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장. 개전(開戰) (1) >
22장. 개전(開戰) (1)
프로젝터 앞에서 긴급보고를 하던 박세황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지난 달, 아니 어느새 지난 해가 되어버린 김일성 사망 사태가 남측에 알려진 이후 안기부는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군인들은 휴가가 잘렸으며 전방에는 진도개가 내려왔다.
지금 박세황의 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한숨도 북 쪽의 반응을 예상하고 향후 권력구조가 어떻게 재편될 것이냐에 대해서 관련된 모든 정보를 한 달 넘게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펼쳐서 잠을 청하며 모으느라 쌓인 피로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중간관리자의 애환이 담긴 한숨을 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지금 이 회의실에서 자신의 발표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직속 상사인 3차장 뿐 만 아니라 이 안기부의 부장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단 하나 정체를 모를 사람이라면 산천초목이 부르르 떤다는 안기부 부장 옆에서 감히 팔짱까지 끼고 있는 남성인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청와대에서 나온 사람이 분명했다.
“이제까지의 모든 정보를 취합해본 결과, 확실합니다. 1년 전 총서기 취임 당시 김정환이 선포했던 신 4대 노선, 경제특구 지정, 영국과의 관계 개선 시도 등...그리고 이번 취임사로 자신의 정책을 확실하게 대외적으로 천명했다고 봐야 합니다.”
“자세히 설명해보게.”
“남이나 북이나 국가수반의 취임사는 앞으로의 정책에 대해서 알려주는 예고편 같은 겁니다. 여기 영상을 보시면 알 수 있다시피, 6.25전쟁... 그러니까 지네들 말로 조국 해방전쟁에 대해 언급한 건 전 취임사에서 단 3초였습니다.”
박세황의 조작에 따라 전면의 스크린에 흐릿한 화질로 찍힌 김정환의 연설 장면이 재생되었다.
평양을 드나드는 현지 조선족 협력자가 신의주와 단둥을 거쳐 마침내 인천까지 보내준 귀한 영상이었다.
“김일성의 최대 업적 중 하나라는 6.25 전쟁. 그걸 왜 이렇게 짧게 언급했는지는 뒷부분을 들어보면 답이 나옵니다. ‘미제와의 대립 청산’, 심지어는 미제, 그러니까 ‘미 제국주의자’도 아니고 미합중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육이오 때 미군 폭격에 평양에 2층 이상 건물이 안 남아났다고 이를 가는 놈들이, 왜 그랬을까요?”
“그러니까 그게 미국에 관계 개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고작 1년 만에? 아직 지 애비한테 인수인계 과정도 못 거친 친구가 급커브를 너무 심하게 도는 거 아닌가?”
“그러니 중간에 브로커를 끼었겠죠. 주영 대사관이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얼마 전 베를린 장벽 붕괴 과정에서 북한이 영국 외교부 쪽에 입장을 함께 한다는 사인을 보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얼마 전 소련이 독일 재통일에 지지의사를 밝혔음에도 그 사인을 철회하지 않았고요. 아시다시피 영국은 미국과 함께 유럽에서 소련에 가장 극렬하게 대립해온 국가 중 하나입니다. 특히 KGB하고.”
여기까지 말한 박세황은 아무 말도 없이 듣고만 있는 청중의 반응을 살피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예전부터 오월동주 관계였다지만 그래도 자기네들 최고 대장인 소련의 외교적 입장과 정반대되는 포지션을 북한이 취하는 이유가 뭘까요? 간단합니다. 갈아탈 준비를 하는 거죠. 대장은 휘청거리고, 부대장인 중국은 천안문 사태 이후에 요즘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있으니, 자기들도 앞날이 불안하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대북 파트의 주축을 맡아온 사람으로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 정도 결단을 내릴 수 있다면 저 김정환이라는 친구가 명실상부하게 북의 우두머리라고 봐도 되겠지? 그럼 이제 소련 영향력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서 독자적인 길을 가기 시작하는 건가?”
“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김정환이라는 친구가 최고사령관 칭호를 받은 건 일단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증거니까요. 당분간 기습 남침 가능성 같은 건 크게 경감됐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프룬제 놈들은? 1년 전만 해도 그 놈들 사나우니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소련 비틀거리는 거 보고 분위기 파악한 모양이지?”
“지난 거사를 일으킨 강경파 프룬제 장교들도 뒷배가 있을 때나 강경파지, 자기들끼리 홀몸으로 국군, 주한미군이랑 싸우라고 하면 질색할 겁니다. 원래 자기보다 센 놈한테는 분노 조절이 잘 되는 법이지 않습니까, 하하.”
“......후우....”
‘뭐야, 재미없었나?’
나름 웃으라고 던진 회심의 농담이었는데, 반응이 영 껄쩍지근하자 박세황은 속으로 볼 멘 소리를 했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가 농담할 자리냐고 차장이 재떨이라도 던졌으면 퇴근이라도 할 수 있으니 맞을 각오하고 던진 말이었는데, 이건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고 영 반응이 밍밍하지 않은가.
그 때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듣기만 했던 팔짱 낀 남자, ‘청와대 사람’이 입을 열었다.
“잘 들었네. 박 실장. 외교부 쪽 분석과 일치하는 거 보니 신뢰해도 되겠군. 제가 거기에 몇 마디 더 얹어도 되겠습니까, 부장님?”
“아 물론입니다. 수석님.”
‘수석? 역시 청와대 쪽에서 나온 게 맞았군.‘
그것도 보통 높은 수석이 아니라 대통령의 뜻을 대리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사람임에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현 대통령의 복심이라 불리는 안기부장이 저렇게까지 예의를 차리지는 않을 테니까.
“다른 데도 아니고 북한이 친미라.... 허허허... 이거 참 자고 일어나보니 하늘이 뒤집힌 거 같군요. 저 빨갱이들이 미국하고 수교하겠다고 나설 날은 동해 바다 물 마를 때까지 안 올 줄 알았는데... 아무튼 이건 외교부 쪽에서 청와대에 건의한 말인데... 지금으로서는 여러분들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한 ‘수석’의 말에 박세황과 안기부장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는 걸까?
“만약 우리가 판단한 게 맞다면... 그러니까 북이 친미 노선을 타고, 개혁개방을 편다고 하면 그 이야기는 즉슨 우리 대한민국에도 조만간에 관계 개선 제스처를 취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이야기가 없지만...”
“거야 그렇겠지요.”
“북의 개혁개방이라는 게 뭡니까, 앞으로 사회주의 그만 하고 자본주의 하겠다 이거 아닙니까? 그런데 자본주의 하려면 제일 먼저 뭐가 필요합니까? 우리 대한민국이 배고프고 힘들었던 때를 한 번 떠올려 보세요.”
“............수석님 말씀은....”
“멀지도 않습니다. 고작해야 10년 전... 외국에서 차관 하나 더, 지원 하나 더 얻어오려고 아등바등 하고, 베트남에 사우디에 가서 달러를 벌어와, 지금의 이 발전을 이룩한 거 아닙니까. 즉 자본주의 하려면 제일 먼저 종잣돈, 자본이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건 북괴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즉, 수석님 말은 우리가 그 쪽에 자본을 빌려주자 이 말씀이십니까?”
도대체 왜?
박세황은 속으로 떠오르는 의문문을 삼키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군사정권 때처럼 남북협력을 숨겨야 하는 시대는 아니라고 하지만 빨갱이 혐의 뒤집어 씌워 무고한 사람 때려잡던 시절이 고작해야 몇 년 전이다(사실 이건 지금도 하고 있다).
청와대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그리 넉넉지도 못한 나라 곳간을 열어 북 쪽에 뭘 해주겠다는 말인가?
그런 그의 의문은 이어지는 수석의 말로 해소되었다.
“우리 대한민국이 북쪽의 국민소득을 따라잡은 지 어언 1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총알로 하는 전쟁은 몰라도 돈으로, 경제로 하는 전쟁에서는 충분히 이겼다고 자신할 수 있겠지요. 북괴들이 도중에 찬물을 끼얹기는 했지만, 지난 88올림픽으로 체제경쟁 승리는 거의 기정 사실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렇다면 대통령님 뜻은 이제 전선을 확장해서, 이 경제력을 가지고 총알로 하는 전쟁에서도 이겨보자, 이겁니다.”
“아하,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 경제력, 자본을 가지고 북 측이 딴 생각 못하게 꽁꽁 묶어두자, 수석님은 지금 청와대에서 그런 말이 나오고 있다 이 말씀이시군요.”
대통령의 오른팔에게 아부할 기회만을 노리던 3차장이 무릎을 탁 치면서 옳다꾸나 하는 어조로 말하자 수석 역시도 은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꽁꽁 묶어두기만 하겠습니까? 미국 놈들이건 일본 놈들이건 우리에게 돈 빌려준 거 가지고 사사건건 얼마나 거들먹댑니까, 그래. 그럼 이번에는 우리가 북에 대고 좀 거들먹거릴 수도 있는 거지요. 우리가 상전 노릇을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우리 경제력으로 그게 가능할까요?”
“아 왜 안 됩니까? 저기 근대 그룹 같은 곳에 나라를 위해 돈 좀 써라!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애초에 저 놈들이 손 벌릴 데가 몇 군데나 된다고... 중국하고 소련이야 요즘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쁘고, 미국하고 일본은 뭘 믿고 쟤네들에게 돈 빌려주겠습니까. 말 통하겠다 거리 가깝겠다... 저 놈들이 도로 닦고 공장 짓겠다고 돈 빌리러 올 가능성이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여기, 대한민국이란 말입니다.”
“그거야.... 그렇지요.”
“그리고 그렇게 십 년 정도만 잘만 하면 우리가 북쪽을 총 한 방 안 쏘고 통일... 그러니까 아예 흡수해버릴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최소한 통일 문제에 있어서 우리 발언권이 훨씬 세지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이건 새로운 외교 노선, 뭐라 할까요, ‘북방외교’가 아니라 ‘북진(北進)외교’ 어떻습니까? 북진!”
“허, 그거 말 되는군요. 북진외교라... 총 한 방 안 쏘고 평양까지... 하기야 전쟁 일으켜서 세간 다 태워먹는 것보다는 평화적으로 우리가 주도권을 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 그럼 지금 각하께서 첫 통일 대통령이 되시는 거군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3차장, 안기부장과 수석을 멀거니 보고 있던 박세황은 이 부분에서 수석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더욱 짙어진 것을 봤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북진외교라는 묘한 어감의 단어가 하루 이틀에 수석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역시 확신할 수 있었다.
천안문에서의 중국의 자폭으로 인해 그 진척이 최소 몇 년은 미뤄지게 생긴 북방외교를 스리슬쩍 대체하기 위한 묘수를 짜내고 짜내다가 나온 말일 게 분명했다.
어느새 안기부장과 수석은 자기들끼리 열심히 밀담을 나누느라 주변에서 박세황이 듣고 있다는 것도 잠시 까먹은 듯 했다.
“뭐 어디까지나 아직 계획 단계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일단 명분이 통일이니 박이삼이, 유민중이 같은 야당 의원들이나 좌익계 인사들도 대놓고 반대는 하지 못할 테고.. 평소에 북에 유화책을 써야 한다고 자기들이 그렇게 입 아프게 떠들어댔는데 어떻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통일 대통령이라... 헌법을 고쳐야 되기는 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요즘 보안사에서 하고 있는 그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한 번에 다 쓸어 담을 수 있을까요?”
“염려 마십시오. 안 그래도 저쪽 지도자 바뀌면서 국민 기대감도 높아졌겠다, 지지율도 올리고 시의적절하게 북진외교! 통일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5년 단임제 개헌! 이렇게 사회공기만 잘 청명하게 관리하면 개헌도 어렵지 않습니다. 북이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는 군요. 하하.”
역시나 딴 속셈들이 있으셨군.
박세황은 속으로 벌써부터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키는 상관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편으로는 경제적 흡수통일, 소위 북진외교라는 정책이 그렇게 틀렸다고도 보지 않았다.
손자병법에도 나와 있듯이, 총 안 쏘고 이길 수 있다면 그게 제일이니까.
그런데 여전히 그에게는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저놈들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타령할 때는 게임 판이, 그러니까 링이 아예 달랐으니까 안 됐지만 북이 개혁개방, 자본주의 하겠다 그러면 이건 우리가 이기는 게임입니다. 평양에 태극기 대신 근대그룹 광고판을 꽂을 날이 머지않은 거 같군요. 각하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면 뛸 듯이 기뻐하실 겝니다.”
“저기 부장님,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응? 뭐야, 박 실장.”
꿈 같은 미래를 그리던 두 사람은 그제서야 박세황의 존재를 다시 인지했는지 자세를 바로했고 그런 그들에게 박세황은 조심스럽게 현실을 알려주었다.
“만약 저 쪽이 정말로 개혁개방 과정에서 자본이 절실하다면... 왜 우리한테는 직접 아무 연락이 안 올까요? 지금도 미국에게만 관계 개선 사인을 보냈지 판문점을 통해서는 아무 소식이 없지 않습니까.”
“아, 그거야 지네 딴에는 우리 상전인 미국하고 먼저 친해두는 게 낫겠다 싶은 거겠지. 북쪽 애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데 돈 좀 꾸어달라 아쉬운 소리를 바로 하기는 힘들 거 아닌가.”
‘그것도 모르냐?’하는 눈빛으로 안기부장이 그에게 핀잔을 주고, 높으신 분들 이야기하는데 끼어든 그가 불편한지 3차장이 헛기침을 했지만, 박세황은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북측 의도가 그거 하나 뿐 일까요? 자기들도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미국하고 친하려 했다가는 외교적으로 소외당하기만 한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지금 미국이 북한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지 않겠습니까?”
북한이나 대한민국이나 기본적으로는 현재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이 영 희미한 국가들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소련, 나아가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는 마개 역할을 하는 의미가 있지만, 소련이 붕괴 직전에 이르며 중국이 경제 제재에 얻어맞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즉, 북한 문제는 현재로서는 베를린 장벽 붕괴로 유럽 쪽에 모든 관심이 쏠린 미국 외교가에 있어서 일대일로 다뤄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 북한이 미국 측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뭔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무언가, (석유라든지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이라든지)가 있지 않은 이상은.
북한이 미국에 대한 충분한 레버리지(Leverage)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통적 우방인 중국과 소련을 내팽개치듯 하고 미국에 구애한다는 건 아무리 봐도 이성적인 전략이 아니었다.
“역시 북측 새 지도자가 젊은 친구라서 뭘 좀 모르는 거 아닐까? 자기 아버지가 선생들 붙여서 과외 안 해줬나?”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북한은 이런 우리의 속셈을 꿰뚫고 외교적인 몸값 올리기를 하고 있는 걸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당분간 미국하고만 이야기할 테니, 대화하고 싶으면 너희가 먼저 와라 그거죠.”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박세황의 예측에 안기부 부장과 3차장, 수석까지 전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거 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맞장구를 쳐줄 거 아닌가.
“외교적인 몸값 올리기? 이봐, 박 실장. 지금 한미 동맹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같은데, 도대체 미국이 뭐 얻을 게 있다고 40년 우방인 우리를 내팽개치고, 같은 전선에서 중공과 북괴에 맞서 피를 흘린 우리 대한민국을 소외시키고 북한과 대화한단 말인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거기다 지금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 출신 참전용사일세. 미국 재향군인들이 전우애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지? 그리고 공화당의 큰 지지기반 중 하나가 그 재향군인들이고. 그런데 미국인들이 갑자기 머리가 돌아서 우리 대한민국을 패스하고 얼마 전까지 저기 소련과 중국에 붙어서 빨아주던 북한의 수교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
“북한이 미국에 직접 해를 가하거나 이득을 줄 능력이 있거나 하면 모르겠지만, 아직 미국에게 있어서도 북한은 그다지 믿을 수 없는 적성국가야. 나는 판문점 도끼 사건이 아직도 어제 같구만, 뭘...”
“..........하지만....”
“아 뭐 자네 직업이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는 직업이니 좋은 업무자세라는 점은 아네. 하지만 그런 일은 안 일어나. 최소한 외계인이 쳐들어와서 미국이랑 북한이랑 손 잡고 싸우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저쪽이 뭔가 심하게 오판을 내리고 있는 거겠지.”
부장의 단언에 박세황은 아무 말 않고 입을 다물었다.
박세황의 어깨가 쳐지자 자신이 그래도 좀 너무했다 싶었는지 부장은 인심 쓴다는 듯한 태도로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철야하느라 피로가 쌓여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군. 일단 한숨 돌린 거 같으니 오늘은 그만 퇴근해서 오랜만에 마누라랑 애들 얼굴 좀 보게. 내가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그토록 원하던 퇴근을 받았지만 박세황은 왠지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부장도 그렇고, 결정권자들이 너무 사태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의구심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이번에 북의 절대 권력자가 된 젊은 총서기.
과연 그는 부장의 말대로 외교라고는 하나 둘 셋도 모르는 풋내기에 불과한 걸까?
그래서 그냥 단순한 오판을 내린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뭔가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킬 어떤 복안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기를 바라야지.’
박세황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만의 하나, 천의 하나라도 그의 예상이 맞아떨어진다면 대한민국은 미국의 관심과 지원을 두고 다른 곳도 아니라 북한과 경쟁해야 하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
그로서는 자신이 생각한 가능성이 그저 피로에 의해서 생긴 과대망상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서기실이 많이 변했군요.”
“그렇네, 변한다기보다는 시대에 발 맞추는 거지만.”
최승일은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서기실의 ‘시대에 발맞추는 디자인’을 지휘하는 정환을 보며 기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라서 이제 두려울 게 없는 총서기지만, 이건 좀 빠른 변화 아닌가.
“....지금 레닌 동지의 초상화를 내리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거시는 건...”
“각국 증권시장을 보여주는 전자 상황판일세. 미국, 일본.... 물론 남조선도 있지. 저걸 들여오느라 고생 좀 했네. 서기실 동무들이 애를 많이 썼지.”
최승일의 지적처럼, 정환의 지도 아래 공화국은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다.
최고지도자이자 군 최고 지휘관 자리에 취임하자마자 정환은 그동안 반드시 해야 했지만 권한의 부족으로 손 대지 못했던 영역을 마음껏 건드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중 첫 번째는 바로 정치범수용소, 통칭 ‘교화소’라고 불리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