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장. 퇴보와 전진 (1) >
20장. 퇴보와 전진 (1)
중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가 결정된 것은 평양에서 학생축전이 성대하게 막을 내린 후 몇 주 정도가 지나서였다.
그동안 중국 외교관들은 발이 닳도록 각 국 대사관과 언론사와 통신사를 드나들며 ‘천안문에서 벌어진 사태는 중국 내부의 체제안정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치였으며 탱크 맨 사망은 사고‘라고 역설했지만, 효과는 전무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러난, 탱크에 깔려죽은 남자 사진 한 장이 가져온 사태의 결과는 중국, 정확히는 중국의 개혁개방 지지 세력들에게 있어서 실로 혹독한 것이었다.
- CNN입니다. 미국 국무부는 오늘 오전 대변인을 통하여 얼마 전 천안문에서 일어난 중국 정부의 반인원적 행위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最惠國待遇)의 철폐를 발표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로 인하여 미국에 수출하는 중국산 제품들에 관세가 추가 부과됨으로써 최대 40%까지 가격이 상승하게 될 것이라 전망하며 대미(對美) 수출액이 250 억 달러에 이르는 중국 경제에 무거운 짐이 될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 미국 뿐 만이 아닙니다. 일본 정부는 오늘 미 국무부와 발맞춰 중국에 예정되어 있던 58억 달러 규모의 차관을 전면 유보했습니다. 이전부터 티베트 독립 현안에 대해서도 중국에 각을 세워왔던 프랑스는 정부 관료의 모든 중국 고위층과의 접촉을 자제할 것이며 관민을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협력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미국, 유렵, 일본의 다자 제재를 가장 앞장서서 이끌고 국제기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중국을 압박한 건 역시나 미국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의도를 굳이 숨길 생각도 없는지 미국은 단순히 국제적 영향력 행사 뿐 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다시 제재를 발표했다.
- 우리 미국 상무부는 오늘을 기하여 중국산 원 금속, 반 가공 금속, 자동차와 항공기 부품, 그리고 농작물, 비료, 플라스틱에 대한 특별 관세를 발표합니다.
- 지난 6월 사태 격화 직후 발표된 세계은행의 7억 8천만 달러 규모 차관 유보에 이어, 오늘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이 중국에 대한 융자를 전면 재검토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세계은행 그룹 내에서 총재 선임을 포함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의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이러한 결의에 대하여 중국 외무부는 ‘타국의 정당한 법집행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간섭하려는 행위에 대해 대단한 유감을 표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 빌어먹을 양키 오랑캐 놈들! 아주 가리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는군! 이 오만한 놈들은 자기들이 무슨 세계경찰인 줄 아는 거야? 앞으로 20년, 아니, 10년만 지나 우리 중국이 강대국이 되면 이런 국가적 수치를 반드시 갚아줄....
- 애초에 당신들 인민해방군에서 너무 시끄럽게 진압을 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잖소! 난리는 베이징에서 벌어졌는데 정작 애먼 상하이나 광저우 같은 곳은 지금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란 말이오! 진압을 하더라도 카메라에 찍힐 일은 피했어야지! 젠장! 고향이 발전한다고 해서 사업까지 옮겼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계속 싱가폴에 있었어야 했어!
물론,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대부분 중국에 대해서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여론을 의식해 조심스러운 의견이었지만, 그래도 세계의 하청 생산기지 역할, 나아가 최대의 소비시장이 될 것으로 예측되는 중국에 대한 제재는 나아가 자유무역을 약화시키지 않을 까 하는 의견이었다.
- 클린턴 주지사 님. 사석에서 중국에 대한 경제 제재가 도가 좀 지나친 것 같다는 의견을 표명하셨는데, 이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 아,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미국 시민이자 민주당원으로서 중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침해 실태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단지 저는 이러한 과잉대응이 장차 미국의 국익과 세계무역에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것 뿐 입니다.
-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세계 티셔츠 절반은 아마 중국에서 만들 겁니다. 이러한 제재로 인해 중국 경제가 퇴보하고, 나아가 중국이 더욱 폐쇄적인 국가가 되면, 그게 과연 중국의 인권을 증진시키는 일일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러한 근시안적인 대응의 배후에 강경한 모습을 연출해서 인기를 끌고자 하는 현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의 정치적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실제로, 점점 더 커지고 강력해지는 다국적 기업의 복잡다단해지는 공급망에서 중국의 저임금은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었다.
중국에 공장을 두고 투자하며 이제까지 그 혜택을 마음껏 누리던 각국의 사업가들은, 각종 제재 발표를 보고 짜증에 발을 구르면서도, 벌써부터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국가를 찾느라 눈에 불을 켰다.
값싼 노동력과 무역에 유리한 지리적 위치, 기업에 친화적이면서도 결정적으로 세율이 낮은 정부를 둔 개발도상국을.
그리고, 일련의 흐름을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던 조선로동당 총서기 김정환은 마침내 움직일 시기라고 판단을 내렸다.
“올해는 가을 농업 생산량이 풍작이군, 아니 이건 풍작이라기보다는.........”
팔랑팔랑 서류를 넘기며 정환이 중얼거리는 말에 정치국 위원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저 총서기가 과연 오늘은 또 무슨 파격적인 지시를 내리려나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이미 긴장을 하는 사람은 있어도 불만이나 거부감을 표정으로나마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취임한 지 고작 1년이었지만, 이미 정환은 거의 확실하게,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완벽히 당군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환은 아직도 미약하게나마 자신에게 불만을 가지는 세력, 혹은 그를 의심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여러 분석들을 종합해보면, 기후와 운이 따라준 풍작이라기보다는 개별 농가들의 생산효율성이 크게 개선되었군. 하기야 이제 농사를 잘 지으면 잘 지을수록 자기들 것이 늘어나니 당연하겠지만.”
“총서기께서 지도하신 정부 수매 축소와 농군 동무들에게 자율적 처분권을 주자는 과감한 결단이 성과를 거둔 까닭 입네다. 참으로 겨레 역사에 남을 지도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무들도 그렇게 생각하나 보군. 그럼 이제 때가 됐어.”
“.............?”
정환이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내려놓자 옆에서 아부할 때만을 기다리던 정치국 위원들은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장성택과 현영숙을 포함해 몇 몇 사람들, 정확히는 당 경제부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무리만큼은 뭔가를 알겠다는 듯 표정을 바꾸었다.
“.....그동안 이미 알고 있었던 당 간부들, 내각 일꾼들 있었겠지만, 이제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선포하지.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제 계획경제 체제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개혁 개방의 길을 걸어갈 거요.”
“............으음..!!!"
"...역시...!!!“
정환의 선언에 정치국 회의 테이블에 물결이 번져나가듯 파문이 일었다.
물론 그들도 눈과 귀가 있고, 정치적 변화에 한해서만큼은 누구보다 민감한 자들인 만큼(그렇지 못한 자들은 옛적에 교화소로 갔으니) 젊은 총서기가 공화국을 지탱해온 사회주의를 버리고 중국식 개혁개방에 관심이 있다는 것쯤이야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의지가 얼마나 확고하느냐였다.
1년 전 당 대회에서 4대 노선을 발표할 때만 해도 ‘혹시나’하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체사상이 당 규약에서 언급되지 않고, 자영농들의 개별 처분권을 인정할 때만 해도 총서기가 젊은 사람인만큼 뭔가 변화를 줘보려고 한 거 겠거니 했다.
하지만 조선중앙방송 내에서 재주꾼들을 들여서 코미디 프로를 제작 방영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40년 우방 중국에 대해 비난 성명을 발표하며, 자본주의 수괴 미제의 어버이 국가 영국의 공사가 평양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지난 1년 간 보며, 그들은 확신했다.
‘총서기는 지금 진짜로 공화국에 자본주의를 도입하려 한다!’
얼마 전에는 당 전문부서에서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경공업부, 군수공업부가 경제부 산하로 통합되었고 그 자리에는 통계부가 신설되었다.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묻는 어느 정치국원에게 총서기는 ‘정확한 통계는 국가 경제발전 전략 수립의 기본’이라는 핀잔을 남기기까지 했다.
그렇다, 만약 자본주의를 도입하려 한다 치자, 그런데,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냐 하는 것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최대의 공포였다.
설마, 총서기는 이 조선을 건국한 자기 아버지 수령의 당, 조선로동당까지 없애버리지는....
“아, 너무 걱정들 할 것 없소. 풍파야 좀 있겠지만 나 역시 체제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니. 앞으로도 이 공화국은 우리 당, 군의 통치 하에 존속할 것이오.”
‘휴우!’
자리에 앉은 정치국원들의 마음속에서 안도의 한숨이 지나갔다.
사실 그들 중 대부분이 걱정했던 건 마르크스주의의 퇴조에 대한 순수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그냥 당이 없어지거나 힘이 약해지면 그곳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정치국원 본인들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지난 10여 년에 걸쳐 김정일이 최고 지도자에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을 만큼 용기와 소신 있는 자들을 지속적으로 솎아낸 결과이기도 했고.
“혹시 반대할 동무 있으면 지금 말하시오. 총서기께서는 모든 의견 수렴을 받아 결정하실 생각이시니.”
“.......홍 차수 동지. 차수 동지께서는........?”
“우리 군이야 언제든 총서기의 편 아니갔소? 총서기께서 지시하시면, 당장 이 홍계성이부터 장작불에 뛰어드는 나뭇가지의 마음으로 앞장서갔소. 허허헛.”
‘저 참기름칠한 여우 같은 간나!’
정환에 대한 군의 지지를 천명하는 홍계성의 아부 섞인 확언에 장성택과 당 간부들 뿐만 아니라 일부 정치국원들의 얼굴에도 기가 막힌다는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쨌든 가장 반발이 심할 것으로 예상했던 군부를 대표하는 홍계성이 반대하지 않는 이상, 공화국의 시장경제체제 도입은 이미 통과된 거나 다름없었다.
“좋소, 그럼 다들 동의한 걸로 알고 진행하도록 하지. 아, 현 부장, 뭐 물어볼 말이라도?”
“총서기님의 개방정책에는 저도 물론 다른 당 일꾼들, 간부들과 같이 더 할 나위 없이 찬성입니다. 하지만 너무 걸씨(급히) 모든 요소를 바꾸려들다가는 인민들에게 서구의 타락한 부르주아적 날라리 관습까지 전파되지 않을 까요? 그건 저희 당과 총서기님의 지도력에 대해서 심각한 위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지.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이미 대비가 되어 있소. 다들 이 곳을 보시오.”
정환이 가리킨 곳에는 북조선의 전도가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얼마 전 교화소에 갔다가 돌아와서 총서기의 새로운 심복으로 부상해 주목을 받고 있는 최승일이 김영남 옆에 시립해 있었다.
이윽고 김영남은 쑥스럽다는 듯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시작했다.
“험, 동무들, 제가 얼마 전 총서기와 당의 지시로 과업을 받아 중국에 갔다가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왔습네다. 물론 그 전에도 당의 지시를 받아 가본 적은 여러 번 이었지만,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소. 상전벽해라는 옛말이 절로 생각나더군.”
“김 위원장 동지는 이번에 내 지시를 받아 중국에 외교 업무를 다녀왔소. 지난 비난 성명 발표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일 뿐, 결코 나나 공화국의 본의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덩샤오핑 동지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였지. 그리고 거기서 성과도 얻어왔고.”
“허허... 덩샤오핑 동지께서는 총서기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표명하셨소. 사방이 적 뿐인데 믿을 건 역시 혈맹 뿐이라고 하시더군. 게다가 조선이 개혁개방의 길을 가는데도 만족을 표하셨소. 자국에서 덩 동지의 정책을 이해 못하는 자들이 아직도 많아서인지 더 그러시더군. 덕분에 이번에도 차관을 얻어오는 데 성공했지. 그럼 자세한 설명은 이제 여기 당의 새 일꾼이 된 최승일 동무가 설명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