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100화 (100/350)

< 28장. 새로운 계절 >

28장. 새로운 계절

북측이 처음 남북합의 초안에 경제 교류와 상호 재산권 보호에 대한 기본 조항을 넣자고 제의했을 때, 이를 가장 먼저 검토하고 그 제의가 가진 의미를 파악한 사람들은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포함한 경제 관료들이었다.

그리고 신군부 시절부터 만연했고 경제성장에 따라 더욱 깊어진 정경유착 커넥션에 의하여, 극비여야 할 합의문 초안이 근대그룹을 포함한 재벌들의 정보망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리고 군사정부의 폭력이 두려워 이제까지 대놓고 말은 못하고 있었지만, 대통령을 포함한 군사정부 요인들에게 자발적 협조(라고 쓰고 삥 뜯기라고 읽는다)를 강요받았던 재벌들이 마침내 그동안 여기저기 바른 ‘돈 값’에 대한 청구서를 보냈던 것이다.

- 대관(代官) 업무 담당자들, 다 움직여. 회담 참가하고 합의서 만드는 국장급, 차관급, 차관보, 필요하면 장관이나 국무총리 위쪽은 내가 직접 만나지.

-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런데 아무리 북한 가는 길이 뚫려도 저쪽 총서기라는 친구가 바보가 아닐 테니 일정 수준 제한을 걸어놓을 게 뻔합니다. 그런데 저희 성삼그룹이 북에서 사업할 수 있을까요?

- 그러니까 지금부터 발 빠르게 움직여야지. 길 뚫리면 정부에서 근대그룹을 제일 먼저 앞장세워서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어. 서두르게, 저쪽 국민들... 아니, 인민들이군, 하여간 인민들은 소비자권장가격이고 가성비고 아무것도 모르는 자본주의 무지렁이, 한 마디로 무주공산이야. 북쪽 정부가 정말로 우리 상표가 붙은 물건을 제한적으로나마 북쪽 소비자들에게 팔게 허용해준다면 그것보다 더욱 확실한 투자는 없네.

- 미래에 통일이 되거나, 되지 않더라도 우리 브랜드를 저쪽 소비자 머리에 새겨놓자 그 말씀이시군요. 하기야 사람은 써본 거 쓰지, 웬만해서는 잘 안 갈아타는 법이니 말입니다. 특히 전자제품 쪽은 더더욱 그렇구요.

- 북쪽 시장을 선점하면 우리 성삼이 근대를 제치고 이 나라 대표기업 타이틀 따내는 것도 꿈이 아니야. 뭐 하나라도 1등을 해야지, 2등이 무슨 소용 있나? 일본 내수시장 크기 부러워했던 것도 앞으로 10년이면 옛날이야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러한 기업들의 움직임과 함께 유신 시절, 아니 그 이전부터 한국 사회를 지배해왔던 안보 보수의 가치, 반공(反共)이라는 이념은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퇴조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해 한국의 보수라는 정치 진영의 지분 대부분을 가져가게 된 쪽은 재벌 대기업들로 상징되는 성장지상주의, 시장만능주의를 숭상하는 시장 보수들이었다.

물론 그 뒤에는 아직 석유를 통해 자본축적을 이루지 못한 북한을 한국 경제력에 최대한 종속시켜 최종적으로 흡수통일을 이루겠다는 구(舊) 안보 보수들의 묵인 내지는 노선 전환도 포함되어 있기는 했다.

하여튼 이렇게 각자의 꿍꿍이를 속에 품은 채로, 남북은 빠르게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대한뉴스 아나운서는 흥분된 어조로 뉴욕의 유엔 본부에 남북한의 국기가 동시에 게양되며 북한 총서기가 북한에 처음으로 들어올 한국 기업으로 근대 그룹을 지정했으며 석유사업에도 참가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TV앞에 모여 앉은 국민들에게 전했다.

바야흐로 한반도에, 아니 전 세계에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 중 누구도 합의서가 ‘천리마 속도’로 체결된 현 시점에서 북한 지도자 김정환이 가지고 있는 계획과 준비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봐, 김 소좌 동무, 저기 새로 올라가는 건물이 뭐에 쓰는 건물인가?”

“아....! 저거이 이번에 평양에 들어선 호텔입네다. 이제 총서기 동지의 개혁개방이 진행되면서 미제... 아차, 그 미합중국에서 온 자본가들이나 중국 무역상들이 공화국에 공장 들여놓을 부지를 보려고 왔을 때 숙박하는 곳이라고 합네다.”

“허어... 그런데 그런 거 치고는 규모가 꽤 크구만 기래. 외제 자동차들도 벌써 많이 들어와 있는 거 같은데...”

“제가 듣기로는 저 호텔이 당에서 지은 거이 아니라 이번에 일본에서 귀환한 째포... 아차차, 재일 교포 동무들 돈으로 지은 거라고 합네다.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불러 와서리 당에서 장 부장 동지가 직접 영업 허가도 내주시고 해서 나중에는 평양 공민들 대상으로 가라오케주점 장사도 할 거라고 들었습네다.”

“.....거 확실히 요즘 공화국이 뭔가 바뀌어도 많이 바뀌는구만 기래.”

질문한 사람, 리종수는 걸프전에서 귀환한 후 당에서 포상으로 내려준 독일제 메르세데스 벤츠 뒷좌석에 등을 기대고 묘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평양에 가라오케 주점이라니....

사실 문화어로는 ‘화면 음악반주 주점’이었지만 당장 공화국 고위 군관인 자신부터 사석에서는 가라오케 주점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이게 다 일본에서 건너온 자들, 재일 교포들의 영향이었다.

북조선이 개혁개방을 해서 자본주의 국가가 된다는 소문이 점점 퍼지고 일본 부동산 버블이 폭락한 이후 재일교포들은 고향에서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아 북조선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청원을 조총련을 통해 넣었다.

그리고 총서기는 일본에서 벌어들인 자본을 공화국에 최소 천만 엔 이상씩 투자한다는 걸 전제로 영업허가(주로 음식점이었다)와 공민증을 발급해주었다.

일종의 90년대 판 ‘투자이민’인 셈이었다.

- 지금 우리 공화국이 필요한 건 재일교포들, 해외 동포들이 가진 자본 뿐 만이 아닐세. 그들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배우고 익힌 노하우들, 경험들도 필요하지. 투자야 외국에서 받고 기술이야 배워온다지만 자본주의 일꾼을 어디서 쉽게 구해올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아직 민족주의 정서가 남아있던 정치국원 하나가 ‘아무리 돈을 고인다고 해도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배신자’운운 하자 정환이 헛소리 말라는 듯 일축하며 한 말이었다.

확실히 (어디까지나 소비할 외화가 있는 평양 일부 당 간부 자제들에 한해서지만) 벌써부터 최신 유행은 일본에서 돌아온 째포들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재일 교포, 자이니치들은 공화국에 새로운 인적 혁신 요인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암암리에 쓰이던 일본 산 소니 카세트 테이프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하라주쿠나 오모테산도의 패션잡지까지 공화국 여성 동무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 일본에 친척이 있으면 큰 부자. 중국에 친척이 있으면 작은 부자, 공화국에만 친척이 있으면 거렁뱅이.

이런 말까지 벌써부터 당 하급 일꾼들에게서까지 나오는 판이었고 이에 대해 보수적인 당원들에게서 불만이 없지 않았지만, 총서기의 결단으로 인해 이루어질 수 있던 개혁개방의 첨병들이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입에 담기만 해도 자본주의 날라리 풍이라고 자아비판해야 했던 일들이(얼마 전 시청자들의 아쉬움 속에 종영한 공화국의 유명 막장 드라마를 포함해서) 하나씩 이루어지는 것을 눈앞에서 보니 아직 김일성, 김정일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리종수는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이야 계획발전 특구로 이루어진 평양이나 남포, 원산 같은 곳에서 주로 외국인 사업가들을 주 고객으로 영업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이 자본주의 바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체로 번져 나갈 것이다.

사실 그동안 평양 뿐 만 아니라 리종수 개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리종수 소장 동지! 서기실에서 총서기 동지가 기다리고 계십네다!”

“바로 가지. 소좌 동무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디.”

당사로 들어서자 경비원이 그를 알아보고 잽싸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짧게 답례한 후 리종수는 얼마 전 자신에게 배정된 보좌군관에게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지시한 후, 리종수 ‘소장’은 긴장된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서기실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책상에 앉아서 업무에 집중 중인 공화국 최고지도자의 존안을 보자마자 리종수는 아까 전 서기실 경비병 보다 훨씬 더 목소리를 높여 경례를 올리고 오늘의 용건, 종이 봉투 하나를 두 손으로 받쳐 들어 건넸다.

“좋은 아침입네다, 총서기 동지! 여기 대외정찰총국 대(對) 남과 보고서입네다, 지시하신 조사 내용을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샅샅히 알아냈습네다!”

“.....그래, 수고했네. 물러가보게. 아, 그리고 말인데...”

“네? 총서기 동지?”

자신에게 칼 같이 경례를 올리는 새로운 대외정찰총국장, 리종수에게 정환은 물러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굳이 보고서 하나 전달하겠다고 리 국장 동무가 직접 서기실까지 올 필요 없네. 동무나 나나 서로 바쁜 몸 아닌가? 다음부터는 그냥 유혜림 소좌나 서기실 동무들에게 전달하도록 하게.”

“아, 알겠습네다, 총서기 동지! 즉시 시정하도록....”

“알겠네. 알았어. 아무튼 국장 취임을 다시 한 번 축하하네.”

다시 경례를 붙이며 황급히 물러가는 리종수 대좌, 아니 이제는 리종수 소장을 보며 정환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걸프전에서 ‘인민의 적 사담 후세인의 마수에서 로동자 동지들을 구출한 인민영웅’이 되어 돌아온 인민지원여단 군관들은 평양에서 화려한 환영식과 진급을 포상으로 받았다.

몇 일에 걸쳐 개최된 환영식의 마지막 일정은 사상 첫 미국 대통령의 북한 방문으로 마무리되었는데, 걸프전 참전 용사들의 개선을 미국인이 축하해주러 온 것처럼 인민들에게 보이자는 외무상 김용건의 아이디어였다.

‘내부적으로는 이번에 참전한 우리 군관 동지들의 격을 드높임과 동시에 아직 미국에 대한 반감이 남아있는 일부 인민들의 마음을 회유하는 절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총서기 동지.’

그리고 여단 지휘관이었던 백승철을 포함해 좌관급(영관급), 위관급 군관들 전부에게 논공행상이 이루어졌는데, 상장으로 진급한 백승철을 포함해 그중 리종수 대좌는 이번에 새롭게 해외 정보기관으로 개편된 대외정찰총국의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전대 보위부장 김영룡이나 보위국장 원홍희처럼 보통 김 씨 일가에게 대한 충성도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능력보다 절대 배반하지 않을 인사를 정보기관장에 임명했던 전례와는 달리, 정환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일면식이 없는 프룬제 출신 리종수를 정찰총국장에 임명했다.

이러한 조치는 정환이 자신의 심복을 정찰총국장에 기용할 거라 예상했던 군 뿐 만 아니라 당 내외에서도 놀라움을 샀는데, 직접적으로 정환에게 말이라도 꺼낼 용기를 내본 건 그 중 장성택이 유일했다.

- 총서기 동지.... 그거이... 결코 동지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아닙네다만, 백승철이와 그 밑에 있던 리종수 동지를 믿을 수 있겠습네까? 차라리 김용건 부장 동지 밑의 외무성에서 믿을 만한 당원을 불러올리시는 거이...

‘쟤네들 믿어도 될까요’라는 말을 완곡하게 돌려서 표현하는 장성택에게 정환은 의외로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고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리종수 신임 소장은 후세인에 대항해 공화국의 이름을 드높인 이번 파병의 주역이며 백승철 중장 동무와 함께 임무를 완수하고 영웅적으로 개선한 참전영웅일세. 이 공화국에서 인사가 능력과 실적이 위주가 되어야지, 출신성분이 되어서야 되겠나?

이러한 정환의 인사는 그동안 병역자원 감축, 내부 부패 단속으로 채찍만 때려왔던 인민군에 대한 당근인 동시에 두 가지 의도가 더 있었다.

그 중 첫 번째는 능력주의 인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군대인 이유는 엄청난 땅덩어리에서 나오는 쇼 미 더 머니 수준의 보급력이 가장 크지만, 사회문화적인 면도 무시 못 하지. 민간에서부터 참전군인을 우대하고 야전에서 실전을 치러봤느냐 아니냐(Battle - tested)가 장성 진급의 주 기준 중 하나일 정도니까 말이야. 똥별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아부만 잘하지 지휘능력은 떨어지는 정치군인을 상당수 걸러주거든.’

군인이 정치에 기웃거려서 좋은 꼴 난 역사가 드물다는 건 동서고금 남북을 막론한 진리였다.

개국 이래 수십 년 간 군부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총 한 번 안 잡아본 고위 당원들도 군 계급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북조선의 특성상 당장 문민통제는 힘들더라도 능력주의, 실전주의로 보직임용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당군 양 쪽 모두에 주는 게 정환의 의도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의도는 장기적인 국방 개혁이었다.

“쿠웨이트까지 가서 그 고생을 했으면 그래도 뭔가 좀 배웠겠지. 백승철 그 골칫거리도 철 좀 들은 거 같고... 하여간 인사가 만사라는 건 진리라니까.”

침을 꿀꺽 삼키면서 리종수 국장에게 올라온 보고서의 봉인을 뜯으며 정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걸프전에서 참전영웅이 되어 돌아온 군관들 중 리종수가 정찰총국장에 임명된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외에 한 가지 더 인사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리종수와 함께 백승철을 쿠웨이트에서 수행했던 군관, 김철규를 공군 소장으로 부임시켰다는 것이었다.

말 많고 적극적인 성격인 리종수와 달리 상대적으로 과묵해서 장승처럼 보이는 김철규 본인은 이 생뚱맞은 최고지도자의 보임을 묵묵히 받아들였지만, 조종사 출신도 아니고 항공육전여단 출신 군관을 공군 장령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북조선 기준으로도 제법 파격적인 인사였다.

다만 함께 쿠웨이트의 사막에서 지옥도를 맛보며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미제 놈들 날틀’에 구원받은 백승철만이 좀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이것 참....”

“왜 그러십니까, 총서기 동지? 뭐 언짢으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정환은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유혜림에게 애써 손사래를 치며 읽고 있던 정찰 총국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 보고서는 지금 서울에서 암약 중인 남파 간첩을 통해 올라온 것으로, 얼마 전 정환은 리종수를 통해 한국 내 정찰총국 정보망을 통해 어떤 지시를 내렸다.

개편 이후 첫 총서기의 직접 지시에 리종수는 바짝 긴장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정작 이어지는 총서기의 엉뚱한 지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남조선의 한 가정에 대해 조사해서 보고서를 올려주게. 아버지 직업은 공무원이고... 아마 아들이 한 명 있을 걸세. 그리 자세히 조사할 필요는 없고 그냥 자녀관계 정도만 알아봐 주면 되네.

그리 어려운 임무도 아니고, 한국에서 슬슬 생겨나기 시작한 흥신소 정도에만 의뢰해도 충분히 습득할 수 있는 정보였기에 정찰총국은 대상이 된 가정의 정보를 쉽게 알아내서 총서기실로 전달했다.

이유야 그들이 알 리 없었지만, 어쨌거나 하늘 같은 최고지도자의 개인적 지시에 리종수는 방금 전처럼 국장의 신분으로 직접 서기실로 와서 전달하는 열성을 보이기까지 했지만.... 정작 옆에서 정환의 기분을 가장 잘 알아채는 비서 유혜림은 정환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음을 알아챘다.

“정말로 괜찮으신 게 확실합네까? 혹시 편찮으시다면 지금 즉시 의사 동무를....”

“아니, 아니야, 유 소좌. 난 정말로 괜찮아.”

“............?”

“아직 오늘 일정이 남았군. 남포에 미국 민간 상선이 처음 들어온다고 했나? 가서 장성택 부장이나 놀래켜 주고 와야겠군. 소좌도 곧 나와. 서기실 아래에서 보지.”

정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우려하는 유혜림에게 짐짓 괜찮다는 듯 쓴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서기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평소답지 않게 책상 위에 그대로 방치하고 나간 정찰총국 보고서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조사를 명령하신 남조선 가정은 평균적인 남조선 인민보다 약간 더 유복하게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부 쪽은 남조선 정치인들에 대해 가끔 불만을 드러내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남조선 정부와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며 술자리에서 공화국과 경애하는 최고지도자 총서기 동지에 대해 불경스런 비방을 하는 것으로 조사되므로 차후 공화국으로의 전향이나 포섭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서울에서 공작 활동 중인 해주 3호에 의하면, 최근 들어 남조선과 체결된 북남기본합의에 대해서도 ‘빨갱이들 수작질에 넘어가는 것’ 운운하는 등의 발언이 관찰되었으며 가정에 대한 상세사항으로는, 공무원 부(父)와 모(母), 그리고 신혼 직후 갓 태어난 딸 하나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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