망명을 할 때부터 정환을 모셔온 최측근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자신이 이런 조직의 존재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서운함을 느끼기 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외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혜림에게 정환은 슬쩍 비밀을 알려주었다.
“음... 유 소좌, 사실 말이야...”
“네, 총서기 동지?”
“사실은 첩보망 그런 거 없어.”
“......네?”
“.....최소한 지금은, 말이지.”
벙찐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혜림에게 정환은 실망시켜서 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부시(와 딕 체니)에게 정환이 한 말, 대외정찰총국이 심어놓은 소련 첩자로부터 고르바초프의 위치 등 정보를 입수했다는 사실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실제로 정환은 얼마 전 정찰총국장 리종수를 부임시키며 그에게 이제 첩보전의 방향을 다른 방향 특히 중국과 러시아에 집중시키라고 지시를 내렸다.
애초에 리종수처럼 백승철과 함께 프룬제에 유학하면서 소련 내부 사정이나 인적 네트워크를 누구보다 잘 아는 프룬제 출신 장교들을 정찰총국에 대거 기용한 데에는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인맥만 믿은 건 당연히 아니었고 피오니 홀딩스가 일본 버블경제 붕괴로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를 예산으로 배정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르바초프의 급격한 개혁개방 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 소련 경제와 인민의 생활수준은 이미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고, 먹고 살 길을 찾는 군 장교들과 고위 당 간부들은 정찰총국의 뇌물 공세에 쉽게 고급 기밀과 정보들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정환이 예상한대로 보리스 옐친이 이번 쿠데타를 계기로 집권하면, 소련, 아니 러시아 경제가 바닥으로 치닫는 속도는 더더욱 빨라질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무슨 신도 아니고, 3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런 만능 첩보망을 구축하냐?’
현 시대, 90년대에서 첩보망이란 아직까지는 인적정보, 이른바 휴민트(Humint)다.
지금부터 시대가 좀 지나면 군사위성이나 전파 감청 등 신호 정보가 대세가 되지만, 현재로서는 전통적으로 외교관으로 위장한 첩보원, 즉 간첩을 보내는 게 정통(?)인데 이런 식의 첩보망은 단기간에 육성이 거의 불가능하다.
불과 3년 전에 총서기에 취임하고 1년 전에 최고지도자가 된 정환이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미래인의 지식이 아니었으면 소련 수뇌부들 중 수뇌부인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를 연금해놓은 장소 같은 건 알 턱이 없는 것이다.
사람, 인적자원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본이나 기술보다 훨씬 육성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분야니까.
‘사실 지금으로서는 이 공화국 전체가 다 그렇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정환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아무리 개혁개방을 하고 국부펀드로 천문학적인 달러를 쌓아놓고 친미 국가로 노선을 전환했다고 해도 아직 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 지표상으로나 세계인들의 인식 상으로나 개발도상국에도 들어갈까 말까하는 처지다.
국가대표기업은커녕 버젓한 컨벤션 센터 하나 없고 대다수의 인민들에게는 투자나 예금 같은 기초적인 시장경체제의 용어와 원리부터 가르쳐야 하는 판이다.
그나마 외국에서 정문영 회장 같은 기업가들을 모셔오고 해외 기업들에게 온갖 혜택을 줘서 경제 개발을 실시하고 있지만 북조선 토종 대기업이나 순수 국산 라디오라도 보려면 10년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사실 그가 지금 이렇게 요구하지도 않은 정보까지 제공해가며 미국에 알랑방귀를 뀌는 것도 결국 미국에 최대한 자신과, 나아가 북조선의 가치를 유지시키기 위함 아니냐 말이다.
“쯧, 앞으로 일거리가 넘쳐나는군. 그나마 이 시간대에서는 일본이 원래보다 좀 더 심각하게 망하는 중이라는 게 그나마 위로이기는 한데.... 문제는 중국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이란 말이지...”
“네? 총서기 동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앞으로 며칠 간은 모스크바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겠어. 미국이 얼마나 성명을 빨리 발표할지 궁금하군.”
“이 쿠데타가 얼마나 오래 갈까요?”
“3일, 어쩌면 더 빠를 수도 있고.”
그리고 바로 그날 정오에 부시는 전세계에 미국의 공식 입장을 천명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실각시킨 행위는 위헌적이며 발전을 저해한다’라는 취지로 요약되는 성명문은 쿠데타를 일으킨 보수파 세력에 대한 비난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여전히 소련 지도자로 인정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와 발맞춰 영국, 독일을 필두로 서유럽 국가들 역시 경제 원조 중단을 시작으로 소련에 대한 대응을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정환이 알고 있는 지식대로였지만, 문제는 중국이었다.
원역사에서는 쿠데타 세력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중국이 보수파의 행동을 옹호하는 듯한 미묘한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 같은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 동지로서, 폭력을 최대한 배제하되 소련 인민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이를 방해하는 외국 세력은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국제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내정 간섭하지 말라... 거기에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 동지라... 한 마디로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은 일이나 신경 쓰라 이 말인데... 대상은 소련이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이고, 말은 외국 세력이지만 실제로는 미국한테 하는 말이로군.”
그날 저녁 발표된 중국 외교부의 성명을 들은 정환의 반응이었다.
지난 번 천안문 참사 때부터 중국 내부 사정이 불안불안하다고 느꼈지만 드디어 그 불안이 표면화되기 시작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시각, 러시아 공화국 국회 의사당 앞에서는 한 남자가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들을 막는 탱크의 포탑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러시아의 시민 여러분, 1991년 8월 18일과 19일 밤, 이 나라의 합법적인 선거에 의해 선출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셨소! 그 분이 왜 해임되어야 했는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는 이렇듯 극우적이고, 수구적이며, 비합법적인 쿠데타와 마주하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