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장. 특별한 관계 (1) - 여기서부터 유료입니다. >
19장. 특별한 관계 (1)
“그렇다면 총서기께서는 저에게 이해를 구하시기 위해 이 자리에 부르신 거로군요.”
“그렇소. 일단 우리 공화국은 대외적으로 귀국의 행동에 대한 어느 정도 수위의, 외교적으로 잘 조절된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잠시 그쪽과 거리를 둘 거요, 지금은 바깥바람이 너무 세니까.”
“...............”
“쏘련 동무들은 침묵을 선택했지만, 온 대사도 알다시피 우리는 쏘련 같은 대국이 아니오. 게다가 개혁개방 정책을 선택한 지금으로서는 굴욕적이지만 바깥 곁눈질을 할 수밖에. 하지만 앞으로도 미래 조-중 우호관계는 이전과 변함이 없을 것임을 덩샤오핑 동지께 전
해주셨으면 하는 바요.”
“......이해할 수 있는 처사입니다. 총서기와 조선이 우리 중국의 변치 않는 친우임을 베이징에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한숨 돌렸다. 비록 지지성명이야 못 받아냈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그건 무리임을 본국에서도 알고 있었을 터. 만약 여기서 향후 관계를 보장하는 징표만 더 받아낸다면...’
이런 온업담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는 정환은, 그의 마음속 염불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또한 앞으로도 조중 혈맹이 변치 않을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에 김영남 위원장과 여기 장성택 부장이 귀국을 방문할 거요. 가서 선전 같은 개혁개방 특구 산업시찰도 하고 오고 덩샤오핑 동지께 내 친서도 전달하면 좋겠지.”
“.......ㅤㅆㅖㅤ쎄(Xie Xie : 감사합니다), 총서기 동지! 하지만 이왕 방중단을 보내실 거라면, 김 총서기 동지께서 직접 내왕해주셔서 덩샤오핑 동지와 조중 우의를 기념하는 술잔이라도 나누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취임 이후 첫 방중이신 만큼 저희가 정성을 다해 환대해 드
리겠습니다.”
‘이 아저씨야, 지금 세계 무림 공적 되기 직전인 당신들에게 여기까지 해줬으면 됐지, 더 뭘 바래?’
정환은 이래서 중국 놈들에게 틈을 주면 안 된다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지만, 속마음이야 어쨌건 겉으로는 ‘제안은 고맙지만 지금은 좀 그래’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저었다.
“비난 성명을 발표해 놓고 바로 직후에 내가 방중한다면 모양새가 많이 이상할 것이오. 누가 봐도 짜고 치는 투전판처럼 보일 테니. 게다가..........”
“................?”
“불과 얼마 전 우리 공화국을 방문해주신 자오쯔양 총서기께 그런 ‘불행한 사고’도 있었는데.... 내가 바로 면을 바꿔서 베이징을 방문해 덩샤오핑 주석동지와 양국 간 친교를 논하면 뒤에서 수군대는 말들이 좀 있을 거요. 대사 동지는 무슨 말인지 알 거라 믿소.”
“..............이해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총서기 동지.”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 할아버지를 구실로 이용한 셈이 됐군.’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온 대사를 보며 정환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현재는 다음 수십 년의 정세를 결정하게 될 과도기였고 그 속에서 북조선 같은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재의 후원자와 적, 동시에 잠재적 후원자와 적을 잘 오가는 능력이 중요했다.
최소한 이 공화국이 자립할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더욱 과격해진 천안문 사태는 결과적으로 정환과 공화국에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 역사에서 천안문 사태가 이렇게 과격해 질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시간을 벌은 건 천운이야. 그럼 이제 우리와 목표를 공유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아야겠군.’
솔직히 말하자면 중국의 존재는 차후 공화국의 경제개발에 있어서 재앙과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10년도 먼저 개방을 시작하여 외국 자본을 투자 유치, 1차, 2차 산업 기술력을 꾸준히 축적해놓은 국경을 맞댄 세계적인 대국이 아닌가.
인구 규모와 영토에서 낮게 잡아도 수십 배 차이가 나는 중국이 바로 옆에서 북조선에게 가야할 모든 해외투자와 자본을 블랙홀처럼 집어삼키는 것은 정환에게 있어서 큰 근심거리였다.
설령 개혁개방을 해도 초반은 해외로부터 투자를 유치해 자본과 기술을 발악하듯 그러모아야하는데, 북조선은 개발도상국의 무기인 저임금과 노동집약형 산업에서 중국의 경쟁상대가 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남조선, 원래 그의 고향인 대한민국 역시 중국의 경제개발사와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가장 큰 경쟁상대가 될 수 있었던 중국이 알아서 장기간 나자빠져준 덕분에 그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측면이 분명히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이 본격적으로 경공업을 발전시키고 수출입국 정책으로 자본을 축적하려는 시기에 맞춰, 문혁이라는 마취제를 스스로에게 투여함으로서 10년 이상 경쟁에서 뒤처지게 됐으니까.
그리고 지금, 중국은 천안문에서 탱크로 자국 민간인으로 이루어진 시위대를 깔아뭉갬으로써, 다시 한 번 ‘마취제’를 스스로에게 투여했다.
비록 이번에는 이 마취제의 효과가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건 북조선이라는 국가에게 있어서 엄청난 기회였다.
‘개인적으로 기분은 매우 더러웠지만 어쩌겠나, 이런 게 정치니 원. 그래도 시간을 번 것 외에 장차 차선 변경을 위해 ’깜박이‘를 켰다는 성과를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겠군.’
며칠 후, 정환의 말대로 북조선 외무성은 천안문에서의 중국의 ‘과잉진압’ 행위에 대하여 섬세하게 조절된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은행(The World Bank)이 중국에 대한 8억 달러 규모의 차관을 유보, 장기적으로는 취소할 지도 모른다는 발표 직후였다.
비록 ‘폭력적인 시위 진압을 반대하며,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라는 식의, 두루뭉술한데다 쟁점인 민주주의 요구 박해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은 성명이었지만, 여타 국가들에게 있어서 그 성명은 작지만 놀라움 그 자체였다.
소련처럼 침묵을 지키거나 심지어 자신들과 비슷한 입장인 중국의 자국민 학살을 옹호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그’ 북조선이 미약하게나마 중국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북조선의 변화는 중국의 인권침해에 대한 세계은행의 제재 발표로 시끄러운 세계에서도 작게나마 화제가 되었다.
특히 중국과 북조선의 동맹을 누구보다도 증오 섞인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국도 그 중 하나였다.
- ‘북, 중국의 천안문 대학살에 대한 비난 성명 발표. 수위는 미약하나 분명한 비난의 뜻 담겨, 북중 관계 균열 움직임?‘ 허, 빨갱이들끼리도 이건 도저히 옹호를 못 해주는 모양이구만. 하기야 지금 전세계적으로도 빨갱이들이 다 야코 죽고 있기는 하지만...
- 그래봐야 개구리 낯짝에 물 끼얹기지. 탈북자들 말이 김정일이가 몇 명 죽였을지 아무도 모른다잖아? 아마 지난 번 사고 났을 때도 책임자들 모가지 여럿 날아갔을걸?
- 아 근데 그건 로스케들이 한 거 아니었나? 그러면 이거 가만 있어봐라... 지금 대통령 외교 정책이 북방외교 아니야? 중국 하고 수교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럼 이거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이러한 참사 와중에도 전 세계는 마치 도도한 강물이 흐르듯 더욱 빠르게 다원화, 다극화, 궁극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지구촌 사회로 나아가고 있었다.
폴란드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붕괴하고 자유노조가 승리했으며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서독을 방문했다.
유럽 공동체(Europe Community)는 냉전과 세계 패권 경쟁의 최종 승자가 된 미국에 맞서 세계패권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기 위해 발 빠르게 뭉치고 있었다.
어딜 봐도 세계는 냉전이 끝나가고 해빙기가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와중에서, 평양에서는 작년부터 준비해온 세계학생축전이 개막했다.
비록 불과 몇 주 전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일어난 참사로 인하여 분위기가 많이 죽고(애초에 그거 아니더라도 주 초대국인 동구권 국가들이 전체적으로 힘들었다) 규모가 많이 축소되기는 했지만(‘그런데 쓸 돈 없지만 그래도 하긴 해야지’라는 정환의 불평으
로 인해), 그래도 축제는 축제였다. “저, 저 사람이 그 북조선 총서기야? 생각보다 많이 젊은... 아니, 어린 동무인데?”
“우리보다 몇 살 많은 정도잖아..... 저 사람이 정말로 조선의 당을 이끈단 말인가?”
“쎄베르나 까레아(Северная Корея, 북조선)가 별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아버지에게서 당 서기 직을 세습 받았다니, 도대체 원....”
평양 릉라도 경기장에서 개최된 세계학생축전 개회식은 화려했다.
비록 전체적인 규모를 줄이기는 했어도 쓸데없는 보여주기식 치장이나 낭비를 줄이라고 했지 어쨌든 대회 종목이나 행사 자체는 그대로라서, 거대한 릉라도 주경기장에 세계 각국의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들이었지만) 대학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그 나름대로 장관이
었다.
그리고, 개회식이 열리는 지금, 연단에 올라선 수수께끼의 북한 최고지도자, 전세계의 공산당 서기들 중 최연소일 것이 분명한 김정환 조선로동당 서기가 올라오자 장내의 모든 시선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이 열리며 경기장 곳곳에 설치된 일제 음향설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세계만방에서 오신 학생 동무, 동지 여러분! 저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 오늘 이 자리에 우리는 국경과 민족, 영토를 넘어 이상과 열정, 만국평화와 인민의 행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섰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선 여러분은 한 명 한 명이 조국의 미래이며 민족의 자랑입니다. 그런 청년 학생 동지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모실 수 있다
는 것에 저 총서기 김정환은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그리고 그 이후로도 세계 만방의 평화와 인민 사회주의의 이상 어쩌고 하는 연설이 길게 이어졌으나, 장내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은 연설 자체의 내용보다 연사, 정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름 공산권 내에서 가장 어린 국가지도자로 유명세를 탄 덕분이라면 덕분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정환은 그 시선을 즐기기는커녕 속으로 절규하고 있었다.
‘휴우, 고역이군.... 아니, 죽을 거 같아.’
하지만 다행인건, 완벽한 표정관리(그리고 능라도 경기장의 면적) 덕분에 이런 정환의 진땀 흐르는 광경을 본 관중들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연설은 길지는 않았지만 감동적이었다.
사실 길래야 길 수가 없는 게, 개회사를 담당한 정환이 연설 같은 건 도무지 체질이 아니라고 질색 팔색을 했기 때문이었다.
- 지금 우리 공화국 사정이 이런 걸 개최할 형편이 아닌데, 대체 왜 이런 광대놀음을 해야 하는 지 모르겠군. 이미 준비해놓은 걸 취소하는데 더 많은 예산이 들어간다는 보고만 아니었어도.....!’
- 총서기 동지, 거의 처음으로 세계만방 인민들에게 총서기 동지의 모습을 보이는 일정입니다. 공화국을 대표하시는 만큼 위엄을 보이셔야죠.’
‘제길, 회귀 이전부터 이런 건 전혀 체질이 아니었어! 난 보통 중학교... 아니, 중학교 반장 선거 때가 내 인생의 마지막 연설 관련 기억이었는데! 그나마도 아직 아버지가 돈 좀 있었을 때라 간식을 뿌려서 부정선거로 당선된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