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장. 퇴보와 전진 (2) >
20장. 퇴보와 전진 (2)
김영남의 소개에 최승일은 비쩍 말라서 혈관이 다 드러나는 목을 슬쩍 끄덕이며 앞으로 한 발짝 나서서 걸려있던 전도를 넘겼다.
전도의 곳곳, 주로 공화국의 해안에 위치한 항만 지구에 붉은 색을 포함해 각종 색깔로 표시가 되어 있었고, 상단에는 ‘신(新) 계획발전 특구’라고 적혀있었다.
“감사합네다. 위원장 동지! 중국 동무들은 덩샤오핑 동지의 개혁개방 노선을 처음 시작할 때 일부 항만도시들부터 개방을 했습네다. 선전부터 시작해서 상하이, 광저우... 물산의 유통이 편리하고 자본주의 날라리 풍조를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죠. 그러니 공화국에서도 그 모델... 그러니까 그 행보를 본받아 개혁 개방 계획을 수립하라는 게 총서기의 지시였습네다.”
그렇게 말하며 최승일은 손가락으로 전도 곳곳을 가리켰다.
“원산, 남포, 라선, 신의주 청진.....그리고 총서기 동지의 특별 허가를 얻어 제한적으로 평양까지. 이 다섯 곳은 앞으로 계획발전 특구로 지정되어 이곳에 입주하는 외자 기업들의 입주와 공화국 인민들의 고용 등이 허용되면서 개혁개방의 선봉장이 될 겁니다.”
‘사실 연구원 시절에 ’통일 시 북한 경제발전 가상플랜‘에서 본 다섯 개 도시들을 그냥 따온 거지만 말이야.’
최승일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정환은 책상을 두드리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뭐 거기에 평양까지 제한적으로나마 추가시킨 건 정환 본인의 결단이기는 했다.
일단 역사가 바뀌어 중국이 적어도 몇 년은 투자 유치 경쟁에서 뒤쳐진 이상, 그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 이 공화국에 그나마 희망이 있을 테니까.
“이미 동지들 중 몇몇은 들었겠지만 공화국 내에 영국 기업 브리티시 페트롤륨이 벌써 유전 탐사를 시작했습네다. 올해 유월 전해진 초기 지층 탐사 보고서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받아보시고 총서기 동지께서 결단을 내리신 거죠. 아마 공화국 첫 자본주의 식 기업은 영국인들과 공화국의 합작 기업이 될 거라고 전망하고 있습네다.”
“.....영국 놈들을 믿을 수 있갔습니까? 그놈들이 오래 전부터 제 놈들의 배 다른 사생아, 미제와 붙어먹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네다. 아직 우리 공화국과 정식 외교관계도 맺지 않았는데... 혹시 그놈들이 총서기 동지의 은혜를 이용해서 공화국 인민의 자원을 빼돌리려는 게 아닐까요?”
이번의 거친 발언은 테이블 구석에 앉아있던 인민군 중장이자 정치국 후보위원인 백승철에게서 나왔다.
테이블 내 몇몇, 그리고 눈살을 찌푸린 홍계성의 시선까지 그에게로 향했지만, 정작 정환은 태연했다.
“그렇고 말고, 백 중장 동무. 아마 머지않아 그들은 우리 공화국과 처음으로 대사를 파견하는 서방 수교국이 될 걸세.”
“총서기 동지의 영단에 결코 의심을 제기하는 것은 아닙네다만... 기름이라면 로씨야 동지들이 더 잘 찾지 않을 까요? 지난 1세기 동안 영국 놈들이 세계 만방 인민들에게 가한 고통과 제국주의적 행태의 역사를 생각하면...”
“백승철 동무.”
“..........네, 넷, 총서기 동지! 혹시 기분이 상하셨다면.....”
조용한 정환의 지적에 백승철은 지레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지만, 정작 정환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함의(含意)는 결코 차분하지 않은 반응, 어쩌면 개혁개방 선언보다 훨씬 더 클지도 모르는 파급을 불러일으켰다.
백승철 뿐만이 아니라, 테이블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영어를 배워놓으라고 추천해 두고 싶군.”
“..........예? 총서기 동지? 무슨 말씀이신지.......”
“로씨야 말은 충분히 배웠을 테니 말일세. 필요하다면 외국에서 당 간부들과 군관들 전용으로 좋은 선생을 구해서 붙여주지. 앞으로 써먹을 일이 많지 않겠나? 영어는 영국 놈들만 쓰는 게 아니니.”
“............!!!”
여기까지 말한 후, 정환은 벌써 자기 말의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고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몇몇 당 간부들을 향해 더욱 충격적인 한 마디를 덧붙였다.
“미국식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영국식 영어는 아무리 생각해도 발음이 너무 웃겨.”
영국이 첫 수교국이 될 거라는 정환의 예언은 머지 않아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 9일, 하나의 오보에서 시작된 파동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 지금부터 저희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에서 새로 발표되는... 음... 여행허가 규제 완화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서독을 포함한 외국여행에 있어 조건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출국 비자는 지체 없이 발급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 동독 국민들은 ‘모든’ 국경 출입소에서 출국이 인정될 것입니다.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 잠깐, 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모든’ 국경 출입소?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도 포함된다는 말씀이십니까?
- 네, 그렇습니다.
- 저, 정말이요? 기한은? 언제부터 발효되는 겁니까?
- 에......... 지금부터요. ‘지체 없이(unverzuglich)’ 발효될 겁니다. 그러니까 당장.
11월 9일, 믿지 못한 소식을 뉴스에서 접한 동독 시민들은 하나 둘 씩 그들을 오랜 세월 갈라놓은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다.
처음에는 몇 몇 일행이던 사람들은 이내 군중이 되었고, 비어있던 손에는 망치와 끌이 잡혔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검문소의 경비원들을 붙잡고 고함을 지르기까지 했다.
- 정지! 넘어오지 마시오! 당신들 비자와 여권은 어디 있는 거요? 이곳을 함부로 월경하는 건... 거기다 지금은 야간이란 말이오!
- 야 이 멍청이들아! 지금 뉴스도 안 봤냐? 에곤 크랜츠 당수께서 비자고 뭐고 필요 없다고 했다고! 우리는 서독으로 가서 헤어진 내 동생을 만날 거다! 당장 문 열어! 이 슈타지 훈트 슈바인들아!
- 당신들이 들은 건 오보요! 오보! 그건 대변인이 말 실수를 해서.........!!
- 닥치고 당장 문 열어! 여기 사람들 안 보이냐! 아니, 어차피 허가도 받았겠다, 안 열어주면 차로 깔아쳐서 들어갈 거다! 이 거지 같은 트라반트(Trabant:동독의 국민 경차)라도 힘을 합치면 저거 하나 무너트리는 데는 충분하지! 네놈들이 막으면 저기 중국 천안문에서처럼 너희들을 깔아 뭉게고 갈 거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월 10일 아침, 이미 장벽은 수많은 동독, 서독 시민들의 손에 사실상 형해화되고 있었다.
그것은 슈타지로 대표되는 동독의 철통 같던 사회주의 체제의 통제력 상실을 의미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동독의 군대와 경찰은 기능을 정지했고, 악명 높은 비밀 경찰 슈타지의 사무소는 분노한 시민들이 들이닥쳐 파괴해 버렸다.
단 하루만에 2천 명의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했고, 그들은 헤어졌던 형제 자매들의 얼굴에 늘어난 주름살을 매만지며 기쁨의 탄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유럽 대륙 다른 한 쪽에서도 탄성이 터지고 있었는데, 이쪽은 기쁨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 영감님, 소문 들었습니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답니다. 곧 서독이 동독을 집어삼킬 거랍니다!”
- 어이, 자네 어제 펍에서 맥주 너무 마시더니 술이 덜 깼.... 응? 아니잖아? 그러니까.... 지금.... 돼지 썩는 내 풍기는 크라우트(Krauts : 독일인의 멸칭)들이 돌아온다고?
- 네, 이미 BBC에서 전문가들이 통일은 반쯤 기정사실이라고.... 영감님, 듣다말고 어디 가십니까?
- 내 스탠 기관단총 가지러! 아르덴 대공세 때 의가사 제대한 이후 안 썼는데, 아직 총알이 나갈 걸세!
- 대통령 각하, 오늘부터 군에게 명령해서 에펠탑과 루브르를 잘 지키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아침부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자네 꿈 꿨나?
-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군요! 히틀러가 다시 돌아와서 에펠탑과 루브르를 훔쳐가려 할 테니 말입니다! 여기 신문 좀 보십쇼! 간밤에 제3제국이 부활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 통일에 대한 반응은 신경질적이다 못해 폭발적이었다.
곧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유럽 정상들 간의 만남이 예정되었으며, 각국 외교관들과 국방무관들은 비상대책회의에 돌입했다.
그 비상대책회의가 열린 곳 중 하나는 당연히, 런던 하이드 파크 근처의 수상 관저, 다우닝 가 10번지도 있었다.
“모두 커피 한 잔씩 드시고 회의 시작합시다. 지금 상황은 블랙 커피를 맥주 피처에 담아 들이켜도 이해가 안 될 것 같지만. 외무 장관,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대처 총리님. 죄송하지만 저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오늘 아침 더 썬 보셨습니까? 그 치들이 제목을 뭐라고 뽑았냐면....”
“그만! 숙녀 분들, 이제 상황에 적응하죠. 여론을 모읍시다. 여기 오기 전 위층에서 미테랑 대통령과 통화를 했어요. 프랑스 친구들과 벨기에, 2차 세계대전 때 친구들을 다시 모아야 합니다. 이미 실질적인 재통일을 막는 건 늦은 것 같으니, 기간을 늦추기라도 해야 해요. 점진적 통일이든 주민투표든 어떤 말장난을 동원해서라도! 여론전을 펴죠. 모두 각국 대사관 돌을 준비부터 하세요.”
“각국이요? 총리님.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에게 우리 입장에 대한 지지를 요청할까요?”
“나라란 나라는 전부 다. 어제 개국해서 국민이 열 명인 나라라도 상관없어요. 우리는 지금 독일인들의 통일에 대해 회의적인 여론을 전 세계에서 최대한 모아야 합니다. 어서들 움직이세요. 저는 부시 대통령과 통화부터 해야겠습니다.”
곧 외교관들의 전화통에 불이 났다.
현안의 당사자인 유럽 국가들부터, 과거 독일 제3제국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아프리카 국가들까지(영국에 비해 그 수가 얼마 안 돼서 업무 부담이 비교적 적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아시아 국가들, 그 중에서도 독일과 비슷한, 소련과 미국의 틈바구니에 껴서 분단된 동아시아의 대한민국도 있었다.
- 박 대사님! 이거 아침부터 참...... 허허. 제가 왜 왔는지는 이미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저기.. 한국 외교부에서는 이런 참극..... 아차차!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떤 외교적 입장을 취하실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글쎄요... 원하시는 대답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만 아마 제 경험으로는 독일 통일에 아마 긍정적인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 네? 그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 일단 타의에 의해 분단된 민족이 하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저희 국민들은 벌써부터 흥분하고 있습니다. 이미 독일과 대한민국의 처지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사설도 고려일보에 실렸군요. 뭐 물론 저희는 2차 대전을 일으키고 집단수용소를 열어서 독가스로 특정 인종을 죽이려 한 적은 없었습니다만... 정신 차리고 보니 어째서인지 분단이 되어 있더군요. 아무튼, 저희 대한민국에서는 축전을 보내면 보냈지 대처 총리님이 원하시는 답은 못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 ...............
한국 대사관에 들어갔던 직원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비관적인 소식을 들고 돌아갈 무렵, 지구 반대편에서 정환은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었던 이 사태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지는 못했다.
총서기인 그에 대한 불온한 움직임, 사전에는 알고 있었지만 이제까지 표면에서 본적은 없었던 어떤 움직임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중심에는, 그의 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