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장. 퇴보와 전진 (3) >
20장. 퇴보와 전진 (3)
불온한 움직임은 1989년의 마지막 한 달에 가까워질 11월,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온분자들은 현명하게도 그들의 첫 공격 목표를 김일성의 아들이자 권력의 중심에 있는 김정환 총서기 동지가 아닌, 그의 이복형이자 현재 당 반부패수사국장으로 재직 중인 김영일로 정했다.
김영일도 김일성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대권 밖으로 밀려난 곁가지인데다, 옛말에도 장수를 떨어트리려면 먼저 말을 잡으라고 했으니까.
“김영일 국장 동지! 오늘 아침도 무탈하십네까!”
“총서기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망각하고 이 공화국을 좀먹는 부패 반동의 분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무탈하겠나? 어서 수사국으로 가자우. 내래 할 일이 산더미니까.”
걸어오면서도 손에 든 서류 뭉치에서 눈을 떼지 않는 김영일이 뒷좌석에 올라타며 무심히 중얼거리자 운전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종이 뭉치는 분명히 근래 더욱 살벌해진 내사 작업의 희생자들, 철직(해직)이나 혁명화 문책 대상자들이 적힌 살생부이리라.
공화국의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한 김영일의 기분을 혹시 거스를 세라 운전사는 칼 같이 경례를 붙이고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르르릉.....!!!
‘요새 이놈들이 이상하게 조용하단 말이지. 꼭 뭔가를 기다리는 살쾡이 마냥......’
그의 지휘 아래 반부패 수사국은 지난 1년 간 당과 군을 넘나들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섬유공장 생산량을 조작해서 중앙당을 기만하려던 기업소 책임일꾼은 자리에서 철직되었다.
동유럽에서 담배를 밀수해 이익을 챙기던 외교관 하나는 혁명화 교육을 받았다.
하전사들 군량미를 빼돌려 장마당에 팔아치운 군관들은 군사재판을 거친 후 총살되었다.
물론 윗사람을 대신해 칼을 휘두르고 손에 피를 묻히는 사람이 그렇듯, 그런 숙청 작업에 앞장선 김영일은 뒤에서 온갖 증오와 살의의 대상이 되었다.
김영일의 출생에 대한 저질 삐라가 나돌기도 했고, 당사에서도 서로 모여 수군거리던 군관들이 그가 멀리서 보이면 입을 뚝 다물고 시치미를 ㅤㄸㅖㅤ던 모습도 보였지만, 그래도 아무도 대놓고 그런 불만을 말하지는 못했다.
김일성 주석의 아들이자 현 총서기의 이복형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가진 그에게 맞선다는 건 현 총서기와 바로 적대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까.
김영일 개인적으로도 불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아무런 직위도 보호막도 없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야인으로 떠돌던 자신을 발탁해서 무시하던 놈들의 대가리를 까부술 권력을 부여해준 사람이 바로 자신의 이복동생, 총서기 동지였다.
한 때 자신을 무시하거나 뒤에서 비웃던 놈들이 이제 자신의 얼굴만 봐도 안색이 파랗게 질리는 걸 보며 김영일은 말로 뭐라 다 할 수 없는 통쾌함을 느꼈다.
그런데, 그렇게 달콤한 나날을 보내던 요즘, 자신 주변에서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어도 항상 공기처럼 맴돌던 적의의 냄새가 얼마 전부터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좀 신경이 쓰였다.
‘하기사, 1년 간 그만큼 당했으면 이제 슬슬 꼬리를 내릴 만도 하지. 내가 너무 민감한 건가?’
김영일이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순간, 갑자기 쌩쌩 잘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
“응? 뭐이야? 왜 여기서 멈춰?”
“쯧.... 앞에 왠 고라니 시체가 있습네다. 옆으로 피해서 몰갔습니다.”
운전사의 말대로 지나던 차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고라니 시체 하나가 노상에 엎어져있었다.
올해 농사가 풍작이다 보니 농군들의 작물을 서리하기 위해 멀리서까지 고라니가 출몰하고는 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평양까지 들어온 놈들이 가끔 차에 치어 죽어 있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다.
게다가 김영일이 근무하는 반부패수사국 본국은 이미 각종 당 사무실로 포화상태가 된 평양 도심 외곽에(물론 가급적 눈에 띄면 안 된다는 업무 필요성도 있고) 위치해 있던 지라 직통 도로도 좀 외진 곳에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니 김영일도 별 생각 없이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그럼 옆으로 몰게. 나중에 하전사들 보내서 치워야겠어. 아무튼 빨리 가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알갔습니다.”
차는 고라니 시체를 피해 우회전 했고, 곧 시체를 지나 다시 원래 속도를 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옆 차창으로 배가 터져 내장이 흘러나온 고라니의 사체를 보며 김영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신성한 공화국의 공무를 보기 위해 상쾌해게 나선 아침 등청 길에 불길하게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어? 으아악!!!”
“.........!!!!!”
귀청을 찢을 듯한 폭음과 엄청난 폭압이 함께 들이닥치며 승용차 전면 유리창을 산산히 부숴버렸다.
깨진 유리 조각이 소낙비처럼 차 안으로 들이닥쳤고 차 앞부분이 허공으로 휙 들려 차체가 잠시 일자로 서면서 김영일은 뒷좌석에 처박혔다.
“크, 크으으으윽.... 이, 이게 무슨.....!!!”
쿠우우웅!!!!
차가 뒤로 뒤집어지고 졸지에 뒤집어진 차 천장에 누운 김영일은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필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운전사는 이미 즉사한 듯 했다.
“이게... 설마... 어떤 간나들이....!!!”
퍼억
쨍그랑.
이미 반쯤 부숴진 차 유리창을 발로 걷어차 깨고 차 밖으로 기어 나온 김영일은 간신히 두 발로 서서 연기가 자욱한 도로를 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도로 한 복판에 폭탄으로 인해 생긴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 고라니를 피해 운전하느라 몇 초만 늦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김영일도 즉사했을 것이 너무나 분명해 보였다.
“영국 여론이 재미지게 돌아가고 있군. 김 과장 동무, 자네도 이 제목 봤나?”
“네, 봤습네다. 총서기 동지. 장벽 붕괴 다음날 아침도 그렇고, ‘더 썬’이 우릴 도와주는 군요. 참 기묘한 일 입네다.”
“민주주의 국가의 단점이지. 언론이라는 작자들이 대놓고 이런 제목을 뽑아도 정부는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 표현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이니까.”
탁 하고 정환이 서기실 책상에 신문을 내려놓자 김용건이 동의한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 위의 타블로이드 지의 전면에는 ‘친구냐 적이냐? 연합국과 추축국의 리턴 매치.’라고 큰 글자로 적혀 있었다.
1면은 두 쪽으로 나뉘어 한쪽에는 독일 재통일에 지지성명을 표한 국가들의 국기가, 반대쪽에는 반대 성명을 표한 국가들의 국기가 인쇄되어 있었다.
가관인 것은, 독일 재통일을 반대하는 나라들 쪽에는 자국 영국을 필두로 상단에 ‘연합국’이라고 적혀 있었고, 통일을 찬성하는 나라들 쪽에는 독일을 필두로 ‘추축국’이라고 적혀 있었다.
웃기게도 추축국 란에는 한국 태극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헤이우드 대사.... 아니, 아직은 공사군. 공사는 뭐라 그러나?”
“여기 오기 직전에 이미 만나 봤습네다. 저에게 허겁지겁 달려와 우리 공화국의 입장은 어떤지 이렇게 물어보더군요.”
- 설마... 북조선에서는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이 서독에 산채로 잡아먹히는 것을 찬성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압박을 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이 문제에서 우리 영국과 같은 입장에 서주신다면 의회에서 한국과 북조선 간 외교적 입장 재설정이 진지하게 다시 논의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흐음, 그래서 뭐라고 했나?”
“지시하신 대로 했습니다. 우선 공식 성명으로는, 같은 사회주의 동맹 국가로서 동독의 붕괴에 결연히 반대한다고 발표할 것이고, 비공식적으로 헤이우드 공사를 통해서는 총서기께서 이 문제에 대해 대처 총리와 모든 입장을 같이 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물론 지시하신 말씀도 더불어 말입네다.”
- 감사합니다! 총리님께 정말 기쁜 소식이 될 겁니다!
- 아, 공사 동지. 본국에 이 말도 같이 전해주시오.
- 네?
- 총서기 동지께서는 이러한 입장 표명이 우리 공화국이 영국과의 차후 관계를 그만큼 중히 생각한다는 징표라고 하셨소. 또한 이러한 호의와 신뢰의 대가로 앞으로 양국 간 수교가 하원에서 정식으로 논의되기를 바란다는 말씀도.
‘흐음, 잘 되어가고 있군. 아니... 솔직히 좀 씁쓸하기는 하지만.’
정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서기실의 목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대처는 미국과 소련이 독일 재통일에 찬성할 거라는 사실을 모른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미국은 예측했을지 몰라도, 소련은 모르겠지, 사실 정상인이라면 그런 판단이 당연하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당한 소련인들의 시체가 아직도 우크라이나에 지층을 이루고 있는 형편에, 독일 재통일에 소련이 찬성할 거라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북조선의 독일 통일에 대한 반대의사 표명을 소련이 찬성하고 난 이후에 할지, 아니면 전에 할지, 몸값을 최대한 올리기 위해 좋은 시점을 고민하기는 했다.
하지만 소련까지 찬성한다면 어차피 즉각 통일은 기정사실이니 그 후에 소련의 말단 부하 정도로 취급 받는 북조선이 꼽사리 끼어봐야 영국과 대처에게 그리 큰 임팩트는 못 줄 거라는 게 정환의 판단이었다.
그게 현재 북조선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국제외교에서의 한 없이 가벼운 무게라고 정환은 스스로 자조했다.
“저... 총서기 동지.”
“물어볼 게 있으면 하시오. 김 과장 동무.”
“이렇게 우리가 구애를 한다고 대처 수상이 우리와 수교하겠습네까? 솔직히 저는 왜 총서기께서 이 일에 이렇게까지 심려를 쏟으시는 지 잘... 이런 말씀 드리기 대단히 민망스럽습니다만... 남조선은 이미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나 뭐로 보나 위인 국가 아닙니까? 그런데 실리주의자인 대처 수상이 남조선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우리와 수교할 거라고 저는....”
“할 거요. 실리주의자니까.”
정환의 단도직입적인 답변에 김용건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정환의 설명에 바로 깨달았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김 과장 동무. 방금 남조선과 영국과의 관계라고 했는데... 남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과연 영국인들이 중대히 여길 거라고 보시오? 우리 공화국과 수교하느냐 아니면 남조선과의 의리를 지킬 것이냐가 하원에서 중대 논쟁거리가 될 만큼?”
“기야... 아, 그렇군요.”
“남조선 동무들이 현재 우리 공화국보다 여러 면에서 앞서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남조선도 미국의 최우방이자 유엔 상임이사국인 영국이라는 국가에게 있어서는 우리 공화국과 인식 면에서 그다지 차이가 없소. 둘 다 아시아 변방의, 분단되고 가난한 개발도상국들일 뿐이지. 솔직히 하원의원들 중 절반은 우리와 남조선을 구분도 못 할 거라고 내 장담하지.”
여기까지 말한 정환은 김용건의 얼굴에 나타난 씁쓸한 표정을 보며 자신도 웃었다.
아마 방금 전 자신의 얼굴에도 저런 표정이 떠올랐으리라.
“그들이 우리와 수교하지 않은 건 오직 하나, 아직 냉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오. 아마 대처 수상이 현재 자국 과세 문제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기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머리 아픈 고생을 할 필요 없이 빠르게 수교에 성공했을 것이오. 한 때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던 대영제국의 총리께서 남조선 관료들의 ‘둘 중 하나만 코리아로 인정해야 운운’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테니!”
그것이 국제사회의 현실이었다.
같은 분단국가끼리의 국가 인정 다툼이라도, 결국 그 국가들이 자국에게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어느 편에 서느냐 하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남북한도 분단국가들이다.
중국과 대만도 분단국가들이다,
하지만 각 국 정부들은 중국, 대만 중 어느 쪽을 ‘진짜’ 중국으로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훨씬 더 골몰한다.
중국은 각국에 있어서 가지는 영향력이 남북한보다 비교도 못하게 크니까.
잠시 정환의 냉소로 서기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순간, 밖에서 유혜림이 노크도 없이 서기실의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무리 총서기의 개인비서라지만 엄연히 공적인 장소에서 이건 좀 무례 아니냐고 생각한 김용건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려는 순간, 유혜림은 자신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설명했다.
“기, 김영일 국장 동지가 탄 차가 폭파당했습니다. 천우신조로 목숨은 건지셨지만, 국장 동지는 이게 자신이 아닌 총서기에 대한 공격일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범인이 누구겠습니까?”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자리에 앉아서 씩씩거리는 김영일을 보며 김용건이 중얼거렸다.
그는 처음에 정환도 그 대답을 쉽게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질문에 대한 용의자는 다대(多大)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정환의 숙청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들, 당 대회에서 해임된 전직 정치국원들, 부패 관료들, 문책당하고 철직당한 군관들, 하나하나 세자면 끝이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정환은 바로 대답했다.
“뻔하지, 나는 이미 나에게 공격이 들어온다면 김영일 국장 동무부터 시작할 거라고 짐작했어. 그리고 그로 인해 범인이 상당히 좁혀졌네.”
“...............?”
“아무리 곁가지라고는 해도 김영일 국장 동무는 아버지 주석님의 혈육일세. 이 공화국에서 그걸 무시하고 백주대낮에 그에 대한 암살 기도를 할 세력은 거의 없네. 최소 아바지와 같은 연대의 혁명 원로들이 아니면.”
그 말에 김용건의 뇌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정환 역시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오진우 전직 부총참모장, 아바지와 비슷한 빨치산 1세대 인데다, 중앙위 위원부터 시작해 총정치국, 민족보위성 부상 등 온 요직을 두루 거쳤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아바지의 후계자 분쟁에서 내가 아닌 김정일이를 지지했거든. 틀림없이 그 영감이겠지.”
실제로, 정환의 예측은 사실이었다.
당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평양 외곽의 별장, 이곳은 비소에 중독되어 이미 반쯤 산송장 신세가 된 김일성이 엄중한 경호 속에 요양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김일성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공손하게 말을 건네는 노인이 있었다.
“원수님, 그간 강녕하셨습네까? 접니다, 원수님과 함께 빨치산을 했던 오진우입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