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99화 (99/350)

< 27장. 앞으로의 10년 >

27장. 앞으로의 10년

세상 물정 모르는 후배들에 대한 도발 같기도 하고 조롱 같기도 한 문장으로 시작한 시인의 사설은 두 가지 의미에서 다시 대학가를 투쟁의 불길로 달구려던 학생 운동권들에게 충격적이었다.

첫째는 그 사설이 ‘정권의 파수견’ 정도로 취급받던 고려일보에 실렸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그 사설의 저자가 자신들과 함께 독재에 맞서 투쟁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생명이 신성하다는 금과옥조를 새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심지어 종교까지도 생명의 보위와 양생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그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당신들 자신의 생명은 그렇게도 가벼운가? 한 개인의 생명은 정권보다도 더 크다. 이것이 모든 참된 운동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사설은 길지는 않았지만 강력했는데,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여 당시 운동권 내에서 은연중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강요되던) 군사독재에의 효과적인 저항수단, 목숨을 건 희생을 직접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 진보세력에게 그 공격이 강력했던 이유는 단순히 운동권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집단 뿐 만 아니라, 군사독재의 폭압을 소극적으로 거부하는 의미에서 운동권을 지원하던 소시민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신들이 믿고 있는 그 해방의 전망은 확고한가? 목적에 대한 신념은 과학적으로 확실한가? 만약 그것이 기존의 사회주의라면 그 전망은 이미 끝이 났다. 우리 모두가 보았듯이 김일성은 죽었고, 김일성의 공화국 역시 죽었다. 아니 애초에 그의 뜻이 사회주의에 있었는지도 의문스럽다. 죽은 주석의 젊은 후계자 역시 선부(先父)의 원수 미국과 손을 잡았다. 새천년을 10년 도 안 남긴 이 시점에서, 그대들은 지금 여기서 무엇에 매진하고 있는지 돌이켜보길 바란다.>

‘원래 예나 지금이나 같은 편이던 사람이 돌아서서 때리면 훨씬 더 아픈 법이지.’

서기실에만 배달되는 고려일보 사설란을 보며 정환이 한 씁쓸하게 고개를 저으며 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환의 예측대로, 이 사설이 실린 것을 기점으로 8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 진보 세력은 정치적 빙하기를 맞이했다.

물론 처음에는 해당 사설에 대해 ‘민주화 운동 선배의 변절’, ‘변절이 아니라 숨기던 본모습이 드러났다’며 현 대통령과 그 일파에 넘어간 한낱 배신자의 의견으로 치부하는 목소리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그 이후 운동권에게는 악재, 그리고 그 악재에 대응하는 전략적 실수가 연발하기 시작했다.

그해 예정되어 있던 지방선거에 오래 대비해왔는지 현 대통령과 여당은 진보 세력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시인의 사설은 그중 전초전에 불과했다.

진압 치사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분신한 학생들 중 한 명이 자의로 자살한 게 아니라 학생 운동 수뇌부의 강압과 회유에 의해 자살로 떠밀렸으며, 그 학생이 남긴 유서조차 수뇌부가 조작했다는 ‘주장’이 검찰에 의해 제기되자 긴가민가했던 여론은 급격하게 운동권에 악화되기 시작했다.

만약 여기서 운동권으로 대표되는 학생운동 세력이 노선을 바꾸어 유화적으로 비폭력 투쟁을 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운동권 수뇌부들을 이룬 학생들은 국민들이 더 이상 대학가에서 최루탄 냄새가 풍기는 걸 지겨워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와 이념의 시대는 냉전의 최전선 중 하나였던 한반도에서도, 남과 북 모두에서 막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던 학생운동 세력의 퇴로를 차단하듯 대통령과 여당은 남북 간 서로의 존재인정과 경제교류를 포함한 논의가 진전되고 있음을 밝히며 그들의 이념적 기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북한의 접촉은 대한민국 정부가 가장 정치적으로 남북협력 이미지가 절실할 때 접촉하는 게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정환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 에, 본인과 이 정부는.... 그동안 북측과의 오랜 협상 끝에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분쟁의 종식을 이룩해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습니다. 현재 실무적 단계에서의 논의가 오가고 있는 상태이며, 북측 최고지도자의 재가가 떨어진다면 언제든 양측이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아...

여기까지 오자 ‘현 정부는 미국 일본 등 강대국의 사주를 받아 분단과 냉전체제를 공고화시켜 쿠데타로 찬탈한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굳히고 민족 재결합을 방해하는 파쇼 세력’이라는 진보진영의 논리는 크게 힘을 잃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에서 운동권 단체들은 과거의 과격투쟁 노선을 버리지 못하고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질렀다.

- 우리 선생님들을 학살하고 교육자로서의 가치관을 배신한 총리는 신성한 교육의 장에서 물러가라!

당시 새롭게 총리에 부임하게 된 전 문교부 장관은 이전부터 '5.6 조치' 등으로 대표되는 학생운동 탄압 조치, 전교조에 대한 공격 등으로 운동권 학생들의 불만을 사오던 인사였다.

그리고 마침 그 신임 총리 내정자가 입각 전 마지막 강의를 하던 학교에서, 운동권 학생들은 그에게 물리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심각한 오판을 저질렀다.

게다가 마침 해당 내정자를 인터뷰하기 위해 학교에 운집해 있던 기자들을 통해서 보도된 총리 내정자가 돌과 달걀 세례를 맞으며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학교를 떠나는 모습은, 아직 운동권 학생들에게 ‘그래도 저 친구들이 피 흘리지 않았으면 민주화 안 됐겠지’하는 한국 국민들의 마지막 동정심마저 말려버렸다.

- 이런 싸가지 없는 놈들... 지금 신성한 교육의 장을 더럽히는 게 누군 줄 알기는 해! 어딜 감히 어린놈들이 하늘같은 스승에게 폭력 행사야!

- 저거 저놈들 이제 안 되겠네, 저거. 저게 무슨 놈의 학생운동이고 민주화 항쟁이야? 그냥 패륜 짓거리지. 민주주의가 학교 선생들 패는 거여?

그리고 운동권은 (최소한 사회 주류에서는)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반격의 기회를 잡은 정부 여당은 총리 내정자에 대한 운동권 학생들의 공격을 ‘인륜을 저버린 테러’로 규정하고 ‘법질서 확립’에 나서 수뇌진들을 조사 체포했다.

그리고 마침내 코앞으로 다가온 총선 앞에서, ‘여당인 민국자주당과 정부는 굳히기에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한 방을 간절히 원할 것’이라고 판단한 정환은 김용건 외무상과 김영남 상임위원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이 적절한 시기군. 원래 물을 가장 비싸게 팔려면 목마른 자에게 팔아야 하는 법이지. 이번 합의가 앞으로의 북남관계, 아니, 공화국 전체의 10년을 결정할 테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네.”

“지당하신 말씀입네다, 총서기 동지!”

그리고 남북 양측 모두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된 남북기본합의는, 광역의회 선거를 고작 일주일여 남겨둔 시점에서 체결되었다.

제안부터 실무자급 회담과 체결, 실제 발효까지 채 반년도 걸리지 않은 그야말로 광속 타결이었지만, 남북 양 측 모두 겉으로 불만은 없었는데, 각자 나름의 계산이 이미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경제교류. 자본협력에 관한 합의서>

제1장. 남북 화해

1.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2. 남과 북은 상대방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아니한다.

3.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상을 하지 아니한다......

“자, 김영남 상임위원장님,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대통령님께서도 그쪽 최고지도자 총서기님께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허허허.... 저희 공화국 역시 앞으로 남과 민족 공동번영의 미래를 열어나가고 싶을 따름입니다. 총서기 동지께서도 남과의 교류에서 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는 말을 보니까 이거 예상이 맞았군. 석유가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게 어디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석유 팔아서 먹고 살 수 있을 때까지 우리랑 미국 돈으로 캐내시겠다 이 말이지? 쯧, 하여간 빨갱이들 이거 돈 맛은 빨리 알아가지고....’

서울에서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합의서에 싸인한 김영남과 한국 국무총리는 웃는 낯으로 서로 악수를 나누면서도 상대방의 내심을 캐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롭게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는 원 역사에서보다 경제교류에 대한 조항이 더 많이,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북에서 제안한 이런 초안의 내용을 두고 한국 외교부와 안기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 이걸로 확실하군. 얘네들 개혁개방 시장경제체제 하려는 거 맞아. 아마 석유도 나오는 거 맞고. 근데 그게 일이년에 되는 게 아닐 테니 우리 기업들이랑 미국 자본 손을 빌리겠다 그거야.

- 정말이요? 중국이랑 소련 쪽 놔두고 왜....? 석유 채굴이라면 그 쪽도 기술력 노하우 만만치 않지 않습니까.

- 뺏길까 무섭다 그거겠지. 요즘 중국 애들도 중동 쪽에서 뭐 하고 있다는 소문 파다하잖아?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격이니까. 북에서 얼마 전에 정보기관 하나 새로 출범시켰다는데 자기들도 귀가 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인질 빌미로 걸프전 낑겨 들어가서 미국인들 끌어들이고 하는 거겠지.

- 근데 이거 청와대에서 합의서대로 통과시켜 줄까요? 저쪽 석유 개발되면 우리가 우리 돈으로 쟤네 무기 사고 체제 유지할 돈만 벌어다 주는 격 아닙니까?

놀랍게도, 한국 정부는 일견 말이 많이 나올듯한 합의서에 대해 별 말 하지 않고 통과시켜 주었다.

이러한 전환의 이유 중 우선 첫째는 현재 열심히 정치적 패착을 반복하고 명분을 잃어 대중적 지지도를 까먹고 있는 진보 진영(물론 현 여당과 고려 일보 눈에는 철모르는 빨갱이들이었지만)를 고사시키고 지방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이자 진정한 이유는, 진보가 이러한 내부 분규와 재탄생 절차를 겪고 있는 와중에 반대 진영, 한국 보수세력 역시 북한이라는 존재의 대전환에 대해 새로운 스탠스를 연구하고 전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년여 전부터 이루어진 이 전환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청와대와 정책결정권자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고려일보와 수출 대기업들로 이루어진 시장 보수 세력이었다.

- 석유! 북한에 기름이 난단 말이지! 크하하하... 이거 하늘에서 이 대한민국을 도우시는구나. 이제 올라가서 집어먹기만 하면 된다. 벌써부터 일본 놈들 배 아파서 죽으려고 하는 게 보이는 구나. 안 그래도 요즘 닛케이지수 폭락해서 제2패전이니 뭐니 하던데.... 흐흐흐...

- 아니 회장님, 골프 치시다 말고 그 무슨 남산 구경 갈 소리를.... 지금 회장님이랑 태화그룹이 북한 가서 사업하겠다 그 말씀입니까? 은행이 뭔지도 모르는 빨갱이들이랑 그게 되겠어요?

- 장군님, 안 될 건 또 뭡니까? 우리나라가 그놈의 자원이 없고 석유가 없어서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게다가, 이제 미국인들도 그 빨갱이들이랑 같이 손잡고 사업해보겠다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 이 빨갱이들... 아니지, 이 북한인들이랑 우리랑 같이 돈 좀 벌어보면 안 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말도 통하는데.

-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회장님, 그래도 그렇지...

- 탱크도 전투기도 결국은 그거 다 석유로 굴러가는 거 아닙니까? 애들 다니는 국민학교 교과서에도 30년이면 석유 고갈 돼서 큰일 난다고 하는데... 그럼 중국 놈들부터 시작해서 다른 데 넘어가기 전에 우리가 얼른 가서 가져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곧 남북 교류 사업이 화두에 오를 듯 한데 그 때 우리 태화그룹 들어갈 수 있게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 장군님 둘째 사위 분이 외교부 근무하신다고 하셨지요? 정보 좀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진보 진영을 구성하는 세력이 미국을 추종하여 민주주의와 인권을 주 역점으로 삼는 중도 진보에서부터, 민족주의를 내세워 반미를 기조로 하는 주사파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한국의 보수 세력 역시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누어져있었다.

그중 한 진영은 한국 전쟁과 분단에 기원을 두고 40여 년 간 맹위를 떨쳐온 안보 보수, 반공(反共) 친미(親美)를 국시로 삼는 보수 세력이었으나, 김정환이 이끄는 ‘자본주의 북조선’이 점차 구체화되며 남북 대결국면이 식어가자, 이 세력은 된서리를 맞았다.

재미있게도 이 안보 보수 진영은 함께 몰락 위기에 직면한 극 진보 세력과 동일하게 과거의 북한을 정치적 동력원으로 삼아온 세력이었으나, 이제는 사장 위기에 처한 것이다.

원래 적이 없으면 전쟁은 지속되지 않고, 무기상인도 폐업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리고 그러한 안보 보수의 몰락과 함께 새롭게 한국 보수 정치 세력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은, 3저(低) 호황을 맞아 경제 성장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그 세를 키운 ‘시장 보수들’, 좀 더 적나라한 표현으로는 ‘성장 제일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친미라는 점에서는 이제까지의 냉전 기간 동안 한국 보수의 대표주자였던 안보 보수와 맥락을 같이했지만, 시장 경제에 대해서는 그들과 시각이 좀 달랐다.

- 이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애국 보수 신자 여러분! 이번 남북 기본 합의는 북한의 전통적인 화전양면 전술, 기만전술입니다! 김정환이는 자기 형 김정일, 애비 김일성과 다를 바 없이 틈만 나면 우리 자유대한을 집어삼키려는 북괴의 수장...

- 자자, 목사님, 잠깐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시죠. 거기 권사님들, 장로님들도 제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십시오. 이게 애국이란 게 말입니다, 요즘 고려 일보 경제란 보시면 아시겠지만 무조건 빨갱이 죽이자고 하는 게 애국이 아니에요. 아니,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한 민족 아니겠습니까?

- 사장님! 저 빨갱이들하고 우리가 무슨 한 민족이라는...

- 여기 표 좀 보십시오, 이번 저희 그룹 전략기획실에서 발간한 남북 경제교류 여파에 관한 보고서인데, 만약 북의 2300만 인민들이 우리 시장에 편입되면, 이게 뭐가 가능해지는 줄 아십니까?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규모... 뭐라고요?

- 규모의 경제 말입니다. 뭐 쉽게 설명 드리자면 뭐든지 한 번에 많이 만들면 싸지고 그럼 소비자들 모두 행복하고 회사는 돈을 10원 벌 거 20원 더 벌고 그런 겁니다. 아니, 그거 이전에 저 북한 인민들이 자동차만 한 대씩 산다고 해도 저희 그룹이 얼마나 팔아먹을 수 있겠....흠흠, 그러니까 경제성장이 더 가속화된다 이 말입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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