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87화 (87/350)

< 23장. 인민의 이름으로 (2) >

23장. 인민의 이름으로 (2)

조선인민군이 다국적 군 편에 서서 걸프전에 참가할 것이라는 총서기의 결단은 여러 곳에서, 북조선 국내외를 비롯해 여러 국가의 여러 사람들에게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그 파문은 미국 뿐 만 아니라 대한민국, 그리고 물론 북조선 내부에도 상당히 큰 충격을 던졌는데, 인민군이 형식상으로나마 미군 지휘 하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당에서 허락했다는 것에 놀란 대부분의 당원들과는 좀 다른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다국적군 합류가 발표되기 약 한 달 전, 1990년 7월, 국제사회에서 걸프전이라고 불리게 될 전쟁, 북조선에서는 ‘페르샤 만 전쟁’이라고 불릴 전쟁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순간에도 닛케이지수는 점점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이런 폭락을 예상하고 있던 북조선의 국부 펀드, 피오니 홀딩스와 피오니 홀딩스를 이끄는 최승일은 정환이 지시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차였다.

- 일본 시장의 풋 옵션을 전부 팔라. 매도에서 얻어진 수익은 수십 곳으로 쪼개서 일단 일본 현지와 미국 델라웨어, 말레이시아, 마카오, 모나코 등지에 세워진 페이퍼 컴퍼니로 이동, 그곳에서 빠칭코, 카지노를 비롯한 조총련과 전(前) 39호실 산하 사업체들을 이용해

세탁한 후 공화국으로 들여온다.

최승일을 비롯해 조선로동당 39호실 전 멤버들은 불법 자금 형성과 세탁에 프로들이었지만, 이 정도로 큰 자금을 굴려본 적은 그들로서도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상당한 애를 먹었다.

이번 일에서 얻어진 자금을 세탁하는데 쓰일 합법적인 신규 사업체를 만들기 위해 명의를 빌려줄 현지 범죄조직들과 당국에 뿌릴 뇌물에만 물경 1억 달러가 들어갔다.

하지만 ‘출처를 최소 수십 년 간은 확실히 추적할 수 없어야 한다’라는 점을 총서기가 특별히 강조하기도 했고, 최승일이 거칠게나마 계산해 본 예상 총 수익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으므로 별로 아깝지는 않았다.

- 물론 이 정도 자금을 동원해도 완전히 세탁이 끝나는 데만 몇 년은 걸리겠지만... 석유공사에서 석유를 생산할 즈음에 맞춘다면 의심의 시선을 피할 수 있겠습네다.

- 그렇지. ‘석유 팔아 번 돈’이라는 설명만큼 좋은 핑계가 없을 테니. 자기들 증권 시장을 털어먹었다고 일본인들에게 원한 살 일도 없지. 하여튼 일단 향후 5년은 조선투자공사의 연 평균 수익률 8%가 우리 목표일세. 할 수 있겠나?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보게.

- ........아무래도 저와 금융 일꾼 동무들에게 일 복이 터진 거 같군요. 저나 다른 39호실 출신들이 자산 운용 솜씨가 좋기는 하지만, 그 수가 너무 적습네다. 이 정도 자금 규모면 거래꾼, 트레이더가 족히 수백 명은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공화국 인민들이 은행이 뭔지

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어디서 그런 일꾼들을 구해올지...

- 그 점은 걱정 말게, 곧 런던에서 금융자본주의를 공부하고 온 김대 출신 공화국 최고 엘리트들이 돌아올 테니. 물론 당분간은 실전을 겪어본 최승일 동무 휘하 39호실 식구들이 사람 노릇하게 잘 가르쳐야겠지만... 공화국 최고 금융전사인 최승일 동무의 능력을 믿도

록 하지. 21세기가 오기 전에 연 평균 수익률 10%를 달성하면, 보상이 두둑할 걸세.

- 보상이라는 말씀은.... 로력영웅 훈장이나 공화국 영웅 칭호 같은 걸 말씀하시는 겁네까, 총서기 동지?

- 아니! 당연히 현금, 성과급을 말하는 거지! 앞으로의 공화국에서 그딴 훈장 쪼가리를 대체 어디 쓰겠나? 자본주의의 가장 큰 원동력은 개인의 이기심인데 말이야. 이제 보니 동무도 꽤 공화국스러운 면이 있었군?

‘나 원, 가끔 보면 정말로 주석님 혈통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시니...’

최승일은 한 달 전 있었던 (전혀 공산국가 지도자답지 않은) 총서기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피오니 홀딩스의 정관(定款)을 손질하는 작업을 마무리 했다.

최승일을 사장으로 하는 피오니 홀딩스는 소속상 조선로동당 휘하로서, 수익금은 전액 공화국에 귀속되어 ‘민족자본 형성과 강성대국으로의 도약을 위한 미래 밑거름’을 위해 사용된다.

공화국 법률에 따라 피오니 홀딩스 이사회 의장은 물론 김정환 조선로동당 총서기 본인이 맡으며, 투자방향을 비롯한 내부 의사결정 과정은 국가기밀로 취급된다.

그러고 보니 총서기와의 한 가지 더 떠오르는 게 있었다.

- .............아, 석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석유 선물 상품 시장도 잘 주시하고 있으라고. 앞으로 8월이 되자마자 유가가 크게 오를 테니까. 단타로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걸세.

- 네? 왜 그렇습네까, 총서기 동지? - .....그냥 사태를 지켜보다보면 알게 되네. 그 이야기는 별로 더 하고 싶지 않군. 아, 앞으로도 가끔 이런 식으로 내가 특정한 투자 방향에 대해 지시할 일이 있을 텐데, 그 때는....

- 저는 이미 닛케이지수가 금강산 구룡폭포마냥 내려가는 걸 보고 총서기의 혜안은 감히 제가 측정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네다. 결사옹위의 정신으로 받들 테니 총서기께서는 지시만 해주시면 됩네다.

- 역시 자네는 말이 잘 통해서 좋군.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 피오니 홀딩스는 곧 그 어떤 총 폭탄보다도 이 공화국을 수호할 자본주의 방패가 될 거야. 그 날까지 힘내도록 하지.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하단 말이지. 도대체 총서기 동지는 닛케이가 추락할 걸 어찌 아셨을까?’

소리 없는 전쟁 같은 국제금융의 현실 속에서 살아오며, 최승일은 운이나 (당에서 엄히 단속하지만 아직도 일반 인민들 사이에서는 은밀히 성행하는) 무속신앙에 대한 미신적 믿음 같은 건 내다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런 현실주의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총서기의 능력을 보고 있으면 나름 공화국 대다수의 인민보다 많이 보고 많이 배웠다고 자부하는 자신도 부처님 손바닥 손행자가 아닐까 의심스러워지는 경우가 요즘 들어 늘어나고 있었다.

설마 총서기는 요즘 물 건너 미제에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는 ‘백 투 더 퓨처’(너무 재밌어서 최승일도 몰래 본 적이 있었다)처럼 미래에서 돌아오기라도 한 건 아닐까?

‘......아니면 정말로 하늘이 우리 공화국을 굽어 살피셔서 정말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은 진정한 백두혈통을 내려주신 걸 수도 있고 말이지.’

교화소에도 다녀오며 죽을 고비도 넘기고 나이도 들다보니 자신도 참 별 생각을 다하게 되었다고 최승일이 속으로 혀를 차던 찰나, 문 밖에서 부하 직원 하나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자신과 같은 전(前) 39호실 출신, 이제는 피오니 홀딩스 창립 주축이 된 당의 젊은 일꾼이었다.

“최, 최승일 동지! 아, 아니, 최승일 사장 동지! 큰 일 입네다!”

“무슨 소란인가? 큰 일이라니?”

“지, 지금 쿠웨이트에서 큰 일이 터졌습네다! 이라크의 수령 후세인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인접국 쿠웨이트를 기습 공격했다고 합네다! 그리고 놀랄만한 소식이 하나 더...”

“뭐, 뭐야? 기습공격? 쿠웨이트에? 그, 그럼 그곳 유전은 어떻게 됐나?”

최승일은 황당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펜을 떨어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부터 국제 유가가 출렁거리는 게 그의 눈에 선해서인지, 부하 직원이 끝부분에 덧붙인 말은 그의 귀에 좀 늦게 들어왔다.

“쿠웨이트 유전은 싸그리 이라크 군에게 점령됐다고 들었습니다! 그, 그리고 그 곳에 위치한 영국 유전에서 연수 중이던 우리 공화국의 로동자 동무들이 이라크 군에 전부 억류되었다고..... 이미 그중에는 사상자도 생겼답니다!”

“그거이 정말인가? 총서기께서는? 아, 아니 그 전에 놀랄만한 소식이라는 게 뭔지 부터 말해보게.”

“그게... 놀라지 마십시오, 사장 동지. 방금 총서기께서 정치국 간부 동지들과 회의에 들어가셨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미군 지휘를 받아서 저희 인민군을 다국적 군에 합류시켜 후세인 놈을 치기로 결정하실지도 모른다고...”

“..... 할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분명히 하실 걸세.”

“네?”

“총서기께서는 우리 인민군을 다국적 군에 합류시켜 미제 군대와 같이 싸우게 하실 참이야. 그러니 우리는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하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거는....”

‘아무리 총서기 이후 새 시대가 왔다지만 벌써부터 그렇게 할까요?’라고 묻는 듯한 얼굴로 직원이 최승일을 바라봤지만 그는 확신했다. 벌써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까지 희미하게나마 있었던 의심이 사라지고 빠르게 계산이 오가고 있었다.

“유가가 오르고 있겠군. 하지만 다시 진정되기까지는 오래 안 갈 기야. 총서기께서 미군 편에 서기로 하셨다면 그건 미군이 이기는 전쟁이라는 이야기고. 곧 이라크 군은 격퇴될 테지. 그러니 그 전까지 최대한 돈을 긁어모아야한다.”

“....네? 사장 동지, 지금 무슨 말씀을...”

“뭘 멀거니 보고 있나? 어서 움직이게! 연 평균 수익률 8% 달성이 목표라는 총서기 지시를 알아먹지 못했나? 금융 전투 목표 달성에 실패해서 당성(黨性)에 의심을 사고 싶은 건가?”

“예, 예!”

한 편, 이러한 경악은 지구 반대편, 미 대륙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었다.

“상원의장, 하원의장,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 밤 우리는 비극적이면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라크의 페르시아 만 침공의 증인으로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험, 험. 내 목소리 어떤가?”

“아주 훌륭하십니다, 각하. 그 정도면 참전을 망설이는 의원들은 물론이고 국민들도 각하 편을 들어 국제질서 수호의 대의명분을 지지하게 될 겁니다.”

“좋네, 그럼 계속하지. ......8월 2일 이른 아침,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협상을 통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쿠웨이트를 침공했습니다. 약속을 믿고 있던 약한 이웃 국가 쿠웨이트를 막강한 이라크 군대가 침공했고, 사흘 만에 12만에 달하는

병력과 850대의 탱크가 쿠웨이트로 진입한 후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협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습니다. 이 때 나는 이 침략을 저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워싱턴 DC의 가장 유명한, 아니 어쩌면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할지도 모르는 건물의 한 방에서 한 남자가 텔레프롬프터(연설이나 대본을 화자에게 전달해주는 장치)를 보며 연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보좌관들과 비서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긴장된 얼굴로, 하지만 묵묵히 그 중년의 백인 남성이 연설문을 읽는 걸 보고 있었다.

“......이러한 목표는 미국만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는 UN 안전보장이사회가 5주 동안 다섯 번에 걸쳐 승인한 목표입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원칙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만의 안정은 이들 국가의 이익에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이 전쟁은

사담 후세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과 이라크 간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이라크가 전 세계를 상대로 도발한 전쟁입니다. .....그래, 이래야지. 전 세계... 미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도발했다는 부분이 중요해.”

‘아무도 이게 제 2의 베트남이 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놈의 재정 적자가 여기서 더 늘어났다가는 이 집에서 4년만 있다가 이사 가야 될 수도 있고 말이지.’

연설문을 읽으며 연습에 몰두하던 남성, 미국 제41대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지난 정부부터 미친 듯이 늘어나기 시작한 정부 적자를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가 결의한 이 전쟁이 후세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 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석유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미국의 중동 영향력을 후세인 그 미친 놈이 이렇게 대놓고 능욕하지만 않았어도 그도 이 전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을 것이다.

‘이미 하기로 결정한 이상 어쩔 수 없지. 제발 전쟁이 길어져서 돈을 물 쓰듯 하는 일만 없었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더 재정에 빨간 불이 켜지면 민주당에서 나를 뭐라 씹어댈지 원...’

지상군 파병은 공군과 달리 돈 잡아먹는 늪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번 파병의 총지휘를 맡은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Schwarzkopf)를 포함한 모든 군인들이 한 목소리로 ‘베트남 전쟁 이래 가장 큰 전쟁’이 될 것이라 외쳐대서 그도 별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을 충분히 고려한 부시와 그의 각료들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로, 전세계 국가들, 전통적 우방인 유럽은 물론이고 심지어 얼마 전에는 적대국인 시리아까지 다국적군 참가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자기 초기 공약이었던 ‘증세 없음’을 번복해야될지도 모른다고 한숨을 내쉬며 부시가 연설문 종이를 들어 올리려던 찰나, 급히 집무실 문이 열리며 제복을 입은 한 흑인 남성이 들어왔다.

“파월 장군? 퇴근한 줄 알았는데,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인가?” “각하, 연락도 없이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유엔 대사로부터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놀라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노쓰코리아... 북한 외무장관이 방금 대 이라크 다국적 군에 자국군의 참가를 표명했습니다.”

“...뭐라고?”

합동참모본부 의장, 콜린 파월의 믿기지 않는 소식에 툭, 하고 부시는 들고 있던 연설문들을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움에서 벗어난 그는 파월에게 다가가 급히 물었다.

“노쓰 코리아...? 북한 말인가? 우리가 아는 그... 사우스 친구들하고 투닥거리는 그 북한 말이지? 정말 그들이 이번 파병에 참가하겠다고 한 건가?”

“그렇습니다. 그것도 그쪽 당국자 말에 의하면 아버지에게 자리를 물려받아 새로 부임한 젊은 20대 총서기가 내린 결정이라고 합니다.”

“Hell, 믿겨지지 않는군. 소련이야 그렇다 치고.... 중국인들이 별로 안 좋아할 텐데,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는 건가, 그... 김이라는 친구? 이름이 김정환이었나?”

“네, 얼마 전 제가 이라크 군의 쿠웨이트 중요 시설 점령 상황을 브리핑해드린 거 기억나십니까? 이라크 군이 그쪽 유전을 점령할 때 그곳에서 영국인들과 일하던 노동자 몇을 살해했습니다. 공식적인 명분은 그겁니다만....”

‘물론 그것만 있는 건 아니지요’라는 표정으로 뒷말을 흐리는 콜린 파월을 보고 부시도 바로 눈치를 채고 눈을 빛냈다.

유엔 주재 미국 대사와 중국 연락사무소장, CIA 국장을 지내며 국제 외교전에서 잔뼈가 굵은 그다.

태평양 건너편 극동아시아의 공산주의 국가지도자의 결정 이면에 숨겨진 진의를 알아채는 데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북한이 그렇게 자국민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국가는 분명히 아니었는데... 이건 우리에 대한 화해의 제스처, 평화의 비둘기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각하. 최근의 개혁개방 정책, 석유를 미끼로 한 영국인들과의 수교 등을 볼 때 그 젊은 총서기가 드디어 자기 세습 왕국의 문호를 열기로 한 거 같군요. 그리고 그 왕국은 앞으로 친미 국가가 될 의사가 있다고 말한 거고요.”

“지금 당장 그 쪽과 통화할 수 있겠나? 파병에 대한 비공식적 감사인사를 겸해서 속을 좀 알아봐야겠어.”

급하게 방 밖으로 나가 연락장교를 부르려 하는 부시를 파월이 잠시 제지했다.

“침착하십시오, 각하. 좋은 중고차일수록 딜러의 감언이설을 조심해야 하는 법입니다. 우리에게는 신경 써야 할 코리아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 아아. 그렇지. 하기야 속도 조절을 안 하면 싸우스 친구들이 불안해 할 테니까 말이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쪽은 지금 어떤가? 자기들 숙적이 우리와 친구가 되겠다니 아마 기절초풍하고 있을 텐데 말이지.”

“그 쪽 소식도 유엔에서 같이 왔습니다. 한국 대표 얼굴이 시퍼랬다고 하더군요. 즉시 우리 대사와 접촉해서 음.... 그러니까.... ‘빨갱이들의 개수작’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허, 이거 잘만 하면 우리에게 꽤 큰 호재가 될 수도 있겠군. 당연히 파병 이야기도 했겠지?”

“물론입니다. 아직 의회 통과고 뭐고 안 됐지만, 이런 상황이니 한국에선 어쩌면 1만 명 이상의 대규모 파병을 할 가능성이 있으니 한미동맹이 굳건함을 의심하지 말아달라고 하더군요. 거의 악몽이라고 믿고 싶은 거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좋았어. 어쩌면 진짜로 지상군 파견 규모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르겠군.’

부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래도 주축이 미군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정말로 후에 증세를 하게 되더라도 대폭 증세와 소폭 증세는 엄연히 유권자들에게 다르게 들리는 법 아닌가.

“국무부와 국방부는 뭐라고 하나? 북한이 정말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을까?” “제임스 베이커 국무부 장관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소련이라는 침몰선에서 쥐들이 탈출하는 중이라고요. 명분도 확실하니 이 기회에 우리 수교국을 하나 더 늘리는 게 어떻겠냐고 합니다. 특히 중국이 요즘 저런 상황이니, 이 관계를 향

후 잘만 관리한다면.... 아시잖습니까? 대 중국 지렛대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겁니다.”

“흠, 그렇군. 좋아. 하지만 국방부 쪽도 들어봐야겠지. 딕(Dick)은 뭐라고 하나?”

여기서 딕이란 현재 국방부 장관, 리처드 브루스 체니(Richard Bruce Dick Cheney)를 말하지만, 조지 부시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딕 체니, 딕이라고 불렀다.

“그쪽은 좀 부정적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편을 바꾸는 놈들은 믿을 수 없다고 전화통화에서 그러더군요. 각하께도 소련의 3등 위성국가에게 속지 않도록 주의하시라 전해달라고 딕 체니 장관이 제게 부탁했습니다.”

“역시나로군. 냉전도 끝나가는데 그 친구는 가끔 보면 너무.... 강경하단 말이지. 무조건 총을 쏜다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는데 말이야.”

부시는 ‘과격하다’라고 말하려다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에 급히 단어를 바꾸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임기 초에는 그저 차분하고 식견 있는 줄로만 알았던 친구가 요즘 들어 왜 갑자기 이렇게 강경해졌는지 그로서도 알 도리가 없었다.

대략 1년 전 천안문 탱크맨 사태 때부터 인 듯 했는데, 갑자기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 강경발언을 쏟아내더니, 얼마 전에는 중국을 새로운 악의 추축국(Axis of power)로 지정해야 한다고 발언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중국에 대한 강성 경제제재를 역설하고 붕괴해가는 소련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고 대통령인 그와 백악관 관료들에게 슬슬 바람을 넣고 있는 것도 딕 체니 바로 그였다.

‘거기에 입을 놀려서 혼을 빼놓고 설득하는 능력은 또 얼마나 뛰어난지, 그나마 나니까 다행이었지. 국제외교 경력이 일천하거나 귀가 얇은 친구가 대통령이었으면 정말로 이 미국에, 아니, 전세계에 재앙이 왔을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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