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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수령동지-81화 (81/350)

< 21장. 공화국의 새로운 태양 (3) >

21장. 공화국의 새로운 태양 (3)

‘수령의 여자’가 되어 아들(물론 그 아들이 지금의 아들은 아니지만)을 낳고 ‘수령’이 급사하여 그 아들이 어쩌다 공화국의 수령이 된 걸 보게 된 정환의 ‘어머니’ 김명애의 심정이 참으로 복잡할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하고 샘솟듯 눈물을 흘리는 김명애를 보며 정환 역시 참으로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흑흑... 수령님.... 이제 남은 우리들은 어찌 하라고 벌써 떠나십니까.... 이런 변이 있나...

-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머니.

‘그래, 그래도 남편 비스무리한 거였다고 눈물을 흘려주는 건가?. 아니면 여타 인민들과 비슷하게 남편이 아닌 수령을 잃은 슬픔? 어느 쪽이던.....’

가슴 아프다, 라는 말을 정환은 그때 속으로 삼켜버렸다.

죽은 김일성이 정환 입장에서야 아버지는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김명애에게 있어서는 자신에게 하나 뿐인 아들의 생부(生父)인 것이다.

비록 음지의 꽃 취급을 받아 아내로서 인정과 대우는 고사하고 단 한 번도 남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평생 동안 그런 대우를 받아왔음에도 수령에 대한 충성심인지 무슨 이유에선지 김명애가 김일성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며, 정환은 내심 ‘이 사람도 결국 세뇌된 인민들 중 하나로군.’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김명애가 하는 말을 듣고 정환은 그런 자신의 생각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녀는 김일성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생각을 해보렴, 정환아. 이제 네가 수령이 되어 이 공화국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니?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일이....이 에미는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려 숨을 쉴 수가 없구나...

- 어머니께 피해가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겁니다. 게다가 아바디 수령님께서 제게 1년 동안 많은 가르침을 주셨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당과 군의 원로 분들도 많으니 제 걱정을 하실 필요는...

- 이 에미가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다. 정환아. 제발 조심해라. 이 공화국에서 태양에 가까이 간 사람치고 무사한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이제 네가 태양이 됐으니 이 어미가 어찌 걱정이 안 되갔니? 이 에미는 주석님이 원망스럽기만 하구나. 주석님이 대체 네게서 뭘

보고 너를 험난한 당무에 끌어들이셨을까...

- ...........어머니.

- 왜 우리 모자를 그저 조용히 살게 가만 놔두지를 않는지... 무식한 여편네가 장정들, 당 간부들 하는 일에 재수 없게 끼어든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저 몸조심 하거라, 정환아. 그저 몸조심해야 돼.... 출세는 몸 성히 올라가기 어렵지만 몸 성히 내려가기는 더

어려운 법이다... 정환아... 이 에미는 정환이 네가 참으로 걱정되는 구나... 이 일을 어찌 감당하면 좋니.... 나는 네가 그저 김대 교수직이나 하면서 참한 처녀하고 결혼해 손자나 보여주면 그저 만족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중년 여인으로만 알았던 김명애의 말에 정환은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그동안 이 공화국에서, 김 씨 일가 옆에서 지내면서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고, 겪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얼마나 많이 겪어 왔을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 긴 세월동안 그녀는 칼 날 위를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지켜온 하나 남은 아들마저 영욕의 수렁으로 들어가려는 광경을 보고 애가 타는 김명애에게 정환은 정말로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으며 약속했다.

-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머니께 약조를 하나 하겠습니다. - 약조? 그거이 대체....

- 수령이 되어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까지 공화국을 잘 이끌어 인민들에게 더 이상 제가 필요 없는 날이 오면.... 그 때는 훌훌 털고 다시 이 위치로 내려오겠습니다. 약조드리죠.

- .....정말이니? 하지만 그런 거이 되갔니?

- 물론입니다. 어머니, 제가 어찌 어머니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어쩌면 그 때 와서 총장 동지가 저를 받아주면, 그 때는 정말로 김대 교수직을 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니 그때까지 어머니가 참한 처녀나 구해놓으세요. 하하.

어쨌거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드디어 운구차가 목적지인 김일성 광장에 도달함으로써 장례식은 일단락되었다.

김일성의 유체는 그가 평소에 소원했던 대로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히게 될 것이다.

원 역사에서 그를 신격화 시켜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려 했던 김정일이 그를 미라로 만들어 시체 팔이를 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그가 아닌 정환이 김일성의 뒤를 이은 것이 그 자신에게도 다행스런 일일지도 몰랐다.

‘다행은 무슨, 뭐 살아서 이룬 업적도 주체사상도 뭐도 다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인 인간이었으니, 이제 와서 거짓을 하나쯤 더 추가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지. 그럼 나도 시체 팔이 좀 시작해 보실까.’

그리고 장례식이 끝나자, 오늘의 메인이벤트, 총서기 김정환의 취임식이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김일성 광장에는 장례식의 착 가라앉은 공기가 썰물 빠지듯 사라지고, 정체모를 흥분과 열기가 1월의 차가운 공기를 몰아내고 광장을 점령했다.

그건 바로 새로운 지도자, 새로운 우두머리에 대한 인민들의 호기심과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김일성 광장이 다 내려다보이는 연단에 오늘 이 자리에서 전 인민군대의 원수로 취임할 총서기 김정환과 당 간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 인민군대....... 원수님께! 받들어, 총!”

처처처억!!!

정환이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무려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김일성 광장에 빈틈없이 가득 들어찬 정복 차림의 인민군들이 구령에 맞춰 일제히 총검을 치켜 올려 숲을 만들었다.

그리고 역시 동시에 광장을 행군하던 조선인민군은 신호에 맞춰 움직이는 로봇처럼 구스스텝(거위걸음)을 멈추고 일사불란하게 몸을 45도 틀어 연단을 바라보며 그대로 정지했다.

가히 각에 살고 각에 죽는 그 모습에 정환은 지금 때와 장소도 잠시 잊고 순수하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 아버지? 아니, 아바디라고 해야 하나?’

회귀 이전에는 항상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보도하는 저녁 뉴스 자료화면으로만 보던 광경이었는데 지금 이 위치에서 보니 정환으로서는 그야말로 감회(?)가 남달랐다.

“원수니이이이임께~~~~ 경례!!!!”

“조국을 위해 복무합네다!”

‘그래도 내가 학군사관으로 중위 전역한 사람인데 이거 참.... 이런 경험은 대한민국, 아니, 한반도 역사상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보는 사람이겠군.’

전생에서 대한민국 국방의 의무를 다한 사람이 이 김일성 광장에서 무려 북한군에게 사열을 (그것도 원수 계급장을 달고서) 받아보는 경험은 아마 자신이 유일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 같으니 언제까지나 감상에 빠져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정환은 인민군대에게 마주 경례를 해주고 마이크 앞으로 다가가 배에 힘을 주었다. 하얀 인민군 원수 정복 품에서 꺼낸 한 장의 종이가 그의 손에 들려있었지만, 연설문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온 나라 인민들과 인민군 장병들이여! 이 자리에서 나는 또 력사적인 한 해를 보내고 새롭고 중대한 사변들이 기다리는 1990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신년은 작년과 달리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이 아닌 공화국의 큰 별이 진 슬픔이 인민들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기에 총서기로서 중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시작은 역시나 죽은 김일성에 대한 추모사였다.

정환의 뒤에 도열해 있는 당과 군의 간부들부터,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민군 장병들, 그리고 니콘 카메라를 들고 이 광경을 취재하느라 정신이 없는 외신기자들 모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잠시 동안 김일성의 생전 업적들(공화국 건국, 주체사상 정립, 인민생활 안정 등등)에 대한 찬양이 지나가는 동안,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이 연설을 생중계로 듣고 있던 한국을 포함한 각국 정보기관들은 저 젊은 녀석의 말에 무슨 뜻이 담겨 있나 눈코 뜰 새 없이 분석

하고 있었다.

지도자의 연설, 그것도 취임연설에는 어구 하나, 단어 선택 하나에도 향후 정책과 외교 기조에 대한 실마리가 담겨있는 건 물론이고, 각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앞으로 그 지도자가 어디에 중점을 둘 것이냐 하는 걸 예측할 수 있게 만드니까.

그리고 과연 그들의 그런 노력에 보답하듯, 한 가지 이변이라면 이변인 일이 터졌다.

“.........그리고 남조선 해방전쟁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석 동지의 노력으로 인해 반석 위에 올라선 이 공화국은 지금 막중하면서도 중차대한 위기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뭐야? 저 친구... 방금 남조선 해방전쟁... 그러니까 한국전쟁을 그냥 지나간 거야? 어서 본사에 타전해!”

“왜 그래? 뭔데? 그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건가?”

“당연하지! 방금 저 젊은 왕은 자기 부왕(父王)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를 그냥 무시했으니까! 북한 새 지도자가 아버지나 형하고 다르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파격적으로 변할 줄은 몰랐는데!”

서로 쑥덕거리면서 급하게 유럽 본사에 연락을 넣는 외신기자들의 지적은 옳았다.

북조선에서 김일성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는 남조선해방전쟁의 승전(본인들 주장)은 이제까지 김일성에 대해 언급하는 그 어떤 연설에서도 빠지지 않고 다뤄지는 단골 주제였다.

사악한 미 제국주의자들의 꼭두각시가 된 남조선 지도자들의 밑에서 신음하는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건 빨치산 활동과 함께 김일성 주석의 가장 큰 치적 중 하나 아닌가.

그런데, 정환은 자신의 취임사에서 공화국과 주석이 미국에 맞서(남조선이 아니라, 미국, 이게 중요하다.) 이루어낸 최대의 승리이자 업적을 마치 지나가듯 슬쩍 언급만 하고 지나간 것이다.

완전히 언급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이제까지의 연설에서 무슨 원칙마냥 반드시 ‘용맹무쌍의 과업’이나 ‘미제의 간악한 손아귀에 분연히 맞서 일어나’ 정도의 수식어를 붙여 표현되던 부분을 거의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했다’ 정도로 평이하게 묘사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이변의 연유는 곧 정환이 이제까지 손에 들고 있던 정체불명의 하얀 종이에 의해서 밝혀졌다.

“...........그리고 주석님은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공화국의 미래와 인민들에 대한 근심을 단 한 순간도 그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동지들이여! 나는 이 자리에서 주석님께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 힘을 담아 육필로 저술한,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

화국의 미래 노선에 대한 유훈(遺訓)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뭐야, 유훈?”

“주석 동지께서 유훈을 남겼다 그 말인가?”

이 충격적인 사실은 극적인 효과를 위하여 대부분의 인사들, 당 간부들 중 상당수에게까지 비밀로 지켜졌음이 확실했다.

손이 방금 전에 비해 몇 배로 빨라진 외신기자들은 물론이고, 도열해 있던 군관들과 간부들 중 상당수의 힘이 잔뜩 들어간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조용한 폭발 같은 군중의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단에 선 정환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동작을 크게 해서 접힌 종이를 펼쳐 그 위에 적힌 말을 읽기 시작했다.

“나, 김일성은 오래 전부터 조선민족의 자주자립과 공화국의 발전번영, 나아가 조국통일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아 매진해 왔다. 그리고 죽음에 당면한 지금, 내 후계자에게 붉은 기를 물려주며 이제는 세계 여러 나라들의 친선과 호상리해를 확대강화하는 것이 확고한

의지임을 적어 전달하고자 한다.” “..........!!!!!”

“따라서 전 인민들과 당 일꾼들은 이러한 노선에 발 맞추어 오랜 기간 지속된 서방, 미합중국과의 대립을 청산하고 조선반도와 지역의 정세안정을 추구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하며 나아가 세계평화와 안전의 리념을 따르는 총서기를 보필해 줄 것을 당부하는 바이다.”

미국과의 대립 청산!

장황한 문장 속에 감춰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이는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 진의를 이해한 자들은 하나 같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드디어 북조선이 세계를 향해 개혁개방의 문을 열어젖힐 것을 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주석님의 유훈을 따라 공화국의 최전선에서 모든 각고분투를 앞장서서 이끌 것이며 그 누구도 우리의 결심과 의지, 힘찬 진군을 돌려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모두다 참다운 인민의 나라, 조선민족의 부강발전을 위하여 한마음 한 뜻으로 힘차

게 일해나갑시다.”

그걸로 새롭게 취임한 인민군 원수, 당 총서기의 취임 연설은 끝났다.

이윽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마이크 앞에서 서서 이제 새롭게 정해진 정환의 공식 직위를 선언했다.

이전까지의 지도자들, ‘주석’ 김일성, ‘장군’ 김정일과 비슷하게, 정환에게는 새로 신설된 직위이자 이제까지 그의 공직 직위였던 총서기 외에도 하나 더 칭호가 더 붙었다.

실속이 중요하지 칭호가 뭐가 중요하냐는 정환의 난색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형식이 실속을 이길 때도 있는 법입니다’라는 김영남의 조언에 의해 만들어진 칭호였다.

“조선로동당 총서기, 정무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최고지도자(Supreme Leader)', 김정환 동지 만세!!”

“만세!!!”

“만세에에에!!!!”

인민들과 군관들, 전 군중들의 함성 소리가 김일성 광장을 가득 메웠다.

정환에게는 당에서 자발적으로 제정한 새로운 훈장, 이전까지 최고위의 훈장이었던 공화국 영웅 훈장보다 한 등급 위의 훈장인 ‘최고지도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렇게 1990년 1월 1일, 김정환은 공식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로 올라섰다.

한편 김일성 광장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 대한민국 안기부의 어느 지하실에서는 한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참석자는 몇 명 안 됐지만, 그 참석자들 한 명 한 명은 전부 현재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안보 정책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박세황 실장, 자네 말은... 북괴들이 이제부터 개혁개방을 할 것이다? 그 말인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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