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장. 인민의 이름으로 (1) >
23장. 인민의 이름으로 (1)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공화국 수비대는 단 4시간 만에 쿠웨이트 군의 저항을 무너뜨리고 쿠웨이트의 수도, 쿠웨이트 시티로 진격해 들어갔다.
애초에 국토가 작은 데다 인구수도 많지 않은 쿠웨이트 군은 순식간에 돌파당하고 쿠웨이트 내의 모든 중요시설들은 이라크군에게 그 통제권이 넘어갔다.
그리고 이 소식은 날이 갈수록 발달하면서 전 지구를 지구촌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하나로 묶어놓은 국제 통신망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 군, 주요시설 점거 후 이라크에 합병 선언. 쿠웨이트 왕족들은 사우디 아라비아로 망명.
- 전문가들, 후세인의 갑작스러운 침공 결단 주 원인을 ‘석유’로 꼽아... 쿠웨이트의 석유 초과 생산이 이라크에 경제적 타격 입혀.
- 소련, 중국 침묵. 미美 부시 대통령, 캠프 데이비드에서 ‘명백한 침략... 주권국가 침공 용납하지 않을 것’ 선언.
- 다국적 군, 이라크 해상 봉쇄 개시. 후세인 협상에 응할 가능성 낮아.... 미군 주축으로 한 다국적 군 소집되면 국군 참전 가능성?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국제사회(와 미국)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신속했다.
침공 후 며칠이 안 되어 유엔 안보리가 소집되었고 이라크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제재 결의가 통과되었으나, 경제제재 정도로 후세인이 굴복할 것이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으리라는 건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일주일 만에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의 인접국가 사우디아라비아에 군 병력을 파견한다고 발표했다.
무력 사용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후세인을 쿠웨이트에서 몰아내는 일은 물론 미군이 대부분 떠맡게 된다는 것 역시도 많은 사람들이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21세기를 눈앞에 둔 현 시점에서, 대규모 무력 사용에는 그 무엇보다 명분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미국 정책 결정권자들은 최대한 다양한 국가들의 참전을 이끌어내 이 작전을 ‘미국의 전쟁’이 아닌 ‘주권국가의 침탈에 결연히 대항하는 유엔의 전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로서도 아직 친 소련, 구 공산주의 진영 국가 중 이 다국적군에 가담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는 오래 전부터 이라크와 불구대천지 원수인 시리아 정도로만 짐작하고 있었다.
“........쿠웨이트의 우리 기술자 동무들 중 사망자가 생겼다고?”
“그, 그렇습네다, 총서기 동지.”
“자세히 말해보게.”
정치국 회의실 책상을 나직하게 울리는 정환의 낮은 목소리에 홍계성과 장성택을 대표로 하는 당군의 간부들은 전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라크와는 전대 장군 시절부터 군사 협력을 비롯해 제법 친분이 있던 국가였지만, 아무래도 이번은 그 친분도 하 무소용이 될 듯 했다.
“...그거이... 이라크 군, 그러니까 공화국 수비대가 쿠웨이트를 점령하고 현지인을 제외한 외국인들을 전부 호텔 한 곳에 몰아놓으려고 했던 모양입네다... 그런데 기술자 동무들 중 일부가 그 지시에 반항하다가 그만....”
“....한 곳에 몰아놓으려고 했다라... 그러니까 인질로 쓰기 위해서였겠군? 그 와중에서 사망자가 나온 것이고.”
“아무래도 그런 듯 합네다.”
‘위험에 처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제3국의 인질이니만큼 죽을 줄은 몰랐는데... 그들은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는 건가....?’
잠시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발로에 정환은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비록 그는 미약한 죄책감과 슬픔에서 한 행동이었지만, 테이블에 함께 앉아있던 다른 간부들의 눈에는 이런 젊은 수령의 행동이 분노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속으로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당내외에서 총서기께서는 (성격이 지랄병 환자 같은 김정일과는 달리) 평소에는 글방 서생처럼 차분하다가도 한번 결단하면 전대 혁명 원로들도 단박에 기관총으로 쏴죽일 만큼 랭혈(냉혈)하고 잔인한 면모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 차였다.
그런 정보를 토대로 지금 상황에서 총서기가 느낄 감정은, 격렬한 분노 외에는 달리 짐작이 가질 않는 것이다.
기껏 석유라는 공화국 창건 이래 손가락에 꼽을 대(大)경사가 일어나 한시라도 빨리 영국 놈들에게 그걸 캐낼 기술을 배워오라고 보내놨더니, 후세인인가 뭔가 하는 왠 잡놈이 끼어들어 (이제는 꿈이 아니게 된) 강성대국 건설에 어깃장을 놓는다.
짜증과 분노가 안 솟구치는 게 이상한 상황인 것이다.
절대권력자의 기분을 짐작하고 미리 비위를 맞추는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북조선에서 생존에 필수적인 스킬 중 하나다.
당군 할 것 없이 모두가 총서기의 의중을 정확히 읽어내고 그의 입맛에 맞을 문구를 생각해내려고 머리 굴리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였으나, 이내 총서기 본인이 고개를 들면서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의외로 침착했다.
‘이제 와서 돌이킬 방법은 없다. 아니, 오히려 참전 명분이 더욱 확고해졌으니 잘 됐다면 잘 된 일이지. 철인(哲人)정치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서 죄책감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쇳덩이, 철인(鐵人)이 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거 후세인인가 하는 놈, 미치광이라더니 듣던 대로 정신이 보통 나간 놈이 아닌 거 같군. 내가 알기로는 그 동네... 중동에서도 악명이 자자하다고 들었는데, 맞나?”
“그, 그렇습네다. 듣기로는 본인과 가솔들의 부정축재가 하늘에 닿은 데다 걸핏하면 의심이 가는 놈을 총으로 쏴죽이고, 죄 지은 자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군을 몰살시켜서 이라크 인민들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합네다.”
“친족 정치에 연좌제라... 그거 참으로 무도(無道)한 놈이군 그래. 그렇게 인민들을 괴롭혀서야 어디 인민들이 마음 편히 살겠나? 물론 미제 놈들도 나쁜 짓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저래서야 저놈이 그걸 비판할 자격이 없지, 쯧.”
“..........”
정환의 비웃는 내용은 공화국 인민들에게 뭔가 남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익숙했지만, 그런 생각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낼 간부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이내 정환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홍계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홍 차수 동무. 내가 물어볼 게 하나 있네.”
“예, 언제든 물어보십시오. 총서기 동지!”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대의 정식 이름이 뭔가?”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일부 계산이 빠른 관료들과 군관들은 정환이 이미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알아차리고 소리 내지 않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놀라워 한 진짜 이유는, 그 결단 자체보다는 이런 결단이 이렇게 빨리 현실로 다가올 줄은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인민의 군대, 조선인민군입네다! 총서기 동지!”
“그렇소. 그런데 인민을 지킨다는 그 인민군대가 정작 그 인민을 사지에 버려둔대서야 우리가 인민들에게 면이 안 서겠지. 안 그렇소, 동무들?”
“그, 그렇습네다.”
정환의 말에 담긴 뜻에 테이블에 소리 없는 충격이 내려앉았다.
저 말은 그러니까.....
“총서기, 그 말씀은 우리가 기술자 동무들을 구출하기 위해 다국적 군에 참가한다는....”
“그렇게 되겠지.”
“....다국적 군은 미군들을 주축으로 구성될 텐데, 그렇다면 우리 인민군 하전사들을 미군 장령들의 지휘 하에 놓으신다는 말입네까?”
누군가가 ‘이제 친미하실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라는 내심이 역력히 드러나는 말투로 회의석상 누군가가 물었지만, 정환은 여전히 태연했다.
“홍 차수가 말했듯 우리 조선인민군은 말 그대로 인민의 군이요. 그리고 우리 인민군의 원정은 인민의 적, 사담 후세인에게 억류된 우리 기술자 동무들을 구출하고 타지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한 우리 공화국 인민의 목숨 값에 대해 인민의 이름으로 불벼락을 내려 징계하기 위함인데, 이런 대의를 위해 미제 군대와 잠시 협력하는 것 정도는 우리가 해량해야 하지 않겠소?”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게다가 그 후세인이라는 놈 하는 짓거리를 가만 들어보고 있으니 참으로 인민의 적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놈이로군. 우리 기술자 동무들을 구출하기 위함도 있지만, 후세인 놈의 제국주의적 책동에 고통 받는 쿠웨이트 인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 조선인민군이 나선다면 차후 련합국 기구(유엔) 가입에도 우리가 남조선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을 거요. 그렇지 않겠소?”
“....중국과 쏘련 동무들에게는 뭐라고 하실 생각입네까, 총서기 동지?”
그래도 미제 군대와 협력한다는 사실에 여전히 뭔가 껄적지근했던 장령 중 하나가 소심한 저항을 하듯 그렇게 물었지만 정환은 이미 뭐라고 대답할지 다 준비되어 있었다.
“아, 인민군대가 고통 받는 인민을 구출하겠다는 데 뭐 그리 말이 많겠소? 인민군대가 인민을 위해 싸워야지, 그럼 도대체 존재 목적이 뭐요? 하기야 요즘 중국에서 벌여대는 짓거리들을 보면 그 동네 인민해방군이 과연 정말로 인민의 군대인지 의심스럽기는 하더군.”
“....흐, 흠. 총서기 동지. 아무래도 그거이는...”
“걱정 마시오, 장 부장 동지. 당연히 온업담 대사 동지에게 곧바로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을 테니. 아무튼 이리 명분이 확실하니, 중국에서도 우리가 미제 군대와 싸워도 뭐라 하지는 못할 거라 이 말이오. 그럼 남는 건 소비에트 동무들인데, 그 동무들이야 지금 자기들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 바쁘지 않겠소?”
살짝 헛기침을 하는 장성택에게 너무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젓고는 정환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중국 놈들이 미국과 가까워지려는 낌새만 보여도 경기를 일으키는 놈들이라고 해도, 이렇게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면 외교적으로 깽판 치기도 힘들겠지. 지들 딴에는 인민을 지키는 인민군대니까 말이야. 행동은 전혀 아니올시다 지만.’
정환은 이전부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걸프전 참전은 생각하고 있었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공화국과 중국과의 관계였다.
오월동주니 믿을 수 없는 혈맹이니 해도 결국 중국은 현재 북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강대국, 게다가 얼마 안 되는 수교국 중 하나인 것이다.
천안문 사건으로 인하여 원 역사보다 한중수교가 좀 늦어지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나날이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해감에 따라 북조선과 중국은 서로에게 있어서 쉽게 버릴 수 없는 외교 상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머지않은 시일 내에 북조선이 개혁개방을 해서 자본주의 국가가 된다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거대한 시장이 바로 중국 아닌가.
15년 쯤 후라면 또 모르겠지만 최소 10년 간은 값싼 가격만을 무기로 수출시장에서 싸워야 할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북조선 기업들에게 중국 시장은 물고기에게 물 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였다.
그게 바로 정환이 오랜 시간을 들여, 그리고 국가지도자는 장기말을 버린다는 심정으로 정치에 임해야 함을 스스로에게 되뇌어가며 기술자들을 사지로 보내가며 명분을 마련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러한 전략은 훌륭히 제 기능을 해서, 심지어 자타공인 친중파인 장성택 조직지도부장도 이번만큼은 중국이 아무런 군소리를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번 일은 총서기 말이 맞다. 이 정도로 명분이 확실하면 중국에서도 트집 잡기 힘들 터... 설마 총서기는 이걸 짐작하고 쿠웨이트로 기술자들을 보낸 게 아닌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주석님이 축지법을 쓰신다는 거이도 그냥 노래 가사인데 신통력을 가진 게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이미 련합국기구(유엔)에 김용건 외무상이 가 있소. 홍 차수와 백 중장 동무는 미군과 협력하여 이라크에 파병할 우리 인민군대의 이라크 원정군을 편성하도록 하시오.”
“따르갔습니다, 총서기 동지.”
“선전선동부와 현 부장은 즉시 기사와 방송을 통해 이 사태를 일반 인민들에게 알리도록 하시오. 그리고 우리 인민군이 기술자 동무들을 구하고 인민을 수호한다는 본분을 다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다는 사실 역시.”
“알겠습니다. 동시에 후세인의 간악한 제국주의자로서의 면모와 인민들을 억압하는 잘못된 지도자라는 사실 또한 집중적으로 보도하도록 하겠어요.”
‘그에 비해 우리 총서기께서는 인민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아끼신다라고 비교 기사를 내면 효과가 곱절이겠군요.’
벌써부터 프로파간다를 구상하는 현영숙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환은 정치국 국원들에게 당부하며 결정된 사실을 선포했다.
“사담 후세인과 우리 공화국이 전대 주석님 시절에 어느 정도 친교가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가 우리 로동자들 동무들을 살해한 이상, 그 후세인 놈은 이제부터 나와, 이 공화국과, 나아가 인민의 적이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동무들은 그걸 알아두기를 바라겠소.”
“알갔습네다! 총서기 동지!”
총서기의 지시가 떨어지자 곧 당군정의 모든 기관들은 행동에 돌입했다.
육군 정찰여단을 주축으로 한 ‘조선인민군 인민지원여단’은 급히 증액된 예산으로 장비와 탄약 보강에 나섰고, 조선중앙방송을 비롯한 공화국의 관영 언론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인민의 적’ 후세인 규탄에 나섰다.
로동신문 1면에는 ‘총서기께서 인민의 이름으로 공화국의 적 후세인에게 선전포고한다’라는 제목 아래에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는 후세인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그 옆에는 마치 대비를 이루듯 눈물을 흘리는 기술자 유가족들과 그들을 위로하는 총서기의 사진이 실렸다.
그리고 1990년 8월 10일, 북조선 외무상 김용건은 유엔에서 미,영,프, 서독과 아랍 12개국으로 구성된 다국적 군에 참가 의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