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장. 개전(開戰) (2) >
22장. 개전(開戰) (2)
- 장성택 부장 동지에게 수령으로서 명령하겠네. 교화소에 갇힌 무고한 인민들, 전대 장군 시절에 반당, 반혁명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갇힌 이들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시작하도록 하지. 모든 인적사항들은 내가 전부 재검토할 것이고 최종 승인도 내게 받도록 하게. 그리고 그 중 억울하게 갇혔거나 죄가 없는 자들은 사면령(赦免令)을 내려 복권시키거나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도록 하지.
- ......아, 알갔습니다! 그런데 억울하다 하시면 어떤....
- 말 그대로 죄목과 실제 저지른 죄가 다른 자들! 내가 알기로는 전대 장군... 아니, 이제는 그냥 터놓고 김정일이라고 부르지. 김정일이 시절에 그가 자주 찾던 특각에 거주하는 애첩들에 대해서 누설했다가 ‘반혁명적 언동‘인가 하는 얼토당토 않는 죄목으로 교화소에 간 호위부 군관들도 제법 되는 걸로 아는데? 내 말이 틀린가?
- ........ 총서기께서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 그런 사례는 그나마 양반이고, 주석께서 살아계실 적 제 놈의 여성편력을 지적하시자 그 분 귀에 들어갈까 자기 아이를 밴 여성동무를 쏴 죽인 적도 있다지? 심지어는 도로에서 자기 전용차량을 늦게 알아보고 뒤늦게 정차했다는 이유로 해당 차량의 운전사를 교화소로 보낸 적도 있지, 아마. 이것도 맞나?
- ..................그렇....
- 쯧,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장군이라는 칭호가 참으로 아까운 작자야. 뭐 피는 못 속인다고 하니 그게 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안 봐도 알겠지만... 하여튼 그럼 이제 내가 무슨 이야기하는지 알겠군. 즉시 조치하도록 하게.
- 알갔습니다!
- 당연하지만 진짜 중범죄자, 살인강도 같은 놈들은 그대로 가둬두게. 수형자가 대폭 줄었으니 교화소도 많이 없애야겠지만, 그런 놈들을 위해서라도 한두 군데는 남겨둬야겠군.
총서기의 지시는 곧 문서화 되고 행정명령이 되어, 새해 첫날이 지나고 얼마 안 되어 조선중앙방송과 평양 TV, JBS 등은 대규모 사면령을 발표했다.
새해도 되었겠다, 안 그래도 새로운 최고지도자의 취임으로 뭔가 바뀔 것 같다는 들뜬 기분에 취해있던 인민들은 자신들의 기대가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기쁨에 환호성을 질렀다.
- 당과 서기, 그리고 공화국의 목소리를 가장 빠르게 전달하는 방송, JBS입니다. 오늘 총서기께서는 취임일성으로 대규모 사면령을 발표하셨습니다. 지금 화면에 보시는 것처럼 온 평양 공민들은 광장에 몰려나와 총서기 동지의 관대함에 만세를 부르고 있습니다.
‘총서기 동지 만세! 드디어 좋은 세상이 공화국에 왔다!’
‘교화소에 갔던 오마니가 돌아오셨습네다....!! 전대 장군님 시절에 주석님 시절보다 배급이 적어졌다고 불평한 게 유일한 죄였는데... 총서기께 감읍할 따름입네다.’
‘오빠가 월남한 이후 저희 식구들은 줄줄이 사상이 의심스러운 혈통을 가진 적대계층으로 몰렸습네다. 이제야 고향에 돌아가게 되다니....’
‘저희 아바디는 대학 교수셨는데, 저서에 이조(李朝) 시절 력사를 좋게 썼다고 부농을 미화하는 계급의 적, 반동으로 몰려서.... 그래도 마지막은 집에서 보내실 수 있으실 거 같습네다.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총서기 동지!’
그 밖에 수많은 기상천외한 ‘수감이유’들이 있었지만, 가장 황당하면서도 잔인한 경우는 바로 이런 경우였다.
- 장 부장 동무. 여기 이 동무는 출신 성분도 좋고 당성 검사도 매번 통과했는데 왜 여기 자강도의 교화소로 보내졌나?
- 아...... 고거이......
- 무슨 내가 모르는 문제라도 있나?
- 휴우...... 이 동무는 선천적으로 언청이입니다. 그래서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공화국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보위부에서 교화소로 보낼 것을 명령했습니다.
- .......하하. 이것 참......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안 좋은 영향이라...... 참으로 대단한 수감이유로군 그래.
- 저도 그들이 가여웠지만 어쩌겠습니까,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을......
바로 장애인인 경우였다.
소위 ‘난쟁이 병’이라고 불리는 왜소증, 소아마비, 정신지체, 자폐아 등 각종 심신장애자들은 ‘불량한 종자를 퍼뜨려 공화국을 오염시키면 안 되기 때문에’ 49호 병동이라 불리는 함경도나 자강도의 특수 교화소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들은 휴식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린 건 물론이고, 생식 기능을 없애버리는 피임 주사까지 맞아야 했다.
서류와 실무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이러한 장애인들의 수용은 1970년대부터 이루어졌지만, 절정에 달한 건 대략 3년 전, 그러니까 86년도 부터였는데, 세계학생축전을 맞아 평양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조선민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보이기 위해 장애인들을 평양에서 싹 쓸어 담았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평양은 장애인이 없는 도시여야 하고, 그걸 외부에 선전하기 위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장애인 동무들을 전부 함경도 종성에 있는 교화소로 보냈다, 이 말인가?
- 그렇습네다! 총서기 동지께서도 잘 아시는 것처럼,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조선 민족 중에는 장애가 있는 씨종자가 있을 수가 없습네다!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지 않습네까!
- .......알았네, 물러가게.
‘이런 철지난 우생학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놈도 있다는 게 또 문제로군. 내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이런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이 모든 일들을 서류상으로나마 접하면서 몇 년 동안 산전수전을 겪어 나름 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에 좀 익숙해졌다고 여긴 정환조차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혹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자신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참상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보아왔던 건 새발의 피였지. 내가 경치 좋은 특각 하나를 개조해서 요양소로 만들어 장애인 동무들 쉼터를 준 건 생산성과 수익률 같은 숫자놀음을 가까이 하는 최승일 동무 견지에서 보면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
“아니오, 총서기께서는 진실로 만대에 남으실 업적을 세우신 겁니다. 총서기 동지의 영단은 아마 후세가 널리 기억하여 대대로 인민들의 칭송을 받으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흠, 입 발린 소리는 잘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잘못 봤나보군. 최승일 동무?”
정환의 장난기 섞인 놀림에도 최승일은 여전히 진지했다.
그의 강팍한 얼굴에 박힌 눈동자에서 진심 어린 감복과 찬미의 빛이 보이자 정환도 웃음기를 잠시 거둘 수밖에 없었다.
“믿어주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타 당 간부들처럼 뺀질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거기 다녀온 적이 있기에 교화소가 어떤 곳인지 압니다. 자식이 부모를 배신하고 형제가 형제를 팔아먹게 만드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만드는 곳이죠. 그만큼 잔혹하니까 말입네다.”
“...........그렇지, 내가 깜박했군.”
정환은 잠시 당황하여 입을 못 열다가 끝내 대충 얼버무렸다.
여태까지 계산적이고 각박한 태도를 보여 왔던 최승일의 진심을 봤던 탓이었다.
“그나저나 장성택 부장 동지께서는 뭐라고 안 하셨습네까? 부장 동지 성정에 분명히 교화소에 있던 동무들을 사회로 내보내면 체제가 불안정해지고 총서기께 불만을 가진 반동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고 조언하셨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물론 했네. 그래서 나도 대답해줬지.”
“......뭐라고 대답하셨길래....”
“뒤집어씌울 놈을 찾아서 책임을 떠넘기면 된다고 말이지. 총살자들 명단을 보여주자 장 부장 동무도 좋아라 하더군.”
- 가장 바른 소식, 가장 옳은 소식만을 전하는 평양TV, PTV입니다. 인민 시청자 여러분, 오늘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 밝혀졌습니다. 반부패수사국의 수사 결과, 군 수뇌부들 중 상당수가 무고한 인민을 감금 고문하는 패륜무도한 교화소 운영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연루된 관계자 중에는 통탄스럽게도 빨치산 1세대, 혁명 원로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하고 있습니다.
- 오진우! 리을설! 최광! 조명록! 네놈들이 당파 형성을 위하여 반대파들을 교화소로 보내 제거했다는 심증이 밝혀졌다! 따라서 사적 이득을 위해 당 조직을 부패타락시키고 당과 수령을 기만한 죄목으로 본 인민 법원은 전원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판결은 지금 즉시 집행한다!
- 이런 정신 나간....! 야, 이 간나 새끼들아! 교화소에 애먼 놈 잡아가둔 게 우리 마음대로였네? 다 주석 동지와 장군님 교시로...
- 어디서 감히 그 더러운 아가리로 거짓부렁을 놀려 돌아가신 최고존엄들을 모독하나! 네놈들에게는 총서기 동지께서 직접 극형을 주문하셨다! 끌고 나가라우!
- 초, 총서기! 제... 제발....!!!
‘흠, 뭐 당군 간부들 중에 교화소를 정치적 목적으로 안 써먹은 놈들이 없었으니 아주 거짓 죄목은 아니지. 물론 그 중심에 있던 두 사람의 죄를 모른 척 해 줄 수밖에 없다는 건 속이 좀 쓰리기는 하지만.’
감상적이 되지 말자고 정환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가 최고지도자 자리에 취임하기는 했지만, 당분간은 김일성과, 심지어 김정일의 후광까지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건 누가 뭐라 해도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판단이니까.
최소한 그의 개혁개방 정책이 인민들 모두에게 혜택을 줄 때까지는 그래야만 했다.
“혁명원로들이랍시고 거들먹거리던 노인네들이 대대기관총에 벌집이 됐으니 이제 내 앞길을 막을 사람은 없네. 군 내에 남아있을지 모를 반동들과 부패 분자들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한 셈이지. 그래도 갈 때는 나름 한 몸 바쳐서 공화국에 기여하기는 했군 그래.”
“......단호하시기까지 하군요. 정말이지 총서기께서는 수령으로서 타고 나신 분입니다.”
“칭찬 고맙군, 하지만 두 번째 지시를 내릴 때는 나로서도 좀 망설여지기는 했네.”
“공화국을 이끌어가는 기반을 직접적으로 손대셨으니 어쩔 수 있겠습니까? 반발이 있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틀렸네.”
“.......네? 동지?”
어깨를 으쓱하는 최승일의 말에 의외로 정환은 단호하게 결론을 내리면서도 부정했다.
“공화국을 이끌어가는 기반은 일반 인민들과 그들의 생산력이지 군이 아닐세. 특히나 한창 생산능력이 활발한 20대 청년 동무들을 군으로 끌어가 10년 씩 군대에 잡아두는 멍텅구리 같은 징병제는 더더욱 아니고.”
정환의 확언에 잠시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던 최승일은 5초쯤 지난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실언을 인정했다.
“....총서기 동지 말이 옳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군요. 저도 나름 자본주의 경제학을 배운 사람이라 총서기 동지의 심중을 그나마 안다고 내심 자신했는데, 이제 보니 저도 그저 어리석은 공화국 인민이었을 뿐이었군요.”
최승일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정환의 말대로, 그가 수령이 된 이후 두 번째로 손댄 것은 바로 북한의 징병제였다.
그가 수령이 된 이후 교화소 해체 다음으로 지시한 건 정치국 회의에서 징병제를 유지시키되 복무기간을 대폭 줄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전 인민 무장화를 추구하는 병영국가인 북조선인 만큼, 이러한 지시는 교화소 해체보다 더한 반발이 일어날 수도 있으리라 예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 지금 인민군 하전사 동무들의 복무기간이 어느 정도지?
- 규정상 3년 6달입니다만, 하전사들 모두의 자발적인 희생정신으로 평균적으로 5년에서 8년까지 추가적으로 복무를 하고 있습네다! 공화국 인민으로 태어나 조국강산을 수호하고 당과 수령의 은혜를 입은 것을 갚는 당연한 자세이지요.
‘퍽이나 자발적이겠군.’
정환은 속으로 그렇게 비웃은 후,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지시했다.
- 그거 참 아름다울 정도로 긴 기간이군. 이 상태에서 경제발전이 가능하면 그거야말로 기적이지. 이제부터는 일괄적으로 3년 반으로 줄이세.
최승일의 지적처럼, 이번만큼은 약간의 반발 내지는 마찰의 기운이 정치국 회의 테이블 내에 흘렀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정치국원들 중 누구도 이제는 대놓고 반발할 수는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고작’ 총서기였지만, 이제는 공화국의 최고 존엄, 최고지도자 동지 아닌가.
게다가 불과 얼마 전 총서기에게 반역하려 한 군 원로들이 기관총으로 처형되어 황천길로 갔다는 걸 알면서도 감히 그의 말에 토를 달 담량이 있는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총대를 멘 건 인민군을 대표하는 차수 홍계성이었다.
- 저기... 총서기 동지, 제게 한마디만 허락하신다면... 이번 결단은 조금만 더 숙고를 해보심이....
- 왜, 장령들, 군관들 자리 줄어드는 게 벌써 걱정되나, 홍 차수?
- 눙토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생각도 없는 건 아닙네다만... 일단 저 아래 미제와 남조선 괴뢰 군대들이 여전히 공화국을 노리려는 야욕을 거두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동지께서 미제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시는 줄은 알지만은... 게다가 그밖에 반동들의 소요사태라던가 공화국을 노리는 위협들이 많은 상황에서 하전사들 복무연한을 줄이시는 거이는 조금...
정곡을 찌르는 지적에 부인도 못하고 뒷말을 흐리는 홍계성 뿐만 아니라 정치국원 모두에게 정환은 들으라는 듯이 선포했다.
- 동무들, 지금 우리 공화국과 남조선 국방비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 줄 아나?
- .........
- 대답이 없군. 내가 대신 대답해주지. 미화로 환산하면 우리 공화국은 약 20억 불, 남조선 동무들은 약 94억 불일세. 족히 네 배 차이가 나지. 미제 쪽은 얼마냐고 물어보지 말게. 내가 그래도 인민군대 최고사령관인데 내 입으로 직접 말해주기 처참한 심경이 되니 말일세!
- ......다 저희가 불민한 탓 입네다! 총서기 동...
- 아직 내 말 안 끝났으니 끝 까지들 듣게. 옛말에, 손자병법부터 시작해서 모든 동서고금의 장군들이 하는 말이 있지. 전쟁은 곧 돈이다. 강한 군대는 강한 재정에서 나온다. 알겠나? 자강력, 나라를 지키는 국방력이란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이란 말일세. 미제 놈들의 추격기와 미싸일이 최고로 센 것도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기 때문이지. 그렇지 못한 소비에트 동무들은 지금 군대는 커녕 나라꼴을 유지하기도 벅차고. 그럼 우리 인민군대의 사정은 어떤지 아나?
어조는 조용했지만 마치 쥐를 잡듯 정치국원들, 군관들을 다그치는 정환의 말에 테이블의 다른 배석자들은 전부 유구무언이었다.
정환의 말이 차분하지만, 그런 만큼 그 기저에 강한 분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 분노의 타깃이 된 건 현재 홍계성 다음 가는 인민군의 2인자인 백승철 중장이었다.
- 백승철 중장 동무. 지금 인민군대의 최정예, 류경수 땅크 사단의 하전사들이 무얼 먹고 있는 지 대답해보게.
- 제, 제가 알기로는 명절마다 불고기를 배식해서 하전사들의 사기를 고양하고 군에 대한 당의 뜨거운 사랑을....
- 집어치우게, 무슨 만한전석도 아니고 고작 불고기를 명절에나 배식하는 게 자랑이라는 시점에서 입이 부르트도록 외치는 남조선 해방은 주정뱅이 헛소리만도 못하지. 아까 전 질문에 내가 대신 대답하자면, 류경수 땅크 사단 하전사들의 주식은 옥수수밥에 염장무일세. 우리 인민군대의 자랑이라는 최정예 기갑사단조차 이 꼴인데, 그럼 다른 부대의 하전사들은 어떨지 한 번 상상들 해보게.
역시나 유구무언.
이런 반응을 진작에 예상했던 정환은 잠시 이들의 반응을 보다가 더 다그치면 의기소침해 지겠다 싶은 시점에서 살짝 어조를 부드럽게 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 이제 내가 왜 복무 기간을 줄이자고 하는지 이해들 할 거라 믿네. 지금 있는 덩치도 주체 못하는 시점에서 더 장정들을 군으로 끌어가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차라리 다가올 개혁개방에 대비해서 노동력으로 쓰는 게 낫지.
- ........총서기 동지 말이 옳습네다.
- 물론 지금 당장 줄이자는 건 아니지. 앞으로 몇 년에 걸쳐서, 오래 복무한 하전사들 순으로 전역시키고 새롭게 입대하는 동무들부터 줄어든 복무기간을 적용시키자는 걸세. 그리고 종국에는 기갑 병력을 중심으로 한 정예 병력으로 재편해야겠지.
‘총서기 동지, 말씀하신 모든 사안들, 저희 역시 잘 알고 있습네다! 저희라고 하전사들을 잘 먹이고, 땅크, 추격기, 방사포 좋은 걸로 사서 갖다놓고 남조선과 미제에 위세 부리고 싶지 않을 리 있겠습네까? 더 사오고 싶어도 외화가 부족하고, 직접 만들자니 기술이 부족하다고 항상 당에서 하소연하는 걸 대체 저희 장령, 군관들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네까?’
...........라고 항의하고 싶은 백승철이었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열어야 할 때를 잘 구분하는 모범적인 조선인민군의 장령인 만큼 지금은 입을 다물었다.
백승철 본인이나 지금 저기서 한숨을 내쉬는 홍계성이나, 일단 김일성의 배려로 프룬제 유학을 다녀올 만큼 인민군 군관들 중 손꼽히는 엘리트다.
그들도 머리와 판단력이 있는데 지금 정환이 지적하는 문제를 전혀 몰랐을 리 없다.
오래 전부터 이 문제를 인식하고 고칠 방법을 찾아왔으나, 현실의 한계와 자신들이 가진 능력과 권한의 부족으로 인하여 손을 놓은 상태가 작금의 현실인 것이다.
나라 금고가 비었다는데 군관들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건가.
다행이도 (이전 두 명과는 달리) 정환은 부하들을 호통만 칠 뿐 대안은 제시하지 않는 무능한 우두머리가 아니었다.
“흠, 그 동지들이 권력욕은 있어도 그런 문제를 몰랐을 정도로 골이 나쁘지는 않을 텐데, 혹시 총서기 동지께 마음속으로 앙심을 품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군요. 어쨌든 공화국 곳간이 비어버린 게 그 동지들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세 번째 지시를 내렸지. 사실 오늘 자네를 여기로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고.”
그 말과 함께 정환은 이제 완전히 작동을 시작해서 서기실 한 켠을 차지하고 온갖 복잡한 그래프와 숫자들을 출력해내는 전광판을 가리켰다.
“며칠 전 닛케이지수가 사상 최고점을 찍었지. 기억하고 있나?”
“물론입니다. 동지께서 항상 시장 상황을 주시하고 있으라고 하셨지요. 취임식 전날까지도 저에게 보고를 받으셨지 않습니까.”
“닛케이지수는 곧 떨어질 거야. 즉 우리가 피오니 투자은행 명의로 보유한 주가선물 풋옵션을 팔아치울 때가 됐다는 말이지. 그 자산으로 피오니 투자은행은 피오니 홀딩스(Peony Holdings), 조선투자공사(朝鮮投資公社)로 다시 태어날 거고.”
이 시대에는 아직 국부펀드(Sovereign Wealth Fund)라는 단어가 생소할 것이라고 정환은 생각했지만, 최승일은 국제금융계에서 닳고 닳은 사람답게 금방 정환의 의도를 눈치 챈 듯 했다.
하지만 그는 신중한 성격답게 확인 차원에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뭔가가 변한다는 기쁨 때문인지 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열기를 띠며 다시 물었다.
“조선투자공사라.... 그 기관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동지? 그리고 저는 거기서 무슨 역할을 하면 됩니까?”
“이제까지 했던 것과 똑같은 일. 피오니 투자은행의 종잣돈을 불리고 증식시켜 수익을 내는 것일세. 물론,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 돈은 지도자 개인의 호강이 아니라 이 공화국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쓰일 것이고. 그럼 이제 인민의 돈놀이, 금융 천리마 전투를 시작해 보세. 자본주의는 미제 놈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