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역사는 움직인다 (2)
18장. 역사는 움직인다 (2)
-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서 영국행 비행기에 김일성 대 학생들이 오르고 있습니다. 이들 공화국 최고 엘리트 핵심 일꾼 후보들은 총서기와 당의 배려로 앞으로 3년 간 영국에서 유학하게 됩니다.
‘핵심은 자유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거지. 실제로 자유가 있는 지는 중요한 게 아니고.’
정환은 서기실에 설치된 TV에 나오는 조선중앙방송 뉴스화면을 통해 비행기에 오르는 유학생들을 보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곧 활주로를 달려 하늘로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니 얼마 전 시험비행에 참여한 미그 29기 생각이 났다.
‘원래보다 많이 구매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이군. 뭐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소련 놈들이 다운그레이드야 시켰겠지만 상관없어. 머지않아 소련 설계국 기술자들을 통째로 데려올 테니까.’
정환은 백승철과 홍계성을 포함한 프룬제 일파를 처분해버리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한 때 딴 마음을 품었다고 해도, 일단 그들은 현재 군을 지탱하는 엘리트들, 참모부의 뇌와 척추를 이루는 핵심들인데다가, 그들이 가진 러시아 인맥은 분명히 써먹을 곳이 많았다.
그런 인맥을 진짜로 쓸모 있게 만들어주는 자금이나 권력 같은 뒷배가 없을 때는 그게 무용지물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김정일 그 돼지새끼, 그동안 참 많이도 쳐드셨더군. 이 나라 곳곳에 별장이며 요트며 없는 게 없었으니.’
이번 미그기 대량 구입의 자금 조성에는 그동안 북조선 국내에 있던 김정일의 수많은 호화별장이나 사치품을 등을 전부 처분한 것도 한 몫 했다.
원산과 마천 등 공화국 전역에 180곳이 넘는 특각이니 초대소니 하는 곳들을 거의 대부분 뜯어서 해외 경매에 붙여 팔아치우니 이게 또 한 재산 했던 것이다.
수십 년 간 김일성과 김정일이 자신의 첩들에게 준 보석, 구두, 옷, 시계, 심지어 별장 바닥 대리석에 금 수도꼭지까지 뜯어 처분하거나 용도변경을 시켜버리는 정환의 모습을 보며 매각 책임자 최승일은 그야말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 .......그래도 몇 군데는 개인적인 용도로 남겨두실 줄 알았는데, 정말 대단하시군요. 총서기께서 일본 유학을 하실 적에 나름 사치를 즐기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했는데... 인민들이 이를 알면 사상교양 없이도 총서기께서는 참으로 청렴결백한 지도자시라고 진심으로 칭송을 할 겁니다.
- 입 발린 소리는 필요 없네. 그리고 내 몸 하나 호강은 거기서 물리게 했으니 더 하고 싶지도 않고. 그나저나 39호실 쪽 사업은 완전히 정리했나?
- 네, 그렇습네다. 아편과 위조 달러 쪽이 사줄 사람을 찾지 못해 그동안 문제였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데다 팔아버릴 수도 없어서 골칫거리였는데, 마침 아프간 쪽의 친구들이 새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원료와 장비를 찾고 있더군요. 사막에서 양이나 치는 놈들이 무슨 달러를 그렇게 많이 들고 있는지 원... 아무튼 섭섭지 않은 가격을 받고 넘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새롭게 인민군 공군에 배치된 미그 29기는 조선중앙방송과 로동신문을 비롯해 새롭게 단장된 공화국 매스 미디어의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송출규모와 시간이 크게 향상된 미디어의 힘을 업고, 벌써부터 평양 골목을 돌아다니는 공민의 아이들의 날틀 놀이에서 미그 29기가 단골로 회자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성택이 긴장한 얼굴로 서기실에 들어오자 정환은 내심 두려워하면서도 기대하던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총서기 동지, 대국에서 급보가 전해졌습니다. 그... 두 달 전부터 천안문에서 대학생 동무들이 시위하시던 거 기억하시지요? 아무래도 덩샤오핑 동지가 강경진압에 나선 듯 합니다.”
“....몇 명이나 죽었나?”
“여러 곳에서 말들이 많지만... 중국 대사관 동지들과 외교 일꾼 동지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사상자만 2만 명이 넘을 듯 하다고....”
“.....2만 명?”
예상보다 훨씬 더 큰 피해규모에 정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거이.....”
“또 뭔가? 또 내가 모르는 게 있나?”
“.......대국에서 일반 인민들에게는 아직 안 알려져 있지만... 주중 대사관 외교 일꾼과 군관 동지들이 조사한 결과, 아무래도 자오쯔양 총서기 동지도 사망한 듯 합니다.”
“.............!!!!”
투욱.
여러 가지 충격이 복합적으로 덮친 결과, 정환은 들고 있던 펜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으며 장성택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나? 중국 당국에서 자기들 총서기까지 의도적으로 죽이려 했을 리는 없을 텐데...”
“그거이... 아무래도 자오쯔양 총서기께서 시위 현장에서 끝까지 학생들과 군인들의 충돌을 저지하려 하시기 위해 군중들 틈에 섞여 있던 것을 진압군이 모르고 한꺼번에 일제사격으로 쏴버린 모양입네다...”
“..............”
장성택의 무거운 보고에 정환은 잠시 이마를 감싸 쥐며 지난번 자신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던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쩐지 그를 보낼 때 어딘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지만, 아무래도 그 예감이 적중한 듯 했다.
중국 지도부는 원역사를 통해 그가 예상하고 알았던 것보다 훨씬 강경하게 대응한 듯 했다.
‘침착하자, 어찌 되었든 이건 잘 이용하면 전화위복의 기회다. 오히려 중국이 더욱 날뛰어 준 덕분에 내가 움직이기 편해졌다.’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게, 이 일에 대한 대응을 논의해야겠네.”
“알갔습네다, 총서기 동지.”
“아, 그리고...........”
“.............?”
“온업담 대사 동무도 부르는 걸 잊지 말게.”
“저저저저저.............!!!!”
“허어, 저런.....!!!”
주중 대사관이 서방 언론인을 통해 입수한 비디오가 재생되자, 회의실 곳곳에서는 짧은 비명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정환 역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에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탱크가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인간의 잔해와 길게 이어진 핏줄기만이 남았다.
“...............지금 이 영상을..... 서방 언론에서 구해왔다고 했었지? 어디오?”
“CNN입네다, 뿐만 아니라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일본 NHK, 영국 BBC, 프랑스의 르 피가로(Le Figaro), 남조선 고려일보에도 모두 보도되었습네다.”
“그렇겠지. 반응들은 어떻소?”
이건 굳이 안 물어봐도 답을 알고도 남겠지만 말이야.
실제로 이번만큼은 그런 정환의 마음 속 중얼거림을 당사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듯 했다.
“.........최악입네다. 지금 서방... 아니, 전 자본주의 진영의 입 가진 자들이란 자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중국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미제 신문 사설란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세계가 련합해서 중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박해받는 중국 인민을 구출해내야 한다는 글까지 실렸습네다.”
“........서방 뿐 이오? 우리와 같은 사회주의 진영은? 김용건 부장 동무, 쏘련 동무들은 지금 대국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아무 말이 없소?”
이번 정환의 질문에 회의실 테이블에는 잠시 미묘한 공기가 돌았다.
오늘 회의의 사회자이자 이제까지 정환의 질문에 답했던 장성택 역시도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어쩌면 그건 얼마 전 자신의 예언 아닌 예언이 적중했음에 속으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 장 부장 동무, 요즘 베이징은 어찌 돌아가고 있지? 장 부장 동무라면 그쪽에 끈이 많으니 공관으로 전해 듣지 못하는 소식도 많이 알 듯 한데....
- ..........공기가 영 살벌합네다. 총서기 동지께서 취임하신 이후 소련이 자기들의 뒷빡을 후려갈겼다는 거친 의견들이 오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쏘련과의 관계에서 각을 세우고 중국의 이익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였는데, 지난 번 류경 호텔 거사로 이제 베이징에서 온건파 관료들은 할 말이 없게 됐습니다.
- ........그럼 이제 베이징과 덩샤오핑 동지의 주변은 강경파 인사들이 장악했다는 말인가? 아니, 알겠군. 그쪽에도 우리 공화국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군.
- 그렇습니다. 이건 제 판단입니다만... 눙토히 말해 덩샤오핑 동지의 개혁개방 노선 와중에 조금씩 설 자리를 잃어가던 인민해방군 장령들은 총서기 동지와 프룬제 아새끼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게 지옥에서 동앗줄을 잡은 심정일 겁니다. 조선이나 대국이나 군이라는 거이, 모름지기 적이 있어야 존속하는 법 아니갔습니까?
‘이렇게 된 이상 총서기에게 더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갔군. 빌어먹을 뙤놈들! 이래서 뙤놈들은 절대 10할 믿으면 안 되는 기야!’
장성택은 속으로 은근히 자신의 뒷배로 믿고 있던 중국의 돌발행동에 쌍욕을 퍼부었다.
아무리 지금은 홍계성과 군관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발악한다지만, 총서기가 중국과 비슷한 개혁개방 정책을 지지하는 이상 언젠가 조직지도부장인 자신이 공화국의 2인자가 될 거라고 믿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현재 천안문에서 벌어진 사태로 인하여 중국이 개혁개방을 해서 미국을 비롯해 서구 경제권에 편입할 날이 오는 것은 (최소한 당분간은) 날 새 버린 것이다.
“.........겉으로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항상 형식적으로나마 발표하던 중국에 대한 지지성명조차 없다는 이야기는 쏘련에서도 서방의 눈치를 보고 있는 듯 합니다. ........하기사 아무리 이념전선에서 우방인 국가라도 이런 일을 대놓고 지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외교부장 김용건의 탄식 같은 말은 현재 전 세계가 중국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정확하게 요약해 주었다.
지금 유럽과 미국인들, 그리고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나마 도입한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게 중국과 덩샤오핑은 거의 아시아판 나치의 재래였다.
'천재일우........라기보다는 이건....‘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상황은 정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천안문 사태가 일어날 줄은 미리 알고 있었고, 심지어 기다리기까지 했다.
원역사대로 시위대 편에 섰다가 실각하고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 신세가 되는 자오쯔양에게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꼈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시위대에 강경한 반응을 보인 덩샤오핑과 중국 지도부를 보며, 정환은 얼마 전 장성택을 통해 전해들은 중국 내부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게 바로 나비효과라는 건가? 김정일의 사망과 내 집권이 중국의 내부 권력 지형과 대외정책에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겠지?’
물론 북조선의 개혁개방을 준비하는 그에게, 그리고 북조선에게 있어서 중국은 현재의 친구, 미래의 경쟁자였다.
그 경쟁자가 알아서 나자빠지는 모습을 보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지만, 정환도 사람이 탱크에 압사당하는 것을 보고 유쾌해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귀자이자 북조선의 수령이라는 입장으로서는........
“총서기 동지, 우리도 입장을 표명해야 합니다. 일단 군중들은 해산됐고, 머지않아 중국에서 같은 사회주의 진영 국가로서 지지를 요청할 게 뻔합네다. 결단을 내려주시는 것이....”
“.................”
정환이 잠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는 듯 하자 정치국 회의실은 이내 침묵에 잠겼다.
모든 사람들이 방금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정환이 뭐라고 말하느냐에 따라서, 지지성명을 발표하느냐 비판 성명을 발표하느냐에 따라서 향우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런 사태를 알기 이전부터 어떤 태도를 취할 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온업담 대사 동지를 부르게, 그를 통해 덩샤오핑 동지에게 전할 말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