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장. 원교근공(遠交近攻) (1) >
25장. 원교근공(遠交近攻)
사상 첫 미국 대통령의 방북(訪北)은 소련이 붕괴해가고 냉전이 끝나가는 와중이라는 걸 감안해도 상당히 파격적인 결정이었고, 그만큼 전세계에 많은 파급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만큼 여전히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얼마 전 까지 아시아 변방의 기괴한 공산국가로만 알려져 있던 곳에 핵가방을 든 군 통수권자를 보내도 되는 것인가 하는 불안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딕 체니를 비롯한 군 관계자들 일부는 총서기 김정환이 쏘련 출신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집권했음을 잊지 말라며 ‘쏘련이 붕괴 직전 마지막 미친 발악을 할지도 모른다’는 식의 노골적으로 불길한 경고를 날리기도 했다.
첫 미국 대통령의 평양 국빈방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었던 이런 불신의 도가니를 해소시킨 건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첫째는 김정환의 부탁을 받은 영국, 정확히는 헤이우드 대사의 중재였다.
- 미국 국민 여러분. 저를 좀 보십시오, 제가 억압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납치나 협박을 당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시나요? 저와 영국 정부는 여러분보다 먼저 김 총서기님을 알아왔고, 그분이 국가 간 약속을 존중하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증할 수 있습니다.
2차 대전에서, 그리고 냉전 기간 내내 미국의 최우방국 중 하나였던 영국의 장담은 대통령 방북에 대한 불안감을 1차적으로 잠재웠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미국 대통령 본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본인의 대담함이었다.
- 친구들, 걱정하지 마. 가서 내가 죽기야 하겠어? 나는 이미 아들놈도 다 컸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잽스(Japs)들한테 산채로 잡아먹힐 뻔 했다가 살아나기도 했다고. 쉽게 안 죽는 사람이란 말이지.
- 각하, 그래도....
- 게다가, 곧 재선이 있지 않나. 요즘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진, 이미지야. 듀카키스 그 친구가 탱크 타는 사진 한 번 잘못 찍혔다가 어떻게 됐는지는 잘 알고 있지? 내가 그 아시아판 붉은 광장에 들어서서 손 한 번 흔들어주면, 분명히 그림이 아주 좋을 거야.
- ...............
재선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안위를 걱정하던 참모진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걸프전에서 전 세계는 크게 두 가지를 배웠다.
첫째, 냉전은 끝났다. 미국의 완전무결한 승리로. 그러니 미국에 함부로 대들지 마라.
둘째, 유럽이나 북미 대륙에 위치한 자기 집 안방에 앉아서 지구 반대편 바그다드에 미사일이 떨어지는 걸 생중계로 볼 수 있는 세상이 왔다.
발달한 정보통신기술에 힘입어 미디어가 갖는 영향력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는 시대였다.
그 어떤 국제기구에서의 말잔치와 따분한 협정과 조약보다, 미국 대통령이 와서 손 한 번 흔들어주는 게 북조선이 자유시장경제체제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훨씬 더 잘 알려줄 것이라는 점을 정환은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부시 역시 이번 국빈방문이 걸프전 승리에 힘입어 로켓처럼 상승하는 자신의 지지율에 추진력을 더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국 미국 기자들의 동행과 취재를 허용한다는 조건을 달고 그렇게 부시 대통령의 북조선 국빈방문은 두 달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성사되었다.
마침내 그해 4월, 에어포스원이 평양 순안국제공항에 착륙하는 전대미문의 광경을 전 세계는 보게 되었다.
“부시 대통령 각하께 경례!”
‘살다보니 이런 광경도 보게 되는군.’
보안원 오토바이 행렬에 호위를 받으며 김일성 광장을 지나 조선노동당 1호 청사로 들어오는 미국 대통령 경호차량을 보며 정환은 속으로 피식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이지만 참 비현실적이라는 감상까지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랑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90년대에 북미 수교라... 정권 잡고 나서 3년도 안 되는 시간에 이 정도면 정치외교학과 교과서에 실릴 업적이지.’
오늘 여기서 일어날 일이 후세 아이들이 배울 교과서에 실린 ‘김정환 동지의 업적’ 란에 볼드체로 쓰여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정환은 벌써부터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서렸다.
‘그럼 이제 천조국 황상을 만나러 가보실까. 개인적으로도 한 번 만나 국제정치에 대해 가르침이라도 들었으면 하던 인물이기도 했어. 자식교육 빼고.’
“미스터 프레지던트(Mr President),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도 만나 뵙게 돼서 참으로 반갑습니다. 총서기님. 사람들의 환영이.... 참으로 대단하군요.”
김일성 광장을 가득 메운 인민들의 환호성을 보며 부시가 예상 밖이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짓자 정환은 그를 영빈관으로 안내하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조선에서는 대담하고 배짱이 좋은 사람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님의 배포에 조선 인민들이 답을 보낸 거지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야당에서는 제가 이곳으로 오는 걸 말렸습니다.”
“민주당과 클린턴 주지사야 대통령님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전쟁에 나가보지도 않았고 병역 기피 의혹까지 있는 사람인데, 한 번은 전선에서 직접, 한 번은 백악관에서 두 번의 전쟁을 승리하신 대통령님과 비교해서 미국 유권자들이 어느 쪽을 더 선호하겠습니까? 참전 용사는 언제나 선거에서 유리한 법 아닙니까.”
“......총서기님은 미국에 대해 잘 아시는 거 같군요.”
부시는 정환에게 다시 한 번 의외의 일면을 발견하며 내심 놀라워했다.
세습 공산 국가 지도자라고 해서 아무리 개방적이래봐야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매끄러운 영어는 둘째 치고 미국 선거 시스템이나 생리에 대한 이해도 매우 높은 듯 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아까 에어포스 원에서 내릴 때만 해도 그를 맞아준 북한 군인들도 이번에 이라크에서 벌어진 걸프전 참전 용사들로 선정되었다고 보좌관이 귀띔해 주었을 때 그의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이번에 방문단에 함께 동행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CNN 기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정보는 생중계로 미국 TV에 보도되었을 것이다.
미국과 북한 관계 개선의 빌미가 된 걸프전을 최대한 미디어에 부각시켜 아직 북한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미국 국민들을 조용히 설득시키려는 대책인 게 분명했다.
‘이 친구, 상당히 세심하게 오늘 만남을 준비했군. 과연 이제부터 무슨 말을 할 지가 진짜지만.’
이윽고 영빈관에 들어선 두 지도자는 북한 측에서 준비한 첫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둘만이 남겨졌다.
보통 이런 방문이 만찬이나 환영사 낭독으로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뜻밖에도 첫 일정은 두 지도자간의 정원 산책 회담이었다.
“허례허식은 싫어해서 말입니다. 저는 제 나라 미디어들을 전부 통제할 수 있지만, 외신은 아니기도 하고 말이지요.”
“김 총서기님은 참 솔직하시군요. 카메라가 없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마음에 듭니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가끔 그것 때문에 이길 전쟁을 지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부시 대통령님이라면 잘 아실 텐데...”
‘부시 대통령은 CIA 국장 출신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정보 통제에 실패해서 국내의 반전 여론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던 닉슨 행정부 시절 말기에 정보기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지.’
이러한 정환의 의도는 적중했다.
부시는 표현의 자유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미국의 대통령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공감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쓴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기자들을 못 따라오게 하길 잘했군요. 민주국가의 지도자로서 다시 한 번 카메라가 없으니 할 수 있는 말입니다만.... 개인적으로 정말 공감되는 바입니다. 요즘은 어째 정부보다 민간 미디어의 힘이 더 커지는 것 같으니....”
‘슬슬 공감대 형성 작업이 마무리되어가는군,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정환은 결심을 하고는 슬쩍 떡밥을 흘렸다.
“아 뭐 저도 원론적인 의미에서 표현의 자유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언론이고 자유고 전쟁에서 이겨야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에 공감하지 못하는 국가가 승리하여 세계의 패권을 쥔다면, 언론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냉전은 이미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전쟁이 더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더 큰 전쟁이 시작됐다고 봐야죠. 이미 그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흐음, 흥미롭군요.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건, 그 전쟁에서 북한이 저희 편에 서겠다는 의미입니까? 이번 전쟁처럼? 그렇다면 우리, 저와 김 총서기님 공통의 적은 누가 되겠습니까?”
‘다 알고 있으면서 묻는 걸 보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면 잘 알 텐데? 내 입으로 말해보라 이건가?’
아무렇지 않은 듯한 질문이었지만, 정환은 조지 부시의 눈빛에서 이 질문이 사실상 이번 방문에서 그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시도 그가 했던 생각과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했고, ‘그 역할’을 수행할 의사가 있느냐고 지금 정환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정환을 믿을 수가 없으니 속내를 떠보려는 것일 테지.
기업에서 압박면접을 보는 신입사원 같은 처지에 내심 기분이 더러웠지만 지금으로서는 선택지가 없었다.
정환은 질문에 바로 대답했다.
“물론 중국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일반적으로 국가 간 협상에서, 특히나 북조선 같은 나라의 협상에서 자신의 내심과 진정한 목표를 바로 노출시키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정환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판단했다.
아직 핵전쟁의 긴장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이 시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정도가 아니면 아직 중국의 잠재력과 위험성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천안문에서의 유혈 사태 이후에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현재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적수’란 쏘련, 즉 러시아가 될 나라였고 정치인들 대부분도 생각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베이징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시절 유엔 주재 미국 대사와 중국 주재 연락사무소장을 지낸 눈앞의 사람, 아버지 부시라면 중국의 잠재력, 그리고 그들이 길어도 20년 이내 미국의 주적으로 부상하리라는 걸 예견하고 있을 것이다.
‘나한테는 행운이지. 북조선이 차후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이니까 말이야. 기분은 더럽지만 지금 입장에서는 전략적 목표를 노출시키는 게 아니라 전략적 목표를 공유하고 이해시킨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지금의 북조선은 막 개혁개방을 시작한, 사회진출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 사회초년생 같은 입장이고, 상대는 이 지구의 헤게모니를 쥔 세계제국이다.
입장이 같지 않은 건 당연하고 제발 채용해달라고 애걸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속내를 숨겨봐야 상대의 경계심만 증폭시킨다고 정환은 판단했다.
“......의외로군요. 북한은 중국과 과거 혈맹으로 맺어진 우호국가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외교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습니다. 대통령님. 특히나 가까운 국가끼리라면 더더욱 그렇죠.”
‘모르는 척 하기는, 당신도 그럴 생각이 있으니까 한국 반발 생길 거 알면서도 여기로 직접 날아온 거 아니야. 물론 재선 생각도 있었겠지만....’
재선 생각이 나자 정환은 잠시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굴렸다.
중국에 비교적 유화적인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가 훨씬 더 일찍 해제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중국의 대체재 동시에 견제자로서 북조선이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기능할 수 있는 역할이나 입지의 유효기간이 훨씬 빨리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북 동시 걸프전 참전으로 지상군 파병이야 상당히 줄었다지만, 어떻게 이 아버지 부시가 클린턴의 ‘문제는 경제야’ 어택에 넉 다운 되는 걸 막는다?
“대통령님, 동아시아에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