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역사는 움직인다 (1)
18장. 역사는 움직인다 (1)
창쥔산(常俊山)은 올해로 28세로, 산서성 진청 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의사였기에 꽤 괜찮은 환경에서 나름 풍족하게 살 수 있었으나, 그가 채 10살도 되기 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문화대혁명의 붉은 바람이 불어 닥친 것이다.
창쥔산이 5살이 되었을 때 의사였던 아버지는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해 반신불수가 되었고, 졸지에 집안의 생계는 홀어머니에게 맡겨졌다.
소학교에 다녀와서 침대에 누워서 손가락 까딱 못하는 아버지와 ‘마오 주석이 우리 가족을 망쳤다’라고 한탄하는 어머니를 보며, 창쥔산은 어린 마음에도 가족의 원수인 마오 주석에 대한 남모를 분노를 키워나갔다.
도대체 그 위대하신 마오 주석과 그 휘하의 홍위병들이 우리 아버지를 저렇게 만들어야 했을까?
아버지는 그저 평생 당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의술을 배워 아픈 인민들을 치료하는데 평생을 다 바친 분이신데...
그렇게 졸지에 중학교도 중퇴하고 막일을 해서 집안에 보탬이 되려던 그는 성인이 되자 여타 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처럼 집안의 입을 하나라도 더 덜기 위해 가장 쉽고 빠른 출셋길을 선택했다.
인민해방군에 입대한 것이다.
그의 배속지는 선양군구(沈阳军区;)의 제 27집단군 제7 기갑여단(第7装甲旅)이었다.
의사 아버지의 머리를 물려받았는지 정규 교육을 완전히 끝내지 못했음에도 창쥔산은 영특했고, 기갑 장비의 운용법을 빠르게 깨우쳐 곧 인민해방군의 주력전차이던 59식 전차의 전차장이 되었다.
그리고, 창쥔산은 현재 인생 최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 창 중사 동무!! 뭐하고 있나! 어서 전진해라!
- ...........하지만....
- 이미 광장의 폭도들은 일소되었다! 우리 부대가 광장에 전개되면, 지난 두 달 간 베이징을 점령한 저 폭도들의 동란은 끝을 고한다! 창 중사! 명령에 복종해라!
- ..............
창쥔산은 무전기로 들려오는 상관의 호통을 들으며 전차장 조준경을 통해 지금 자신들, 자신이 탄 59식 전차들의 종대의 앞에 선 형체를 넋 놓은 얼굴로 주시했다.
지난 밤은 악몽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고, 이것도 결국 조국인 중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반동 폭도들을 진압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나마 어제는 폭도들도 발악적으로 자신들에게 맞서 싸웠기에 내면의 양심에게 피를 보는 일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 창 중사 동무! 지금 자네가 망설이면 저 반동, 반당 분자들이 승리한다! 사상교양 시간에 학습한 걸 떠올려라! 저들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가로막는, 극좌주의적 오류에 빠진 폭도들이다! 지금 저 반동을 그냥 내버려두면, 문혁 때의 무질서, 폭란이 다시 일어난다!
- ..........하지만............!!
- 돌아가신 동무의 아버지를 떠올려라! 그분이 누구에게 맞아 그렇게 되었는지! 지금 광장의 저들은 전대 마오 주석 시절로 다시 돌아가자고 우기는 자들이다! 동무의 아버지에게 일어난 일이 다시 일어나도 좋은가? 덩샤오핑 동지께서 뭐라고 지시하셨는지 잊지 말라! 이미 모든 당 간부들과 상무위원들이 피를 봐야한다는 데 동의했다!
- ..............!!!
아버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창쥔산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는 이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틱을 잡고 전진 기어를 넣었다.
탱크가 천천히 앞으로 이동하자, 그는 눈을 꾹 감으며 지금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일을 외면해버렸다.
그래, 이미 나는 저 남자에게 피할 기회도 여러 번 주지 않았나, 그런데도 비키지 않은 것은 저 자 잘못이다.
쿠르르르르르.....
59식 전차가 굉음을 울리며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에게 천천히 덮쳐갔다.
그리고 전진하는 탱크 앞에는,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손에는 옷가지와 검은 봉투를 든 남자 한 명이 맨몸으로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전차의 무한궤도가 자신을 덮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총서기 정환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북조선의 미디어 혁명은 나날이 가속도를 붙어갔다.
전국 도당 위원회의 주도로 지방 당사, 병원, 기업소마다 최소 몇 대의 컬러 TV가 설치되었고, 공화국의 거의 모든 인민은 이제 전국에서 일어난 대소사를 바로 눈앞에서 전해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는 상당히 특기할만한 변화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뉴스 프로그램의 변화였다.
- 안녕하십니까, 공화국 인민 동지 여러분. 지금부터 오늘 하루 공화국 전역에서 일어난 새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여전히 오전, 오후, 저녁에 방송된다는 점만 빼면 뉴스 프로그램은 거의 180도 전환해서 세련되게 개편되었다.
총서기의 직통 명령으로 날마다 분홍색 한복을 입고 수령 동지의 말씀을 우렁차게 전하던 리춘히 아나운서는 사라지고 평양, 서울 사투리를 섞어 구사하는 말끔한 서구식 여성 정장의 젊은 아나운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전대 장군 김정일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리를 유지하던 리춘히가 성우로 직종을 변경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대다수의 공화국 인민들은 그녀를 별로 그리워하지 않았다.
- 지금 보시는 것은 우리 공화국 인민군대의 자랑스러운 최신예 추격기, 미그 29기입니다. 류철민 아나운서, 최고속도가 무려 마하 2.5에 달한다죠?
- 그렇습니다. 기관포와 중, 장거리 미사일을 포함해 4000kg 에 달하는 무장을 장비할 수 있는 이 추격기가 오늘부터 공화국의 하늘을 수호한다는 것은, 참으로 당의 자랑스러운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격기가 우리 공화국 산이 아니라, 우방 쏘련에서 외화를 지불하고 구매해온 것이 한으로 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심정희 아나운서?
리춘히의 퇴진보다 훨씬 더 인민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이렇게 새롭게 바뀐 뉴스에서는, 무려 ‘나쁜 뉴스’를 전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공화국 내의 나쁜 소식이라면 그것이 도저히 감출 수 없을 정도로 그 소식의 규모가 거대하지 않으면 입에도 올리지 않던 조선중앙방송에서, 이는 가히 천지개벽급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 흠, 이러한 추격기를 구매해오자면 참으로 외환이 많이 소모되었을 텐데요, 그 외환은 다 어디서 났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류철민 아나운서?
- 당 선전선동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지난 해 부터 총서기 동지께서 결연히 주도하신 ‘부정부패 수사 전투’의 성과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의 재정에서 낭비되는 부분을 줄이고 당의 재정을 빼돌려 사욕을 챙긴 ‘일부’ 부패 당원들을 척결한 결과, 예정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추격기를 구매해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 아, 역시 그렇군요. 참으로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방송을 보시는 당원 여러분들과 노동자 동지들도 일터에서 나사못 하나 빼돌리지 않도록 눈을 똑바로 뜨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총서기 동지와 당, 나아가 공화국의 적이 될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눈썰미가 조금 날카롭고 다양한 미디어를 오래 접한 사람이라면, 조선중앙방송을 포함해 새로운 방송사들의 보도가 약간의 자율성과 다양성이 부여되었을 뿐, 비판하는 대상과 논조는 사실상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 비판하는 대상이 변하기는 했다.
단지 일전에는 주 비판 대상이 ‘미제’나 ‘자본주의 부르주아 날라리 풍에 물든 반동’처럼 외부의 세력 혹은 그 하수인이었다면, 지금은 ‘부패 당원’, ‘사회 기풍을 흐트러뜨리는 범죄자’, 혹은 ‘당 내 분열을 조장하는 종파주의자’처럼 내부자로 바뀌었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게다가 교묘하게도 이러한 보도 프로그램들은 인기 있는 연속극 편성 시간의 앞뒤로 배치되어 안 볼래야 안 볼 수 도 없었다.
그리고 이들을 벌하고 공화국의 질서와 인민의 번영을 바로잡는 이는 항상 총서기 정환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로동당이었다.
- 오늘 노동당 39호실의 전(前) 외화벌이 소조 조장이 김영일 국장 동지가 이끄는 반부패수사국에 의해 체포되어 교화소로 보내졌습니다. 김정일 장군님의 은혜로 당 39호실에서 근무하던 그는 인민의 피땀인 외화를 횡령하여 외국으로 피난하려 했던 정황이 발각되어 처벌받게 되었습니다.
- 수사과정에서 그는 외화를 조달하기 위하여 빙두(氷毒, 메스암페타민)나 위조한 미제 달러를 대량제조하고 외국에 판매하는 조직이 노동당 39호실 내에 존재하며, 자신은 김정일 장군님을 위해 그곳에서 충성한 사실 밖에 없으니 스스로 결백하다고 주장했는데요. 하지만 정신과 의사 동지들은 그가 망상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 이러한 소식을 들은 총서기 동지께서는 ‘중죄를 저지른 동무이나, 정신이 많이 아프고 그동안 당에 오래 충성한 전력을 감안하여’ 일반 교화소가 아닌 정신 병원에 수감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러한 총서기의 관대한 처사를 듣고, 일반 당원 동지들은....
물론 어쩌다가 한 번 고위 당원이나 군관의 처벌이 보도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전부 과거 김정일이나 김일성 시대에 한 자리 한 위세 하던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나, 권력과 거리가 있는 대부분의 인민들은 그런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알 수 있는 건, 이제는 뉴스를 포함한 정보 전달매체들이 더 재미있고 자유로워졌으며, 심지어 높으신 당원들이나 군관들도 잘못하면 처벌당한다는 사실이었다.
공화국 대다수의 인민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았다.
- 이제야 공화국도 조금 숨 쉬고 살겠구나.
새로운 조선중앙방송(KCTV)과 평양 TV(PTV), 조선방송공사(JBS)의 3대 방송 체제가 성립되고 몇 달이 지나자, 인민들 사이에는 그런 이야기가 번졌다.
의사를 표현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은 아무리 억눌러도 억누를 수가 없는 법이다.
도서정리사업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김정일 시대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질식할 듯 했던 인민들은 말 한 마디 못 꺼내고 살던 그동안을 회고하며 마침내 공화국에 숨구멍이 뚫렸다고 기쁨에 겨웠다.
- 아이고, 꼴 좋디, 거들먹대던 간부 놈들, 우리 기업소에서도 몇 놈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네. 그동안 김정일 장군님 시절에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어서 그냥 당하고만 있었는데...
- 쉿! 조용히 하라우! 아무리 요즘 공화국 말문이 트였다지만 주석님 일가를 곧바로 언급하면 끌려가서 경 치는 거 모르디?
- 그래도 총서기 시절이 되고 공화국이 많이 나아졌디. 이제 먹고 사는 문제만 좀 나아지면 좋갔는데... 요즘 배급이 통 오르지를 않으니...
- 아, 그래도 전대 장군님 시절에는 나날이 떨어지기만 하디 않았간? 요즘은 그래도 나은 기야. 그렇지 않니?
연이어 이어지는 김정일 시대 핵심 간부들의 부패 적발로 인하여, 김정일은 서서히 부정적인 인상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아직은 조선중앙방송을 비롯한 공식적 매체에서 김정일은 여전히 위대한 장군이었지만, 당국의 눈을 피해 수군거리는 인민들의 혀 위에서 김정일은 ‘주석님이 잘못 낳은 아들이라, 호텔도 무너뜨리고 공화국에 액운을 가져다줬다’라는 말까지 돌았다.
그리고 그러한 뒷담화 후에는 항상 ‘김정일 장군님이 아니라 총서기가 수령이 된 게 공화국에는 천운’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또한 당국에서도 어째 그러한 평가를 그다지 적극적으로 단속하려 하는 거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공화국 인민들의 마음 속 수령이 서서히 바뀌어가면서 맞이한 6월의 어느 날, 서기실에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베이징, 천안문에서 전해진 급보였다.