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장. 특별한 관계 (2) >
19장. 특별한 관계 (2)
회귀 이후 사상 처음으로 정환은 태업행위를 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지만, 마음이야 어쨌건, 머리로는 이런 자리에 최고 지도자가 안 나오는 건 정치적으로 별로 온당치 못한 행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생각해 낸 게, 연설 시간을 최대한 줄이자는 것이었다.
무대체질이 아닌 총서기의 지시에 서기실, 아니 공화국 최고의 문장가들과 연설 담당 보좌진들, 김일성대 문예과 교수들까지 동원되어 양적으로 간결하면서도 듣기 좋은 연설문을 탄생시키느라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연설문도 인사말만 본인이 하고 김영남이나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면 안 되냐고 오만상을 짓는 정환을 유혜림이 간신히 설득하고 밤 새워 연습 상대가 되어준 덕에 지금 이 자리에 선 것이다.
‘이런 일도 엄연히 최고지도자의 일이니까. 권력은 총구 뿐 만이 아니라 카메라에서도 나오는 법이지.......라고 생각해도 안 맞는 건 안 맞아! 빌어먹을. 총서기 자리에 1년만 일찍 올랐어도 이 돈만 잡아먹는 과시성 행사를 진작에 취소해버리는 건데!’
- .............공화국과 당, 모든 인민에게 축복과 영광이 있기를! 지금부터 평양 세계학생축전의 개막을 선언합니다.
짝짝짝짝...........!!!
“와아아아아!!!!”
“총서기님 만세! 공화국 만세!!”
누구한테는 짧고 누구한테는 지옥처럼 길었던 2분여의 연설 시간이 끝난 후, 정환은 식은 땀을 몰래 훔치며 연단에서 빠르게 내려왔다.
젊은이들이 교장 선생님 훈화 같은 건 짧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건 사회주의 국가나 자본주의 국가나 만국 공통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정환의 (이례적으로 짧은) 총서기로서의 첫 연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막을 내렸다.
릉라도 경기장의 아시아, 동유럽, 무엇보다 공화국의 젊은이들은 방금 전 연단에서 본 (자기들 또래의) 젊은 총서기에게 환호와 갈채를 보내며 열광적으로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듣자하니 여기저기 떠도는 소문으로 저 젊은 총서기는 젊은 만큼 권위적인 공산진영 기준으로도 답답한 통제국가 북조선을 개혁개방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얼마 전에 발표된 우방국 중국의 천안문 학살에 대한 이례적인 비난성명도 그 소문을 뒷받침한다.
아니, 다 집어치우고서라도 뽀글머리에 안경을 쓴 작고 땅딸막한 중년 남성이 연설하는 것보다는 시각적으로 훨씬 나았다는 이유가 지금 군중들이 정환에게 보내는 박수갈채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 아무래도 젊으니까 말도 잘 통하고 이상주의적인 면모도 좀 있을 것이다. 적어도 노회하고 탐욕스런 늙은 당의 간부들보다는 훨씬 나을 거 아닌가?
릉라도 경기장을 가득 메운 만국의 청년들은 자신들에게 손을 흔들며 퇴장하는 정환의 뒷모습을 보며 좋게 보면 젊은이답게 이상적이고 나쁘게 말해도 젊은이답게 순진한, 그런 막연하면서도 희망적인 기대를 품었다.
“최대한 많이, 가능한 골수까지 뽑아내서 돌아오길 바라겠소. 김영남 상임위원장 동무.”
“........허, 허허... 명심하갔습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를 가지고 오갔습니다. 총서기 동지.”
“자국민을 탱크로 깔아뭉개 죽인 나라와 우방국 관계를 유지해주고 있는데, ‘친구요금’정도는 톡톡히 받아야겠지. 안 그렇소?”
‘아, 이 시대에 이런 말해도 알아들으려나? 어쨌든 연설할 때보다 훨씬 편한 건 두 말할 나위가 없군. 나와 김정일의 몇 안 되는 공통점이랄까, 대중연설 체질이 정말 아니라는 거.’
연단에서 막 내려온 정환이 히죽 웃으며 당부한 말에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김영남을 보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전 세계학생축전 개막식에서 젊은 학생들의 감동적인 개회사를 하고 내려온 직후 바로 노회한 정치인의 얼굴로 돌변해 그렇게 당부하는 젊은 수령을 보자 천하의 김영남도 놀랐는지 좀 떨떠름해 보였다.
“아무튼 김영남 동무도 이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니 저쪽에서 급수가 낮다고 불평할 일은 없을 거요. 명분이 섰으니 실리를 챙겨야지. 지금 뙤놈들은 자기들 편 한 명이 급한 입장이니까. 차관이건 부품이건 뜯어먹을 수 있는 만큼 뜯어먹고 오시오.”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네다. 그런데.....”
“뭔가, 위원장 동무?”
정환은 이제 명목상 북조선의 자신 다음가는 2인자가 된 김영남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실제로 그의 말처럼 며칠 전 정환은 김영남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방금 말처럼 방중 시 자신을 대신해 북조선을 대표해야할 김영남의 관직 ‘품계’를 올려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지금 현 공화국과 세계의 정세를 회귀자인 정환 자신에 가장 가깝게 읽어내고 유사시 그의 의중을 대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정치국 회의 한 번 거치지 않은 임용이었지만, 불만을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현 북조선 정권 내에서 김영남이라는 인물이 인정받고 있는 능력과 인망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김영남은 이런 정환의 인선이 매우 적합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번 일로 말 머리를 좀 돌렸지만...... 지난 번 지시하신 목표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많습네다.”
“...................”
“게다가 취임하신 직후에 김책 공대에서 이미 관련 보고를 받으신 걸로 알지만, 지금은 살얼음판을 걷는 시기입네다. 아차 잘못하다가는 양 쪽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 있.....”
“그건 그렇지. 동무. 하지만 내게 다 생각이 있네. 그러니 걱정 말고 시찰이나 잘 다녀오게. 요즘 광저우가 천지개벽을 하고 있다지? 곧 공화국의 미래가 될 테니 잘 배워오게.”
끝까지 걱정스런 얼굴을 하는 김영남이었지만 정환이 그를 다독이며 어깨를 두드리자 잠시 말을 멈췄다.
나이로 보면 자신의 아들 뻘인 총서기지만, 그동안 옆에서 그의 판단과 실행력을 보고 들으며 김영남은 어쩌면 김 씨 일가에 진짜로 이제껏 없던 별종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불경스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다 훔쳐도 씨 도둑질은 못한다지만..... 또 모르는 일이디.’
“상임위원장으로서 축제에 얼굴도 보였겠다. 국내 일은 나와 김용건 부장에게 맡기고 다녀오도록 하게. 그럼 나도 개회사도 끝났겠다, 이제 진짜 중요한 일을 보러 가야겠군. 사실 김 부장이 나보다 앞서 협상전투에 매진하고 있겠지만.”
“.......상대는 누구입네까?”
“근 1세기 동안 세계 만방에서 벌어진 모든 국제적 난장의 원인을 제공한 서방 제국주의 도적들 중 최고 흉악한 도적, 영국의 공사요. 얼마 전 그쪽 대표부가 평양에 자리를 잡았잖소? ‘철의 녀인’께서 우리 공화국과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군.”
‘블러디 헬(Bloody Hell), 장난 아니군. 폐허만으로도 원래 규모가 짐작이 가. 저걸 보니 아무래도 시크릿 서비스의 사전 정보가 맞는 거 같은데.’
"헤이우드 공사님, 뭘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아, 아닙니다. 김 부장님. 실례했습니다.”
“바깥이 좀 시끄러운 건 학생축전 때문입니다. 혹시 궁금하시다면 제가 당에 일러서 관람표를 구해드리겠습니다. 이런 공화국의 경사 자리에 영국 공사께서 참석해주신다면 자리가 더욱 빛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흠, 흠, 대단히 감사합니다.”
주조선 영국 대표부의 영국 공사로 파견된 사람은 헤이우드라는 40대의 남성이었다.
현재 그는 북조선 외무성이 자리 잡고 있는 평양시 중구역의 조선로동당 2호 청사의 부장 집무실에 앉아있었다.
처음 대처 수상으로부터 코카콜라 한 병 구할 수도 없는 이곳에 대표부를 개설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드디어 철의 여인께서 농담하는 법을 배우셨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자신이 그 북조선 대표부의 공사로 파견되었다는 통보를 들었을 때, 그가 처음 한 생각은 ‘아, 그래도 여전히 실력이 영 아니시군. 이번 농담은 재미가 없어.’였다.
그러나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 난 농담을 하는 게 아닙니다, 헤이우드 공사. 얼마 전 중국 천안문에서 일어난 피바다는 BBC를 안 봤어도 알거라 믿어요.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건, 북한 외교부에서 그에 대해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는 겁니다. 물론 외교적 수사로 적당히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이건 한 마디로 신호에요. 두 공산주의 브라더즈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신호. 나는 연합왕국의 수상으로서 그걸 알아야겠고. 즐거운 비행 되시기를.
그로부터 몇 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금 자신은 이곳, 지구 반대편의 공산 국가에서 창문 밖으로 믿기지 않을 만큼 거대한 빌딩(시크릿 서비스 말로는 호텔의 잔해라고 했다.)의 폐허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공사께서 도착하시기 전까지 대표부 건물이 완공되었으면 했지만, 그러지 못한 점 양해해주십시오. 귀국과의 외교관계가 워낙 급하게 진행되어서 저희 공화국으로서도 준비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동안은 여기 당 제2청사의 사무실을 대표부로 쓰시면 될 겁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김용건 부장님. 그런데.....”
결국 헤이우드 공사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창밖의 공사현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그러니까....”
“아, 저거 말입니까....... 음.... ”
창 밖 저 멀리로 보이는 류경 호텔(의 잔해) 철거현장을 가리키며 공사가 묻자 김용건도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췄다.
보통 이런 경우의 일반적인 답변은 외국인이, 그것도 ‘서방의 사악한 제국주의 침략국가’ 중 하나인 영국인이 공화국의 치부를 물어본다면 반드시 모른다고 해야 하거나 무조건 부인해야 하는 원칙이다.
하지만 헤이우드 공사가 묻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딱히 그 답을 몰라서 묻는다기보다는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기에 김용건은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적절하면서도 외교적으로 완곡한, 동시에 사실과 예의에도 그리 어긋나지 않는 표현을 찾아 대답했다.
“우리 공화국이 성장통을 겪는 와중에 생긴 사고라고 해두겠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 말은... 본국에서 이곳으로 올 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림자 내각 유력후보였다가 이게 웬 팔자에도 없는 변방으로의 좌천인가 했는데, 어쩌면 수상께서 맡기신 이 일이 생각보다 막중할 수도 있겠군.’
공사가 겉으로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고 지금 그들이 기다리던 손님, 정환이 들어왔다.
수행원 한 명 거느리지 않은 총서기의 방문에 문 밖에서 대기하던 조선중앙방송 및 3대 언론사 기자들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정환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헤이우드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공화국의 영도자, 총서기님께서 납십..........”
“됐어, 그리고 나와 공사, 김 부장 동무만 놔두고 모두 물러가게. 아, 만나게 되어 반갑소. 헤이우드 공사. 영국에서 먼 여행길이었을 텐데 여정은 편했을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