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장. 바그다드 레이스 (3) >
24장. 바그다드 레이스 (3)
“중장 동지! 백승철 중장 동지! 시급한 연락이 있습네다!”
“뭐이야? 누가 감히 사령부 천막에 거수도 없이...”
“그, 그거이... 우리 기술자 동무들 위치가 파악됐습네다! 방금 미군 첩보대에서 국경지대에 위치한 유전에 우리 기술자 동무들이 억류되어 있는 걸 확인했다고 합네다!”
그 말에 방금 전까지 침울해 있던 백승철과 휘하 군관들 얼굴에 확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누구의 보조도 없이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 목숨이 달린 기회가 눈앞에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호사다마라고, 이런 기회에 역신이 딸려온 듯 했다.
“위치는? 위치는 어디야? 어서 말하라!”
“아니, 그게 들어보십쇼, 동지! 위치는 여기서 한나절만 달려가면 갈 수 있는 곳인데, 지금 미제 군대 사령부에서 내일 날이 밝으면 근처에 있는 남조선군 공수여단에 우리 기술자 동무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부여하기로 했다고 합네다!”
“......뭐, 뭐이얏!”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얼굴이 시뻘게진 백승철과 김철규, 리종수가 노먼 슈워츠코프가 있는 지휘텐트로 한달음에 달려갔음은 물론이었다.
곳곳에서 들어오는 승전보에 들뜬 휘하 참모들을 다독이면서도 다음 작전 수행에 차질이 없나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슈워츠코프가 씩씩거리며 달려온 백승철을 보고 처음으로 지은 표정은 ‘성가심’이었다.
안 그래도 귀찮아 죽겠는데 이건 또 웬 짐덩어리란 말인가.
하지만 백전노장답게 금새 자신의 내심을 지우고 동맹국군 지휘관을 대하는 태도로 돌아온 슈워츠코프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백승철 중장. 무슨 일 있소?”
“무슨 일이고 뭐고... 장군 동지가 지금 우리 기술자 동무들의 구출 임무를 남조선군 공수여단에게 하달한 게 사실이오?”
계급은 물론이고 자신보다 나이가 열 살은 많은 슈워츠코프에게 언성을 높이는 백승철을 보고 주변의 참모들 전부 표정이 언짢아졌다.
개중에는 ‘또 지랄이네, 저거’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지만, 그래도 마지막 일선은 지켜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백승철을 응대하는 슈워츠코프 역시 바위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 물론 사우스 코리아와 귀국 간의 정치적 민감 관계는 이해하는 바이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곳에 있고 해당 민간인들과 동일한 언어를 쓰는 부대가 그들 뿐 이므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으니 이해 바라오.”
“아니, 도대체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은 거요? 이 거리면 당장에 달려가 우리 인민을 구출해올 수 있었을 거요!”
“침착하고 내 말을 좀 들으시오, 백 중장. 우리 정보부도 방금 알게 된 사실이오. 그리고 지금부터 아무리 빨리 가도 국경의 유전지대에 도달할 시각이면 이미 해가 진 후 일 텐데, 야간 전투 준비도 거의 안 된 그 쪽 군이 구출 작전에 임하는 건 자살행위요.”
“그럼 내일 아침에 출격하면 되잖소!”
여전히 성난 표정으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항의하는 백승철을 상대하는 슈워츠코프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짜증스런 기색이 미약하게 비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냉정했다.
“그건 힘드오. 내일 날이 밝고 나서 출발하면 때가 늦을 거요.”
“.....어째서 그렇소?”
“이미 공화국 수비대는 우리 다국적군의 파상 공세에 밀려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 퇴각하고 있소. 그리고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초기에 우리가 예상하던 대로 그들은 퇴각시간을 벌기 위해 초토화 작전을 펼칠 것이 거의 확실하오. 알겠소? 날이 밝자마자 그들은 유전을 태워버리고 도망칠 거란 말이오. 물론 귀국 민간인들도 같이.”
“.......!!!!”
“즉 이러한 모든 요건을 고려해봤을 때, 해당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한국 공수부대가 구출 작전에 가장 적합하오. 이해해줬으면 좋겠소.”
당연히 백승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백승철로서는 목숨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만약 기술자들을 무사히 구출해 공화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군대가, 그것도 하필 남조선 특수부대가 기술자들을 구해냈다는 정보가 총서기 귀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총살형이 확실했다.
아니, 자신을 호시탐탐 제거할 기회를 엿보던(백승철은 그렇게 확신했다) 총서기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전력을 감안하면 그냥 총살 정도가 아니라 고사포 같은 것으로 시체도 안 남게 분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맡긴 임무를 실패한 건 둘째 치고 남조선 괴뢰군대에게 인민구출이라는 신성한 임무를 강탈당하기까지 했으니, 그렇게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정말 양보해서 남조선이 아니라 야간 작전능력이 출중한 미군 특수부대에게 기술자들을 구해달라고 슈워츠코프에게 애걸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 역시 총서기에게 들키면 죽음인 건 변함없는데다 그들이 이라크 대공망 거점을 타격하는 임무에 동원되어 여유가 전혀 없는 건 백승철도 잘 알고 있었다.
“......그쪽 직승기(헬리콥터)를 빌려줄 수 있갔소? 우리 여단 전사들을 실어다 그쪽에 내려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미안하지만 백승철 장군, 지금 우리는 지상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고비에 와 있소. 앞으로 12시간 정도만 더 밀어붙이면 후세인은 항복할 거요.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로 예비 항공전력을 빼내서 리스크를 늘리는 건 내 부하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이오. 그리고 그런 일은 장군으로서 용납할 수 없소.”
한 마디로 너희들은 그냥 손가락 빨고 날 밝기를 기다려라 이 소리였다.
주변의 다른 다국적군 참모들도 북조선 내부 사정을 알 리 없으니 ‘그냥 앉아서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면 자동으로 해결되는데 왜 저 난리냐’하는 표정으로 구경할 뿐이었다.
결국 백승철은 이를 악물고 결단을 내렸다.
“.....좋소. 그럼 이건 우리 공화국 군대가 알아서 하지. 남조선 군대 지휘관에게는 일 없으니 오지 말라는 이야기나 잘 전해주시오.”
“백 중장! 군인으로서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지금 국경지대는 퇴각하는 이라크 군 부대와 그들의 퇴각을 호위하는 잔존병력들이 우글거릴 거요. 아무리 패잔병들이라지만 그쪽 수준의 기갑전력으로, 그것도 야간에 뛰어 들어가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오.”
“....상관없소. 우리 총서기께서 그러시더군. 인민군대가 인민이 사지에 처하는 걸 보고만 있는 게 말이 되냐고 말이오. 명령 불복종과 작전 비협조에 대한 벌은 돌아와서 달게 받갔소!”
그 말만을 남기고 백승철과 인민지원여단 군관들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 모든 광경을 옆에서 황망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미군 장교들은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미친 코미(Commie: 공산주의자) 새끼들. CIA에서 저 놈들은 쏘련 놈들보다 더 미쳤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그렇지 않습니까, 장군님?”
“..............”
“.......장군님?”
슈워츠코프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미묘한 표정으로 백승철이 사라진 자리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막의 밤은 말 그대로 암흑천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국적군에 속한 모든 군대에게 배포되는 작전지역 군사지도와 출정 직전 급하게 보급된 야간 투시경 덕분에 인민지원여단 정찰 대대는 전속력을 다해 국경지대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선두에 선 지휘장갑차에는 백승철이 직접 타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슈워츠코프가 예견했던 위험에 부딪히고 말았다.
“전방, 300여 미터 앞에 적군으로 추정되는 부대 보입네다! 지시를 내려주시라요, 중장 동지!”
“적군의 무장 상태는?”
“3개 중대 정도 규모, ㅤㅉㅣㅍ차와... 장갑차인지 뭔지 기갑차량이 두 대 보이는데 움직이지를 않습네다! 꽤 무질서해보이는 것으로 보니 패잔병들 같은데, 옆으로 돌아가시겠습네까?”
“........모두 교전 준비하라우!”
백승철은 이를 악물며 자신도 68식 자동보총을 꺼내들었다.
적군 규모와 무장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위험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만, 이쪽도 보병 정도가 아니라 장갑차 분대다.
이동 소음으로 들키지 않게 돌아가려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데, 지금 시간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날이 밝기 전에 기술자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지 못할 공산이 컸다.
“기습타격한다. 기관포 사수 조준하라. 기관포 엄호를 받으며 양쪽에서 친다. 운전수들, 저격보총 사수들에게 야간 투시경 넘기고 신속하게 움직이라!”
“알갔습네다!”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은 엔진을 끄고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적들을 포위했다.
잠시 사막의 바람 속에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와 의미를 알 수 없는 다짐이 입속에서 웅얼거려졌다.
그리고.
“사격 개시!”
타타타타타타!!!!!
위이이이이잉....!!!!
BTR에 거치된 기관포가 회전하며 불을 뿜었다.
78식 저격보총의 사격에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아랍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쏘아 올려진 조명탄이 사막의 밤을 환하게 밝힌 순간,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장갑차’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예미럴, X 됐구만 기래....”
“오마니.. 이 아들이 오늘 죽습네다... 부디 만수무강하시라요...”
‘장갑차’의 정체는 무한궤도가 빠져 그대로 주저앉은 T-72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다국적 군 기갑부대와의 싸움에서 패해 급히 퇴각하던 이라크 군 전차 중 하나가 정비불량으로 고장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대로 낙오되었다.
후에 어떻게든 얼마 남지 않은 기갑 병력를 보존하라는 명령에 남은 공화국 수비대 보병들이 정비반을 끌고 와서 낑낑대던 게 그날 백승철이 이끄는 부대가 조우한 병력의 정체였다.
기습과 훈련도의 이점을 살려 보병들 중 상당수는 첫 사격에 사망했다.
하지만 조명탄이 밝힌 두 부대 간의 전력 격차는 안 그래도 독이 잔뜩 올라있던 이라크 군을 용기백배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주포 발사! 알라의 이름으로 침략자들을 격퇴해라!”
“발사관! 발사관 사수 어디 있나? 당장 저 전차 날려버리라!”
“저, 저기 급하게 오니라 예비 탄약을 전혀 안 가지고 왔.... 크아악!!!”
콰아아앙!!!!
T 72에 달린 125mm 활강포가 불을 뿜자 북한군의 장갑차 중 하나가 그대로 관통되며 움직임을 정지했다.
수야 지휘 장갑차까지 포함해 6대로 이쪽이 우위에 있지만 이쪽 화력은 30mm 기관포, 그리고 미군 부대에서 (그래도 동맹군이라고) 하나 용접해서 달아준 고속유탄발사기 하나.
일반적으로 보병수송용으로 경무장한 장륜장갑차와 전차가 동일 조건에서 싸우면 당연히 전차가 압도적으로 전자를 학살한다.
하지만 지금 잠깐이나마 북조선군과 이라크 군이 대등하게 맞설 수 있던 것은 북조선군 쪽 보병의 기량과 훈련도가 월등했던 데다 야간, 거기다 그들의 지휘관이 T 72의 고향 소련에서 훈련받은 백승철이었던 덕분이었다.
“있는 대로 다 쏟아 부어라! 3대는 여기서 제압사격하고 나머지 2대는 우회기동 하여 보병들부터 제압하라! 후방 탄약고를 맞춰 쏘면 우리가 이긴다! 포탑 후측면이 장갑이 약하니 포탑을 노려라! 모두 공화국 전사의 긍지를 걸고 싸우라!”
쉬이익
퍼어어어엉!!!!
목숨을 걸고 접근한 발사관 사수 하나가 쓰러지며 발사한 RPG가 T72 중 하나의 포탑을 맞춰 한 대가 격파되었다.
불운하게도 온 몸에 불이 붙은 이라크 전차병들은 전차에서 기어나와 바닥을 구르다가 북조선군 저격수에게 그대로 황천길로 가버렸다.
하지만 그동안 다시 활강포가 BTR 2 대를 더 날려버렸다.
피슝
꽈아아아앙!!!
“으아아아악!!!!”
“아아아악! 오마니!!”
‘아... 이대로 여기서 죽는 건가... 아니, 공화국으로 치욕스럽게 돌아가 총서기의 손에 죽느니 차리리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 리종수, 김철규 대좌 동무들. 나 같은 우물 안 개구리를 만나 이렇게 타향에서 득 없이 죽는구나. 미안하다...’
이제 반밖에 남지 않은 장갑차들을 보며 백승철의 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자신은 장성이니 차라리 항복하고 목숨만 살려달라 하면 일단은 자신과 부하들의 목숨은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일단 목숨을 건져도 자신은 물론이고 치욕스럽게 인질이 된 부하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총서기가 과연 가만히 놔둘까?
아니, 설령 어떻게 살아난다 해도 과연 공화국에서 자신에게 어떤 비참한 삶이 남아있을지 백승철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백승철이 그렇게 속으로 인생 마지막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저 하늘 위에서는 공격기 한 대가 전투 지역 공역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 사령부, 여기는 콜사인 아크라이트다. 작전지역 공역으로 접근했다. 타겟만 지정하면 이라크 놈들 대가리 뚜껑을 따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
- 아크라이트, 여기는 사령부다. 근처에서 수신된 근접항공지원(Close Air Support, CAS) 요청에 따르면 현장에는 공정통제사가 없다. 그러니 현장판단을 우선시해서 임무 수행하도록 하라.
A 10 공격기, 정식 명칭은 ‘썬더볼트(Thunderbolt)'지만 워트호그, 흑멧돼지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이 비행기는 아파치 공격헬기와 함께 그야말로 미군 항공대 최고의 탱크 저승사자라고 불려 마땅했다.
하늘에서 급강하하며 부착된 GAU-8 회전식 기관포가 불을 뿜으면, 보병들을 괴롭히던 기갑부대들은 떨어져 내리는 강철의 소나기에 몰살당하고는 했다.
그게 베트남 전 때부터 지금까지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법칙이었고, 그게 이제까지,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A 10이 근접항공지원의 왕좌 유력 후보 중 하나인 이유였다.
- 음... 공정통제사가 없다고? 지금은 야간인데... 게다가 양 쪽 교전세력간 거리가 250m 도 안 되어 보인다. 데인져 클로즈(Danger Close : 근접위험통보)가 거의 확실하다.
- 반복한다, 현장판단을 최우선한다. 이상이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대체!’
A 10 공격기 조종사는 저 아래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두 세력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 사령부에게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탱크들과 보병들에게 죽음을 내려준 하늘의 사신이었지만, 수천 미터도 아래에 있는 물체들을 일일이 식별하는 매의 눈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는 양 쪽 다 BTR과 T72, 즉 적성 장비 교육 시간에 많이 본, 소련 냄새가 물씬 나는 장비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대충 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